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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대박산마루> 제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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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637회 작성일 15-12-1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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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학계는 단군이 신화적인물인가 실재한 인물인가에 대해서 론의해왔고 신화적인물이라는데로 학술상의 연구를 몰아갔다. 원사인 석진자신이 학술토론과 론문, 국제적인 모임들에서 그것을 인정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김일성동지께서는 신화적존재로서의 단군이 아니라 조선민족의 실지조상으로서의 단군을 생각하고계신다.

단군은 과연 실재한 인물일가, 실재했다면 5천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 존재를 증명할수 있을가.

사회과학원의 자기 방으로 돌아온 김석진의 흥분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그의 흥분은 수령님께서 주신것이였다. 지난 시기 석진은 그이의 천재적인 예언에 탄복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의 성격은 본래 소심했다.

허나 그의 일생에는 타고난 소심성에 맞지 않는 뜻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이웃의 한 나라에서 출판된 《전세계사》책을 꾸겨쥔 김석진원사의 두손은 분격을 참지 못하여 우들우들 떨었다. 그 나라의 학계에서 《전세계사》를 내놓으면서 조선문제를 잘못 서술해놓았던것이다.

얼마나 성이 났던지 그의 온몸에서는 서리발이 풍기는듯 하였다. 숱많은 긴 눈섭이 움씰움씰하며 치를 떨고 굳게 다물린 입에서는 금방 우뢰가 터져나올상싶었다. 사람들은 감히 그의 곁으로 가지 못했다.

김석진은 세계앞에서 유구하고 자랑찬 조선민족의 력사가 외곡되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그는 즉시 조선력사를 외곡한 력사의 오도자들의 부당성을 신랄히 비판하는 글을 써서 당보에 실었다.

그 글이 대외관계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이르렀다. 당의 요직에 앉아있던 반당수정주의분자들이 《민족리기행위》라고 도적이나 잡은것처럼 야단을 쳤다.

김석진의 진짜모습이 이때 드러났다.

그는 주저없이 수령님께 서면보고를 올렸다.

《존경하는 김일성동지, 당보에 실린 저의 론문이 문제가 섰습니다.

저에게 가해지는 정치적압력이 두려워 이 보고를 올리는것은 아닙니다.

저의 론문이 과연 당을 욕되게 하였다면 저는 서슴없이 처벌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을 믿습니다.…》

아직은 평범한 학자에 불과했던 그때 수령님을 믿고 이러한 글을 올렸다는것은 아주 용감한 행동이였다. 그것은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이는 할수 없는 행동이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원사도 사회과학원 원장도 아닌 일개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평범한 학자에 불과했다. 그러한 처지에서 요직에 틀고 앉아있던 반당수정주의분자들에게 도전하여나섰다는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였다.

그는 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그 나라에 갔다가 《전세계사》문제를 가지고 우정 필자를 찾아가 단호한 립장을 표명하였다.

《난 당신이 〈전세계사〉에 서술한 조선의 남부지방에 대한 일본의 지배설을 비롯한 우리 나라 력사를 오도한 사실을 론의하자고 하오.》

《그거야 〈전세계사〉에서 내가 명백히 밝힌것인데 구태여 더 론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상대는 어딘가 불안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채 말끝을 얼버무렸다.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의 관점에 있는거요. 우리는 벌써 력사학자의 량심을 버리고 오도된 력사자료나 제창하는 당신의 일변도적인 립장에 대해 주의를 준바 있소.

당신도 공산당원이라면 우리의 당보를 보고 정신을 차렸어야지!》

김석진은 상대방의 도고한 주장을 호되게 후려갈겼다. 그 사람은 눈이 둥그래서 석진의 날카로운 눈길을 겁에 질려 바라보았다.

그는 궁지에서 헤여나려고 덤비면서 중언부언하였다.

《석진선생, 당신은 내가 일본인들의 견해를 따랐다고 불만스러워 하는것 같은데 그것도 그들대로의 정설이였던것만큼 어느 국한된 지역의 력사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력사서술에서는 능히 리용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언제 조선땅을 파보고 그런 망발을 하는거요? 우리 나라 력사는 우리가 아오. 일본력사라면 몰라도 조선력사를 서술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인들의 오도된 자료를 리용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김석진의 서리발같은 목소리는 방안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아 석진선생, 좀 자중해주십시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과학원이 잘못했습니다. 우리는 수정판을 내려고 합니다.》

그 나라 과학원의 간부가 이마의 진땀을 찍어내고있는 필자를 대신해서 사죄를 했다.

