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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새나라>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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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446회 작성일 15-10-2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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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편 치료실에 혼자 남은 처녀의사 리수영은 분해서 견딜수 없었다. 모욕당한 자존심이 독을 쓰는지 머리가 뗑하고 귀속이 웅웅거렸다.

(내가 직업을 잘못 택했다고? 이제라도 의사를 그만두라고?… 어쩌면…)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청년의 말을 되새겨볼수록 자기가 잘못했다는것을 인정하게 되는것이였다. 환자가 있다는데도 집이 멀다고 직일의사를 핑게대고 가지 않았으니 의사의 자격이 없다고 한 그 사람의 말이 옳은셈이다. 더 큰 잘못은 방금전까지 자기가 분해서 울었다는것이다. 뭘 잘했다고 울었는가?

(내가 진실앞에서 폭로되는걸 두려워하고 그걸 변명하려고 행악질까지 하는 그런 천박한 녀자였는가?)

생각해볼수록 그 청년을 미련쟁이라느니, 무례하다느니 하고 욕할만 한 자격이 자기에게는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수영에게는 그 청년이 미웠다. 그가 운상을 미워하는것은 자기를 모욕했기때문이 아니라 그 청년이 자기의 약점을 알고있기때문이였다. 사람은 자기의 약점이 상대방에게 폭로되였을 때 그를 두려워하고 마주서는것을 꺼려하며 어쩔수없이 미워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것이다. 수영이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다 자기를 인물곱고 마음씨고운 처녀로 알고있는데 유독 그 사람만이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있던 미완성측면을 알아보았던것이다.

텅 빈 방안에 앉아 제 생각에 잠겨있던 수영은 벌떡 일어섰다. 왕진가방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것들을 더 집어넣었다. 이제라도 토성랑에 가보지 않고는 마음이 편할것 같지 못했던것이다. 자기자신을 위해서라도 수영은 왕진을 가야 했다. 사실은 오늘 저녁에 신창리 영남이네 집에 갈 계획이였다. 지난 겨울에 일곱살나는 영남이가 급성페염으로 입원했는데 수영이가 맡아 치료해주었다. 그때부터 그 집에서는 수영이를 은인처럼 여기고있었다. 오늘이 영남이 생일이라면서 그 애 어머니가 우정 찾아와 저녁에 꼭 들리라고 신신당부했던것이다. 작년 11월에 서울에서 들어와 외삼촌집에 얹혀사는 수영에게는 여기 평양이 생소하였고 따라서 자기의 외로움을 덜어줄수 있는 그런 생활이 몹시도 소중하였던것이다.

수영은 아쉬운 마음으로 신창리를 지나 신양리에서 경의본선철길을 따라가다가 서성교근방에서 큰길에 떨어졌다. 해는 이미 지평선을 넘어가고있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아래토성랑이 어디인가고 물으니 수영의 왕진가방을 알아보고는 서성리변전소를 지나 얼마쯤 가다가 오른쪽소로길로 꺾어들라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토성랑주변에 이르니 퀴퀴한 냄새에 절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숨쉬기가 괴로와졌다. 수영은 토성랑에 한번도 와보지 못했었다. 그저 먼발치에서 지나가며 평양에도 서울의 한강변처럼 빈민촌이 있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뿐이였다.

한참 더 가서야 오성재가 말하던 큼직한 오물적치장이 나타났다. 시내의 오물을 가져다버리는 이런 불결한 곳에서 사람이 산다는게 놀라왔다.

꾀죄죄한 람루를 걸친 서너명의 아이들이 쓰레기를 뒤지다가 멋쟁이아지미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얘들아, 좀 물어보자. 오성재아저씨네 집을 아니?》

막대기로 쓰레기를 뒤지던 애들중에서 한 아이가 나섰다.

《내가 알아요.》

《어느 집이냐?》

《나하구 가자요.》

그 애가 앞장서느라고 자기옆을 지날 때 수영은 물씬 풍겨오는 악취에 그만 숨이 꺽 막히는듯 했다.

《이 집이예요.》

아이는 거적을 드리운 움막을 가리켜보이고 오던 길로 돌아섰다.

수영은 주인을 찾았다.

