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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조국 방문기 61. 정기풍 교수와의 대화로 농촌을 공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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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9건 조회 68,957회 작성일 15-06-04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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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61

정기풍 교수와의 대화로 농촌을 공부하다


모란봉을 내려오는데 한 두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갑자기 굵은 빗방울로 툭툭 떨어지더니만 제법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 한낮의 짙은 안개라고 여겼던 것이 비구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도가 잘 닦여있지만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기에 걸어서 올라왔는데 우산도 챙겨오지 못했으니 꼼짝없이 비를 맞게 생겼다.  당황하면서 걸음을 재촉하는데 이젠 아주 세차게 큰비가 되어 쏟아진다.  노 박사님은 거의 뛰다시피해서 앞장서서 내려가는데 그대로 따라가는 것보다는 일단 큰 비는 피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제법 큰 나무 아래에서 김미향 안내원과 함께 비를 피하기로 했다.


우리 부근의 여기저기에서 공원을 찾은 다른 인민들도 각자 적당한 크기의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데 처음 몇 분까지는 나무 밑이 견딜만 하지만 계속 쏟아지는 큰비에 나무는 더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주변을 살펴보니 아까 모란봉을 오르면서 모란각이라는 제법 큰 건물이 있었고 사진까지 찍었었는데 그 모란각이 길 건너 저만큼 안쪽에 보인다.  그 넓은 건물에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김미향 안내원이 일단 거기까지 가서 비를 피하자고 한다.  지금 이렇게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을 헤치고 칠십 미터쯤 되는 모란각까지 가노라면 비를 다 맞을 것은 뻔하지만 그래도 나무 아래서 계속 버티는 것보다는 낫겠기에 모란각을 향하여 뛰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로 머리도 얼굴도 옷도 다 젖었고 구두 속에도 물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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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을 오르면서 칠성문이 보여 사진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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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을 오르면서 사진으로 남긴 모란각.  얼마 후 큰비를 피하기 위하여 이 한적한 건물에 우리 일행과 수많은 인민들이 찾아들었다.  



모란각의 계단을 올라서니 넓은 마당은 억수로 쏟아지는 비로 금방 물이 그득해진다.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만해도 아무도 없던 모란각에 여기저기서 비를 피할 곳을 찾던 평양시민들이 몰려온다.  금방 수십명의 사람들이 우리처럼 흠뻑 젖은 상태로 모란각 넓은 처마 아래로 모여들었다.  비는 그칠줄 모르고 계속해서 세차게 쏟아지는데 사람들을 향해서 카메라를 들이대지는 못하고 모란각 앞마당에 퍼붓는 비를 기념으로 남긴다.  


비를 흠뻑 맞았지만 마음은 참 흐뭇하다.   벌써 석달 열흘째 비가 오지 않았다는데 이렇게 큰비가 쏟아지니 일단 논밭에서 자라나는 작물들에게 어느 정도의 해갈이 될 것이 아닌가.  추석날의 이 비는  농촌과 인민들에게 단비가 되고 기쁜 선물이 되리라는 생각에 내가 비에 젖은 것은 대수롭지 않다.   함께 비를 피하는 평양시민들도 아무도 비가 쏟아지는데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도 비록 오늘의 소풍은 차질을 빚었지만 온 나라가 비를 기다려온 만큼 가뭄이 해소될 정도의 비가 내려주는 것이 반가웠을 것이다.