그러나 이때 필자가 김석진을 다시금 건드렸다.

《당신은 내가 인용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조선민족의 유구성, 단군때로부터 계산된 반만년의 력사를 가지고 부정하는것 같은데 그렇다면 한가지 묻겠소.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요, 어디?》

김석진이 침착성을 잃기 시작했다.

일본학자들과 《임나일본부설》을 가지고 론쟁할 때도 똑같은 항변에 부딪쳤던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일본 나라현지방의 야마또왕정이 기원 4세기부터 조선반도 남부 가야(《임나》라고도 한다.) 지방에 《미야께》라는 자기의 통치기관을 두고 주변의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하여 조선의 남부지방을 수백년간 통치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설이였다. 김석진은 경성제국대학 학생시절부터 이 학설에 반발해나섰다.

그때의 론적은 그의 대학교원이였던 일본학자 스에마쯔였다.

《선생은 일본의 야마또왕정이 벌써 4~5세기부터 조선의 남부지방을 지배하였다고 하는데 그때는 고조선의 옛땅을 다 차지한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위한 남방진출을 다그치고있었고 세 나라와 가야사람들이 고대에 이어 특히 일본의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고고학적유물에도 반영되여있고 고대 일본의 력사책인 〈일본서기〉나 〈고사기〉에도 외곡되게나마 반영되여있습니다. 뒤떨어진 일본이 자기를 도와준 선진문명국인 조선을 지배하였다는것은 리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삼척동자도 웃을노릇입니다.》

그후 김석진이 조선력사학계의 중진이 된 다음에 쓴 《초기조일관계연구》라는 론문에서 《임나일본부설》의 허황성을 적라라하게 발가놓았다.

이 론문은 일본땅을 뒤흔들어놓았다. 어느때엔가 조선어학술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일본에 간 김석진은 스에마쯔와 다시 맞붙었다.

그는 백발의 스승앞이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였다.

당신네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격페된 땅이다,

일본땅의 원주민들은 기원전 5~4세기전까지도 원시의 잠에서 깨여나지 못했다, 갈대만이 무성한 땅에서 겨우 짐승가죽으로 사타구니를 가리우고 무리를 지어 물고기를 잡아 굶주림을 달래는 원시무리생활을 하고있었다,

금속기나 논벼 같은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일본렬도에 고조선과 진국사람들이 건너가 농정문화와 금속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야요이문화를 보급하였고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사람들이 건너가 고분문화, 아스까문화를 보급했다,

일본은 바로 조선민족이 전달한 고대문명에 기초하여 중세, 근세로 발전할수 있었다, 그런데 단군이래 5천년력사국이 어찌 당신네 지배를 받았단 말인가.

그때 스에마쯔도 단군이란 신화적존재이며 단군조선이란 허황한것이라고 항변하였다.

지금 김석진의 눈앞에는 《전세계사》필자와 스에마쯔가 손을 잡고 나란히 서있고 그들의 목소리가 합쳐져 귀전을 때리고 온몸을 흔들어놓은듯 한 환각이 일어났다.

드디여 재털이가 필자를 향하여 날아갔다.

그의 성격이 뒤집혀졌던것이다. 그는 결코 소심하지만 않았다.

한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김석진이 제왕들에 대한 취급에서 취했던 모호한 태도로 하여 수령님의 추궁을 받은 직후였다.

사회과학부문 학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안건은 사회과학부문에서 당의 지도원칙을 구현하는 과정에 나타나고있는 편향들을 바로잡는것이였다. 회의는 련 사흘째나 계속되였다. 회의 마지막날에 김일성동지께서 참석하시였다. 회의를 집행하던 반당수정주의분자가 김석진이를 무대에 올려세웠다. 그는 제왕문제에서 소심하게 행동한 사실을 걸고들었다.

사상적변질, 학문의 상아탑속에 사는 현실도피분자… 별의별 요란한 감투들이 김석진의 머리우에 씌워졌다. 당보에 실린 그의 론문을 걸고들었다가 타격을 받은 일을 잊지 않고 이번 회의에서 앙갚음을 하려고 했던것이다.

