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설 <대박산마루> 제 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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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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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후 밤 9시.
책임서기 전기철이 록화기의 스위치를 넣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서재의 의자에 앉으시여 록화기의 형광판에 눈길을 주고계시였다.
《오늘은 발굴 첫날입니다.》
해설자(학자인듯싶다.)가 화면과 함께 종합적인 해설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바람 한점없이 개인 날씨여서 양지쪽은 비교적 따뜻하였지만 대기온도는 령하 16℃로서 몹시 쌀쌀하였습니다. 발굴작업은 무덤의 구획과 안길 입구를 찾기 위한 작업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날 오전에 무덤 안길의 입구와 묘역시설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과정에 상돌과 그 받침돌 4개, 안길 입구를 확인하였습니다.
오후에는 무덤의 발굴구획을 확정하고 발굴장주변을 깨끗이 정리하였습니다.》
지대정리작업은 이미 리관직이 해놓은것이였다. 그렇기때문에 비록 하루동안이였지만 일자리가 많이 난것처럼 보였다.
《발굴 첫날에 발굴조성원들은 예견했던것보다 많은 작업량을 해제낌으로써 앞으로 발굴을 계획적으로, 성과적으로 진행해나갈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게 되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화면에 반복되여 소개되는 이날의 소득물인 상돌과 받침돌을 주의깊이 다시 보고나서 손수 록화기의 스위치를 끄시였다.
이튿날 저녁 9시.
전기철은 매일 이 시간을 정해놓고 록화기를 돌려드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아무리 바삐 보내시다가도 시간을 정확히 지키시였다.
발굴 2일;
《오늘은 발굴구획을 더 확장하여 사방 10m정도의 구획을 정하였습니다.
발굴자들은 발굴을 빨리 끝내려는 한가지 생각으로 휴식도 뒤로 미루고 표토층을 제끼는 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다행히 여러날동안 톱밥으로 언 땅을 녹였기때문에 땅파기작업에서 겨울이라는 계절적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강동군안의 일군들과 인민들이 현장에 후방물자를 가지고 찾아와 발굴조성원들을 고무해주었습니다.》
화면으로 사람들의 표정들도 얼핏얼핏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표정들에는 우리의 방송보도물들에 나오는 대건설전투에 참가한 근로자들속에서 볼수 있는 그런 약동이 없었다. 환희와 랑만보다도 조심스럽고 지어 정중한 표정마저 어려있었다. 화면을 보시면서 수령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그래, 하는 일본새들이 돼먹었거던. 아무렴, 선친의 묘를 다루듯 해야지.》
그런 장면들이 자주 교차되였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수령님께서는 지루해하지 않으시였다.
오히려 화면이 꺼졌을 때는 수령님께서 약간 아쉬워하시였다.
《동무가 록화물을 다시 편집한게 아니요?》
《저…》
전기철이 솔직히 말씀드렸다.
《학술적인 문제와 관련이 없는 장면들을 몇장면 뺐습니다.》
《그럴줄 알았다니까. 래일부턴 그런 일이 없도록 하오.》
더이상 질책을 않으신 그이께서는 굳어진 표정으로 서있는 전기철을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시였다.
《책임서기, 이건 내 어렸을 때 일이요.》
그이께서 뜻밖에 어릴적추억을 펼치자 전기철은 긴장해졌다. 그이께서 국사를 잊으시고 사담을 청하신것이다. 그는수령님께서 이렇게 허물없이 앉아 인간적인 고백을 하실 때마다 크나큰 위인의 세계에 접하군 하였다. 오래동안 그이를 몸가까이 모시고있으면서 그를 매혹시킨 수령님에 대한 위인상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처럼 격식없는 말씀을 주고받으실 때도 웅심깊고 통속적인 위인철학의 세계가 펼쳐진다는것이였다. 그때마다 그는 온 신경을 다 집중하여 그이의 말씀을 한마디한마디 기억속에 똑똑히 새겨놓았다가 기록하군 하였다. 후세에 전해줄 우리 수령님의 위인상을 과연 덕성실기들이나 기록영화화면들만으로 만족할수 있으랴. 그런 측면에서 전기철은 행운아이면서도 책임적인 사업을 맡아하고있는것이다. 지금도 그는 그이의 말씀을 통채로 머리속에 록음하고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산당지기였다는것은 잘 알지? 그래, 남의 묘를 돌봐주는 묘지기였지. 내 고향집이라는것은 말하자면 상두막이나 다름없었고… 헌데 말이요. 내가 너덧살쯤 되였을 땐데 하루는 우리 남리로 상여가 하나 올라왔소. 원래 만경대가 풍수 좋은 곳이라 량반벼슬아치들이 자주 선산으로 쓰는 곳이였지만 그런 요란한 상여를 난 첨 봤소. 상제는 대동군에서도 손꼽히는 지주였으니까. 난 어릴적이라 할아버지를 쫓아 묘자리를 파는 곳에 가있었댔기때문에 그 일이 눈에 선하오. 글쎄 상여가 묘자리로 올라오다가 산중턱에서 멈춰서는것이였소. 상여군들이 발을 떼야 갈게 아니겠나. 람루한 차림의 상여군들의 어깨우에서 화려한 상여가 흔들흔들 그네를 타고있었소.
