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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새나라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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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612회 작성일 15-11-1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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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저녁무렵, 장군님의 집무실에는 김책과 안길 그리고 강량욱서기장과 리주연 등이 보통강개수공사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모여앉았다. 장군님께서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들과 마주앉으시였다.

《공사가 어떻게 돼가고있습니까?》

리주연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는 김운상이 떠남으로 해서 수문설계가 중단된 엄중한 사태를 먼저 보고드리려 했으나 그 말은 차마 입밖에 나가지 않았다.

장군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심뇌가 크실것인가. 하여 그는 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 문제를 말씀드리기로 했다.

《전반적으로 공사계획을 미달하고있습니다. 계획에는 일인당 하루 운토량을 1㎥으로 정했는데 보통 0. 6㎥밖에 못하고있습니다.》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우선 하루 동원로력이 계획대로 나오지 못하고있습니다. 일부 건달군들과 모리배들은 동원장을 받고도 로력을 돈으로 사서 자기대신 공사장에 내보내는 현상이 나타나고있습니다.》

리주연은 대표적으로 중성리에 사는 정근식이란 사람이 오성재농민에게 동원증을 맡긴 사실을 들은대로 말씀올렸다. (장혁수는 현장책임자로서 규정을 어기고 동원증을 받아놓지 않을수 없었던 사정을 리주연에게 이야기했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낯익은 이름을 듣는 순간 리주연의 말을 중지시키시였다.

《가만, 오성재농민이라면…》

《예, 토지를 바꾸어달라던 그 농민이랍니다.》

장군님께서는 한켠으로 반가운 생각이 드시였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갔을가 걱정하시였는데 다시 돌아와 땅을 가꾸는데도 열성이고 공사장에도 매일 나온다니 마음이 좀 놓이시였다.

《정근식이란 사람은 공사장에 나오지 못할 무슨 리유라도 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강량욱서기장이 정근식에 대해 좀 알고있었다.

《한때는 그 사람도 예수의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42년 큰물때 서성리에 있던 공장이 수해를 입고 그때문에 군수품조달을 지연시켰다는 죄로 류치장신세를 지고 나와서는 예수의 교리도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례배당에 다니던 발길을 딱 끊어버렸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정근식에 대해 좀 자상히 알고싶으시여 강량욱에게 물으시였다.

《그 사람이 예수의 교리를 부정하는것과 공장이 홍수피해를 입은게 무슨 련관이 있다는겁니까?》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우습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라는겁니다. 거기에는 40일동안 비가 와서 지구전체가 물에 잠기고 노아부부만 살아남았다고 씌여있는데 그러자면 비가 내리기 전에 그만한 분량의 물이 지구에 존재해있어야 했다는거지요. 증발한것보다 더 많은 량의 비가 쏟아져내릴수는 없기때문에 그건 질량보존의 법칙이라는 상식도 모르는 어린애같은 옛말이라는겁니다. 더구나 성서에는 노아부부가 제일 착하기때문에 방주를 보내주어 그들을 살아남게 했다는데 어째서 보통강수해때는 제일 가난하고 착한 토성랑사람들만 피해를 입고 심보 못된 일본놈이나 부자들은 살아남았는가고 하면서 지독하게 하느님을 욕질했습니다. 속세의 진리를 부정할수 있는 능력이 신앙의 기초로 된다는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닌데… 하여튼 조만식이도 그 사람의 사나운 입심에는 꼼짝을 못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사업수첩에 정근식이라고 써넣으시고 리주연에게 시선을 돌리시였다.

《내 생각에는 주연동무가 그 사람을 한번 만나보는게 좋겠습니다. 그가 공사분위기를 흐리게 하자고 우정 그런것 같지는 않고 일제시기 부역에 동원되는것처럼 생각했을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애국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건국의 구경군이 되지 말고 이 거창한 시대의 흐름에 합류하라고 잘 말해보시오.》

《알았습니다. 》

《그다음엔 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로동자들속에서 공사를 장마철전으로 끝낼수 있겠는가 하고 동요가 일어나고있습니다. 장혁수동무까지 쏘련에서 굴착기가 나온다는데 로동강도를 높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소리를 하는 형편입니다.》

