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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새나라> 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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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915회 작성일 15-11-24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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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해방산을 넘어선 정근식은 서성교를 지나 봉수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지금 보통강개수공사장으로 가는 길이였다.

하얀 모시로 지은 바지저고리차림에 슬슬 부채질을 하며 바쁘지 않은 걸음으로 걷는것을 보면 한가로운 유람객의 자세였다. 오늘은 그의 생일날이다. 로친네는 공사장에 가서 수영이를 데려오라고 아침부터 성화를 먹였다.

《령감은 걱정되지두 않수? 그 애가 공사장에 나가사는지도 보름이 넘었는데 오늘같은 날에야 집에 데려와야 할게 아니요? 그 애가 있을 땐 그래도 사람사는 집같더니 요샌 꼭 무덤속같은게 질거죽겠수다.》

《그 애가 제 외삼촌생일을 잊지 않았다면 제발로 나타나겠는데 뭘 찾아다닌다는거요? 그리구 지금같은 때에 생일놀이는 또 뭐구?…》

《지금이 어드래서요? 해방이 돼서 처음 맞는 생일인데 있는껏 차려봅시다레.》

종당에 정근식은 마누라한테 질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자기도 이미전부터 공사장에 한번 가보고싶었다. 그러니 수영이를 만나러 간다는건 자기의 내심을 감추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세상에 철저한 현실도피란 있을수 없는 모양이다. 아프리카의 쟝글이나 남아메리카의 빤따날 같은데 깊숙이 숨기 전에는 절대적인 현실도피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철저한 현실부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에 대한 허무도 절대적일수 없다는것을 말해준다.

정근식의 경우가 그랬다. 해방전에는 오불관언하고 사는것이 가능했었다. 그때는 세상이 그를 외면했고 자기 또한 이 세상에 볼 일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은둔자로 자처하면서 고독에 습관되였고 점차 그 고독을 사랑하게까지 되였다. 그런데 해방된 세상에서는 그를 가만놔두려 하지 않았다. 장군님께서 굳게 닫긴 대문을 두드리시던 그날부터 그의 생활세계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적굴동을 지나고 봉수산기슭을 돌아서던 그는 공사장의 한적한 풍경앞에 다소 어리둥절해졌다. 조카딸의 말은 사람들이 공사장에 하얗게 널려서 쉴새없이 일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쉴참이 아닌데도 일하는 사람은 없고 다들 나무그늘밑에 앉아 땀을 들이고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자기가 와보길 잘한것 같았다. 하긴 이 복더위에 토목로동을 한다는게 헐하겠는가. 그래도 왜정때처럼 채찍을 들고 꽥꽥거리는 십장들이 없으니 마음편히 쉴수는 있을것이다.

정근식은 제 생각에 옴해서 걷다가 웬 사람에게 팔목을 잡혔다.

《보아하니 정신을 안 가지고 다니는것 같군요. 저길 보지 못합니까?》

그 사람이 가리킨 곳은 팔동교방향으로 물길을 돌린 봉수산기슭을 더 넓고 깊이 따내는 곳인데 암만 봐도 별다른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정근식의 팔을 놓아주며 허허 웃었다.

《이 사람이 공사장물계는 영 깜깜이군요. 당장 발파를 한단 말입니다.》

《발파요?》

그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는듯 때마침 지심을 흔드는 발파소리가 울렸다.

쾅, 쾅, 콰쾅…

발파소리에 잇달아 뽀얀 먼지구름이 주변을 덮었다. 돌부스레기가 그곳까지는 미치지 않았지만 정근식은 저도 모르게 둬발자국 물러섰다.

《공사장이 처음인가 봅니다. 외지에서 오셨는가요?》

길섶에 주저앉아서 그 사람이 묻는 말이였다. 정근식은 자기도 알아들을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평양에 살면서 여기에 처음 와본다고 하기가 량심에 찔리웠던것이다.

《로동안전규정이라는게 있으니까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는 여기서 다리쉼이나 하고 가시지요.》

정근식은 그 사람이 권하는대로 풀밭에 앉으며 먼저 물었다.

《댁은 여기서 무슨 일을 보시는지요?》

뒤꽁무니에 수첩을 찔러놓고다니는것을 보니 막일이나 하는 사람같지 않았던것이다.

《나요? 시를 씁니다.》

《시를요? 이 공사판에서 시를 쓴다구요?》

《왜 놀라십니까?》

그는 정근식이 놀라는게 놀랍다는듯 되물었다. 그 사람은 시인 리찬이였다. 리찬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있는 정근식에게 정색해서 물었다.

