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설 <대박산마루> 제 18-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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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8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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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산의사당 회의실에서 돌아와 쏘파에 몸을 던진 리관직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수령님을 모신 좌석에서 자기가 부지중 올린 대답을 좌중이 공감하지 않았을뿐더러 수령님께서도 침묵하시였다.
그는 실언을 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오랜 세월 마음에 간직했던 말을 한것이였다.
(수령이 바라시는것이라면 무조건 해내겠다! 하늘에서 별이라도 따오겠다!)
그의 행적을 보면 례컨대 대학에서 그리고 과학원에서 오래동안 일해오면서 늘 그렇게 말해왔고 당과 수령이 바라는것이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할 기세를 보여주었다. 행동이 얼마나 뒤따랐는가 하는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람이 말에 의하여 평가되는 때가 없지 않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들의 마음은 깊은 곳에 숨어있으니까. … 사람을 평가하는 직분을 가진 일군들이 품을 들이지 않거나 조금만 태공하면 진짜보석은 놓치고 가짜를 진짜로 보게 된다. 가짜들의 언사가 초당적일 때 어지간한 일군이 아니고서는 어쩌지 못한다.
리관직은 바로 그러루한 언사들로 등용되고 발전하여왔다고 할수 있었다. 그런데 자기의 전생애를 떠밀어주다싶이 한 그 《훌륭한》언사가 수령인 그이께 불쾌감을 드렸다. 틀림없이 기쁨을 드리리라고 믿었던 일이 역전되였다.
리관직은 머리를 싸쥐고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자기의 말이 아니, 전생애의 생활방식이 부정된 지금 자신을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오랜 기간 자기 행동의 합리성을 찾는데 습관되여있었다. 말이 있어야 실천이 있지 않는가. 선동력으로 대중의 실천을 추동한다면 그것이 곧 나의 실천이 아니란 말인가. 뱅글뱅글 돌던 그의 머리가 지금은 정지상태에 빠졌다. 정지된것은 머리만이 아니라 리관직이라는 인간을 움직여오던 맥박도 호흡도 혈압도, 말하자면 모든 생명활동수치들이 정지되여 령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죽음과도 같은 정지상태에서 그는 정화되고있었고 그속에서 환생의 메아리를 듣고있었다. 그 메아리는 어데서 울려오는것인가?
그는 그 메아리가 어데서 울려오는것인가를 알았지만 이번만은 찾아가지 않고 스스로 듣고있었다.
먼저 인간이 되라. 박진규는 친구가 아닌가. … 그와의 관계부터 풀라던 당조직의 충고, 《잡소리》문제를 들고나온것이 결코 비인간적행위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귀등으로 흘려버렸던 당조직의 충고가 절망적인 이 순간에 환생의 메아리로 느껴지는것이였다. …
한밤중에 박진규가 사는 아빠트에 도착한 리관직은 출입문가에 서서 숨을 크게 내쉬였다.
사업상용무로 차를 타고 와서 문가에 선채로 간단히 용건을 말하고 돌아선적이 두어번 되고 박진규의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조객으로 한번 왔을뿐 이 집에 들어가본적이 없었다. 그는 몹시 주저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박진규의 안해나 혹은 딸이 나올가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당사자가 문을 열었다.
박진규는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밤중에 안됐네. 집식구들에게 미안해서 그러니 우리 밖에 좀 나가세.》
리관직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황황히 몸을 돌려 계단을 구르며 내려갔다. 마치 박진규가 자기 팔을 잡아끌기라도 하는것처럼…
그는 밖에 나와서도 진정을 못했다.
박진규가 어떤 얼굴로 나타나겠는지?
리관직은 웃사람의 하회를 기다리는 아래사람의 심정으로 박진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박진규앞에서 불안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기의 처지를 두고 기막힌 생각도 없지 않았다.
현장에서 잠간동안 로동생활을 하던 때를 내놓고 승승장구해온 자기의 생애에 이런 무참한 지경에 이르렀던 때가 또 있었던가.
좀 있어 박진규가 나왔다.
그는 정장을 하고있었다.
《어떻게 왔습니까?》하는 박진규의 말투도 공식적인데가 있었다. 이것은 친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것을 간접적으로 표시한것으로서 리관직으로 하여금 가슴이 서늘해지게 하였으며 그와의 매듭이 쉽게 풀리지 않으리라는 위구를 금할수 없게 하였다.