〈발이 안 떨어지누나, 안 떨어져, 맏상제 술 한잔 받지 않고 이승길을 하직할소냐. 고인의 분부노라, 맏상제는 얼른 술동이를 내여라.〉
하고 선소리군이 한소리 뽑으니 상여군들은 일시에 화답하고…
상제들이 바빠하더군. 베감투를 내리쓴 맏상제가 술을 동이채로 안고 허겁지겁 달려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상여군들에게 술을 붓더란 말이요. 상여군들이 이때라고 생각했는지 더욱 게정을 부렸소. 산아래서 중턱까지 올라오도록 장남, 차남, 손자, 손녀들의 음주대접을 차례로 다 받으며 상여가 흔들흔들 올라오던 그 광경이 눈에 선하오. 볼만 했소. 그 모습이 왜 내 기억속에 꽉 박혔는지… 그걸 보고 우리 할아버지가 말했소. 〈저 지주도 오늘만은 사람다운데가 있어보이는군. 평생 사람질이라곤 할것 같지 못하더니.〉
지주가 자기 머슴들이나 소작인들에게 머리를 굽혀보기는 아마 그게 처음이였을거요. 말하자면 그게 상여군들에게 굽신거린게 아니라 바로 조상에게 굽신거린거지. 조상에게 조금이라도 루가 미칠가봐 그 오만한 지주마저도 그렇게 체면도 다 버렸던거요. 일전에 왕씨가문에서 올려보낸 편지를 보고 내가 느낀게 뭔지 아오? 그것은 자기 조상을 남달리 신성시하는 우리 인민의 미풍량속이요. 그게 오늘까지 단일민족으로 살아올수 있은 우리 인민의 민족성의 중요한 징표의 하나라고도 할수 있지.》
《수령님, 말씀의 뜻을 알았습니다. 저도 단군릉발굴에 저의 성의를 고이겠습니다.》
《누구나 그래야지. 이게 얼마나 큰 일인지 동무도 알지 않나.》
발굴 3일;
《오늘도 발굴에서는 일정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향불대돌과 무덤앞기단, 릉비대, 기적비대 등 돌구조물들을 찾아내고 묘역시설들을 확인하였습니다. 한편 강동군 교원재교육강습소 지도교원 홍사성의 도움으로 1963년에 강동군에서 작성한 단군릉조사자료(박진규와 홍사성이 함께 연구작성한것임)를 얻게 되였습니다. 단군릉조사자료에 의하면 1936년에 〈단군릉수호회〉와 〈단군릉수축기성회〉의 주최로 복구된 단군릉은 기단있는 돌칸흙무덤으로 방대형의 봉분으로 되여있고 그 한변의 길이는 7. 5m이며 무덤앞에는 릉비, 단군릉기적비, 상돌, 망주석, 향토, 2개의 돌사자, 기와를 얹은 울타리릉문 등 묘역시설이 있었습니다. 무덤주변에는 돌을 깔았고 나무도 많이 심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봉분의 높이는 3m이고 릉비의 크기는 높이 80㎝, 너비 40㎝, 두께 10㎝였으며 릉비에는 한자로 세글자를 새겼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단군릉기적비에는 앞면에 한자로 단군의 업적을 찬양하여 쓴 글이 새겨져있고 뒤면에는 우리 글자로 단군릉수축경위가 간단히 적혀있었으며 단군릉수축에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새겨져있었습니다.》
김정일동지의 당부에 의하여 첫날부터 담당간호원이 수령님곁에 항시로 붙어있으면서 맥박과 혈압을 재고있었다.
수령님께서 흥분하실것을 예견하여 취해진 조치였다.
발굴 4일;
밤 9시에 록화기는 여느날처럼 동작하지 못하였다.