《계십니까?》

거적문이 들춰지며 오성재가 반색을 했다.

《아니? 의사선생님이?…》

《환자를 보러 왔어요.》

《정말 고맙수다. 좌우간 들어오시우.》

수영은 움막안으로 들어갔다. 거적문을 닫는 순간 가물거리던 등잔불이 바람에 탁 꺼졌다. 움막안은 굴속처럼 캄캄해졌다.

《원, 이런…》

잠시후 성냥불에 움막안이 확 밝아지는가싶더니 다시 어두워지면서 좁쌀알같은 불씨가 등잔심지에 달라붙었다.

《여기루 오시우.》

수영은 어둠에 익숙치 않아서 오성재의 안내를 받아가며 신을 벗고 방안에 들어갔다. 방안이라야 부엌바닥보다 한뽐정도 높이고 판자를 깐 다음 그우에 가마니짝을 펴놓은 맨땅이였다. 구들도 놓지 않은데서 어떻게 겨울을 날수 있는지 수영이로서는 리해되지 않았다. 수영은 청진기를 꺼내들고 환자를 진찰했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높았다.

《뭘 잡수셨어요.》

환자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어요. 목이 마르길래 랭수를 그냥 먹었더니… 아이쿠.》

오성재가 한숨을 쉬며 보태였다.

《여기 물은 끓여먹어야 하는건데 아마 그때문에…》

《여긴 수도가 없는가요?》

수영은 아차-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토성랑에 무슨 수도가 있겠는가. 모든걸 미루어보아 급성소대장염같았다.

《병원에 입원해서 며칠 치료를 받아야겠어요.》

그런데 오성재가 도리질을 했다.

《그럴 형편이 못되우다. 사실은 오늘 래일 여기서 뜨자던 참이였수다.》

《어데로 이사를 갑니까?》

《딱히 정한데는 없고 그저 아무데로든 떠나야 할 사정이 생겨서… 난 여기서 살수 없는 놈이웨다.》

《왜요?》

《죄를 졌지요.》

오성재는 더 말하고싶지 않은지 고개를 돌렸다. 날이 갈수록 오성재는 자기가 정말 사람으로서 못할짓을 했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고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농촌위원회에 찾아가니 증서는 이미 나라에 바쳤다는것이였다. 자기는 영영 땅을 잃은것이였다. 땅이 없이야 여기서 어떻게 살랴. 평생 배운 재간이 농사짓는것밖에 없으니 이제는 아무데 가서 초막이라도 지어놓고 화전을 일쿠든가 아니면 막로동판을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운명이나 성격은 제가 나서자란 산천을 닮는다더니 어쩌면 자기 팔자는 신통히도 돼지밸처럼 우불구불한 보통강을 닮아서 이다지도 모질게 갈지자를 그리는것이냐…

오성재의 사정을 알리 없는 수영에게는 그의 말이 리해되지 않았다. 이런데서조차 살수 없을 정도로 죄를 지었다는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가? 이 집에서 이사를 가는건 상관할바 아니지만 그럼 환자는 어떻게 하는가?

한동안 속생각을 굴리던 처녀는 주사도 놓고 약도 주고나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하여튼 제가 다시 오겠어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영은 한가지 방도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외삼촌의 방조를 받는것이였다.

그가 중성리에 사는 외삼촌네 집대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는 밤이 퍽 깊어서였다.

《에그, 왜 이제야 오니? 처녀가 밤중에 다니다 어쩔려구.》

외삼촌어머니가 걱정스레 하는 말이였다.

《왕진갔댔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네가 온 다음에 먹자구 기다리구있단다.》

친자식이 없는 외삼촌내외는 수영을 친딸처럼 여기고있었다.

《어쩌나… 나 목욕부터 해야겠는데…》

《밥부터 먹어라, 그새 목욕물을 덥힐테니.》

《아니예요. 찬물도 일없어요.》

수영은 외삼촌어머니의 의아해하는 눈길을 등뒤에 느끼며 얼른 제 방으로 들어갔다. 토성랑냄새가 옷에 슴배인것 같아 의농을 열고 속옷까지 몽땅 갈아입었다.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한아름 안고 세면장에 들어가 으쓸한 랭기를 참고 찬물을 쫙쫙 끼얹었다. 《진달래》표비누로 머리를 감고 피부가 빨개지도록 온몸을 박박 밀었다.