과학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수령님을 여러차례 만나뵙고 단군연구의 주역을 담당한 박진규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고있다. 오늘만 해도 수령님을 모시고 동석식사까지 했다지 않는가. 이러한 사실이 또한 친구(절교한 사이이지만)앞에서 위압감까지 느껴지게 하는것이였다.
그는 먼저 입을 뗄 용기를 잃고말았다.
그렇다고 박진규가 먼저 입을 열 잡도리도 아니다. 찾아온것은 당신이니 당신이 무슨 용건인지 어서 말하라는 태도였다.
그 좋던 구변은 다 어디로 갔는지 한동안 갑자르던 관직이가 떠듬거리며 힘들게 말을 뗐다. 《좀… 걷지 않겠나?》
《…》
그들은 아빠트주변의 공원길을 한참 말없이 걸었다.
《앉자구. 앉아서 이야기하자구.》
리관직이 공원의 긴의자에 먼저 앉으며 자기의 옆자리를 권했으나 박진규는 좀 떨어진 맞은켠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리관직의 말을 기다렸다.
《단잠을 깨워서 안됐네.》
《괜찮소. 어서 말씀하십시오.》
친구관계로 되돌아가려고 애쓰던 리관직의 입은 그의 랭담한듯 한 표정과 공식적인 말투로 하여 다시 막혀버렸다.
두사람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박진규가 입을 열었다.
《금향이는 잘 있습니까?》
《응?… 그래, 잘있네.》
리관직은 그 물음이 뜻밖인듯 박진규를 빤히 쳐다보며 기쁨이 어린듯 한 어조로 대답했다.
금향이란 그의 첫 안해의 몸에서 태여난 딸이였다. 박진규는 금향이가 자기 맏아들과 중학교동무였기때문에 그의 안부를 진심으로 물었다.
리관직은 자기 딸의 안부를 묻는 그의 진정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낼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진규, 난 동무에게 사죄를 하려고 찾아왔네. 난 이래저래 죄를 지었네. 동무에게 용서를 비네.》
《나에게라구요?》
박진규는 놀란듯 리관직을 바라보았다.
《그래, 동무에게가 아니구 누구이겠나?》
그러자 박진규는 왜서인지 《음ㅡ》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리관직은 당황해서 허둥거리며 의자에로 다가가 그의 몸을 안았다.
《어디가 편찮나? 어디가? 이 사람…》
박진규는 자기 몸을 감싸안는 팔을 뿌리치더니 벌떡 일어나 그가 앉았던 긴의자에 가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관직이를 향해 소리쳤다.
《가시오! 가!》
《이 사람, 왜 그러나? 엉? 진규…》
리관직은 그의 옆에 따라가 앉으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고있던 박진규는 잠시후 일어나 자세를 바로 잡고 앉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내리쓸고난 다음 담담한 어조로 침착하게 말했다.
《난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올 때마다 우리의 관계를 풀려고 했소. 수령님의 밝은 안광에 좋지 않은 우리의 관계가 비끼기라도 할가봐 겁이 났던거요. 그래서 내가 먼저 부원장을 찾아가 만나자구 했던건데 이렇게 부원장이 먼저 찾아왔소.》
《진규, 고맙네.》
《내 말을 끊지 마시오.》
《그래, 어서 말하게.》
리관직은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옛 친구를 바라보았다.
