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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대박산마루> 제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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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545회 작성일 15-12-14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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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람 살려줘요ㅡ》

당장 어떻게 될것 같은 다급한 소녀애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돌우에 삐죽이 드러난 칼날같은 바위츠렁을 꽃순같이 작고 연약한 손으로 붙잡고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있는 소녀의 몸은 세찬 물결에 휘감겨 빨래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솜옷을 벗어던지고 첨벙 물에 뛰여든 총각애는 얼음처럼 찬 이른 봄철의 골물을 헤가르며 소녀애를 향해 첨벙첨벙 다가간다. 구원자를 본 소녀는 고무줄처럼 탄성이 있는 긴팔로 총각애의 목을 꽉 휘여감는다. 총각애는 숨이 막힐듯 했으나 소녀를 구원해야 한다는 일념때문에 탓하지 않고 서둘러 기슭으로 나온다.

소녀애는 예닐곱살쯤 나보인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소녀애를 들여다보던 총각애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어린다.

총각애는 소녀보다 일여덟살은 더 나보였다.

그들은 바람을 피해 산비탈 양지쪽에 앉아 기이한 인연(아직은 그렇게 말할수 없지만)을 맺어준 강물을 내려다보고있었다. 소녀애는 총각애가 물에 뛰여들 때 벗어놓았던 솜저고리를 후렁하니 입고있었다. 총각애는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있으면서도 애써 추운 티를 내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이 둘 다 콩콩 뛴다. 소녀애는 금방 닥쳤던 공포때문이고 총각애는 그를 구원했다는 기쁨때문이다. 봄의 훈향이 그들의 몸을 인차 덥혀주었다. 가슴도 어지간히 진정시켜준다.

《너 어쩌다 물에 빠졌댔니?》

《나비가 앉았댔어, 노랑나비. 저기…》

이제야 자기를 수습한 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자기가 필사적으로 목숨을 지탱하고있던 물우의 뾰족바위를 가리켰다.

그 소리에 총각애는 어른처럼 히히 웃었다. 소녀가 깔깔 따라웃었다.

둘의 마음이 동시에 즐거워졌다.

《앞으로 그러지 마. 그땐 누가 꺼내주겠니?》

《고마워, 오빠.》

소녀는 총각애의 팔을 끼며 젖은 머리칼이 함치르르한 머리를 총각의 어깨에 기대였다. 그러자 총각애는 갑자기 뭔가 소녀를 위해 주고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에게 줄것이 없을가 하여 고개를 빼들고 사방을 살핀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총각애는 실망하여 다시 눈길을 소녀애에게 돌렸다.

《내 이름은…》하고 소녀애가 쪼꼬만 입을 오물거리자 총각애가 손바닥으로 다급히 그의 입을 가린다.

《네 이름은 내가 안다.》

《어떻게 아니?》

《안다니까!》

《그래두 대줄래.》

《정 그러면 난 성을 낼테야!》

소녀가 놀란듯 총각애를 쳐다보다가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럼 오빠이름은?》

《대줄수 없어.》

《오빤 참 별나구나.》

참 이상한 싱갱이질이다. 이때 총각애가 무릎을 모으고앉아 바로 발앞에서 옥색의 패랭이꽃을 발견하고는 신기한 보물을 얻은듯 기뻐하며 정히 꽃을 꺾어 소녀의 젖은 머리에 꽂아준다.

소녀애가 그 꽃을 뽑아서 눈앞에 들고 들여다보며 《야, 곱구나!》한다.

《야, 머리에 도로 꽂아라.》

《아니, 들고 볼래.》

《너 꽂지 못하겠니?》 총각애가 성을 낼 잡도리이다.

허나 소녀애는 방글거리기만 한다.

《나 이것 오래오래 건사할래.》

《정말?》

소녀애의 생각을 알아맞힌 총각애가 이렇게 반문하며 성을 풀고 기뻐한다.

《응, 나 정말 그렇게 할래.》

소녀는 총각애의 몸에서 자기 팔을 뽑으며 불현듯 《오빠, 나 나비, 노랑나비 잡아줘!》한다.