《놀랄만도 하지요. 옛날같으면 신음소리, 채찍소리만 울리던 공사장에서 노래소리가 울린다는게…》

리찬은 심장에서 끓고있는 시적인것을 퍼내지 않고는 견딜수 없다는듯 초면인 정근식에게 손세까지 써가면서 열변을 토했다.

인간은 원래 자연앞에 무력한 존재였다. 때문에 력사적으로 자연에 대한 공포와 신앙이 존재해온것은 불가피한것이였다. 보통강의 력사만 보아도 사람들에게 해마다 재난을 들씌우면서 태고적생긴 모양대로 흘러왔었다. 지난날 봉건통치배들은 인민을 억압할줄만 알았지 그들을 보살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제통치시기에도 왜놈들은 저들의 침략적, 략탈적목적으로부터 보통강을 리용하려 했을뿐 그 주변일대에서 사는 인민들의 운명에는 무관심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장군님께서 평양을 수해로부터 보호하고 토성랑인민들을 살리자고 처음으로 삽을 들고 나서시였다. 인민수난의 력사, 불행의 력사를 끝장내자고 대자연에 선전포고를 하시였다. 인류력사를 돌이켜보면 만민평등의 행복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열쇠가 어디에 있느냐 세기와 세기를 넘으며 뜻있는이들이 력사의 미궁을 더듬질해왔건만 누구도 찾을수 없었던 행복한 세상의 열쇠를 우리 장군님께서 찾아쥐신것이다. 찾으신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 바쳐 만들어내신것이다. 리찬의 어조는 시종일관 웅변적이였다.

《난 빛과 어둠을 시창작의 근본으로 삼고 글을 써왔습니다. 그런데 해방전에는 어둠에 대해서만 노래했지요. 그 시대의 양상은 어두웠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빛에 대해서만 노래하고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태양에 대한 노래만을 쓰려고 합니다. 난 지금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민주의 새 조선의 위대한 태양이 누구인가를 온 세상에 노래하는 <김일성장군의 노래> 를 창작하고있습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정근식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생각지도 않았다가 뜻밖에 대단한 사람을 만났던것이다. 그는 리찬의 흥분에 전염된듯 바투 다가앉으며 그 보배손을 덥석 움켜쥐였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는 마음속에 켜진 등불탓인지 퍼그나 진지하고 엄숙한 빛이 흘렀다.

《선생은 민족앞에 정말 큰일을 하고있소이다.》

《이러지 마십시오. 장군님에 대한 송가를 짓는거야 만민이 일구월심 바라는게 아닙니까? 조선민족이 낳은 불세출의 위인을 세상앞에 뚜렷이 내세우는것은 민족성원모두의 응당한 본분인즉 한방울의 먹물이라도 손끝에 묻혀본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맨먼저 정중한 자세로 나서야지요.》

정근식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백성들모두가 제 본분을 다하고 사는건 아니지요. 나라는 위인만 봐도 평양에 태를 묻고 살면서 오늘에야 구경삼아 여기에 나와봅니다. 동원장을 받고도 로력을 돈으로 사서 대신 내보냈댔지요. 그래서 장군님께 노여움을 끼쳐드렸댔습니다. 장군님께서 내 집 대문을 손수 두드리시며 건국의 한마당으로 불러주시였는데도 엉치가 무거워 오늘에야 나왔습니다.》

《글쎄 어쩐지 관청에 온 촌닭같다 했습니다.》

리찬은 능청스레 말하며 제 먼저 웃음을 터쳤다. 정근식이도 오래간만에 롱담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웃었다.

《무엇이 나를 여기로 뚱기쳐냈는지 하여튼 와보고싶더라니까요. 선생같은 귀인을 만나고보니 우리 로친네가 못나긴 했어도 하늘의 계시를 받고 내 등을 떠민게 틀림없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이 공사장에서 나같은 선비를 만나는게 뭐 그리 대단한것이겠습니까? 여기서 봐야 할건 김일성장군님께서 착공식날 첫삽을 뜨신 자리지요.》

정근식은 애원에 가까운 간절한 표정으로 리찬에게 청을 드렸다.

《날 거기에 데려다주겠습니까? 부탁입니다.》

《그런 부탁이야 백번이라도 들어주지요. 갑시다.》

아직 발파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지만 건설자들은 작업장으로 밀려들고있었다. 공사장은 대번에 활기를 띠였다.