수령님께서도 비판하신 일이니 반대하지 않으시리라고 여기면서…

《동무, 로동당이 동명왕이나 왕건왕의 무덤을 마스기라도 했단 말이요?》

집행자는 대번에 어성을 높였다. 그는 수령님께서 김석진이를 비판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받아 추궁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두팔을 앞탁에 대고 앉아서 듣기만 하시였다.

그이의 표정을 흘끗 살피고난 집행자는 더욱 기세를 올렸다.

《동무때문에 수령님께서 얼마나 괴로워하신줄 아오? 엉? 반당이 다른건가?》

이때 김일성동지께서 《반당은 무슨 반당이겠소.》하고 짧게 한마디 하시였다.

집행자는 《예, 예.…》하고 자기의 과언에 멋적은 웃음을 띄우고나서 제꺽 표현을 바꾸었다.

《초당이란 말이요, 초당! 당정책을 받들려면 진심으로 받들어야지…》

《…》

《동무는 제왕들을 무시하는것이 마치 당성, 로동계급성인줄 아는데 당의 지도원칙에는 력사주의원칙도 있단 말이요. 력사에 있었던 사상을 무시해서는 안돼. 그런데 동문 력사연구소의 소장으로서 제왕들에 대한 견해 하나 똑바로 세우지 못했단 말이요. 왜? 겁나서? 차라리 제왕들을 무시하는게 무탈하다고 생각한게 아니요? 이게 초당이 아닌가 말이요!》

《…》

김석진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제왕문제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했던것만은 사실이니까. 그 근저에는 물론 일종의 위구심도 없지 않았다.

그는 이에 대해 열번도 더 뉘우쳤고 마음속으로 수령님께 사죄의 말씀도 올렸다. 그러니 그이의 앞에서 증언부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김석진이 대답을 못하고있자 회의장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회의참가자들은 김일성동지만을 우러렀다.

애당초 집행자의 폭언에 가까운 추궁과 김석진의 대답에는 관심이 없는듯 했다.

회의에서 제기되고있는 문제들, 날카로운 비판, 추궁, 속죄, 반박과 변명 이 모든것을 그이께서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것만이 중요했다.

《도전인가?》

집행자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래도 김석진이 입을 다물고있자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동무들이 비판하시오!》

호상비판이 시작되였다.

김석진이 아니라 집행자쪽을 바라보며 한사람, 두사람 조심스럽게 일어서더니 차츰 비판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집행자는 험악하게도 당적처벌까지 제기하였다. 이때 김일성동지께서 손바닥으로 앞탁을 탁 치며 《동무들이 초당을 한다면서 초당을 부리누만!》라고 말씀하시였다.

그것으로 그의 문제는 결론되였고 그의 정치적운명도 보호되였다.

참가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석진선생,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하고 김석진을 향해 물으시였다.

김석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수령님, 걱정만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하는 대답이 나오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침착하게 말의 첫꼭지를 뗐다.

사람들은 일시에 민망스러운 눈길을 그에게 던졌고 장내에서는 혀를 차는 소음이 일었다. 장내의 공기는 그를 힐난하고있었다.

한것은 시간이 촉박하신 그이께서 이젠 자리를 뜨셔야 한다는것을 모두가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회의가 예정보다 훨씬 길어지고있다는것을 모두가 숨가쁘게 감수하고있었던것이다. 김석진이도 그것을 모를리 없었고 본래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그로서는 장내의 공기에 얼마든지 눌리울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입을 열었다.

《수령님, 제가 좌경을 범했기 망정이지 우경을 범했더라면 용서를 받지 못했을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의 서두를 뗄 때보다 더욱 아연해졌다.

모두가 송구해하고 민망스러워할 때 장내를 놀래우는 소리가 터졌다.

《동무, 무슨 도전인가?》

그만은 김석진이가 도전하기를, 그래서 김일성동지의 노여움을 사게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애써 분격을 누르는 표정으로 김일성동지께서 계시는쪽을 바라보았다.

그를 만류하여 앉히신 김일성동지께서 덮었던 수첩을 앞탁에 도로 펼쳐놓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김석진이를 내려다보고계시였다.

그이의 모습을 우러르던 김석진이 말씀올렸다.