《장혁수동무가?… 그게 정말입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며칠전에는 말썽을 부리는 로동자를 때려주었는데 그 다음날로 현장책임자를 갈아치우라는 삐라까지 뿌려졌습니다.》

리주연은 지금 공사장에 장혁수로 인하여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떠돌고있으며 지휘부에서는 그의 해임문제까지 론의되고있다는데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다. 장군님께서는 무거운 안색으로 리주연의 말을 듣고계시였다. 어떻게 돼서 장혁수가 그렇게 갈팡질팡한단 말인가? 누구보다 보통강반에 원한이 쌓인 사람이고 그래서 누구보다 공사가 빨리 완공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이 공사를 시작할 때 누구보다 믿고 내세워주고싶었는데…

장혁수의 과거사를 잘 알고있는 장군님께서는 그에 대해 남달리 왼심을 쓰게 되는것을 어쩔수 없으시였다. 무작정 정을 주고싶고 언제나 믿고싶고 아름가득 행복을 안겨주고싶으시였다. 만약 이 자리에서 그를 두둔해준다면 그것이 혁명적원칙에서 탈선한 편견으로 되겠는가.…

이윽고 그이께서 말씀하시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이 공사를 통하여 인민이란 존재의 위대성을 시위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장혁수동무의 사업에서 결함이 나타났다고 하여 덮어놓고 해임시켜버리면 평범한 로동자, 농민들을 새 조국건설의 기둥으로 내세우자고 하는 우리의 로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끝까지 믿어봅시다. 물론 장혁수동무의 사상적준비가 약한것은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 기회에 그가 훌륭한 일군으로 성장하도록 잘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때 리주연이 다시 일어났다. 장혁수문제가 론의되는 마당인것만큼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리고 또… 장혁수동무에게 녀자문제가 제기된것이 있는데…》하고는 도중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작 말씀드리자고보니 별 시시한 문제까지 장군님께 보고드리는것 같이 생각되였던것이다. 김책이며 안길이까지도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만은 리주연의 말에 관심을 돌리시였다.

《좀 자세히 말해보시오. 말꼭지를 떼놓고 그만두면 더 궁금하지 않습니까?》

리주연은 장혁수와 리정혜가 알게 된 사연을 아는껏 말씀드렸다.

《장혁수동무는 실지로 그 녀성이 홀몸이라는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기된 신소내용은 너무 야비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아쉽고 분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명백히 말씀하시였다.

《누군가가 장혁수동무의 잔등에 의식적으로 흙탕칠을 하고있습니다. 그가 나라의 기둥감으로 성장하는것도 바라지 않고 행복해지는것도 바라지 않는 세력이 있단 말입니다.》

그이의 말씀이 갑자기 비약하는 바람에 일군들은 모두 긴장해졌다. 그이의 음성은 점점 격해지시였다.

안타깝고 절절하신 그이의 진정이 일군들의 가슴속으로 고스란히 흘러들었다.

《동무들도 알겠지만 장혁수동무는 보통강반에서 불행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는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새가정을 꾸리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공사가 완공되고 그가 행복하게 살게 된다면 그걸 배아파할 사람은 나쁜 놈들밖에 없습니다. 지금 일밖에 모르고사는 그에게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있고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장혁수라는 평범한 인간의 생활상문제가 건국의 아름찬 일감을 도맡아안으시고 누구보다 바쁘신 장군님의 집무실에서 론의된다는것자체가 이례적이고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장군님께서는 이 문제를 다른 문제들보다 더 진지하고 심중하게 대하시였다. 그리고 공사와 관련되는 모든 문건들에는 계급적각성을 더 높일것을 반드시 첨부하도록 지적하시였다.

《우리는 반동들의 책동에 경각성을 높이는것과 함께 일군들이 대중의 건국열의와 투쟁기세를 어떻게 조직동원하는가에 따라 공사의 승패가 좌우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기본은 대중을 인민정권의 두리에 묶어세우고 당원들이 군중의 앞장에 서서 돌격운동을 힘있게 벌리도록 하는것입니다. 나도 인차 공사장에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시공방법이 걸렸다는데 현지에 나가 료해도 해보고 장혁수동무도 만나봅시다.》

그뿐이 아니였다. 김운상이 설계를 어떻게 진척시키고있는지도 알아봐야겠고 먼데서 와있는 건설자들의 숙식조건이 어떤지도 직접 가보고싶으시였다. 그리고 전번처럼 힘껏 일을 하고싶으시였다.

