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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 공동으로 발굴해온 고려왕궁 만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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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606회 작성일 15-10-2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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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왕궁이 수백년의 잠을 깬다

* 만월대유적유물전시회장을 찾아서 *

주체104(2015)년 10월 26일 《통일신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왕궁유적들중의 하나인 만월대왕궁터가 수백년의 잠을 깨고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고있다.

달이 솟는 밤이면 그곳에서 달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망월대라 불리우던것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만월대로 불리워졌다고 하고 밤하늘의 달빛이 속속들이 비쳐들어 만월대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이곳에서 지난 10월 15일 북남공동학술토론회가 진행되였다. 이날부터 시작하여 년말까지 계속 진행되는 만월대유적유물전시회장으로는 사람들이 련일 찾아오고있다.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의 수도, 민족문화를 빛내인 유적의 도시에서 북남에 의해 유적유물전시회가 진행되고있는것은 참으로 의미가 크다.

부귀와 사치, 왕권의 당당함을 자랑했을 수많은 청자기들이며 석상들과 금속공예품들이 사연많고 수난많던 이 땅의 어제와 함께 통일을 갈망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의 강토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슬기와 지혜에 대하여 속삭여주는듯싶었다.

 

하많은 력사를 땅속에 묻고

 

918년 고려를 세운 왕건은 만월대건설을 다그쳐 919년 왕궁을 매우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려놓았다. 만월대의 왕궁은 강화도에 도읍을 일시 옮겼던 40여년간(13세기 중엽)을 제외하고는 고려왕조의 기본왕궁이였다.

지금도 거의 원상그대로 자기의 모습을 유지하고있는 만월대의 계단을 이어 배치된 회경전, 장화전, 원덕전과 건덕전을 비롯하여 수십여개의 집터자리들을 통하여 우리는 만월대가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건물이였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1011년 외적의 침입으로 만월대는 화재를 입어 복구를 하게 되였다.

그후에도 만월대는 1126년 리자겸, 척준경의 반란과 1171년에 일어난 화재를 비롯하여 여러차례의 화재를 입었다.

그러던 1392년 조선봉건왕조의 수립을 계기로 만월대는 다시는 수복되지 못한채 자기의 하많은 력사를 땅속에 묻고 세월의 이끼속에 가리워져왔다.

발어참성이라 불리우던 자그마한 성에서부터 시작하여 만월대라는 큰 궁성을 형성하고 근 500년간 존재한 고려의 력사가 고스란히 재가루를 뒤집어쓴채 잠들었던 수백년전의 이야기는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지가지의 전설로, 이야기로 전해지고있다.

 

함께 찾아내는 민족의 재보

 

만월대궁성유적이 아직 발굴되기 전이였던 주체81(1992)년 5월 5일 왕건왕릉을 찾으시였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만월대에 오르시여 이곳을 민족의 유산으로 훌륭히 복원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력사적인 6. 15공동선언의 채택리행으로 북남관계가 화해와 협력의 궤도를 타고 달리던 2007년 5월 발굴의 첫삽을 박은 북과 남의 공동발굴대는 만월대궁성의 서부지역에 대한 탐사를 시작했다.

만월대의 중심건축군으로 추측되는 회경전과 장화전, 원덕전의 서쪽에 자리잡은 서부건축군에 대한 발굴이 먼저 진행된것은 바로 이 지역에 왕의 침전으로 리용되였다고 하는 건물들이 있었으며 건덕전이라고 하는 흥미있는 건물이 자리잡고있었기때문이였다.

1124년 송나라의 황제가 보낸 사신이 만월대를 다녀간 후 남겼다는 《고려도경》이라는 책에 고려의 력사와 보물들과 함께 건덕전을 중심으로 한 만월대의 건물배치가 있었다.

그 책에는 만월대의 서쪽에 왕의 침전이 있었으며 건덕전이라고 하는 큰 건물이 있었다, 건덕전의 우측에는 장화전이 있었고 장화전의 우에는 왕의 조상들을 제사지내던 원덕전이 있고 아래로는 국사를 론하던 회경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동쪽에는 태자가 살던 동궁이 있었다는 식의 기록이 있었다.