《절간을 비롯하여 그리 긴요하지 않은 민족문화유산들을 방치한 사람은 비판 한번 받는것으로 책임이 끝나지만 그것을 보수하고 관리한 사람은 우경으로 몰려 처벌을 받고있습니다. 물론 지나간 일이지만 아직도 그러한 경향은 존재하고있으며 사람들은 우경보다는 좌경이 낫다는 말을 하고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중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로동계급의 지식인이며 로동당원들입니다. 당원들이, 우리 당이 이룩한것을 우위에 놓으려는 그들의 잠재의식이 선조들이 해놓은것을 하치 않게 대하는 허무주의, 말하자면 좌경적편향으로 나타나고있습니다. 이 리면에는 우경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보신주의가 깔려있고 이것이 또한 좌경의 근원으로 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하자는겁니까, 석진선생?》

《…》

김석진은 그이께서 몰라서 물으시는것이 아님을 알고 구태여 더 설명해드리지 않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무엇을 심중히 생각하시는듯 손가락으로 책상을 다독이시다가 《석진선생.》하고 다시 부르고나서 말씀하시였다.

《당성, 로동계급성이란 말대신에 주체성이란 말을 쓰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되면 동무들의 그 나쁜 관념도 빠질수 있지 않습니까? 허허… 확실히 나쁜 관념입니다. 원쑤들도 과학지도에서의 우리의 당적, 계급적원칙을 시비질하고있지만 우리는 자기의 당성을 숨기지 않습니다, 정의이고 진리이기때문에! 당성, 로동계급성이 무엇이 나쁘단 말입니까? 로동계급의 전위부대인 로동당만이 민족의 리익을 가장 철저히 대변하고 민족의 리익을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투쟁하고있습니다.

주체성! 좋습니다. 민족성을 덧붙일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적들도 입이 막힐것입니다.》

회의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 박사, 교수, 원사들이 그이를 우러러 경탄의 눈길을 보내고있었다. 김석진이를 민망하게 여겼던 모든 사람들이 그제야 그가 무엇때문에 자리에서 일어섰다는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일반적으로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을 견지한다는것은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의 운명과 인민대중의 운명을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여 개척해나간다는것이며 민족성을 지킨다는것은 자기 민족의 고유하고 우수한 특성을 보존발전시키고 사회생활에 구현해나간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력사연구에서 주체성의 원칙을 지킨다는것은 인민대중을 력사의 주체로 보고 인민대중의 투쟁에 의해 력사가 전진하고 발전해왔다는 관점에서 력사를 대하고 연구한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주체의 력사관이라고 할수 있을것입니다.

학자선생들이 주체사상으로 무장할 때 력사연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족성, 다시말해서 민족자주정신과 민족문화전통을 옳게, 더 많이 찾아낼수 있으며 학문으로 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할수 있습니다.

오늘 민족성을 지켜나가는것은 모든 나라 인민들의 공통된 지향입니다. 자기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지 않는 인민은 없으며 민족의 존엄과 넋이 짓밟히고 무시당하는것을 좋아할 인민도 있을수 없습니다.

주체성이자 민족성이며 참다운 당성, 로동계급성입니다. 이것을 시비할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나도 세상에 나 성장하면서 당원이 되기 전에 우리 나라 력사와 민족을 먼저 생각한 민족의 한 식구입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민족의 아들이 될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산주의자이기전에 민족주의자라고 말해왔습니다.

석진선생, 여러 선생님들, 어떻습니까?》

장내에는 폭풍과도 같은 환희의 선풍이 일고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올랐다. 모든 학자들의 눈빛이 물기로 번쩍였다.

이날 김일성동지께서는 말이 난김에 몇가지 더 이야기하자고 하시면서 력사연구에서 귀중한 지침으로 되는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력사연구에서 주체성의 원칙과 함께 력사주의원칙을 지켜야 한다, 아무리 필요한것일지라도 력사에 없는것을 만들어내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외곡이고 날조이며 비과학이다.

그이께서는 가르치시였다.

례컨대 절간은 불교를 선전하는것이기때문에 당의 리익에는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없애버려서는 안된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재능과 노력이 깃들어있다, 그러니 보존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에 대하여 후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력사에 있었다고 다 내놓는것이 력사주의원칙이 아니다, 나는 임진왜란을 내용으로 하는 한 연극을 보면서 파쟁을 기본으로 하여 그렸기때문에 이것은 임진왜란이 아니라 임진내란이라고 비판하면서 철저히 왜란을 그리라고 하였다, 문학작품에서 있는 사실이라고 하여 그대로 보여주는것이 사실주의가 아닌것처럼 력사에 존재했던것이라고 하여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는것이 력사주의가 아니다.…

김석진은 그이의 긴 말씀을 내내 서서 들었다.