박진규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나는 부원장의 말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소. 금수산의사당에서 돌아온 다음 지금까지 줄곧 고민에 빠져있었소. 방금도 자고있은줄 아오? 부원장동문 정말 자신이 있어 수령님앞에서 그렇게 대답을 드렸소? 남들은 말할줄 몰라서 대답을 못드린줄 아오? 자기들의 약속이 공담이 될가봐 주저한겁니다. 그처럼 심사숙고하시는 수령님앞이여서… 그런데 부원장동문 수령님앞에서 죄를 지었단말입니다. 수령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야 뭐가 큰것이겠소. 부원장의 죄는 수령님과의 관계에서 제기된거란 말이요! 정말 괴롭소. 나는 수령님을 만나뵈온 후로는 우리들사이에 있었던 이전 일은 불문에 붙이려고 했소. 그러니 부원장동무의 일에 내가 어찌 무심할수 있겠소. 내가 용서할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소. 그런데 부원장동문 뭐요? 나에게 용서를 빈다구?》
《진규동무의 말이 전적으로 옳소. 그러나 한가지만은 오해하고있소. 나도 인생의 새 출발을 결심했소. 그 첫걸음이 동무와의 관계를 푸는것이지. 말하자면 인간으로 되는것이라고 할가, 이것은 당조직의 충고이기도 했소. 이 한밤중에 동무를 찾아온것이 바로 그래서요. 다시말하지만 지난 일은 다 내 잘못이요! 나를 믿어주오.》
《부원장의 말이 진심이라면 믿겠소. 그렇지만 먼저 말해야 하오. 부원장은 자기의 결함이 뭔가를 똑똑히 알아야 하오. 그것이 납득될 때라야 나는 동무를 받아들일수 있소.》
《진규, 그게 뭐 그리 급한 일이라구… 밤도 깊었는데 래일 천천히 이야기하자구.》
《아니, 난 급하오. 오늘 동무가 이렇게 찾아온 이상 그 말을 꼭 들어야겠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집으로 들어가도 온밤 잠들지 못할거요.》
《글쎄… 뭐라고 꼭 짚어말해야 할지? 내딴에는 뛰고 또 뛰느라고 하는데도 빈번히 실패만 거듭하니…》
《부원장동문 수령님앞에서 죄를 지은 지금조차도 사색을 태공하고있소.》
박진규는 말을 끊었다. 더 말할 흥미를 잃은 그는 갑자기 피로를 느끼며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리관직이 황황히 말했다.
《이러지 마오. 나는 줄곧 생각했소. 그래서 새 출발을 결심한게 아닌가?》
《…》
박진규는 여전히 까딱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었다.
리관직이 사정하듯 말했다.
《동무생각엔 이 리관직의 결함이 뭐 같은가? 동무의 말을 들어보고 받아들일건 받아들이겠네. 이건 정말이네!》
박진규는 이마에서 손을 떼며 부르짖었다.
《동문 이 순간에조차 남의 힘을 빌려는거요? 에익, 자기는 노력하지 않고 횡재를 바라는 불로소득자!》
《뭐, 뭐라구?!》
《그렇소. 건달군!》
《동무,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아, 이런…》
리관직은 총탄을 맞은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흥분한 박진규가 계속했다.
《난 백송리에서 동무를 만난담부터 유심히 보아왔소. 대학시절은 그만두고라도 가정을 이룬다음에 어떻게 했소? 동무때문에 인물곱고 마음씨 착하고 공부를 잘한 녀성, 동무로 해서 전도를 망친 그 안해가 어떻게 되였나말이요. 산후탈로 앓는 몸에… 동무가 탄광에 내려갔을 때 동무는 갱밖에서 빙글빙글 돌았지만 그 녀성이 남편을 돕겠다고 갱안에까지 들어갔지요? 연약한 녀성의 몸으로 그렇게 아글타글하다가 그만… 끝내…》
격하여 말을 끊은 박진규의 두어깨가 경련을 일으킨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후 그의 울음이 엉킨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해의 희생으로 동무는 사람들의 동정을 사게 되고 로동단련을 잘한것으로 평가되였소. 과거를 계산하자고 안했지만 말이 난김에 마저 합시다. 나의 〈잡소리〉문제도 정말 잡소리로 생각했소?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내세우려고 초당성, 초열성을 부린거지요! 정말 동문 무서운 사람이요!》
박진규의 말에는 여전히 울음이 엉켜있었다.
《나도 동무에게 모진 말을 하는것이 괴롭소. 하지만 동무를 위해서 할 말은 다 해야겠소, 동무를 위해서. … 동무도 력사학을 전공했으니 알거요. 계급사회가 어떻게 생겨났소? 불로소득자가 나오면서 생긴것이 아니요. 남의 로력을 착취하는 사람들, 착취계급이 불로소득자인거요! 그런데 오늘 착취계급이 없어진지 오랜 우리 사회에 불로소득을 꿈꾸는 사람들이 생겨나고있소. 동무도 그런 사람들중의 한사람이요. 이런 사람들은 안할 말로 세상이 바뀐다면 하루 아침에 착취자로 둔갑할것이요. 그들은 다 수완가이고 요술로 살아온 사람들이기때문에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의 머리우에 얼마든지 군림할것이요.