며칠전 우리 나라는 일시 중지하였던 핵담보준수협정에 더는 구속되지 않을것이라는 원자력총국의 성명을 내보냈었다. 이것은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이 우리 나라의 평화적핵개발을 시비해나설 명분에 단호한 타격을 안긴 자주적권리의 행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선제타격을 계속 운운하면서 실전배비하였던 저들의 침략무력에 전투명령을 내리는 오만한 행동으로 나왔다.
정세는 전쟁접경에로 치달아갔다. 이런 조건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동지께서는 나라의 최고리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수령님과 이미 토의하신대로 준전시상태를 선포할데 대한 안을 놓고 건의해오시였다.
더는 서재에 앉아계실수 없게 된 김일성동지께서는 최고사령부에 가시였다. 그이께서 돌아오신 때는 밤 12시였다.
그리하여 이날 록화기는 예정시간보다 늦게 밤 12시에 가동하였다.
《오늘은 무덤의 외부시설을 찾는 작업을 계속 하였습니다. 오늘 무덤의 외부에서는 무덤앞 제단의 길다란 연석과 봉분의 기단돌 6개를 새로 찾아냈습니다. 제단연석 좌우끝에 각각 8각형의 망주석의 밑부분이 있었습니다.
무덤칸 앞부분발굴은 연도(안길)의 천정이 파괴되고 그안에 흙이 가득차있었으므로 천정부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파내려가는 방법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오늘 발굴에서는 안길의 벽선을 확인하였습니다.…》
전기철이 록화기를 끄고나서 주저하는듯 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저… 래일부터는 제 시간에 돌리지 못할것 같습니다.》
《그건 무엇때문에?》
의아해하시는 그이께 전기철이 말씀드렸다.
《발굴대원 절반이상이 로농적위대원들입니다. 그들도 진지를 차지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심중히 생각하시다가 강동군당책임일군을 찾으라고 이르시였다.
전기철이 곧 강동군당책임비서를 전화기앞으로 불러낸 다음 송수화기를 그이께 드리였다.
그이께서는 짤막하게 지시하시였다.
《책임비서동무, 단군릉발굴장에 나가보고 제기되는 문제를 풀어주도록 하시오!》
그러시고는 전화를 최고사령부로 돌리시였다.
《형편이 어떻소?》
긴장한 정세를 념두에 두고 하시는 물음이시였다.
《안심하십시오, 수령님!》
김정일동지의 대답은 의지와 신념을 피력할 때마다 하군 하시는 그 말씀이였다.
《고맙소!》
김일성동지께서는 비로소 송수화기를 놓으시였다.
발굴 5일;
《오늘은 무덤외부에서 1936년도 복구당시의 무덤외부마당을 확인하고 무덤에서 릉문까지 구간과 그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였습니다. 안길에서는 아래로 파내려가면서 현재 남아있는 천정돌을 완전히 들어내고 무덤칸의 동서남북 네 벽체를 완전히 확인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발굴에서는 무덤칸의 천정상태를 확인하고 무덤칸의 평면구조를 확인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발굴 6일;
《오늘은 무덤 안길안에 차있던 흙을 완전히 들어내고 안길페쇄벽상태를 확인하였으며 무덤외부에서는 1936년도 무덤복구당시의 외부마당을 기준으로 구획을 사방으로 더 확장하여 무덤주변을 완전히 정리하였습니다. 발굴에서는 무덤칸안의 벽체가 드러나게 함으로써 무덤전체의 평면구획을 확인하고 그 규모를 알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한쪽벽체에는 도굴한 구멍이 뚫러져있었습니다. 그것이 일제가 오래전에 도굴하면서 남긴 흔적이라는것을 쉽게 알수 있었습니다. 발굴자들은 모두 격분을 금치 못해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록화기를 끈 다음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계시였다.
해방전 애국적인 문인이였던 장지연은 《위암문고》라는 자기의 저서에 일본인도굴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무덤안에는 옛 선인과 신령스러운 장수들의 모습이 사방 네벽마다에 그려져있었다는것을 기록해놓았다. 그런데 그 그림은 왜서 안 나타나는것인가.
우리 민족의 력사를 말살하려는 침략자들의 야만행위로밖에 달리 볼수 없었다.
발굴 7일;
《오늘은 무덤칸안에 쌓인 흙을 조심스레 파내려가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무덤칸 바닥우에 설치된 관대와 함께 그 주변에 흩어져있는 사람뼈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우시오!》
다급한 탄성이 울렸다.
전기철이 서둘러 스위치를 누르고 담당간호장이 놀라 혈압계를 들고 수령님의 건강상태를 살피려들었다. 그이께서는 옆에 다가서는 그를 뿌리치시였다.