정근식은 리찬을 따라 일어섰다. 서재골로 넘어가는 굽인돌이를 꺾어들던 그는 새 통수로가 뻗어간 공사장의 전경앞에 입을 딱 벌렸다. 자를 대고 그은것 같은 저런 제방이 언제 생겨났는가? 50m 강폭을 사이에 두고 량옆으로 뻗은 제방과 분주히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면서 그는 이 력사의 기적앞에서 자기 위치를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강산이 이렇게 변하도록 자기는 뭘하고있었는가?

그동안 자기는 망태기가 되여버린 이 세상에 어떤 미련도 가질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구전체를 암흑세상으로 규정했었다. 그런데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영영 밝아질것 같지 않던 이 세상에 광명을 안아오시였고 암흑속에서 헤매이던 천덕꾸러기들이 거인적형상으로 자연에 도전하고있는것이다.

보라! 너도나도 질통을 지고 뛰지 않는 사람이 없다. 저기 저 남정들은 어째서 목고줄을 자기쪽으로 당겨놓으며 싱갱이질을 하고 보매 중학생인듯 한 소년은 어째서 어른들과 같은 질통을 지고있으며 장석을 입히는 저 사람들은 무엇이 즐거워 허리를 물속에 잠그고도 웃고 떠드는가.

정근식은 눈앞에 안겨오는 광경들과 공사장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노래소리, 북소리, 꽹과리소리에 정신이 팔려 몇번이나 발을 헛짚어 넘어질번 하였지만 그래도 공사장에서 눈을 뗄수 없었다.

리찬은 서포천과 형제산강의 합수목에 정근식을 데리고왔다.

《여기가 바로 장군님께서 첫삽을 뜨신 곳이요.》

정근식은 시커먼 감탕흙이 드러난 그곳에 말없이 다가섰다. 바로 여기가 김일성장군님께서 수천년 감탕속에 묻혀있던 인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위대하고 존엄높은 존재로 떠올리시기 위하여 첫삽을 박으신 곳이란 말인가. 바로 여기가 민주건설의 첫출발점이고 이 땅에서 자연에 대한 항거의 력사가 시작된 곳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여기는 응당 황금으로 란간을 두르고 천만년 길이 보존해야 할 유서깊은 곳이 아닌가.

생각에 잠겨있던 정근식은 멀지 않은 곳에서 떠들썩하는 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팔뚝만큼 굵은 이깔장대들을 달구지에서 부리우고있었다.

《저기선 뭘하는가요?》

그쪽을 유심히 살피던 리찬은 탄성을 질렀다.

《아하, 저 사람들이 끝내…》

리찬은 제 먼저 앞장에 서며 정근식을 이끌었다.

《우리도 가봅시다. 참 희한한 구경거리지요.》

거기는 선교4리 작업구역인데 지금 임성민은 웃동을 벗어제끼고 나무레루를 놓을 준비를 하고있었다.

팔뚝만 한 굵기의 이깔나무를 껍질을 벗기고 잘 다듬어 침목에 고정시키면 얼마든지 레루를 대신할수 있었다. 곡산공장에서 당장 밀차를 만들어오겠는데 소철레루가 없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나무레루를 놓고서라도 하루빨리 제방을 쌓자는것이였다.

임성민의 착상은 돌격대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쇠붙이건 나무건 밀차가 굴러가면 되는거지.》

《그래그래. 밉건곱건…》

째지게 가난해서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더꺼머리가 한마디하는데 코마루가 잘 익은 사람이 맞장구를 친다.

《그 말이 맞아. 막걸리건 탁배기건 취하면 되니까.》

《쯧쯧, 한다는 소리들이…》

결국 어제부터 봉수산에서 매츨한 이깔나무를 골라 껍질까지 벗겨가지고 온것이다.

정근식은 침목우에 레루를 놓는 그들의 작업모습을 얼없이 지켜보다가 리찬이 팔을 끌어서야 거기서 떠났다.

《우리 건설자들이 참 용한 생각을 해냈군요.》

정근식은 생각깊은 어조로 한마디했다.

《난 저 나무레루를 단순한 발명품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공사에 진심을 바치지 않고서야 저런걸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애국레루라고 해야지요. 좀 둘러보시오. 저기선 목조기중기가 우뚝 솟고 저쪽에선 권양기가 밀차를 끌어올리고 사람들은 또 어떻소? 여기선 애국이란 말밖에 할 소리가 없습니다.》

리찬의 마음속에서는 벌써 시가 다듬어지고있는 모양이였다. 그는 얼핏 회중시계를 꺼내보고나서 정근식에게 돌아섰다.