김미향 안내원이 전화를 받는다.  운전기사 리영호 동무 전화였는데 차를 몰고 올라올 수 있도록 공원 입구에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조금 후 차가 도착하여 젖은 채로 차를 타고는 노 박사님을 살펴보니 우리보다 더 흠뻑 젖으셨다.  그러니까 그 세찬 비를 내내 맞으면서 공원 입구까지 걸어갔으니 당연한 결과다.  가는 동안에 비가 멎을 것이라 여기고 그냥 내려가셨다한다.  비를 피하기보다는 얼른 모란봉을 내려가려한 것은 생각해보면 노 박사님의 부지런한 성격의 일면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기다렸으면 좋았을 것을 결과적으로 다시 차를 타고 올라오게 되었으니 부지런해서 손해를 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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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각에서 비를 피하며 억세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내가 비가 많이 내리곤 하던 하와이섬에서 농장을 할 때 비를 맞으며 열심히 일하다 부지런해서 손해본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농약을 칠 때 비가 내리면 씻겨서 헛일이 되는데 그럴 때는 차라리 쉬는 것이 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  가끔은 빗속에서 질퍽한 흙을 밟으면서 열심히 일한 것으로 인하여 토양이 오염되거나 병균이 퍼져나가서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  농장 안에서 차가 빠져나오지 못하여 고생한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나 또한 일을 할때는 부지런한 편이지만 비에 대해선 깨달은 점이 컷기에 비를 피할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 경우는 비가 30분 정도 내렸지만 대부분의 소나기는 십여 분만 기다리면 대체로 멎는다는 것도 내겐 상식이 된 것이다.


평양호텔에 돌아와 세탁실에 연락하여 젖은 옷을 말려서 다려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접견실로 향했다.  오늘 오후엔 정기풍 교수와 만나 대화를 나누기로 되어 있다.  우리가 갖고온 약간의 다과를 준비해서 접견실로 가니 아주 인상좋고 훤하게 생긴 정기풍 교수가 곧 도착하였다.  노길남 박사님이 두어 해 전에 정기풍 교수와 대담하였던 기사와 사진을 통하여  내가 대략 짐작하였던 모습과 직접 만나뵌 첫 인상은 별로 다름이 없었다.  밝은 표정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모습에다 아주 박식하고 거침없이 말씀을 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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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풍 교수는 김철주사범대학에서 근무하는데 사회정치학 강좌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사회정치학 강좌는 조선로동당과 혁명역사를 중점적으로 강의하는데 강좌장이기에 강의시간이 적어서 연간 200강의로 400시간을 강의하고 대외활동을 많이 한다는데  6.15 시대엔 통일사업에 관련하여 많은 일을 맡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방직후 북부조국엔 대학이 없었다고 한다.  최초로 김일성종합대학을 설립하여 거기서 1기 졸업생들이 나오자 그들로 하여금 각 도마다 사범대학과 농업대학, 그리고 의학대학을 세워 가르치게 하였다고 한다.  량강도는 농업보다는 임업이 발달한 곳이기에 림업대학을 세웠다.  

북은 9년제 의무교육이던 것을 10년, 11년으로 늘여오다 2012년에 12년제 의무교육으로 되었다.  각 도마다 사범대학이 있는데 큰 도에는 두 개의 사범대학이 있다.   거기서 선생님들을 배출하는데 평양엔 김형직사범대학 (평양제1사범대학, 북부조국의 첫 사범대학)과 김철주사범대학 (평양제2사범대학)이 있다.  


김철주는 김일성 주석의 동생이다.  김 주석이 부친 김형직 선생의 유산으로 물러준 두 자루의 권총으로 항일혁명에 나서 동지를 규합하여 무장대오를 꾸려가는데 동생 철주가 찾아왔다.  형과 함께 무장대에서 싸우기를 원하는 철주에게 김 주석은 “군대가 되어 싸울 사람은 많다.  지금 총을 들고 싸움에 나서기 보다는 인민들을 교양 각성시키고 혁명조직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는 돌려보냈다고 한다.  김철주는 김 주석의 뜻대로 열성적으로 조직 공작에 나섰다가 일제 군경과의 전투중에 피살당했다.  그때가 1935년이었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정기풍 교수는 자신이 근무하는 김철주사범대학은 바로 김 주석의 동생 김철주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말해준다.


정기풍 교수의 가족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더니 부인은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첫째인 딸은 만수대 창작사에서 전문수예사로 일한다고 했다.  통신대학에 재학중인데 현재 연애중이라고 말해준다.  둘째인 아들은 인민군대에 병사로 복무중이라고 했다.  참으로 북부조국의 평범한 가정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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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풍 교수는 이어서 내가 관심을 둔 북부조국의 농촌에 대하여 한참을 설명해 주었다.  해방 직후인1946년 3월 5일에 토지개혁법령을 발표하여 모든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토지개혁으로 시작한 개인농이 협동조합으로 진행된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방문기 30회에 “토지개혁은 천지개벽이었다”라는 제목으로 만경대협동농장 방문과 연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기에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협동농장이 이뤄진 이후 수확은 늘어났지만 농촌에는 여전히 여러가지 문젯점들이 있음을 알게 된 김주석은 1960년 12월에 청산리에서 40일 동안 주재하면서 대학교수, 노동당 일군, 내각간부, 농업기술자들과 함께 농촌의 발전을 위하여 세세하게 상황을 검토하며 대책을 세웠는데 여기서 청산리정신과 방법이 나왔다고 한다.   