《걱정마오. 난 일없소.》
그이의 얼굴이 해빛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정지된 화면에 관대우의 흩어진 뼈쪼각들이 드러나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 방안을 몇고패 돌고나서 다시 앉아 록화기를 가동시키시였다.
해설이 계속되였다.
《무덤칸과 안길의 전모가 오늘 발굴에서 완전히 드러나게 됨으로써 이 무덤이 중심안길을 가진 외칸의 돌칸흙무덤이라는것을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박진규를 비롯한 발굴조의 학자들은 현지에서 지금까지 발굴한 정형에 기초하여 학술적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박진규는 물론 모든 연구사들은 이 무덤이 고구려시기에 만들어진 무덤이라는데 대하여 다시한번 견해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무덤칸 바닥에서 발견된 사람뼈에 대하여 연구사들은 년대측정결과가 나온 다음에 연구를 계속 심화시켜야 하겠지만 우선 이 무덤이 단군의 무덤으로 간주되여온것만큼 거기에서 발굴되는 사람뼈는 응당 무덤의 피장자인 단군의 유골로 가정하는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시조릉으로 간주해오는 이 무덤에 우리 민족성원치고 감히 누구도 다른 시신을 들여놓을수 없다는 일치한 합의에 따른것이였습니다.
박진규는 사람뼈의 성격에 대하여 아직은 속단할수 없으며 그것이 누구의 유골인가는 현대적인 기술기재로 측정을 한 다음 그 결과에 의해서만 판단할수 있다는 신중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연구진영은 무덤에서 사람뼈가 나온것은 이번 발굴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뜻밖의 결과라고 하면서 발굴목적의 중핵적문제를 해결하는데 실마리가 될수 있는 귀중한 성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설사 단군의 유골이라고 해도 그러자면 사람뼈가 이 지대에서 5천년동안 보존될수 있다는 과학적담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록화기를 보시고 해설을 들으시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록화기는 계속 동작하고있었다.
《오늘 현장학술토론회에서는 무덤에서 나온 사람뼈를 인류학적으로 감정하며 그 개체수와 성별 등을 알아내여 자연과학적인 년대측정방법에 의한 절대년대를 측정할데 대하여 합의를 보아 과학원에 통보하고 인류학, 년대학전문가들을 현지에 나오도록 요구하기로 하였습니다.》
록화기가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계시였다.
《책임서기동무, 발굴조를 련결시켜주시오.》
전기철이 주저하며 송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시 그를 제지하시였다.
《아니, 그만두오. 내가 끼여들면 그들이 부자연스러워할수 있지.》
김일성동지께서는 《록화기를 한번 더 돌리시오.》라고 당부하시였다.
그날 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잠도 주무시지 못하시였다.
발굴 9일 ;
《오늘은 무덤주변의 요역시설을 정리하고 봉분의 서남쪽 지점에서 지층상태를 확인하여 무덤칸이 당시 지표에서 1. 2m깊이까지 파내고 만들어졌다는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발굴에서는 무덤칸바닥에서 사람뼈를 드러내는 세부작업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머리뼈는 보이지 않고 깨진 뼈들이 여기저기에 질서없이 흩어져 드러났습니다. 이것 역시 일제놈들의 도굴행위의 후과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사람뼈가 젖어있었으므로 얼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무덤칸안에 방열기를 설치하기로 하였습니다.》
발굴 10일;
《오늘은 일요일이였지만 발굴을 계속하였습니다. 오늘발굴에서는 무덤칸바닥에 설치된 관대들의 규모를 확인하고 바닥을 완전히 드러냈으며 무덤칸과 안길의 벽체도 완전히 정리하였습니다. 벽체에 붙은 흙을 참대칼로 뜯어내고 솔로 쓸면서 벽체정리작업을 하는 과정에 그우에 발랐던 회죽미장에 대하여 알수 있게 되였습니다. 발굴조는 해방전 애국적문인이였던 장지연의 문집 〈위암문고〉에 기초하여 단군릉에 벽화가 있을것이라고 여기고 그 벽화를 찾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벽체 회죽미장은 세번 하였는데 초벌은 돌짬을 메꾸고 두벌미장은 면을 맞추었으며 세벌미장은 벽화를 그릴수 있게 매끈하게 잘 발랐습니다. 때문에 벽화가 있을것으로 예견하고 여러차례 세밀한 관찰을 진행하였으나 벽체의 손상이 심하여 확인할수 없었습니다.
관대는 납작한 판돌쪼각을 3~4돌기정도로 쌓고 바깥쪽 면은 직선을 맞추었으며 그우에 회죽미장을 하여 매끈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오전중에 사람뼈에 대한 세부작업을 끝내고 실측과 사진촬영을 진행하였습니다.