그는 수령님께서 몇번 앉으라고 손짓하시였으나 격정이 솟구치고 눈물이 나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이 놀라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역시 그때에도 수령님을 믿었다. 자기자신처럼 아니, 자기자신보다 더 신뢰했다.

그는 력사학계의 중진으로, 지도일군으로서 수령님을 모신 기회에 사람들에게 당의 과학정책의 본질, 수령의 의도를 똑똑히 파악시키고싶었다.

본래 기질적으로 소심한 그가 이렇게 할수 있은것은 끊임없는 연구로 과학적신조를 확립했고 자기 운명을 한시각도 당과 떼여놓고 생각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그는 자기가 당의 품속에서 숨쉬고 행동하고 발언한다는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있었다.

사람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질수 있다.

그 이중적인 성격중에서 어느것이 주도적인가에 따라서 주도적인 행동이 결정된다. 이것이 성격의 변증법이다. 그는 그 성격으로 하여 끊임없이 문제를 일쿠고 끊임없이 일감을 만들었으며 성공과 실패의 굴곡진 인생행로를 걸어왔다. 그의 성격이 그로 하여금 달리는 살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그의 타고난 《팔자》가 아니라 만들어진 《팔자》였다.

이러한 그가 이제 어떠한 일을 빚어낼런지…

지금 그의 앞에는 단군연구를 심화시켜야 할 막중한 과제가 제기되고있었다.

김석진은 단군연구에서 더는 소심하지 않을것이며 적어도 그렇게 되기 위하여 노력할것이다. 수령님으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기때문이다. 수령님의 접견을 받은 후 그는 자기의 옛 동창생 허진경에 대해서도 생각하였다. 그는 허진경이 박아놓은 말뚝에 대해서 꿈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구한 기간 혁명의 경륜을 새겨오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으신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문제점이 있을수 있다고 하시였다.

이것 또한 천리혜안이였다.

김석진원사는 강동의 단군릉발굴준비를 다그칠것을 결심하고 그 조장으로 박진규를 점찍어놓았다.

그러던 어느날 발굴조성원들을 발표하고 박진규를 따로 불러 조장의 사업을 맡기려고 하는데 리관직이 찾아왔다.

《원장동지, 전 박진규동무를 조장으로 임명하는데 반대입니다.》

《그건 왜?》

《그는 지금 뒤에서 잡소리를 하고있습니다.》

《잡소리라니?》

《그는 이번 발굴사업의 진행을 두고 허튼소리를 하고있습니다.》

김석진은 심각해졌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제였던것이다.

그러나 리관직의 말에 다분히 감정이 섞여져있다는것을 느낀 그는 결론을 주지 않고 알아보겠다는 말로 일단 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박진규를 불렀다.

김석진이 제기된 내용을 알려주자 그는 대바람에 리관직부원장이 그러던가고 물었다. 김석진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상대를 이윽히 바라보다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박선생, 그런 말을 했다는게 사실인가만 대답하시오.》

《사실입니다!》

《무슨 의도에서 그런 험한 말을 했소?》

박진규는 거친 숨을 몰아쉴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서있다고 한참후에 입에 물었던 쓴것을 뱉아버리듯 《발굴사업을 그에게 책임지우십시오!》하고 한마디 하고는 물러갔다.

 



9

 

자기 방으로 돌아온 박진규는 대번에 짚이는것이 있었다.

(우리가 론쟁한것을 문제시했구나, 그가.)

사실 그런 일이 있었다.

김석진원장이 단군릉발굴을 지지하시는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안고 돌아왔을 때 고고학연구소와 력사연구소는 물론 온 과학원이 들끓었다.

《박진규성당》으로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지금까지 《박진규성당》을 꾸리고 유지해온데 대하여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틀림없이 그가 주역을 담당할 이번 발굴사업이 성과를 거두리라는데 대하여 믿어마지않는다고 하였다.

제일 많이 찾아온 사람이 리관직이였다. 지금까지 전혀 관심이 없던 그가 제일 먼저 팔을 걷고 나서는것이 어쩐지 미덥지 않았다. 그러나 부원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찾아오니 어쩌는 수가 없었다.