농촌에 청산리정신과 방법을 고취시켜 첫째, 내가 협동조합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도록 하였고, 둘째, 위에선 아래를 도와주고 앞선 자가 뒤떨어진 자를 도와주도록 할 것,  그리고 세째, 책과의 사업을 중요시하여 선진영농방법을 도입하도록 하였다.  선진영농방법의 예로서 당시에 벼농사를 지을때볍씨를 직파하던 것을 냉산모판을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크게 수확이 늘었다.  이 청산리정신은 지금의 사상혁명, 문화혁명, 기술혁명으로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당시 농촌은 농민들의 낮은 교육수준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영농방식을 고수해왔다.  그러던 것이  1961년에 국가에서 농업지도체계를 따로 세우게 되었다.   중앙에는 농업성을 두었고, 도에는 도농촌경리위원회를 두었고, 군에는 군농촌경영위원회를 두었는데 이는 기존의 인민위원회에서 분리하여 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조직들로 농촌에 깊이 관여하여 주먹구구식으로 농사를 짓던 것을 기업적 방법으로 농사를 짓도록 국가에서 크게 관심을 갖고 이끌어주도록 한 것이다.  


북부조국의 농촌에 정부에서 트랙터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더니 정기풍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개인에게 트랙터를 준다면 그 소유권이 넘어가는 것이 되겠지만 사회주의 북부조국에선 ‘남포천리마트랙터공장’에서 생산한 트랙터를 농촌에 보내는 것은 나라에서 생산한 트랙터를 더 많은 곡식을 생산하기 위하여 보내는 것이니 그것이 손해나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말에 일리가 있다.  보통 100 정보당 7-8대의 트랙터를 국가에서 무상으로 지원한다고 한다.


그렇게 국가예산으로 농촌에 트랙터를 지원하는 것은 국가예산으로 대학이나 연구기관을 지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나라를 위한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생각해보니 이는 사회주의만이 갖고 있는 큰 장점이기도 하다.  북부조국은 나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가정에 종종 비유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자기 자식에게 무상으로 밥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주듯 북부조국의 복지제도는 인민들을 대할 때 우리가 가족을 대하듯 하는 것이다.  정기풍 교수는 이어서 ‘집단의 이익속에 너의 행복도 있다’는 구호를 말해주면서 인민은 사회적존재로 살아갈 때 개인의 행복 또한 이뤄진다고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북부조국 농촌의 미래는 어떠할까?  정기풍 교수는 1964년에 ‘사회주의농촌문제에 관한 테제발표’가 있었는데 그것에 의하면, 공업의 방조, 도시의 농촌에 대한 지원, 농촌의 기술혁명으로 수리화, 전기화, 화학화, 기계화를 달성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이는 이미 1970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경제봉쇄를 당하였던 고난의행군 시절에 활용이 어려웠고, 한동안 보수와 정비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이제 그것을 크게 극복하는 중이며,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 지금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한다.

 

북부조국 여기저기에 자연흐름식 물길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고, 전기화, 기계화, 화학화에서 큰 성과가 있어  앞으로 북부조국의 농촌은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농촌에서 손노동을 줄이면서  파종, 수확, 탈곡 등의 여러가지 과정을 종합적인 기계화로 보다 손쉽게 농사를 지으면서 효율적으로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 그만큼 농촌의 생활은 편리해지고 향상될 것이니 북부조국 농촌의 미래는 아주 밝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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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님의 댓글

광개토왕 작성일

비오는 장면을 사진으로 뚜렷하게 잡기가 쉽지않은데
본 사진에서는 아주 잘 나와있어 그날의 소나기가 실감이 됩니다.