수영은 빨래까지 다 하고서야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세면장에서 나왔다.

향긋한 비누냄새를 풍기며 안방에 들어가니 외삼촌 정근식은 미닫이를 열어놓은 웃방에 앉아 병풍을 감상하고있었다.

《어마나? 웬 병풍이예요?》

《네 보기엔 어떻냐? 오늘 구해온거다.》

골동품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있는 외삼촌은 흡족한 표정으로 수영의 평가를 기다렸다. 높이가 다섯자쯤 돼보이는 십장생도를 수놓은 병풍은 수영이 보기에도 품위가 있어보였다.

《외삼촌방에 잘 어울려요.》

외삼촌은 그 수병풍이 남쪽으로 흘러나가려는것을 부르는대로 값을 주고 겨우 손에 넣었다고 설명을 달았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 최초의 색실염색법과 병풍에 쓰인 비단의 질에 대하여, 해와 산과 거부기를 비롯해서 십장생에 들어가는 그림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수영에게는 외삼촌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토성랑의 비참한 전경이 자주 얼른거렸다. 쓰레기를 뒤지던 소년의 몸에서 풍기던 악취가 아직도 떠도는듯싶었다.

수영은 저도모르게 방안을 둘러보며 오성재의 움막과 대비해보았다. 창문턱에 놓여있는 큼직한 어항에서는 금붕어들이 한가로이 떠다니고 벽에는 단원의 족자가 듬직하게 걸려있었다.

이 방에서 제일 눈길을 끄는것은 책상우에 올라있는 지구의였다. 크기가 축구공만 한 지구의는 온통 새까맣게 먹칠을 해놓았었다. 이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석탄덩이같은 지구의를 보며 사연을 알고싶어했지만 그 리유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서성고무공장을 경영하는 외삼촌은 원래부터 내성적인 선비형인데 42년도 물란리때 공장이 피해를 입은 후로는 사람들과의 교제도 싫어하면서 될수록 바깥세계와 담을 쌓고살았다. 세상살이에 시들해져서인지 공장을 원상복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하루 수백컬레의 지하족을 생산하던 공장이 지금은 겨우 수십컬레밖에 만들지 못하고있는데 그런데도 외삼촌은 전무에게 공장을 맡겨놓고 자기는 며칠에 한번씩 얼굴을 내미는 정도였다.

외삼촌의 병풍강의는 국이 식는다고 삼촌어머니가 두번씩이나 지청구를 해서야 겨우 끝났다. 수영이도 생각에서 깨여나 아래방으로 내려왔다.

외삼촌은 자개박이밥상에 따로 상을 차려주고 수영은 외삼촌어머니와 함께 륙모소반에 마주앉았다. 그런데 토성랑생각이 자꾸 나서 밥을 제대로 먹을수 없었다.

그는 외삼촌이 밥상을 물릴 때까지 숟가락을 들고있다가 입안에서 맴돌던 말을 꺼냈다.

《외삼촌, 나 청이 하나 있어요.》

《뭐냐?》

《사랑채가 비였지요? 당분간 좀 쓰면 안될가요?》

수영은 외삼촌내외에게 루루이 설명했다. 토싱랑에 왕진갔던 일이며 그 집의 딱한 사정이며…

《제가 맡은 환자인데 외면할수가 없어서 그래요.》

정근식의 내외는 조카딸의 착한 마음씨앞에서 다른 소리를 할수 없었다.

《마음씨는 꼭 제 에미를 닮았구나. 네 좋도록 해라. 그러나 내 한마디만 하자. 옛날부터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했다. 그런 동정으로 제 마음은 위안할수 있겠지만 세상을 구제할수는 없는거다. 지금껏 살아봤으니 잘 알겠지만 세상만사를 착하고 뜨겁게만 대했댔자 손해밖에 볼게 없어.》

제 방으로 건너온 수영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외삼촌의 말을 음미해보았다. 지난날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보면 뜨거워지지 말라는 외삼촌의 말도 틀리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 말을 따른다면 자기는 토성랑주민을 외면해야 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수영은 어려서부터 착한 성정을 지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해왔었다. 녀학교시절에 읽은 안데르쎈의 동화들은 의식주에 대한 걱정을 모르고 곱게 자란 수영에게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련민을 꽉 채워주었었다.