리관직은 누구도 별로 앉아본적 없는 박진규의 책상옆에 있는 쏘파에 몸을 맡기고 얼른 물러가려고 하지 않았다.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그것을 수행한다는게 얼마나 큰 영광인가! 동무뿐아니라 온 과학원이 큰 신임을 받았단 말이네, 나도 물론 그렇고! 내가 적극 도와주겠소.》

그때 박진규가 한마디 톡 내쏘았다.

《관직동무(그는 조직적인 모임을 내놓고는 부원장이라는 직함을 부른적이 없었다.), 거 너무 떠들지 마시오.》

《그게 무슨 소린가?》

리관직은 불에 덴것만치나 놀라 튀여일어났다. 수령님의 교시를 놓고 그 관철을 위해 말하는 사람더러 너무 떠든다고 하다니… 관직은 그때 과학원안에서 박진규를 놓고 일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들을 다시 상기했다.

《고집불통》, 《골동품》, 《뇌수에 이상현상이 생긴 사람》…

확실히 박진규의 머리는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되여먹었다. 리관직은 계속 말을 시켰다가는 더 험한 소리가 튀여나올것만 같아 《딴데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오, 친구.》하고는 방을 나와버리고말았다.

친구? 그것은 틀림없었다.

1952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이 자리잡고있던 백송리에서 그를 처음 만난것은 우연이라면 우연일것이다. 둘이 다 력사학부로 왔다.

박진규는 후퇴시기 자기 대오에 인입시켰던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출신병사의 배낭을 메고왔다. 후퇴과정에 벌어진 어느 전투에서 박진규의 무릎을 베고 희생된 그의 배낭에는 그가 남진의 길에서 발굴한 도자기 한개가 들어있었다. 그는 포탄이 작렬할 때 그 배낭을 몸으로 덮고 치명상을 입었었다.

박진규는 그가 교편을 잡았던 그 학부에 그의 유물과 함께 입학청원서와 문건을 냈다. 그에게는 학부선택문제가 나서지 않았다. 한생 걸어야 할 길을 그가 처음으로 내디디였을 때 교원의 배낭이 그의 애어린 두뇌에 고고학의 신비로운 세계를 비쳐주었던것이다.

대학에서 그는 리관직과 나란히 한책상에 앉았다. 박진규는 학부적으로도 성적이 제일 높은 우수한 학생이였다.

그런데 리관직은 한두해 지나자부터 왜서인지 공부에 전념하는것 같지 않았다.

그를 여겨볼 사이가 없었지만 박진규의 눈에는 공부보다 학교적인 사회사업, 이를테면 로력동원이라든가 주민정치사업, 연예써클 같은데 더 극성을 피우는 그의 모습이 비쳐들군 하였다.

《이건 쩍하면 리관직이라니까. 내가 없었으면 어쩔번 했는지…》

무슨 과업이 맡겨질 때면 관직은 얼굴을 찡그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자기는 전혀 흉심이 없지만 일단 책임을 지우니 하지 않을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자는것이였다. 하지만 실지로 그는 공부보다 그런 일들을 좋아했다. 박진규는 리관직을 《연단에 나서면 희열을 느끼는 인간》이라고 단정해버렸다. 분주스레 뛰여다니고 책임진 성원들에 대한 장악통제를 하여 피대를 돋구는 그를 보고 진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책임자가 되는것을 좋아하는듯 했다.

박진규가 보다못해 학생에게는 공부가 기본이라고 충고할라치면 《그런데 동무도 보다싶이 공부할 시간을 좀처럼 주지 않는구만, 이번 창립절에도 또 내가 책임을 지고 공연을 보장하라누만.》하고 한숨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기는 학자보다는 행정일군이 적중할것 같다고 덧붙였다.

리관직은 공부를 싫어하면서도 성적에는 무척 신경을 도사리는 사람이였다. 거의 필사적이다싶이 성적을 높이 받기 위해 애썼다. 이러한 그를 박진규는 불가사의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보조시험이 제기되였다. 그때 대학에서는 기본과목시험만 치고있었는데 학생들이 보조과목에 관심을 덜 돌리기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던것이다.

박진규가 한창 시험답안을 쓰는데 갑자기 누구인가 옆구리를 푹 찔렀다.