《그 나비때문에 혼나구두?》

《아니, 아니야! 나 노랑나비!》

《너 고집쟁이로구나!》

총각애가 손을 들고 일어서며 어디에 노랑나비가 있을가 사방을 살피는데 《저기 있다.》하고 소리치며 소녀애가 먼저 달려간다. 그는 홀릴듯 나풀거리는 노랑나비를 쫓아 관목숲속으로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관목속에 무지무지 연분홍진달래가 곱게 피여있다.

하늘에 종다리가 지종지종 우짖는다.

총각애가 고개를 젖히고 한참 종다리를 쫓고있는데 소녀애가 노랑나비를 잡아가지고 나타난다.

《자, 이건 오빠가 가져!》

《내가?》

《오빤 나한테 꽃을 주었으니까.》

응당 나비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또 나름대로 보답을 해보겠다는 사랑스러운 소녀를 한참이나 바라보고있던 총각애가 갑자기 머리를 외로 돌려버렸다.

《오빠 우누나.》

소녀애는 올롱해진 눈으로 총각애의 상기된 눈시울을 들여다보았다.

《쳇, 아니야, 울긴…》

《그런데 왜 그래?》

《난 나비를 안가져도 돼.》

《나를 살려준 값이야.》

《이게 값이 되니?》

《적어? 그럼 내 두구두구 갚을게. 지금은 이것밖에 없어!》

총각애는 소녀를 담쑥 안아들고 앵두빛같은 빨간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춰주었다. 소녀는 싫지 않은듯 캐드득거리며 그의 품에 오래도록 안겨있다.

이윽고 총각애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소녀애가 말했다.

《우린 래일 평양으로 이사간댔다.》

《나도 알아.》

《어떻게? 오빤 뭐나 다 안대.》

소녀는 이상한 눈으로 총각애를 바라보았다.

《다 아는 수가 있지.》

《오빠도 평양으로 와.》

《넌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가지만 난 가지 못해. 우리 아버진…》

거기까지 말한 총각애는 왜서인지 말을 끊고 입술을 감빨았다.

《농장원이거던. 땅을 떠메고갈수는 없단 말야.》

그 말을 들은 소녀애는 금시 생사기로에 처했던 자기 처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총각애를 련민이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진 과학원으로 간대.》

《것두 알아.》

《오빠 과학원이 뭘 하는덴지 아니?》

《몰라.》

태양이 총각애의 얼굴을 직선으로 내리쪼이지만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그것은 패랭이꽃이 곱고 종다리가 우짖으며 방금전에 소녀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번 했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골물이 흐르는 이 강동땅에서 이처럼 좋은 봄날에 사랑스런 소녀를 다시 볼수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며들었기때문이다. 검은 속눈섭에 파묻힌 역시 검은 두눈과 연약하고 의지할곳 없는듯 한 매혹적인 긴 목을 처음 보는듯싶었다.

이 소녀의 곁에서는 자신도 어린애로 느껴졌으며 자기 어깨에 실린 온갖 시름을 모두 잊게 되는것이다.

헤여지게 되였을 때 소녀가 갑자기 물었다.

《정말 내 이름을 알아?》

《안다는데!》

《거짓말 아니지? 한번 불러봐!》

책상우에 엎드린채 쪽잠에 들었던 그는 소녀의 이름을 막 부르려다가 꿈에서 깨여났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꿈은 완강한 의지로 자기의 기억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던 추억의 한쪼박을 펼쳐놓았다. 바늘로 찌르는듯 한 아픈 추억을! 가슴에 박힌 무수한 파편쪼각들은 그 녀자의 이름에 응결되여 예리한 큰 칼로 찔러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 이름이 제일 두려웠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펜을 찾아들었다.

그러나 추억은 꿈에서만 아니라 생시에도 살아나는 법이다.

…그는 대학입학시험관으로서 교실안을 왔다갔다하고있었다.

응시자들은 자기가 아는것을 한자라도 더 많이 써야 한다는 하나의 열망으로 문제가 제시되자부터 시험지우에 부지런히 펜을 놀리고있었다.

중학교를 금방 졸업하고온듯 한 한 어린 처녀만이 인차 쓰지 않고 머리속에 답안을 굴리고있었다. 긴 속눈섭속에 까만 진주처럼 묻혀있는 눈동자, 눈을 쪼프리고 사색에 골몰하는 그 눈동자는 가랑잎들이 쌓인 숲속에 숨어있는 보석과도 같았다. 10여년동안 그 보석을 언제한번 잊은적 있었던가.