현장에서 인류학자들이 초보적으로 감정한데 의하면 머리뼈는 없어지고 남자의 골반뼈와 남자, 녀자의 팔, 다리뼈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 무덤에는 주인공 남녀부부가 묻히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되였습니다. 오후에는 유관부문 책임자들이 모여앉아 학술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토론에서는 이 무덤이 단군의 무덤이 틀림없다면 이 사람뼈는 단군과 그 안해의 유골일것이라는 주장이 강하였지만 이번의 주역인 박진규와 일부 학자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년대측정결과가 나오는것을 보아야 알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리관직부원장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절대년대측정결과에 의해서만 유골의 정체를 밝힐수 있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 고고학자들은 단군의 무덤에서 발견된 사람의 뼈면 그것은 피장자인 단군의 유골이라는 방법론만은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박진규와 리관직부원장사이에는 약간한 언쟁이 있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언쟁 두측에 다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시면서도 박진규에게 자연 마음이 실리는것을 느끼시였다.
간호장이 와서 혈압을 재보니 혈압은 퍽 안정되여있는 편이였다.
발굴 11일;
이날에는 발굴정형을 수록하지 않고 발굴된 유물들에 대해서만 찍어서 올려왔다.
그에 의하면;
ㅡ 금동관 앞면 세움장식 : 웃부분이 복숭아씨모양으로 생기고 가운데 구멍이 있으며 아래부분은 곧게 되여있다.
ㅡ 청동쪼각: 좁고 길죽한 청동관인데 두껍게 도금한것으로 되여있다.
ㅡ 쇠관못: 모두 여섯개인데 삿갓모양의 대가리가 있다.
ㅡ 도기쪼각: 모두 회색이며 그릇살의 두께가 1㎝로서 퍽 큰 단지였던것으로 추측된다.
발굴 12일;
《무덤칸안에서 세부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오늘발굴에서는 무덤안길과 안칸이 련결되는 부근에서 금동띠패쪽 1개를 발견하였으며 무덤주변에서 고려시기와 리조시기의 기와쪼각들을 발굴하였습니다. 금동띠패쪽은 허리띠의 패쪽으로서 청동에 금도금한것입니다.
발굴현장에서 학술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무덤은 축조형식으로 보아 고구려시기의 무덤으로 5세기경에 만들어진것이며 금속판장식과 띠장식은 고구려시기에 만들어진것이라는데 대하여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에서 나온 뼈가 단군과 그 안해의 유골이라고 전제하는 경우 이 무덤은 단군을 숭배하던 고구려사람들이 평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동명왕의 무덤과 함께 료동에서 옮겨다 이장한것이며 왕관과 허리띠는 무덤에 유골을 넣으면서 고구려사람들이 만들어 넣어준것으로 볼수 있다는데 대하여 초보적인 합의를 보았습니다.
무덤주변에서 고려, 리조시기의 기와가 드러나는것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이 있었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며 이 무덤이 고려, 리조시기에 계속 보호되고 숭배되여왔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10여일간 저녁 9시면 1분도 어김없이 록화기를 보시였고 나머지 시간에도 전적으로 서재에서 책속에 묻혀계시였다. 당과 국가의 수반으로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단군연구에 바치실수 있은것은 두말할것없이 김정일동지에 의한것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최고사령부작전대에 계시면서도 록화필림을 먼저 보시고 자신의 견해를 달아서 수령님께 올리군 하시였다. 두분께서는 단군릉에서 유골이 나온데 대하여 함께 기뻐하시였으며 그 유골의 년대고증에 강한 기대감을 표시하시였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 즉 단군유골을 료동에서 이장해왔을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고 지어는 불안해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석진이 올렸던 편지를 다시 상기하시였다. 그는 편지에서 동명왕릉에서도 나오지 않은 피장자의 유골이 그 보다 몇천년전 무덤인 단군릉에서 나온다는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었다. 아무튼 그 문제는 유골의 측정년대가 나온 다음에 보기로 하자고 견해일치를 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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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원에서는 발굴된 유골과 유물에 대한 연구분석과 과학적인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였다. 이 사업은 담당부원장인 리관직이 지도하였으며 원장인 김석진이 립회하였다.