김운상에게 생각이 미치자 장군님께서는 전화기옆에 놓여있던 책들을 리주연에게 내미시였다.

《김운상동무가 수문설계기초자료때문에 애를 먹는다는데 도움이 되겠는지 모르겠습니다.》

리주연은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한권은 《서선지방의 자연지리개요》이고 한권은 《평양부》였다.

《그리고 이 자료들은 해방전 <평양민보>와 <동아일보>에서 발취한것들인데 해방전 평양시의 수해자료들입니다. 운상동무에게 참고하라고 하시오.》

장군님께서는 자신의 친필로 쓰신 서너장의 서류를 같이 넘겨주시였다.

리주연은 가슴이 조여들었다. 장군님께서 언제 이걸 다… 이 숱한 자료들을 찾아내시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치시였겠는가. 그런데… 장군님께서 천금같은 시간을 쪼개시여 찾아내신 이 귀중한 자료들을 받아야 할 당사자는 지금 공사장에 없다.

리주연은 이 순간처럼 김운상이 야속해보인적은 없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리주연이 머뭇거리는것을 보시며 불안감을 느끼시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장군님, 제가 일처리를 잘못했습니다.》

리주연의 보고는 장군님께 정말로 뜻밖이였다.

김운상, 그 사람이 그렇게 신의없고 나약한 인간이였는가.

다음순간 그이께서는 도리머리를 저으시였다.

초가집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조선농촌주택개량을 연구과제로 삼았다던 그가 의식적으로 건국의 대오에서 떨어져나갈수는 없다. 만약 그런 애국적이고 량심적인 지식인까지도 나의 동지가 아니라고 단정한다면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라고 한 우리의 인테리정책은 말공부에 지나지 않는것으로 될게 아닌가. 김운상이 일시적으로나마 주저앉은것은 우선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모자랐다는것이고 그의 주변에 불신의 찬공기가 흘렀기때문인것이다.

누가, 어떤 세력이 건국열로 달아오른 그의 심장을 랭동시키려 하는가.

생각에 잠기셨던 장군님께서는 심중한 안색으로 리주연에게 물으시였다.

《그러니까 수문설계를 아직 못 끝냈겠습니다?》

《예.》

《김운상동무를 한번 찾아가보았습니까?》

리주연은 대답대신 머리를 숙였다. 한번 찾아가 만나봐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일에 몰리다나니 하루하루 미루어오고있었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대답을 못하는 리주연을 바라보시며 마음이 허전해짐을 느끼시였다.

과연 리주연에게도 김운상은 버릴수 없는 사람이라는것을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혁명은 동지를 얻는것으로부터 시작되고 동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혁명가의 기본품성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그리고 김운상과 같은 사람을 건국의 주인으로 내세우는것이 우리 일군들의 몫이라는것을 주연동무가 모른단 말인가.

장군님께서는 안타까운 심정을 내색하지 않으시고 리주연을 다시 자리에 앉히시였다.

《내 주연동무에게 한마디 하고싶은것은 혁명을 실무적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심장이 뜨거워질수 없습니다. 어서 그 자료를 본인에게 가져다주시오. 그리고 내가 공사장에서 만나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시오.》

일군들이 돌아간 뒤에도 장군님께서는 한자리에 앉아계시였다. 현실의 난문제들이 마치도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보려는듯 거친 파도마냥 끊임없이 밀려드는것 같아 그이께서는 좀처럼 안정을 찾을수 없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오늘 공사장에서 제기된 크고작은 문제들을 통하여 건국이 얼마나 힘든것인가를 다시한번 실감하시였던것이다. 과연 인민의 힘으로 인민의 나라를 세우자는것이 그렇게도 실현불가능한 리상이란 말인가.

오늘의 현시점에서 공사를 제기일내에 끝내자면 어떤 대책이 필요하겠는가.…

깊어가는 밤과 함께 장군님의 사색도 끝없이 깊어져갔다.