그는 그 처녀를 대뜸 알아보았다.

《아!…》

그는 그 이름을 피해 추억을 계속 더듬어나갔다.

언젠가 전국중학생들의 영어경연에서 1등을 하여 텔레비죤에 소개될 때 그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던 그였다. 어렸을 때의 그 모습을 찾아보느라고 했다. 모색은 많이 변했지만 그 눈빛만은 기억속에 뚜렷했다. 그 이듬해 다과목경연에서 또다시 1등을 한 그를 보고 얼마나 기뻤던가.

한동안이 지나서 처녀는 머리를 숙이고 원주필을 달리기 시작했다. 처녀의 등뒤에 가선 그는 시험지를 들여다보고 마음속으로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수재로 자라났구나!

그는 처녀가 시험지를 바치고 나갈 때 처녀의 잔등을 가볍게 건드리며 《시험이 끝난 다음 기숙사 407호실로 오시오.》라고 속삭였다.

시험을 치느라고 긴장했던지 처녀는 《네!》하고 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까딱했다. 시험관이 부르니 긴장해져서 덤비며 사라지는 처녀…

처녀가 방에 들어와도 문을 등지고앉아 책에서 얼굴을 떼지 않고있는 한 괴짜만 아니였다면 정말 빈방이였을것이다. 처녀는 발볌발볌 그한테 다가가 등뒤에 서서 이리저리 그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너머로 패랭이꽃 한송이를 살그머니 떨어뜨렸다.

와닥닥 뛰쳐일어난 그는 목이 긴 늘씬한 처녀를 쳐다보았다.

《그간 안녕하세요, 오빠!》처녀가 말했다.

《난 며칠 기다리다가 단념했었지. 왜 인차 오지 않았소?》

《누군지 몰라서 며칠 생각하느라고 늦었어요. 여기 사람들을 통해 오빠의 고향이 우리 고향과 같다는걸 알고서도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오늘 아침에야… 용서해요.》

처녀가 미안한듯 머리를 숙였다.

《그렇단 말이지?》

그는 처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부모님은 아직 강동에 있어요?》

《응. 아버님이 홀로… 그래서 난 기숙사생활을 하고있지.》

《불편하겠군요.》처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진 사회과학원에 있어요. 거기서 우리 나라 력사를 연구하셔요.》

《우리가 무슨 그런 말만 하고있담, 이 기쁜 장소에서!》

그는 처녀의 두손을 이끌어 창문쪽으로 돌아서며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처녀의 이름을 불렀다.

《례영이를 이렇게 다시 만날줄이야. 참, 대학엔 붙었겠지?》

그는 입학자명단이 발표되는 첫날에 벌써 그의 이름을 새겨보았었다. 하지만 다시 꼬집어 물었다. 기쁨은 나누면 두배로 커지는 법이다. 례영이가 웃음을 함뿍 머금고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떨어졌어요.》

《거짓말!》

둘이가 손을 맞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붙었어요!》

《나도 벌써 봤어.》

《그런줄 알았어요.》

처녀는 패랭이꽃을 창턱에 놓인 꽃병에 정히 꽂아놓았다. 그러던 처녀가 갑자기 처량한 모습을 지었다.

《오빠, 나 배고파요. 찹쌀기름튀기가 먹고싶어요.》

그는 당황해났다.

《우리 방에 한사람 또 있어. 그 동무가 오면 내 돈을 얻어보겠어. …》

《돈은 저한테 있어요. 적어도 한개값은.》

당황해하는 그와는 달리 처녀에게는 자기들의 상봉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례사롭고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처녀와는 달리 도무지 정신을 수습할수 없었고 점점 더 어리둥절해지는것이였다.

이 몇해어간 그는 자기 일에만 골몰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머리에 어학지식을 다져넣는외에는 아무것에도 눈을 팔지 않았다. 텔레비죤에 소개되는 처녀의 중학시절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후렁한 솜옷을 걸치고 바들바들 떨던 소녀의 모습을 몇번 상기한것이 고작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처녀는 물에 빠졌던것을 구원해준 조그마한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옛모습그대로 기억속에 보존되여있던 사람이나 물건의 모양이 세월이 흐른 뒤에 어떻게 변모되였는가를 보게 되면 어차피 놀라든가 혹은 두려워하거나 기뻐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10여년전은 물론 몇년전에 텔레비죤에서 보았던 소녀와 까만 눈을 내놓고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처녀를 보았을 때 자기자신이 무엇을 느꼈던지조차 알수 없었다.