김석진은 그자신이 력사학자였기때문에 립회자라기보다는 주요발언자였고 결론자였다. 연구분석사업은 이번에 발굴된 유골의 성격을 해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 단군릉에서 발굴된 사람뼈에 대한 인류학적감정;
이 사업은 고고학연구소 인류학연구실이 담당수행하였다. 해당 연구성원들은 처음 유골을 정리하고 깨진것은 복원하였으며 하나하나 정확히 실측하였다. 그에 기초하여 사람뼈의 개체수를 확인하고 성별과 나이를 감정하였으며 뼈의 크기에 근거하여 사람의 키를 측정하였다. 뼈는 주로 팔, 다리, 골반, 등뼈가 많고 그밖의 뼈들도 일부 있었다. 발굴된 사람뼈는 두 개체분으로서 모두 86개인데 그가운데서 비교적 잘 보존된 42개는 남자뼈이고 12개는 녀자뼈이며 나머지 32개는 뼈쪼각들이였다.
뼈에 대한 감정은 먼저 성별감정부터 진행하였다. 성별감정은 골반뼈와 몸뼈에 기초하여 진행하였다. 골반뼈에서 성적차이는 10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성성숙기에 이르러서는 뚜렷이 형성된다.
단군릉에서 발굴된 한쌍의 골반뼈는 두껍고 건강하게 생겼을뿐아니라 그 높이가 높고 좁으며 두덩뼈 아래각부위가 60°이하의 각을 이루며 두껍고 조잡하다. 그리고 밸뼈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것이 아니라 수직에 가깝게 위치하며 닫긴 구멍은 높고 비교적 둥글다. 두덩뼈결합부의 높이는 높고 귀모양면은 납작하며 그 옆홈은 형성되지 않았거나 좁고 얇게 나타날뿐이다. 골반뼈의 이러한 특징들은 남성의 유골이라는것을 말해준다. 녀자뼈의 성별감정은 골반뼈가 남아있지 않는 조건에서 팔, 다리뼈로 진행하였다.
녀자의 뼈는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고 얇으며 뼈의 겉면이 고르롭고 힘살이 부착되는 부위의 뼈주름도 상당히 약하게 발달되여있다. 단군릉에 묻힌 녀자는 로동을 모르고 자란 사람이므로 몸뼈의 그 어느 부분에서나 섬약한 녀성의 특성이 전형적으로 잘 나타나고있다.
단군릉에 묻힌 사람의 년령감정은 발굴된 유골에 기초하여 진행하였다. 남자의 나이는 골반뼈의 귀모양변과 두덩뼈결합에서 골질의 겉면이 붕괴되고 퇴화되여 없어지는 현상이 넓은 면적에 나타나있는것으로 보아 50~60살로 감정할수 있다. 이것은 남자가 당시로서는 아주 나이많은 늙은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녀자나이는 많은 뼈들에서 뼈머리와 뼈끝이 분리되는 경향이 인정되는것으로 보아 젊은 녀성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단군릉에 묻힌 사람뼈의 체격은 팔다리뼈의 크기에 의하여 측정하였다.
사람의 키와 팔, 다리뼈는 일정한 비례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팔, 다리뼈의 크기를 가지고 단군릉에 묻힌 사람의 키를 측정한데 의하면 남자의 키는 170㎝이상이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도 키가 상당히 큰 사람이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다음으로 단군릉에 묻힌 사람뼈가 5 000년이상 보존될수 있겠는가 하는것을 담보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담보는 유골이 묻힌 지대의 매장조건과 많이 관련된다. 이 무덤의 매장조건이 사람뼈를 오래동안 보존할수 있은것은 첫째로 그것이 석회암지대에 묻혀있었기때문이다. 단군릉은 우묵하게 침식된 석회암사이를 깊게 파고 그 암반우에 무덤칸을 마련하였다. 따라서 유골은 빙회석과 같은 가용성광물질이 많이 용해되여있는 지하수나 물기의 침습을 많이 받을수 있었다. 광물질이 용해되여있는 지하수나 물기가 유골에 계속 작용하면 뼈세포속에 광물질이 석출되여 거기에 채워지고 또 삭아서 없어지는 빈자리에도 광물질이 들어가 자리잡게 된다. 이번 뼈에서 두드리면 약간 쇠소리가 나는 경향이 인정되는것은 그것이 화석화되는 과정에 있었기때문이다. 단군릉의 매장조건이 사람뼈를 오래동안 보장할수 있는 조건으로 될수 있은것은 둘째로 그것이 유골을 부식시키지 않는 토양속에 묻혀있었기때문이다.
유골이 안치된 무덤의 토양은 산성이 아니라 뼈가 부식되지 않고 잘 보존될수 있는 전형적인 중성토양이다.
이상의 감정결과에 의하여 단군릉에서 발굴된 사람뼈는 이 무덤의 피장자의 유골이라는것을 확증할수 있게 하였다.