《자, 이젠 나두 일을 좀 해야겠으니 손님을 계속 안내할수가 없구만요.》

리찬의 말은 어딘가 야유조로 들렸으나 정근식은 탓하지 않았다. 설사 어느 젊은이나 아낙네가 모욕하고 놀려댄다 해도 그로서는 할 말이 없을것 같았다. 그만큼 그는 공사장에서 받은 충격이 컸던것이다.

《내 오늘은 공사장구경이나 하자고 나왔댔는데 그냥 돌아가면 사람이 아니지요. 부탁인데 삽이든 질통이든 하나 얻어주시겠습니까?》

리찬의 얼굴에서는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지고 대신 심각하고 엄한 표정이 떠올랐다.

《얻어드릴수 있지만 그만두겠습니다.》

《그건…》

정근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찬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오늘 일하러 나온게 아니지요. 처음 나와보고 가책이 큰 모양인데 체면이나 세우고 량심에 위안이나 얻자고 삽질이나 몇번 하고 떠난다면 그건 이 공사를 더 욕되게 하는것으로 되지요. 난 당신이 이 공사장을 보다 정중성있게 대했으면 해서 하는 소립니다. 하여튼 자기의 정신을 목욕재계하고 오직 애국심 하나만을 간직하고 나오십시오. 그때 나랑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힘껏 일해봅시다.》

정근식은 아팠다. 마음의 고통은 육체적고통으로 번져져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시인선생의 말이 그른데는 없었다.

그는 수영이를 찾으려던 생각마저 단념하고 머리를 수굿한채 공사장을 떠났다. 한걸음한걸음 무겁게 옮기는 그의 모습에서 유람객의 자세는 찾아볼수 없었다.




46

 

수영은 땔나무가 떨어져서 낫을 들고 봉수산으로 올라갔다. 음료수를 끓이는 땔나무는 지휘부에서 보장하군 했는데 어제 하루종일 가랑비가 오는 바람에 미처 마른 나무를 준비해놓지 못했던것이다. 수영은 난생처음 낫을 들고 산에 오르는 자신의 정신적변화가 스스로도 장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적극적인 자세로 생활을 대해본적이 있었던가.

언젠가 어머니는 수영에게 이런 말을 해준적이 있었다.

《넌 성질이 불과 같애. 하지만 우등불처럼 활활 타지도 못하구 밝게 빛나지도 못해. 화로불과 비슷하지만 화로없는 집이 없구 겨울이면 화로불신세를 안 지는 사람이 없지. 그러니 평생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게 네 팔자다.》

그때 수영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불이 될바에야 어두운 광야를 밝히는 우등불이 되거나 높은 산정의 봉화가 될것이지 하필이면 빛도 없는 숯불에 비유할건 뭐람… 그러나 생활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수영은 사람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주는 화로가 마음에 들었다. 인간세상에 열을 보태주는 존재로 산다는게 얼마나 보람있는 삶인가.

결국 수영은 어머니가 말해주던 그 팔자대로 사는셈이였다. 지금껏 차디찬 세월탓에 식어버렸던 그 착한 천성이 해방된 오늘에야 비로소 이글이글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것은 아닌지…

수영은 서재골로 넘어가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며 마른 나무가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숲의 정서에 잠기고말았다. 어제 비가 내린 뒤여서인지 한여름의 숲은 푸르고 청신한 기운을 한껏 풍기고있었다. 이름모를 갖가지 풀들이 땅을 덮었고 소나무와 참나무, 물오동나무들이 푸른 잎으로 하늘을 가리웠는데 높고낮은 잡관목들이 하늘땅의 공간을 채우고있어 혼성림은 온통 푸른빛이였다. 수영은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있었는데 푸른 숲의 세계에서는 이색적인 존재였다. 도시에서만 살아온탓에 대자연에 습관되지 못한 처녀는 숲의 청신한 공기, 숲의 색갈, 숲의 음향 그 모든것이 다 신비하게 생각되면서 자기가 이 자연의 조화를 파괴하는것 같아 숨쉬고 말하고 움직이는것조차 서슴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이름모를 꽃잎속에서 꿀벌이 붕붕거리고 까딱하지 않는 나무잎우에 벌레가 기여다니는것을 처녀는 신기한듯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요한 정적속에 홀로 서있는 자기를 의식하는 순간 갑자기 무섬증이 엄습해왔다. 수영은 그 정적속에서 벗어나보려는듯 한발을 내디뎠다. 발밑에서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가 별스레 크게 들려왔다. 마른 나무를 하자면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겠는데 두려운 생각이 앞서서 발을 더 옮길수 없었다. 수영은 할수없이 주변에서 삭정이라도 주어모았다. 한참 신고를 해서야 겨우 물 한가마 끓일만 한 땔감을 모을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였다. 래일은 지휘부에서 나무를 보장해줄것이다. 수영은 나무단을 옆에 끼고 산을 내렸다.