《그래 집은 다 무사하오? 어머니랑?》

역시 공연한 물음이였다. 처녀는 대답대신 가볍게 고개를 까딱까딱 해보였다.

자기가 펼쳐놓았던 책에 눈길을 주는 처녀의 머리칼에는 독특했던 향촌의 봄향취와 지글지글하던 해빛과 야생적인 물비린내가 보존되여있는듯 했다.

기숙사를 나선 그들은 구내 매점에서 찹쌀기름튀기 한개를 사들고 이리저리 공원의자를 골라 나란히 앉았다. 큰 음식꾸레미를 펼칠것처럼…

이 시절 처녀들의 기분이란 순간에도 열두번 변하는것이였다. 처녀는 기분좋게 찹쌀기름튀기를 한입 먼저 베먹고(먹는척 했을뿐이다. ) 《자, 오빠차례!》하고 그에게 내밀며 까르르 웃었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한입 덥석 베여먹었다. 다시 까르르 웃는 처녀의 웃음소리가 공원구내에 메아리쳤다.

미구에 처녀가 웃음을 걷고 정색해서 물었다.

《오빤 아직도 자기 이름을 안 대주었지요?》

처녀의 질문이 너무도 응당한것이였으나 그는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랐다.

처녀가 계속했다. 《난 어머니한테서 두고두고 욕을 먹어왔어요. 은인의 이름 석자도 모르는 맹꽁이같은 계집애라구.》

《그 욕은 앞으로도 계속 먹어야 할거요.》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였다.

《그건 왜요?》

《나하구 약속해. 다신 이름을 묻지 않겠다구.》

《오빤 참 이상한데가 있어.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구? 오빠가 안 대줬다고 해서 내가 모를가봐? 내가 불러볼가요?》

처녀가 그 고운 입술을 막 열려는 순간 그는 다급히 그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처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쳤다.

《정 그럼…》

처녀는 그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글을 새겼다.

《신ㅡ진ㅡ웅.》

진웅의 실망한 표정을 보면서 처녀가 물었다. 《왜 기분이 갑자기 그래요? 내가 알지 못할걸 알았나요?》

《난 례영이가 내 이름을 몰랐으면 했어.》

《건 왜요?》

《그저, 적어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그럼 좋아요. 그때까지는 이름을 안부르기로 약속해요. 그저 오빠라고만 부를래요.》

얼마나 정이 가는 례영인가.

그다음 추억은 토막이 졌다.

추억은 끈질기게 그의 눈앞에서 배회하며 그를 괴롭히고있다.

발굴조성원들과 함께 강동군 려관의 한 방을 차지한 그는 머리를 싸쥐고 몸부림쳤다.

 

13

 

톱밥이 천천히 타면서 느물느물 흰 연기를 피워올리고있었다.

리관직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박진규는 자기 조성원들을 데리고 강동읍 제재소에 가서 마른 톱밥을 날라다가 봉분앞 입구에 덮고 불을 달았다. 언땅을 녹여 여름의 자연조건과 같이 만들려는 작정이였다. 사실 박진규는 이 방도를 찾느라고 며칠 더 지체한것이다.

하루, 이틀, 사흘…

박진규가 며칠동안 수굿하고 톱밥연기속에서 날자를 보내고있을 때 리관직은 승용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드나들며 드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 발굴사업이 수령님께서 관심하시는 일이라는것을 재삼 강조하거나 그런것만큼 지방당조직이 잘 도와주어야 한다는것, 민족사연구에서 하나의 혁명과도 같은 중대한 일이 바로 지금 이 고장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의미심장한 어조로 호소하면서 시간이 모자라 쩔쩔맸다. 지방당조직에는 이미 통보가 내려와 이곳 일군들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였지만 그는 재삼 강조하였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언행을 결코 회의때마다 어떤 문제를 세번네번씩 곱씹어 강조하는 《잔 일군》의 위구심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능력이 한계점에 이를 때까지 책임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던것이다.