38

 

종로 뒤골목의 추녀낮은 단층집들은 어둠속에 잠겨있었다. 이 시간이면 누구나없이 네활개를 펴고 안식의 꿈나라를 훨훨 날고있건만 김운상은 하숙집 웃방의 앉은뱅이책상앞에 조각처럼 앉아있었다. 공사장에서 쫓겨나다싶이 했던 그날부터 운상은 머리를 싸매고앉아 자기라는 존재를 정확히 해명하기 위해 번뇌에 시달려왔다.

건국의 앞장에 서보겠다던 건축가로서의 리상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의 희열마저 사그러져버릴만큼 그의 고민은 심각하고 절망적인것이였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 반동과 한짝인가? 며칠을 두고 그 한가지 질문에 옴해있다보니 운상은 스스로 자기를 믿을수 없게 되였다.

한달전 장군님으로부터 공사설계에 대한 과업을 받아안았을 때 그는 난생처음으로 삶의 환희를 느껴보았었다. 물론 그때에도 토목설계에서 자기의 능력을 의심해보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장군님으로부터 직접 과업을 받아안았다는 건축가로서의 행복감이 그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었었다.

비록 건축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시절에 수재로 이름을 날렸고 토목공학도 배울만큼은 배웠으니 그러한 자신감이 근거없는것은 아니였다. 지금도 그는 자기의 지식이 모자라서 이런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문제는 무넘이제방을 쌓으면 본래의 보통강은 강바닥이 드러나고 평양의 허물로 된다는것을 자기가 알면서도 설계를 그렇게 한것이였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토목공학을 배우지 못하시였지만 무넘이제방의 결함을 대번에 지적하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결국 보통강을 대하는데서 장군님과 자기의 립장이 차이난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였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평양에 대한 사랑의 차이이고 애국심의 차이였다.

이 차이는 어디서부터 오는것인가?

곰곰히 생각해볼수록 자기에게 친일파요, 반동이요 하고 억지감투를 씌우는것이 억울하긴 해도 지금의 처지에서는 변명할수가 없었다. 자기를 비판하던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김운상이라는 인간이 건국의 선봉투사가 될 자격이 없는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세상사람들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새 조국건설에 한몸 바치려던 나의 열정, 나의 량심은 누가 알아줄것인가. 그것을 알아주신 유일한분은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그런데 그분을 노엽혔으니, 아!…

운상은 철들기 전에 집을 떠나서부터 오늘까지 외롭게 살아왔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심정으로 살면 외로움이 덜어진다지만 다가가고싶은 사람이 없었고 왜놈들이 살판치던 그 세월에는 그런 다심한 정을 품고사는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 세월에는 다 버리고싶었다. 그러던 그가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는 오직 그분에게로 가까이, 제일 가까이 다가가고싶은 일념만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었다.

평생 그분의 가르치심을 받고 그분의 사랑만을 받고싶었는데 그 자격을 스스로 잃었으니 이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차라리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지을가? 평양을 떠나면 가슴을 짓누르는 마음속 고통에서 다소나마 해방될것 같았다.

엊그제 그는 하숙집어머니에게 자기 생각을 비쳐보았다.

《부모님들을 모시면서 남새농사나 지을가 해요. 고향에서 참한 색시두 얻구…》

하숙집어머니는 며칠째 웃방에만 박혀있는 운상의 거동을 심상치 않게 지켜보던중이였다.

《그런 말로 날 속이진 못하네. 아무렴 평양성안에 임자 색시감이 없겠나? 그건그렇구 집짓는 기술을 배운 임자가 고향에 가서 남새농사나 짓겠다는건 속에 없는 소리야. 임자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책없는 늙은이소견에두 잘하는 생각같지 않아.》

하숙집어머니는 부엌에 내려가 한참 덜거덕거리더니 개다리소반을 받쳐들고 올라왔다. 따끈하게 데운 모두부와 풋나물무침, 간장종지가 전부였다. 녀인은 자그마한 종발에 술을 부어 운상의 앞에 놓아주고는 제앞에도 한잔 부어놓았다. 초년에 남편을 잃고 독수공방의 밤이 하도 지루해서 술을 배웠다는 하숙집어머니였다.