리관직이였다. 리관직은 눈길로 시험지를 가리켰다. 좀 보자는것이였다. 자기 힘으로만 쓰자니 난감했던 모양이였다. 그러나 박진규는 보여줄수가 없었다. 안달이 난 리관직은 시험관의 시선을 피해가며 연방 박진규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그러나 박진규는 등을 돌려대는것으로 대답했다. 결국 리관직은 보조시험후에 과목담임에게서 무자비한 지탄을 받았다.

《관직학생! 명심하시오. 대학생은 무엇보다도 학문을 닦아야 합니다. 학생은 학업성적을 내놓고는 자기를 절대로 합리화할수 없습니다.》

어성버성하게나마 유지되여오던 그들사이에 불화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리관직은 자기의 친구를 로골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했고 자리를 옮겨 교실 맨 뒤쪽책상에 가앉았다. 박진규 역시 그를 더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리관직은 키가 크고 희멀쑥한데다가 검은 앞머리를 멋지게 추켜올리고 다니였다. 그의 한쪽가슴에는 훈장과 메달이 쩔렁이였다. 그는 어디를 가나 책을 손에 들고 다니였는데 력사학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이상한 책이였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못했다. 하지만 한마디로 말해 그는 대학적으로 눈에 띄우는 존재였다.

몇년이 지나 졸업학년이 되였을 때에는 대상자를 찾는 처녀들이 그의 뒤에 생겨나게 되였다. 결렬은 이때에 선언되였다.

하루는 첫눈에 마음에 싸보이는 곱살한 처녀가 박진규를 찾아왔다. 그들은 대학구내 공원의자에 가앉았다. 대학이 백송리의 가교사를 떠나 복구된 평양 본청사로 옮긴 뒤여서 공원까지 꾸려놓고있던 때였다.

달밤이였다. 처녀는 잠시 부끄러움을 타고있다가 할 말은 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자리를 고쳐앉더니 입을 열었다.

《교정에서 많이 보아왔으나 이렇게 마주하기는 처음이군요.》

《저 역시…》

박진규 역시 마주앉고보니 얼굴을 아는 처녀였다. 얼굴정도가 아니라 그의 학과성적이며 품성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알고있었다.

처녀가 학부는 달랐지만 품성이 곱고 최우등생이여서 박진규의 눈을 끌었던것이다. 박진규에게는 무슨 일때문에 찾아왔는지는 몰라도 처녀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우러났다.

《어려워말고 말을 하시오, 무슨 일인지?》

《저… 리관직동무와 가까운 사이라지요?》

《글쎄… 그렇다고 할수 있지요.》

《아이, 무슨 대답이 그래요? 그렇다고 할수도 있다는건?》하고 처녀는 생긋 웃었다.

《허허… 가깝습니다.》 박진규도 씩 웃었다. 그러자 흉금을 털어놓을수 있는 분위기가 된듯싶었다.

처녀가 마음놓고 물었다.

《그가 어떠세요? 그에 대해…》

박진규는 처녀의 용건을 대뜸 짐작하였다. 그러나 인차 입을 열수 없었다.

《글쎄…》

《아이, 또 모호한 대답이군요?》

《허허… 사랑합니까?》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처녀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네, 그래요!》

《그렇다면…》 박진규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 침묵…

안달아난 처녀가 대답을 재촉했다.

《아직은 약속한 사이가 아니니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장점은…》 하고 불쑥 말을 떼다가 더 말할것이 없음을 의식한 박진규는 떠듬거렸다.

《우선 잘… 생긴… 말하자면 인물이라고 할가…》 큰 키? 희멀쑥한 얼굴? 멋진 앞머리?