야밤중에 발굴조성원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 함께 톱밥연기를 들이키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그는 영낙없이 졸군 하였다.

숙소로는 그가 《수완》을 발휘하여 가져오는 후방물자들이 련속 들이닥쳤다.

《자, 지방당조직들에서도 관심이 큰데 그들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하루빨리 다그칩시다! 한시라도 빨리…》

발굴조성원들이 좋아했다.

《역시 관직부원장이 할줄 알거던.》

하지만 박진규는 조금도 조급해하는것 같지 않았다. 언 봉분을 녹이는 작업은 며칠째 계속되고있었다. 리관직은 매일같이 박진규를 볶아댔다. 그의 마음 같아서는 아마 장작을 활활 태웠으면 했을것이다. 허지만 박진규는 마음속에 정해놓은 날자가 있었으므로 끄떡하지 않았다.

그 날자를 하루 앞둔 날.

그러나 리관직의 시간표에 따르면 그날이 발굴착공의 날이였다. 리관직은 전날에 벌써 군급책임일군들을 부르고 사회과학원에도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발굴이 시작되는 이날을 력사적인 날로 되게 하고싶었다.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는 이런 발굴에서 성과가 있으리라는것을 확고히 믿어마지 않았다. 믿었다기보다는 열렬히 갈망했다.

이른아침 군의 책임일군들이 먼저 여러대의 승용차에 분승해 도착하였다. 뒤미처 과학원에서도 수십명의 사람들이 뻐스를 타고 내려왔다. 그 수십명은 과학원의 지도일군들이였다.

지도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과학분야에서처럼 집중되여있는 부문은 없을것이다. 매 지도일군들은 과제를 주고 그 수행정형을 검토하며 착상을 귀띔해주고 론쟁에 대한 해명을 주며 또 고무하며 약속하고 떠밀어주어야 한다. 헤아릴수 없는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더 높은 지도적지위에 오르는 사람일수록 그에게는 과학적사색에 돌려질 시간이 적게 차례진다.

이러한 보편적인 조건이 자기 전공을 우수하게 마치지 못했으며 그후에도 여전히 자질향상을 사활적인 요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있는 리관직이와 같은 사람들의 존재공간으로 된다. 이 공간에서 능력을 정도이상으로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분주해보인다. 그런 사람들이 《일을 제끼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총화사업때 앞줄에 앉게 되는것이다.

리관직이로 해서 (전적으로 그런것은 아니지만) 발굴장에는 군과 사회과학원만이 아닌 각급 과학지도단위의 승용차들이 모여들었다.

리관직은 발굴시작을 알리려는듯 박진규를 바라보았다.

박진규는 그에게 등을 돌려댔다. 봉분곁에는 하루 더 태울 분량의 톱밥이 덧쌓여있었다. 아연해진 리관직은 내심을 애써 감추며 박진규에게로 다가가 《여보게, 누굴 망신시킬셈인가?!》하며 잔등을 쿡 찔렀다.

박진규가 응대를 하지 않자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사정하듯 말했다.

《하루 앞당긴다고 대순가, 응?》

《덤빈다구 되는게 과학이 아니네!》하고 박진규는 그의 조급성을 리해하려고 애쓰며 사람들이 들리지 않게 충고를 주었다. 리관직은 마음이 안달아났으나 한마디 더했다가는 《고집불통》으로 소문난 그의 입에서 또 무슨 험한 소리가 쏟아져나올지 몰라 주저하였다.

진중한 표정을 짓고 모여섰던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머리를 기웃거리며 그들 두사람을 주시했다.

리관직은 응원을 청하듯 그들속에서 김석진을 찾아내여 눈길을 주었다. 그 눈길의 의미를 알아차린 김석진이 한발 나서더니 학자다운 침착성으로 봉분을 한동안 바라보며 생각을 굴리였다.

톱밥이 타는 연기가 느물느물 피여오르고있었다. 그것은 조심히 그리고 침착하게, 그리하여 유물 한쪼각이라도 상해서는 안되는 이번 발굴사업의 신중성과 심각성을 말해주는듯 하였다.