또한 건덕전이 회경전과 함께 정사를 보던 건물이지만은 고려초기부터 있었던 건물인것으로 하여 만월대의 력사를 해명하는데서 큰 의의를 가지였다.

때문에 발굴대는 건덕전의 위치를 찾아내는데 발굴의 열쇠가 있다고 보고 서부건축물들의 발굴에서부터 만월대의 모습을 재현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발굴사업은 남조선에서 보수《정권》이 등장하면서 북남관계악화와 함께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민족의 력사를 찾아 빛내려는 겨레의 마음과 노력에 의해 발굴사업은 진통속에서도 이어져왔다. 최근 공화국의 주동적인 조치로 마련된 북남고위급긴급접촉의 합의로 만월대복원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였다.

지금까지 9년에 걸치는 발굴과정에 발굴대에 망라된 북과 남의 성원들은 우리 겨레는 언어도 피줄도 력사도 하나이며 결코 갈라져서는 살수 없는 민족이라는것을 다시금 확인하였고 어설프고 서로가 경계했던 발굴초기의 심리상태를 가시고 너나없이 통일에 대한 희망과 꿈, 래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말그대로 한혈육의 정을 나누었다.

하기에 남측발굴대의 한 성원은 발굴이라는 과정 하나만을 거쳤을뿐인데 벌써 서로가 서로를 알고 리해하고 위해주는 이것이 통일인것 같다, 우리 이대로 통일에로 가면 안되는가고 격정에 겨워 말했다고 한다. 또 발굴대에 속한 남측의 한 관계자는 처음 만났을 때에는 솔직히 경계심도 없지 않았다, 허나 발굴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통해 우리 민족끼리라는 리념에 대하여 잘 알게 되였다, 우리의 력사, 우리의 발굴이야말로 외세의 간섭이 없고 외세를 필요로도 하지 않는 진정한 통일의 공통분모이라고 가슴속진정을 터치였다고 한다.

우리와 안면이 있는 평양민속공원 학술실장은 이 나라의 력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만월대발굴단의 한 성원이 된것을 행운으로,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세계적인 유적을 발굴하는 긍지도 크지만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의 걸음에 자기의 적은 힘이나마 보탤수 있어 더욱 기쁘다고 말하였다.

 

1만여점의 유물들이 발굴되여

 

이번 유물전시회에서 인상적인것은 송악산을 배경으로 전시된 왕건좌상이다.

만월대의 주인이며 송악산기슭에서 태여나 거기서 생을 마감한 왕건의 좌상은 왕건왕릉발굴당시 릉의 뒤쪽에서 출토된 유물이라고 한다.

왕건이 세상을 떠난지도 1 000여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있는 청동조각상은 왕궁유적인 만월대유적유물전시회의 품격을 강조해주는듯싶다.

지금까지 무려 7차에 걸치는 발굴과정에 발굴대는 1만여점의 청동유물과 청자기, 고려백자기들과 화강석잡상들 그리고 고려시기의 벽돌과 기와들을 발굴하였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들은 왕의 침전과 정전 등 왕족들의 개체생활과 내부생활에 쓰이던것들로서 세공술과 질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유물들로 보여진다.

특히 청동으로 만든 세발솥과 원통형청자기, 청자기로 만든 절구공이와 뚫음무늬장식접철, 청동장식판들은 고려왕실의 사치함과 호화스러움을 다소 짐작할수 있게 했다.

고려왕궁터에서 발굴된 동전과 유약을 바른 도기병, 청자기에 련꽃을 돋을무늬로 새긴 청자련꽃돋을무늬접시, 청자모란꽃돋을무늬8각접시 등을 통해 참관자들은 고려의 문화와 상업이 발전했으며 특히 도자기공예가 뛰여났다는것을 다시금 느끼고있다.

1 000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지만 조금도 변함이 없이 원상대로 보존된 일부 유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놀라움과 경탄을 감추지 못하고있다.

공화국의 민족문화유산보호정책과 민족의 력사를 길이 빛내이려는 북남력사학자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해 앞으로 이곳 만월대에서는 고려왕궁과 관련한 더많은 값진 유적유물들이 옛 모습을 드러내게 될것이다.

본사기자 강 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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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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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모양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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