《해방이 돼서는 술없이도 살수 있었는데 오늘은 임자하구 한잔 마시고싶군. 내 옛말 좀 하라나?》

《하십시오.》

녀인은 제먼저 한모금 마시고나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난 기미년 만세때에 남편을 잃었네. 그땐 하늘이 보이지 않았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깨여보니 늙은 시어머니와 다섯살난 아들애가 내 머리맡에 앉아있더군. 별수 있나? 산 사람이야 살아야지. 무슨 고생인들 안했겠나. 죽고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어. 그래도 억척스레 살았지. 재작년에 징병에 끌려간 아들의 사망통지서를 받았을 때는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는것처럼 앞이 캄캄해지더군. 난 죽자고 결심했네. 남편과 아들까지 저승길에 앞세우고 살만큼 살았으니 사는게 싫증나더군. 불도 안 땐 랭돌바닥에서 물 한모금 안 먹고 사흘동안을 쓰러져있었네. 온몸이 나른한게 땅속깊이 잦아드는것 같더군. 그런데 글쎄 강아지란 놈이 낑낑거리면서 부엌문을 자꾸 긁어대는게 아니겠나. 며칠째 굶었으니 그놈도 배가 고팠겠지. 방안에 주인이 있다는걸 아는지 그냥 부엌문을 허비며 애타게 낑낑거리는데 더 누워있을수가 없더군. 문을 열고 밖에 나와보니 여전히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고 해가 쨍쨍 비치더란 말일세. 그때 난 생각했네. 죽지 말고 살자, 살아서 이놈의 세상이 망하는 꼴을 꼭 봐야겠다 하고 말이야.

내 말은 강아지가 날 살렸다는게 아니라 사람목숨이 그렇게 질기다는거야. 조그마한 미련이라도 있으면 거기에 매달리게 되거던.

내가 임자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나? 살아가느라면 무슨 일인들 없으랴만 벼랑끝에 몰렸어두 기죽지 말고 버티여내라는거야. 그게 대장부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늙은이의 자격으로 조용조용 말하는 하숙집어머니앞에서 운상은 다른 말을 할수 없었다. 그자신이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면서도 아직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있는것이 바로 평양에 대한 미련때문이였다. 고향에 내려간다는것은 평양에 현대적건축물들을 세우고싶었던 건축가로서의 리상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뜻이였다. 중요하게는 보통강개수공사를 외면할수 없다는 설계가로서의 량심과 인간적인 도의심이 그의 발목을 잡고있었다. 설사 수문설계에 다시 손을 댈 자격은 없다 해도 하다못해 평범한 로력자로서 질통을 지고 육신이라도 바쳐야 마음이 개운해질것 같았다. 더우기 구진배가 진짜 반동이라면 어느때건 공사장에 나타날수 있는데 그의 얼굴을 알고있는 자기가 어떻게 아주 떠날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한가지는 수영이라는 처녀의사에 대한 미련이였다.

그동안 그 처녀에 대해 잊으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것을 운상은 날이 갈수록 똑똑히 느끼고있었던것이다. 여하튼 그 여러가지 사정들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것을 방해할뿐아니라 방구석에 앉아 고민이나 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고 잡아흔드는듯싶었다.

지금 이 시각도 운상은 앉은뱅이책상앞에 한모양으로 앉아서 친일파요, 반동이요 하는 말들이 차단봉처럼 앞을 막아선다 해도 래일부터는 공사장에 나가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굳히고있었다.

제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밖에서 찾는 소리에 귀를 강구었다. 잘못 들었나?… 찾는 소리가 또 들렸다.

《계십니까?》

운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이밤중에 누가 왔을가? 마당에는 리주연부위원장이 서있었다.

《아니?…》

촉수낮은 전등빛에 비쳐진 리주연의 얼굴표정은 어둡고 착잡해보였다. 방안에 들어온 리주연은 잠시 운상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뭘하고있소?》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렸다.

《아직 자지도 않고 뭘하고있는가 말이요? 그래 아직도 자기라는 존재를 해명하지 못해서 고민하고있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도 모르겠는가 말이요?》

평소의 침착하던 모습은 리주연에게서 찾아볼수 없었다.

운상은 그의 태도를 종잡을수 없어 한동안 어리둥절해있었다. 부위원장이 이밤중에 웬일일가?

리주연은 백로지에 정히 싸가지고온것을 운상에게 내밀었다.