현장사무실모퉁이를 돌아서던 처녀는 현장에서 들어오던 설계가청년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못 본척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말을 건넬수도 없고… 참으로 따분한 순간이였다.

《의사선생이 땔나무까지 하는가요?》

운상이가 다가서며 묻는 말이였다.

《아니예요, 저…》

수영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 자리에 서성거렸다. 운상은 무슨 말인가 더 할듯말듯 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처녀는 저도 모르게 호- 한숨을 내쉬였다. 그 사람앞에서 왜 그렇게 쩔쩔맸는지 자기도 알수 없었다.

어쨌든 그 사람과 마주서거나 그 사람 생각을 하기만 해도 마음의 안정이 헝클어지군 하는데 그 리유를 설명할수 없는게 안타까울뿐이였다.

운상이 역시 처녀와 싱겁게 헤여지고는 혼자서 속을 썩이고있었다. 조용한 환경에서 단둘이 마주섰는데 그렇게도 할 말이 없었던가.

그는 얼마전에 완성한 남교수문설계를 찾아쥐고 다시 현장으로 나가면서 자신을 끝없이 원망했다.

그동안 수문설계에 다쫓기우면서도 그는 수영에 대해 잊어본적이 없었다. 리주연부위원장한테서 수영이가 자기를 보증해나섰다는 말을 듣던 그 순간에 운상은 인생의 중대사를 마음속으로 결정지었던것이다.

지내볼수록 처녀는 얼굴도 마음씨도 한결같았다. 롱담을 즐기는 동원부책임자의 말을 빌면 수영이가 처녀로서는 특제품이라나…

현장치료라는 말조차 몰랐던 사람들에게 처녀의사는 아름답고 귀중한 존재로 떠받들리울수밖에 없었다.

수영이가 남들의 칭찬을 받을 때마다 운상은 마치 자기가 칭찬받은것만큼이나 기뻤다.

언제건 기회가 생기면 자기의 가슴을 헤치고 사랑에 불타는 심장을 꺼내보이리라 열백번 벼르었는데 정작 마주서서는 아까운 기회를 놓쳐버린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 번지기 어려운 단어였던가.

(내가 바보야, 사내라는게…)

운상은 수문기초타입이 한창인 작업장에서 삽 한가락을 얻어들었다. 기운이 진할 때까지 일하느라면 답답한 가슴이 좀 열릴것 같았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가만히 서있는 사람의 몸에서도 땀을 줄줄 짜냈다. 더위는 피부를 뚫고 들어와 심장까지 익히는듯싶었다. 벌써 삽질 몇번에 눈을 뜰수 없으리만큼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한판을 밀고나면 어느새 또 모래와 자갈이 몰탈판우에 듬뿍 올라오고 뒤따라 세멘트가 쏟아지며 먼지를 일으킨다.

《또 해보세.》

맨앞에 선 사람이 소리치며 썩- 하고 삽날로 몰탈판을 민다. 그러면 마주선 사람이 썩- 하고 사선으로 삽날을 밀고 뒤따라 썩썩- 썩썩- 순식간에 혼합이 끝난다.

운상은 삽 쥔 손과 뒤로 벋디딘 다리에 온몸의 체중까지 싣고 세괃게 삽질을 해댔다. 어느새 골을 째고 물을 붓는다. 앞사람은 삽날로 몰탈판을 탕! 치고 혼합물에 삽날을 박았다. 그것을 신호로 삽날들이 차례로 엇갈리며 몰탈을 혼합한다.

운상은 삽날을 몰탈무지에 박고는 뚝심으로 밀어내군 했다. 마주서서 일하던 로동자가 운상에게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설계가선생, 삽날을 몰탈판에 댔다가 앞사람의 삽날이 나가자마자 제꺽 뒤따르라구요.》

그래도 운상은 들은척도 않고 미련스레 삽을 혼합물에 박군 했다. 온몸의 기력을 깡그리 뽑아버리자는것이 그의 목적이였다. 함께 일하던 리주연이 그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휴식시간에 제곁으로 불렀다.