김석진은 지난밤 발굴을 시작하겠다는 부원장의 보고를 받은 다음 결론을 주지 않고 박진규를 현장의 전화앞으로 불렀다. 그때 박진규는 하루 더 언땅을 녹인 다음에 해야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부원장을 다시 찾았으나 누구도 그의 행처를 몰랐다. 오늘 아침에 중요한 전화가 있어서 뒤늦게 청사마당으로 나오니 과학원지도일군들은 이미 이리로 떠난 뒤였다. 그가 받은 중요전화가 수령님께서 걸어오신 전화라는것을 아직까지는 김석진밖에 아는 사람이 없다. 침착하게, 덤비지 말라는것이 그이의분부이시였다. 이러한 김석진이 누구의 편을 들것이라는것은 뻔했다. 대뜸 그의 속마음을 짐작한 리관직이 눈치빠르게 《조급한 마음에 제가 너무 서두른것 같습니다.》하고 잘못을 먼저 인정했다.

《그럴수도 있지요.》 김석진이 너그럽게 그의 체면을 세워주며 자기네 과학원사람들이 아니라 군의 일군들앞으로 다가가 죄송한 표정을 짓고 겸손하게 사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과학이란게 갑론을박하는 사업입니다.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다들 바쁘겠는데 다시 모여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군에서 관심을 돌려준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군에서 왔던 일군들이 돌아간 다음 김석진은 과학원일군들에게 말하였다.

《이번 발굴사업은 침착하게 덤비지 말고 하여야 합니다.》

그는 방금전에 수령님의 전화를 받은데 대하여 이야기하고나서 그자신부터 이번 일에 침착하게 대하겠다는 결심을 다지듯 신중한 어조로 계속하였다.

《수령님께서는 이런 내용으로 말씀하시였습니다. … 발굴사업이 그저 땅을 파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사업인만큼 행사장으로 만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침착하면서도 세밀히 하여야 합니다. 추운 때에 발굴하는 조건에서 무덤의 시설물이나 유물에 자그마한 손상이 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발굴장을 연구실화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발굴조가 하는 일에 지나치게 간참해서는 안됩니다. 수술할 때에 집도자에게 여길 베라, 저걸 떼내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도자는 당황해서 수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것입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

학자들은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오늘 밤은 현장당번만 남기고 려관에 가서 푹 쉬시오. 래일부터 발굴을 시작하면 언제 쉴 사이가 없을거요.》하고 원장이 등을 미는바람에 읍려관으로 돌아온 박진규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는 아침에 한 원장의 말을 마디마디 되새기면서 수령님께서 이번 발굴사업에 대하여 얼마나 주도세밀하게 관심을 돌려주시는가 하는것을 깨달았다. 학자인 자기가 생각지 못한 세세한 부분까지 가르쳐주고계시는것이다. 이것은 지금껏 오랜 세월 고독하게 견지해온 자기의 《성당》, 《신자》하나 없이 외로운 《신관》만이 있던 그 고립무원한 《성당》이 수령님의 집무실로 옮겨졌음을 의미한다. 하늘을 위해 있는 《성당》이 하늘에 올랐으니 벌써 《성당》이 아니다. 이젠 하늘이다.

하늘에는 해빛만이 찬란할것이다!

그는 종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려관밖으로 나왔다. 늦겨울밤대기가 대충 걸친 겉옷짬으로 스며들었으나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려관뜨락을 흥분된 심정으로 거닐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딸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이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한다.

진규는 딸을 제일 잘 알고있다고 생각해왔다. 명랑하고 당돌하며 손끝이 여무지고 자기를 닮아 바른소리를 잘하는것으로 하여 박진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있는 딸이였다. 그 딸이 갑자기 나이를 열살은 더 먹은듯 한 진중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래 무슨 일로 얼음구멍안에 들어갔댔니?》

《아버지, 그게 무슨 큰 일이예요. 다른데 정신 분산시키지 말고 이번 발굴에서 꼭 성과를 바래요.》

딸은 중요한 사업을 위해 떠나는 아버지에게 근심을 끼쳐 미안하다는것과 자기도 아버지를 힘껏 돕겠다는 말을 했다. 딸이지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싶도록 고마왔다. 그도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에서 연구사로 있으니 도움을 받을수 있을것이다. 묻고싶은것이 많았으나 단념하고 전화를 끊었다.