그런데 그가 살던 남쪽에서의 생활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어느해던가. 서울대학병원에 다닐 때 한번은 치료비를 물지 못하는 환자에게 자기의 월급을 보태준적이 있었다. 그때 원장은 차거운 시선으로 수영을 쏘아보며 쓰겁게 뇌까렸다.

《선생은 자선단체에서 일할걸 그랬소.》

《저는…》

《선생의 그 알량한 인도주의는 나를 모욕했고 또한 동료의사들을 모욕했고 적자생존을 주장한 다윈까지 모욕했단 말이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자고 의학을 배웠건만 현실은 그의 천진한 공상을 비웃으면서 돈많으면 살만 하고 돈없으면 지옥보다 못한것이 인간세상이라는것을 날마다 증명해주군 하였다.

수영은 세상의 랭정한 존재방식에 순응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사의한 생활의 순리라고 인정하였다. 그런데 오늘 그는 한 청년에게서 심장이 뜨겁지 못하다고 모욕을 당했다. 서울에서는 불쌍한 사람을 동정했다고 원장에게 모욕을 당했는데… 도대체 이 판이한 대조를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과연 여기 북조선은 어떤 세상인가? 여기가 동화속의 하늘나라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아직은 뭐가 뭔지 알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토성랑주민은 돌봐주어야 할것 같았다. 그래야 그 청년앞에 인간으로서, 의사로서 떳떳해질수 있었다.



8

 

수영이가 제 방으로 건너간 뒤 정근식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조카딸에게 객적은 소리를 한것 같아 마음이 무죽했던것이다.

(흠, 착하고 뜨겁게 살지 말라고?… 이런 로망이라구야.)

이제 겨우 인생초엽에 들어선 마음씨고운 조카딸에게 선하고 바르게 살라는 말은 못할망정 세상은 어둡다는따위의 설교로 생활에 대한 공포와 허무를 강조했은즉 이게 로망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십장생도에 그려진 사슴마저도 그렇게밖에 말할수 없었냐는듯 측은한 눈매로 정근식을 질책하고있었다.

(그래, 잘못했다. 나도 한때는 착하게 살고싶었지. 그런데 세상은 너처럼 순하지 못했어. 그래서 나도 이렇게 이지러졌구나.)

그는 순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십장생도의 사슴과 눈을 맞추고 지나온 자취를 얼핏얼핏 더듬어보았다.

일찌기 서유럽의 문명을 숭상해온 정근식의 부친은 거치장스러운 갓이며 두루마기를 개화의 돌개바람에 날려버리고 평양장안에서 제일먼저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다니던 선각자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아버지는 구한국시대에 벌써 자그마한 고무공장을 차려놓고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외아들 근식을 공부시켰다. 아버지의 소원은 사각모까지 아들의 머리에 씌워주는것이였다. 중학시절에도 수재로 이름을 날리던 근식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일본에 가서 대학공부까지 하게 되였고 당시 청년들속에 류행병처럼 퍼지던 맑스주의서적을 읽어보면서 세상의 모순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맑스의 학설이 옳다는것만은 인정하였다.

맑스는 자기의 학설에서 무산자가 잃을것은 철쇄요, 얻을것은 전세계라고 피압박무산대중을 계급투쟁의 마당으로 부르면서 수탈자를 수탈하라고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해주었다. 지금도 정근식은 자기자신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는듯 한 《공산당선언》의 한구절을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오늘날 부르죠아지에 대립하고있는 모든 계급중에서 오직 프로레타리아트만이 참다운 혁명적인 계급이다. 기타의 모든 계급은 대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몰락하며 멸망한다. 그런데 프로레타리아트는 대산업자체의 산물인것이다. 제 중간층, 즉 소상인, 소산업가, 수공업자 및 농민 이들은 모두 중간층으로서 자기의 존재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부르죠아지와 투쟁하는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 못되고 보수적이다. 아니, 그들은 반동적이기조차 하다.》

만약 맑스의 이 론리대로 세상의 구조가 변한다면 중소기업가인 아버지나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플라톤은 소유는 절도품이라고 했지만 근식은 아버지의 정직성을 믿었고 따라서 아버지의 고무공장은 수탈의 대상으로 될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마음이 착했던 그는 같은 민족끼리 피터지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계급투쟁의 리론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가문의 재산을 남에게 수탈당하기도 싫었다.