《얼굴색이 좋지 않구만. 무슨 일이 있은게 아니요?》

《예, 있습니다.》

제 생각에 옴해있던 운상은 기다리기라도 했던것처럼 제꺽 대답했다. 그는 침착한 눈빛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리주연에게 매운 연기처럼 가슴속에 꽉 차있는 안타까움을 말끔히 털어놓고싶었다.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던것이다.

《부위원장동지두 련애를 해봤습니까?》

엉뚱한 질문에 리주연은 한동안 아연해졌다가 운상의 고민거리가 무엇인가를 짐작했다. 그는 우정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세상에 련애 못해본 남자도 있나? 별걸 다 묻누만.》

운상은 싸움이라도 걸듯 목소리를 높였다.

《별거라구요? 이건 저한테 운명적인거란 말입니다.》

《그 체네의사 말이지?》

《예.》

《내 그렇게 될줄 알았소. 그 처녀라면 나도 찬성이요. 첫사랑인가?》

《예.》

《흔히 사랑의 감정은 가변적인거라구 하던데…》

《부위원장동진 절 떠보시는군요. 난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 처녀는 훌륭한 처녀입니다. 물론 난 그 동무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처녀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난 내 가슴에 처음으로 찾아든 이 감정을 가장 소중한것으로 여기고싶습니다. 그를 사랑하고싶고 그의 사랑을 받고싶고 그 과정에 서로가 더 훌륭해지고싶고… 사람이란 그렇게 완성되는게 아니겠습니까?》

리주연은 새삼스런 눈으로 운상을 바라보았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더니… 허허…》

리주연의 마음은 절로 흥그러워졌다. 좋은 일이다. 우리 세상은 사랑으로 살아야 할 세상이니 미래의 터전을 닦는 이 공사장에서 사랑이 맺어지는것은 응당한게 아니랴. 그의 머리속에는 장혁수와 리정혜의 모습도 떠올랐다. 하긴 이 공사장에서 사랑을 꽃피우는 젊은이들이 어찌 한들이겠는가.

《고백했나?》

《못했습니다. 내 감정을 멋있게 표현하고싶은데 어디 말이 나가야지요.》

리주연은 빙그레 웃으며 경험자답게 조언을 주었다.

《운상동무, 표현방식은 그닥 중요치 않소. 그 마음이 진실하면 되는거요. 사랑의 언어는 하도 많아서 그걸 가려듣는건 귀가 아니라 마음이거던. 어쨌든 좋은 일이요. 내 장군님께 동무의 고민거리를 보고드리겠소.》

《뭐라구요? 부위원장동지 정신있습니까?》

그래도 리주연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보고드려야 하오. 장군님께서 기뻐하실거요. 이건 동무의 일신상에 대한 문제이기 전에 이 공사장의 풍경이란 말이요. 해방된 조국땅에서 행복을 꾸려가는 인민의 모습이란 말이요. 내 말뜻을 알겠소?》

그래도 운상은 동의할수 없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장군님께 그런 하찮은 일까지 말씀드릴수 있단 말인가. 리주연은 운상의 마음이 리해되는듯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동무나 나나 아직은 우리 장군님에 대해 모르는것이 너무 많소. 장군님께서 우리들 매 사람의 행복을 두고 얼마나 마음쓰시는지 모르고 산단 말이요.》

그는 운상에게 장군님과 김정숙어머님께서 시공책임자 장혁수의 생활을 걱정하고계시는데 대해 자상히 말해주고나서 제 이야기를 덧붙였다.

《난 해방전에 결혼식을 할 때 기쁨보다도 서글픔이 더 컸댔소. 봉건을 타파한다면서 명천공회당에서 신식으로 결혼식을 했는데 경찰이 두놈씩이나 참가해서 불온한 말을 하지 않는가 감시하는통에 축사도 제대로 못했지. 그날 난 나라없는 백성으로서 망국민의 가정이 또 하나 생겨난다는게 서글펐고 망국노의 후세가 태여나게 된다는 절통함으로 해서 눈물이 났댔소. 하지만 동무들에겐 제 나라 땅에서 마음껏 행복을 누릴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소. 장군님께서 동무들의 행복을 보살펴주시고 인민정권이 동무들의 행복을 담보해줄거요. 그러니 떳떳하게 청혼을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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