로친은 알고있을것이다. 딸이 무슨 연고로 야밤삼경에 얼음구멍에 빠졌는가를…

그 어떤 부주의에 의한것이겠지. 그렇지 않다면야 아무렴 박진규의 딸이 정신이 나갔다고 얼음구멍에 들어가겠는가.

박진규는 자기에게 편리한 쪽으로 애써 생각을 돌리였고 그렇게 단정짓고말았다. 래일 있을 발굴사업만이 꽉 차있는 그의 뇌수속에 딸에 대한 생각이 오래 남아있을 자리가 없었다. 때마침 하늘을 가로지르고 사라진 별찌처럼 그 생각은 까마득히 사라지고말았다. 그리고 래일의 발굴을 생각했다. 밤중으로 언땅이 녹아야겠는데…

문득 김석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밤 원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가? 누구누구해도 회답서한을 받은 당사자는 김석진이니 그의 심리가 제일 복잡할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밤산책을 하던 박진규는 유독 불이 켜져있는 려관의 한 창문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방으로 들어가고싶은 생각이 났다. 그 방에 누가 들어있다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참 이름도 묻지 않았지. 언어학연구소에 있다는 젊은 연구사…)

 

×

 

이밤 박진규의 예측대로 사회과학원의 5층청사에서 원사의 방전등만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고있었다. 원사는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 생각에 골몰하고있었다.

어찌하여 수령님께서는 단군릉을 기어이 파보자고 하시는가. 단군릉이 우상이고 단군의 실체를 증명해줄수 있는 그 어떤 유적유물도 나올수 없다는데 대하여 또 그 경우에 당의 권위에 루가 갈수 있다는것을 설명해드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인하시는걸 보면 그 어떤 타산이 계신다. 그것이 무엇일가.

지금 원사는 거대한 용단을 내린 수령님의 그 심중을 헤아려보기 위해 골몰하고있다. 허나 좀처럼 생각이 잡히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머리의 공허, 답답한 가슴… 내가 무슨 과학계에서 원로란 말인가. 과학자가 아닌 그이께서, 나라의 전반정사를 돌보시는 그이께서 타산하신것을 나는 어찌하여 짐작조차 못하는가.

그이의 깊은 속마음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채 무능한 자기를 원망하며 원사는 생각을 굴리고 또 굴리였다.

그이께서 자신의 타산을 먼저 말씀하시지 않은것은 과학을 생각하여서이다. 언제 한번 과학문제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신적이 계시였던가. 그런데 나에게는 아무러한 타산도 없다. 아무러한 타산도 없이 래일의 발굴을 해야 한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력사학분야에서는 수령님을 보좌해드려야 할 자기가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지 않고는 한걸음도 나갈수 없지 않는가.

원사는 가슴을 치고있었다. …

과학을 중시하고 과학사업을 떠밀어준 당과 수령의 의지는 우리 과학자들에게 혈관속의 피처럼 한시도 멈춤이 없이 흐르고있었으니 지금 원사도 그 의지로 심장의 박동을 울리며 과학적사색에 골몰하고있는것이다.

그이의 타산은 무엇일가, 무엇일가?…

밤은 삼경으로 깊어지고있었다.

이밤 두분께서도 밤을 지새고계시였다.

미국은 우리의 핵시설에 대한 선제타격을 계획하고 방대한 병력을 실전배비하였다. 정세는 전쟁접경에로 치달았다. 하여 두분께서는 마주앉아 대응책을 세우고계시였다.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의 탈퇴와 준전시상태의 선포!…

그러나 우리 인민들은 아직 이것을 모르고있었다.

두분께서만이 알고 두분께서만이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지켜낼 방책을 모색하며 밤을 지새고계시였다. 두분께서는 나라에 그 어떤 비상사태가 조성된다고 해도 단군릉발굴, 민족의 원시조를 찾는 일만은 중단치 않고 계속할 의지를 피력하시였다.

후날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원사는 큰 충격속에 40여년전의 일을 추억하였다.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전후복구의 어려운 나날에도 과학사업이 중단된적은 한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전화의 나날에 과학원이 창립되였고 전화의 날에 세상에서 처음으로 전반적무상치료제가 실시된 이 나라이다. 백송리로 대학생들을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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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백송리로 대학생들을 소환한것도 그때 있은 일이고 전후복구건설의 계획도가 마련된것도 전화의 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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