- 단군릉에서 발굴된 사람뼈에 대한 절대년대측정;
단군릉에서 나온 사람뼈의 절대년대를 밝혀내는것은 단군릉의 성격을 해명하는데서 관건적의의를 가지는 문제이다.
단군릉에서 나온 사람뼈에 대한 절대년대를 밝혀내는 연구사업에는 고고학연구소 년대학연구실, 김책공업종합대학 등 과학분야의 권위있는 연구사들이 참가하였다.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연구개발된 절대년대측정방법은 방사선탄소-14법, 열형광법, 우라니움계렬법, 핵분렬흔적법, 아미노산정량법 등 10여가지가 있지만 그가운데서 측정시료의 제한을 받지 않는 전자상자성공명법(ESR)에 의하여 단군릉에서 나온 뼈의 절대년대를 측정하였다. 전자상자성공명법의 원리는 한마디로 말하여 우주선을 포함한 자연방사선원소들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동식물체나 광물이 받으면 받을수록 홑전자의 수가 많아지는데 이 홑전자의 수는 곧 물질에 체현된 시간의 루적량 다시말하여 지나온 시간으로 된다는것이다. 이 루적량을 방사선량으로 환산하고 그 물질이 묻혀있는 곳에서 1년동안 받은 선량으로 나누면 그 물질이 생긴 년대를 구할수 있다.
시료는 뼈의 치밑부분에서 몇그람 취하여 겉면은 2~5㎝ 벗기고 자기절구로 찧어서 가루를 내는 방법으로 가공하였다.
사회과학원이 가지고있는 현대적인 전자상자성공명장치로 루적된 선량을 측정하였다. 또 이 측정값의 정확성을 검증하기 위하여 첨단과학분야의 어느 한 연구소에 있는 최신형전자상자성공명장치로 24회 측정하였다. 그리고 단군릉에 있는 지대의 년간 방사선량을 측정하였다. 여기에는 지대방사능측정기가 리용되였고 그 정확성을 검증하기 위하여 열형광선량계를 3개월간 매몰하고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단군릉에서 나온 사람뼈의 절대 년대는 지금(1993년 현재)으로부터 5 011±276년전이라는것을 확증할수 있게 되였다.
ㅡ단군릉의 피장자에 대한 해명
단군릉을 발굴하고 거기에서 단군과 그의 안해의 유골, 유물들이 발견되였으며 단군의 유골이 5 011년전의것이라는것이 확증됨으로써 단군릉은 명실공히 우리 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의 무덤이며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민족이라는것이 실지로 확증되였다.
단군릉이 발굴된 후 그 피장자, 단군릉의 성격문제를 해명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 과정은 오랜 세월 굳어져온 단군이 신화적존재, 전설적인물이였다는 관념을 버리고 단군이 력사에 실재한 고조선의 건국시조, 조선민족의 원시조라는것을 밝혀내기 위한 고심어린 과학연구과정이였으며 우리 나라 력사학, 고고학연구에서 다시한번 주체를 확립하기 위한 심각한 투쟁과정이였다.
단군릉발굴이전까지 단군무덤을 가짜무덤으로, 단군을 신화적존재로 여기면서 발굴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거기로부터 고조선의 국가기원을 기껏해서 기원전 10세기이전으로밖에 보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기성관념은 단군릉의 성격해명에서 커다란 장애가 되였다.
많은 학자들은 단군릉이 발굴되고 거기서 유골과 유물이 발굴되였을 때에 그것이 단군의것이라는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유골감정과 그 매장조건이 밝혀지고 그 절대년대가 측정된 이후에도 일부 사람들은 반신반의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뼈가 5천년동안 무덤속에서 썩지 않고 남아있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단군릉에서 발굴된 사람뼈는 우연히 무덤속에 들어갔다가 죽은 사람의것일것이라는 가설까지 내세우면서 단군유골의 존재를 부정해나섰다.
일부 반대론자들은 단군은 지금까지 신화적존재로 되여왔는데 그것을 지금에 와서 실재한 인물로 만들어놓으면 복잡한 문제가 제기될수 있다고 하였다. 지어는 유럽에서 신화적존재로 여기고있는 예수를 실재한 인물로 만들려다가 복잡한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까지 하며 단군의 경우도 그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하였다.
종래의 낡은 관념이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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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종래의 낡은 관념이 화석화된 어떤 학자들은 절대년대측정치를 그대로 접수하게 되면 고조선의 건국년대를 2천년이나 더 올리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서술하여온 력사와 고고학체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특히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전문가들은 청동기시대의 상한과 신석기시대의 하한문제를 들고나오면서 종전의 견해를 고집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반박을 받았는데 반박론자들의 앞장에 서있는 사람이 리관직이였다.