어느날 그는 대학안에 조직되였던 좌익독서회에서 혁명의 동력과 대상에 대한 문제로 격렬한 론쟁을 벌린적이 있었다.

독서회성원들은 계급투쟁에 관한 맑스의 학설이야말로 모든 피압박민중에게 정신적노예상태로부터의 출로를 밝힌 위대한 혁명리론이라고 격찬했다.

한참동안 말없이 듣기만 하던 정근식은 자신없는 소리로 자기 견해를 꺼내놓았다.

《그런데 말이요, 맑스나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던 시기 다시말하면 로동계급이 혁명의 동력으로 성장하고있던 시기에 활동했기때문에 잉여가치학설을 발견했고 계급투쟁의 원리를 내놓을수 있었소. 그러나 우리 나라는 봉건통치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한채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예속되였소. 이런 력사적조건에서 조선혁명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속에서 일어날 혁명이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거요.》

《그럼 조선혁명은 프로레타리아혁명이 아니라는거요?》

정근식이보다 한학년 선배가 날카롭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 어쨌든 우리 아버지도 왜놈을 미워하는 마음은 남못지 않단 말이요. 그런데 만약 조선에서도 저 유럽에서처럼 계급혁명이 일어난다면 우리 집은 혁명의 동력이 아니라 대상으로서 타도돼야 하고 나도 자기 집안을 제손으로 때려부셔야 한다는 결론에 떨어진단 말이요.》

《야!》

선배는 정근식을 쏘아보며 낭떠러지에 몰아세웠다.

《자기 집안이냐, 계급혁명이냐? 립장을 명백히 밝혀라!》

다른 학우들도 이구동성으로 투항주의라느니, 혁명성이 부족하다느니 하면서 정근식을 몰아댔다.

정근식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말았다.

맑스의 리론도 칼날처럼 예리한데 그 리론을 대하는 자세까지 날카로와서야 어떻게 그 학설에 정을 품겠는가. 이제 겨우 좌익서적을 몇권 읽어보았을뿐인데 설사 진리탐구에서 오유를 범한다 해도 리해해주고 용납해야 할게 아닌가.

(하긴 계급혁명이니까…)

당시 그가 리해하고있는 혁명은 인간들이 욕심스레 움켜쥐고있는 온갖 허접쓰레기들을 휘말아올려 허공중에 흩날려버리는 돌개바람과 같은것이였다. 따라서 혁명은 무자비할수밖에 없고 그앞에서는 어떤 포근함이나 자비를 기대할수도 없었다. 맑스의 계급혁명리론에 대한 몰리해로부터 결국 그는 《자본론》을 성서와 바꾸어쥐였다. 있는자와 없는자의 대립을 주장하는 맑스의 학술보다는 사람들에게 화목과 단합을 호소하는 예수의 교리가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아버지가 급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근식은 공부를 걷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고무공장을 경영하면서 그는 일요일례배때면 장로교회의 장대재교회당에 가군 하였다. 예수는 박애주의사상으로 인류를 교화하고 세계적인 통일을 이룩하려고 했다. 예수가 일찌기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누구를 숭배하고 누구에게 자기를 의탁하며 왕벌의 주위에 뭉친 벌떼처럼 어떤 방법으로 세계적인 통일을 이룩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했을수도 있지 않았을가. 선한것에 의한 세계적인 통일, 결코 재부나 권력에 의한 피라미드형의 종적인 통합이 아니라 민족과 민족, 개인과 개인호상간의 평등과 균형에 의한 횡적인 통일에 대한 요구는 계급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전인류적인 념원이였다. 케자르나 나뽈레옹, 칭기스한과 같은 정복자들이 말발굽소리 높이 울리며 세상을 돌아친것도 결국은 자기나름대로 전세계를 통일할 야망에 의한것이였다.