《이 책은 김일성장군님께서 동무에게 보내시는거요. 수문설계에 필요한 참고서들과 장군님께서 직접 발취하신 보통강수해자료들이요.》

순간 운상은 가슴을 때리는 세찬 충격에 흠칫 몸을 떨었다. 이게 무슨 꿈같은 소리인가?

《장군님께서 어떻게… 저야…》

《그렇소. 동무자신이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 고민하고있고 나도 동무가 어떤 사람인지 믿을수 없어서 새 설계가를 찾으려고 했는데 장군님께서는 김운상동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계신단 말이요. 장군님께서는 동무를 변함없는 동지로 믿고 이 자료들을 주시면서 공사장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시였소. 운상동무! 난 장군님의 집무실에서 곧바로 동무한테 달려오는 길이요. 동무는 고작 자기 운명을 두고 고민하고있지만 장군님께서는 이 시각에도 공사의 운명을 걱정하고계신단 말이요.》

그제서야 운상은 리주연부위원장이 왜 그렇게 흥분했는가를 깨달았다. 또다시 흉벽을 두드리는 강한 충격에 운상은 종시 자기를 지탱해내지 못하였다. 그는 헉- 하고 흐느끼며 무릎을 꿇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장군님께서는 나자신도 미처 다 몰랐던 나의 가치를 값높이 사주시며 변함없이 믿고계시는데 나는 보통강을 버리고 그분의 믿음을 저버리고 도피하려 했으니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나는 본의아니게 2중으로 죄를 지었구나.)

김운상은 목이 꺽꺽 메여 말을 제대로 할수 없었다.

《부위원장동지!… 용서하십시오.… 이제… 난 어쩌면 좋습니까?》

그러나 지금 리주연의 마음속에서도 일진광풍이 휘몰아치고있었다. 그의 심중은 운상이보다 더 격양되고 복잡했던것이다. 그는 장군님으로부터 혁명을 실무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에 자기의 본질적과오가 무엇인가를 통절히 느꼈다. 장혁수나 김운상에게 제기된 문제들은 따지고보면 그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데서 생긴것이였다.

매사에 침착하고 깐깐한 그의 성격적우점이 이번에는 간과할수 없는 엄중한 결함으로 되였던것이다. 왜냐면 그 우점이 인간들의 운명에 대한 객관적인 랭정성으로 나타났기때문이였다.

《운상동무! 날 용서하오. 난 오늘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탓에 장군님을 실망시켜드렸소. 내 언제면 장군님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일군이 되겠는지 모르겠소. 난 가겠소. 래일 공사장에서 만납시다.》

《이밤중에…》

리주연은 김운상이 만류할새없이 방문을 열고 나섰다. 여기서 공사장까지는 한시간남짓이 걸어야 하는데 밤길을 홀로 걸으면서 자신을 더 깊이 반성해보고싶었던것이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운상은 서둘러 따라나섰다. 이제야 뭘 주저하랴. 리주연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남산재를 넘어가는 두사람의 앞길을 조금이라도 밝혀보려는듯 열정적으로 깜박거렸다.

달아오른 두사람의 머리를 식혀주려는지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군 했다.

저벅, 저벅… 생각깊은 발자국소리가 봄밤의 고요를 조금씩 흔들뿐 사위는 정적에 묻혀있었다.

서성교를 건너서야 리주연은 이제껏 정리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운상동무, 동무나 나나 심각한 교훈을 찾읍시다. 일단 장군님 가시는 길을 따라나섰으면 죽을 때까지 오직 장군님발자취만을 따라야 한다는걸 명심합시다. 그 길에서 한걸음이라도 헛디디게 되면 우리 인생은 막돌보다 못해진다는걸 잊지 말자구.》

운상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이 길을 걷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리주연은 한참 말없이 걷다가 문득 생각난듯 처녀의사가 자기를 찾아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녀가 정말 괜찮더군. 사람을 보는 눈이 나보다 낫더란 말이요. 하긴 그렇게 믿으니까 사랑도 이루어지는거겠지.》

운상은 그 말을 선뜻 믿을수 없었다. 수영이가 정말 나를 믿는단 말인가? 정말?… 그의 가슴은 조용히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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