박진규는 얼굴곱고 마음곱고 성적높은 이 처녀가 리관직의 어디에 반했을가 의심하며 한참 바라보았다. 처녀는 지금 자기 입에서 그에 대한 찬사가 쏟아져나오기를 기다리고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는 말할수 없었다. 누가 력사학부졸업생 리관직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갑》을 매기겠는가. 왜서 자기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빠져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았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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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분명 리관직이가 이 처녀에게 말했을것이다. ㅡ나에 대해서는 우리 학급의 최우등생인 박진규동무가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나를 보려면 그를 보라. 그에게 물어보라.ㅡ
이 박진규가 남의 허물을 절대로 들추는 사람이 아니란것을 잘 알고있기에… 그는 리관직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리관직은 다른것을 몰랐다. 박진규가 거짓을 절대 꾸밀줄 모른다는것을…
오래도록 대답이 없는 박진규를 이윽히 지켜보던 처녀가 오똑 일어섰다.
《알만해요! 참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며칠후 씨근덕거리며 나타난 리관직이 드디여 결렬을 선언했다.
《우린 더는 친구가 아니네. 어디 누가 더 잘되나 두고보세!》
차라리 잘되였다. 박진규는 그를 자기 머리속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심했다.
그후 대학을 졸업한 박진규는 자청하여 강동중학교 력사교원이 되였으며 리관직은 그가 그처럼 희망하던대로 과학원의 행정일군이 되였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리관직이 무사히 승진일로를 걷고있을 때 박진규는 단군릉의 벌초를 한 일이 문제서서 고초를 겪을번 하다가 구원받았다. 그는 사회과학원에 와서 리관직을 다시 만날수 있었다.
박진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다른 부문, 다른 단위에도 전공에서 몰리운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박히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서도 그의 지도를 받게 되였다는 서글픈 마음만은 금할수 없었다.
몇해후 리관직은 국장을 거쳐 부원장이 되였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그리 나쁜것 같지 않았다. 행정실무에서 빈틈이 없고 책임적이며 더우기 완강한 실천력이 있는 일군이라는 평판이 돌았다. 늘 정숙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떠도는 청사에 그가 한번 웃는 얼굴로 나타나면 청신한 기운이 이는듯 했다.
《아무개선생, 애로가 무엇이요? 그 애로를 풀자고 부원장이 있는것이 아니요. 말하오!》
그에게 개인적사정을 들고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때마다 그는 한번도 외면하지 않았다. 후방경리사업은 그의 관할범위가 아니였지만 집안의 대사가 제기되는 일부 사람들이 후방부원장을 찾아가지 않고 리관직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생활상애로를 놓고 한숨을 쉬는 사람이 있으면 동료들은 이렇게 말하군 했다.
《관직부원장을 찾아가보지.》
박진규는 과학원안에서 그가 차지하고있는 지위와 역할에 대하여 부인할수 없었다. 자기가 미처 모르고있은 그의 장끼를 보게 되면서 그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않았는가고 자책하였다. 더욱 놀라운것은 분명 단념할것으로 알았던 그 최우등생처녀가 그와 결혼한 사실이다. 이것을 아는 순간 박진규는 자기를 천만번 후회했다. 그들앞에 더우기 그 녀인에게 죄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결함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결함을 가지고있다. 제나름으로 보자기에 싸가지고 헤쳐보지 않을따름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상대앞에서는 무방비상태에 빠지며 모든것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부부관계를 보라. 남편은 안해앞에서 숨기지 않으며 안해 또한 남편앞에서 그렇게 한다.
자기가 리관직과 너무도 가까운 사이여서 그의 결함을 남달리 잘 파악하고있을뿐 그런 결함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너그러운 생각을 가지려고도 해보았다. 리관직이 부부처럼 가깝게 여기고 마음놓고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놓는지도 모른다.
박진규는 그에 대해 너그러워지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인차 도리질을 하였다. 차라리 상대하지 않는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자꾸 눈앞에 얼씬거린다.
단군릉발굴을 지지하시는 수령님의 교시가 계시였다는것을 안 그는 지금껏 단군연구를 외면했던 사람같지 않게 박진규를 찾아와서 큰 영광이요, 신임이요 하면서 도와주겠다고 한다.
뭘 어떻게 도와준단 소린가.
그러나 지금 문제로 된 《잡소리》는 리관직에 대한 그 격분때문에만 내지른것은 아니였다. 거기에는 다른 하나의 웅심깊은 박진규의 마음이 깔려있으니 그는 리관직이 원장을 만난다, 당비서를 만난다 소동을 부려도 그 마음을 내비치지 않고있었다.
사상문제에로까지 번져지고있어도…
그 어떤 배심을 가지고있는 그에게 있어서 그 문제는 꿈만하게 여겨지는것이였다. 이때 그의 마음은 한걸음 앞서 리관직과 또 한번 충돌해야 하리라는 예감에 휩싸였다.
1월은 한겨울이다.
리관직은 땅이 땅땅 얼어붙은 겨울에는 발굴을 하지 못하게 된 규정을 어기고 당장 발굴을 시작하자고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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