허나 그들이 실패한것은 세계를 통일하겠다고 하면서 칼을 추켜들었기때문이였다. 칼은 물체를 자르는데 필요한 도구이다. 파괴와 분렬에 필요한 도구를 통일의 유일한 방도로 리용했다는것이 모순이였고 실패의 근본원인이였으며 그들이 위인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 무엇이든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점착제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인류는 칼과 칼이 부딪치고 대포소리 울리는 력사의 동란속에서도 그 점착제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렇게 찾아낸것이 하느님이였다. 하느님이야말로 전인류를 형제처럼 사랑으로 통일시킬수 있는 점착제이며 꿀벌집단의 왕벌과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근식은 있는자건 없는자건 전인류가 하느님이 만든 점착제인 박애주의에 의해 화목과 단합을 이룩할수 있다고 믿었다. 《노아의 방주》에 양과 승냥이가 함께 타고있었다는것만 봐도 그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것이라고 믿고싶었던것이다.

정근식은 지구의를 하나 구해다 책상우에 놓고 빙글빙글 돌려보며 천진한 공상에 잠기기를 좋아했다.

이 지구우에 새끼양들이 승냥이곁에서 재롱을 피우며 마음놓고 뛰놀수 있는 세상을 건설할수는 없을가? 조선사람은 예로부터 선을 사랑하는 민족이니 인류전체가 참되고 영원한 평화를 누릴수 있는 생활원리와 생활방식을 궁리해내여 에덴동산과 같은 락원을 이 땅우에 제일먼저 실현함으로써 세상의 본보기가 될수 없을가.

그 유토피아적인 리상을 그의 머리속에서 깨끗이 쓸어버린것은 1942년의 대홍수때였다. 홍수피해로 공장이 파괴되고 그 후과로 군수품조달이 미달되자 정근식은 《전시법》에 걸려 류치장신세를 지게 되였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막대한 벌금을 물고서야 류치장에서 나올수 있었다. 홍수에 심하게 파괴된 자기 공장의 한가운데 주저앉아 그는 음산한 구름이 떠도는 하늘을 향해 목터지게 웨쳤다.

《아, 하느님이시여! 당신이 창조한 우주만물은 왜 이다지도 악착하나이까? 자연도 인간도 정녕 당신의 교리대로 선하게 개조할수 없나이까?》

이것이 그가 세상에 던진 마지막물음이였다.

정근식은 왜놈들에게 맞은 어혈로 집에 누워있으면서도 성경책을 펴들고 왜놈들을 용서해야 할 《진리》의 문장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글줄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기를 모욕하던 놈들의 가증스러운 몰골과 고문장의 스산한 광경만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책장을 번져도 자비와 용서의 감정이 생기는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억울함을 속시원히 복수하겠는가 하는 생각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이 세상의 본질은 무엇이고 나라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세상의 구조가 착하게 돼있지 못하다면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산다는것은 불가능하다는게 아닌가.

그의 뇌리에는 홀연 신앙은 거짓이라는것과 인간은 자기가 당한 모욕을 잊어버리거나 상대를 용서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올랐다. 그는 성경책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부엌아궁에 던져버리고말았다.

그때부터 그는 교회당에 발길을 끊었다. 최장로가 몇번이나 그를 찾아와 설복도 하고 유다가 되려는가고 위협도 해보았으나 그의 마음을 돌려세우지는 못했다. 나중엔 조만식이까지 정근식에게 이단자가 되지 말라고 막아나섰다.

《그쯤한 일로 하느님을 책망하면서 외람된 반역을 하면 더 큰 불행이 닥쳐올것이요. 우주는 나보다 먼저 나고 하느님은 나보다 더 아신다고 생각하시오. 그러면 노여움이 가라앉을것이요.》

정근식은 한껏 비양조로 웃고나서 조만식에게 물었다.