그는 발굴성과를 대번에 인정했고 발굴을 서두를 때와 마찬가지로 빨리 발굴보고서를 작성하여 수령님께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박진규만은 여전히 신중론을 고집하면서 일상적인 행동거지대로 뜨적뜨적하게 나왔다.
원장 김석진원사가 그의 편이였다.
그는 발굴보고서초안작성을 맡은 박진규에게 덤비지 말라고 일렀으며 발굴보고서초안에 대한 검토와 가필을 직접 맡았으나 남들이 보기에는 매우 굼뜨게 진행하고있었다.
그러자 리관직이 그에게 말했다.
《서둘러야지요, 서둘러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원사는 옛 제자에게 너그럽게 타일렀다.
《관직동무, 과학이란 덤벼서 되는게 아니지.》
리관직은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당당한 부원장이라는것을 은근히 암시하면서 옛 스승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령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는 당비서 한응삼에게도 찾아갔다.
그의 말을 듣고 김석진에게 당비서가 찾아왔다.
《우리는 심사숙고했습니다. 바로 수령님의 권위를 생각했기때문에… 그래서 박진규동무를 평가했고 관직동무에게 비판을 준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서 늦잡는것입니까? 수령님께서 바라시던 일이 드디여 과학적으로 해명됐는데…》
매사에 침착한 당비서도 이번만은 흥분한것 같았다. 당비서에게 원사는 간단히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비서동무.》
발굴보고서가 늦어지는데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원사가 고민에 빠져있기때문이라고 하였다.
…원사는 자기가 김정일동지께 편지를 올렸던 사실을 잊지 않고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우상이라고 믿었던 곳에서 유물이 나오자 그는 수령님께서 어떤 타산을 가지고 단군릉발굴을 강력히 내미시였는가 하는 물음앞에 자신을 세웠다. 지금 수령님의 타산이 옳았다는것이 판명되였다. 아, 원사이고 교수이며 박사인 자기는 왜 그러한 타산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원사는 그 사실에 당황했으며 고민하고있었다. 어느날 그는 박진규와 마주앉아 발굴보고서를 다듬다가 문득 물었다.
《진규동무, 어떻게 고고학자가 됐다구?》
《다 아시지 않습니까. 옛 유물(자기단지)이 든 전우의 배낭을 메고 왔다구. 벌써 대학입학 첫날에 말씀드린것 같은데요.》
《자세히 알고싶구만.》
원사의 고뇌가 어린 눈빛에는 그 어떤 갈망이 깃들어있었다.
박진규는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 배낭에는 피가 묻어있었지요. 우리는 전선을 넘다가 폭탄을 맞았습니다. 그때 전우는 몸으로 배낭을 덮었습니다. 내가 그의 품에서 배낭을 꺼내드니 배낭은 그의 가슴에서 솟구쳐오르는 피로 질벅했습니다.
그러나 유물은 한군데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전우는 말한마디 남기지 못했지만 피묻은 배낭은 많은 말을 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을 하게 됐지요.》
《그랬댔구만! 그랬댔어…》
원사가 고뇌속에 중얼거렸다.
박진규가 추억하듯 눈을 내리깔고있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나의 전우가 자기 부대를 리탈하여 혼자 남게 된것은 그 유물때문이였습니다. 불타는 절터에서 그 유물을 찾아내느라고 정신없이 돌아치다가 부대를 잃었거던요. 그는 내가 인솔한 대오에 와서 말했습니다. 〈진규동무, 조상의 땅엔 숱한 보물이 묻혀있습니다. 보물이…〉 지금도 그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음ㅡ 보물이란 말이지…》
원사의 말은 신음소리처럼 들렸다.
원사가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진규동무, 동무는 단군릉을 발굴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소?》
《어떤 생각이라니요?》
《그래, 학술적기초말이요. 아니, 그건 학술상의 문제가 아니지.》
원사가 금방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하며 계속했다.
《그건 관점이고 립장이요. 력사를 대하는…》
《아, 원장선생님의 물음의 뜻을 알만 합니다.》
《그래 어디 말해보시오.》
원사가 정색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단군릉 발굴결과는 단군이 평양에서 나서 평양에서 묻혔다는것을 말해주고있습니다. 단군유골이 5천년동안 존재할수 있은것은 그가 평양에서 나서 평양에서 묻힌 전제하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평양을 생각했는가 그 말씀이지요?》
《그렇소!》
《처음에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의 단군릉발굴의지를 깨달으며 어렴풋이나마…》
(그런데 원사인 나는 왜 아예 캄캄이였던가?)
원사는 마음속으로 몸부림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