6-70년대에 남한에서 홍수 등으로 식량사정이 어려웠을 때
북에서 알곡을 무상으로 지원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정기풍 교수의 설명대로 당시에 상당한 농업적인
증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남한에서는 북에서 나오는 말들은 무조건 잘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심한데 이런 현상이 진정 북에서 일상적으로 거짓을 말해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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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북의 농지면적이 남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한데 반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된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화학비료를 마구 사용하여 일시적으로 증산했다가 땅이 황폐화되는 일이 없이 퇴비를 생산하고 많이 사용하는 것도 북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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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우님의 댓글의 댓글

황진우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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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의 댓글

강산 작성일

황 선생님, 이메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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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님의 댓글

korean 작성일

북에 협동농장과 국영농장이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
집단소유, 협동소유, 개인소유와의 긴장감이 있을텐 데 이에 대한 내용이 궁금하군요..
사회주의체제에서는 협동농장이나 협동모임이 일종의 계급차이로(노동자 & 농부) 상징되는 부분인데 앞으로 방향이나 전망에 대해 전해들으신 것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공포스런 반북광란 속에서 선생님의 방문기 감동으로 항상 읽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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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korean 님, 북의 대부분의 농장은 협동농장입니다.  개인소유의 농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각 도마다 국영농장이 있는데 저의 방문기에서 거론한 초대형 농장이나 목장은 국영농장이 됩니다.  그러니까 철령 아래 고산의 과수농장이나 세포등판 같은 초대형 목장은 천 명 정도의 단위인 협동농장으로 나눠서 운영하기 보다는 몇 만 명의 농업노동자들이 소속되어 일하는 국영농장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이 당연합니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계획하고 투자하고 지원하고 관리하기에도 편리하겠지요.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협동농장 또한 국영농장으로 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주 넓은 평야에 대부분 벼를 생산한다면 이후에 기계화 자동화로 더욱 진행이 되어 작은 단위로 운영하기 보다 큰 단위인 국영농장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 미래의 농촌은 국영농장이 확대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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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계급에 대해서는 제가 방문기에서 거론한 적이 있는데 북은 계급이 없는 사회입니다.  군대마저도 계급이란 단어마저 사라져서 군사칭호라는 단어로 계급을 대신하여 부르는 정도입니다.  농부들도 농업노동자로 부르는데 북에서 공장이나 산업체의 노동자를 농업노동자보다 우선시 한다거나 하면서 차별을 둔다는 소릴 듣지 못했습니다.  그보다는 제가 예전부터 알고 있기로 광부나 어부 등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대우하고 있는 사회이지요.  한마디로 우리가 3D로 부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더욱 알아주는 사회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를 위하여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이니 아주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알아주긴 커녕 천하게 여기기까지 하지요.  세상이 거꾸로 가는 곳이 어딘지를 보여주는 예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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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요즘은 과학자들을 위해주고 존경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과학자들 또한 그 연구실적이나 업적을 통하여 나라 전체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니 당연히 잘 대우해주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특히 북은 인공위성을 자체적으로 모든 부속을 생산하여 성공리에 발사하는 과학강국이기도 합니다.  컴퓨터 프로그램 경연대회에서 연달아서 북의 대학생들이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지요.  지금의 북은 수백만 명의 지식인들의 사회입니다.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이 해방후 나라를 세울 때부터 서로의 귀함을 인정하고 함께 나라를 건설하였고 그 전통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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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님의 댓글

korean 작성일

가벼운 질문에 성의 있는 답글 감사합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가르는 이론과 현실의 시금석은 소유제도일텐데
조선 현직 정치학자의 설명이 궁금해서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사회주의체제가 수립되면 계급의 근본적인 차이는 사라지지만,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의 과도기적 차이는 존재한다고 봅니다..이를 위해 3대혁명, 3대기술혁명 등의 구호가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겠죠..개인적으론 협동농업제의 변화 또는 발전이 조선식 사회주의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시 해머와 낫과 붓은 북조선의 위대한 철학이고 타사회주의체제와 구별되는 독특한 상징물입니다... 기회된다면 북조선의 선군정치와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 관계에 관해서도 소개해주시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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