《장로님, 일본놈들은 예수보다 천황을 더 숭배합니다. 그런데도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하느님은 이번수해때 일구월심 자기를 믿고따르던 나에게는 불행을 주고 자기를 믿지 않는 일본놈들에게는 아무런 벌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건 분명 하느님이 나나 토성랑백성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왜 하느님을 사랑하겠습니까? 하느님은 원쑤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대라고 했는데 이번에 내가 그 꼴이 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은 덕분에 차례지는것이 모욕을 감수하는것뿐이라면 무슨 리득을 보자고 신앙에 충실하겠습니까?》

《사람이 제 리성이란것을 과신하면 교만이 오는 법이요. 일단 하느님을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야 할것이요. 그래야 이 땅에 천국이 펼쳐질것이요.》

《그만두시오. 하느님을 믿는다고 인간이 아름다워진다면 교인이 많은 나라는 이미전에 하느님의 섭리대로 완성되였어야 할게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은 점점 더 흉흉해지고 인간은 더 악해졌습니다. 결국 종교의 력사는 하느님이 지키라는 그 모든 계률을 그대로 실천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는걸 증명한것밖에 없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예수를 닮으라고 설교하는건 욕심많은 인간에 대한 엄청난 기대이지요.》

그날 정근식은 큼직한 붓으로 지구의에 먹칠을 했다. 그것은 무정한 자연과 사회에 대한 자기식의 복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을 징벌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먹을 갈면서 그는 타고르의 시를 다시 상기했다. 과연 조선이라는 등불이 다시 켜질 날이 있을가? 그 등불이 동방을 밝게 비쳐 혼돈과 암흑속에 묻힌 이 지구상에 자기의 존재를 빛내일 날이 있을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벼루우에 떨어져 먹물과 합쳐지군 했다. 정신적지탱점을 잃어버린 그에게는 인생에 대한 허무와 회의가 파도처럼 덮쳐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자기가 그토록 분노했던것도 우습게 느껴졌다. 문제는 이 세상에 에덴의 동산을 건설할수 없을가 하는 공상에 집착했던 자신의 욕망에 불행의 화근이 있었다. 만약 인생의 초엽에 이 세계가 악하고 헛된것이라는것, 인간의 일체 욕구나 욕망의 추구가 다 부질없는것이라는것을 깨달았더라면 일찌감치 금욕과 체념속에서 정신을 안정시킬수 있었을게 아닌가.

인간세상에서 당하는 불행과 고통이 다 숙명적인것으로서 어차피 거기에 순응할수밖에 없다는걸 미리 알았더라면 현실을 도피하여 그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지 않았는가.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사회를 외면할수 있는 사람, 사회관계를 내던질수 있는 사람만이 고귀한 사람으로 된다.》고 말한 모양이였다.

결국 한때는 자기가 몸과 마음을 다 태워서 식어가는 이 세상을 덥혀보려던 꿈도 없지 않았던 정근식이 대문에도 마음에도 빗장을 지르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기 시작한것이다.

그는 파괴된 공장을 다시 복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하루에 수백컬레의 신발을 만들어내던 공장의 생산규모는 대폭 작아지고말았다. 자식이 없는 정근식은 재물에도 별로 마음쓰지 않았던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해방이 되였다. 해방바람은 그의 마음에 지른 빗장을 덜컹덜컹 흔들며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꾸짖는듯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래동안 거짓된 세상에서 살아온 정근식으로서는 생의 허무로부터 생의 환희로 급상승하여 건국의 한마당에 뛰여들기가 수월치 않았다. 더구나 항간에서는 북조선이 쏘련의 가맹공화국으로 된다는 말이 나돌고 실지로 쏘련군대가 주둔해있는 눈앞의 현실은 개인기업가인 정근식의 마음을 편안치 않게 해주었던것이다.

과연 이 땅에는 어떤 세상이 건설될것인가?

이런 복잡한 심리적굴곡으로 하여 자기가 조카딸에게 무심히 던졌던 말 한마디가 뜻밖에도 그의 가슴에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것이였다.

다음날 아침 정근식의 집에서는 사랑채를 정리하느라 부산을 피웠다. 먼지도 털어내고 불도 살렸다. 정근식이도 망치를 들고 건들거리는 부엌문접철에 못을 박았고 마누라는 부엌세간을 몇가지 갈라내왔다. 몇해동안 비여있어서 곰팡내가 좀 나긴 했지만 토성랑움막에 비하면 궁전과 같은셈이였다.

그리하여 오성재는 뜻밖의 귀인을 만나 정근식의 사랑채로 이사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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