사회주의는 나의 생명이며 생활이요. 나는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건달군들, 불로소득을 꿈꾸는자들을 타매하오! 지금껏 동무를 미워한것도 그때문이요. 관직동무, 사회주의를 세운것은 바로 우리 세대가 아니요. 그런데 자신이 세운 사회주의를 왜 부식시키려는거요? 나는 정말 안타깝소!
지금 어떤 사람들은 일을 쥐꼬리만큼 하면서도 입은 항아리만큼 커서 나라로부터 더 많은것을 바라고있소. 나라가 젖짜는 암소는 아니지 않소. 로동이야말로 성실한 인간의 본태인거요. 관직동무, 인간의 이 본태에로 돌아가오. 제발 부탁이요. 성실한 노력가, 사색가가 되여주오, 관직동무. …》
박진규가 긴 말을 끝냈을 때 리관직이도 지쳤고 진규자신도 지쳤다.
그들은 녹초가 되여 오래간만에 서로 몸을 기대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
그들이 눈을 떴을 때에는 벌써 날이 밝아오고있었다.
리관직은 자리에서 일어나기전에 부석부석한 얼굴로 박진규에게 말했다.
《그래 어찌했으면 좋겠나? 생각이 있으면 말해주게. 이건 불로소득을 바라서가 아니네. 동무의 방조가 절실히 필요해서 그러는거네!》
이때 박진규는 학생때 한 항일혁명투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이 이전 쏘련의 원동지방에서 쏘련군인들, 중국의 항일부대성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할 때였는데 한번은 쏘련군관의 담배물주리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찌어찌해서 그 혐의가 조선인민혁명군에 돌려지게 되였다.
그때 인민혁명군의 한 지휘관이 일어서서 분연히 말했다. 《당신들 쏘련동무들이나 중국동무들은 돈을 알고있으며 돈을 쓰고있다. 그러나 우리 동무들은 천리수해 무인지경속에서 돈을 모르고 돈을 쓰는 장마당이라는것도 모르고 생활해왔다. 우리에게 개인의것이 있다면 그것은 목숨뿐이다. 그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서슴없이 내놓는다. 그런데 물주리가 뭐가 돼서 탐내겠는가! 그 물주리는 아마 본인의 부주의로 흘렸을것이다.》
박진규는 이야기를 끝내고나서 리관직에게 말했다.
《나는 항일투사동지의 이 이야기를 가슴에 새겨두고있으면서 흐려지는 마음을 정화하오. 깨끗한 샘물과도 같은 항일혁명투쟁의 그때, 한점의 리기심도 없이 오직 집단주의만이 꽉 차있던 그때에다 바로 내 마음을 얹어보군 한단말이요!》
( 제 19 회 )
30
서쪽하늘로 기운 삼태성이 구름에 가리워졌다.
이때쯤이면 새벽 2시이다. 최전연은 깊은 정적에 묻혔다. 폭풍전야의 정적이다. 쌍심지를 켜고 눈을 더욱더 밝혀야 했다.
새벽 2시는 제일 졸음이 오는 시간이다. 눈을 비비고 머리를 휘젓고 살을 꼬집어도 눈은 끊임없이 가물거린다. 이럴 때면 장대기로도 내리덮이는 눈꺼풀을 받쳐내지 못한다.
살이 내리는듯 한 고통의 순간이다.
최전연의 군인에게는 항상 잠이 모자라고 잠에 들어도 긴장을 풀지 못한다.
이러한 고통들을 이겨내면서 군인은 단련된다, 사람이 된다. 군대에 나갔다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을 무심히 대하지 말라.
진웅은 전호가에 엎디여있었다. 졸음은 참을수 없이 밀려오는데 모기란 놈이 또 성화이다. 비가 오려는지 기압이 낮고 여간만 습하지 않았다. 모기란 놈들도 낮추 떠돌며 조심성도 없이 사람에게 마구 달라붙는 판이다. 손을 휘저어 쫓아버리건만 어느새 코등과 볼따귀, 귀등에 독침을 놓고 날아가버린다.
독침자리가 넙적넙적하게 부풀어오른다. 귀구멍안을 꽉 채우며 앵앵대는 모기소리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마침내 부실부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땅에 붙인 배밑으로 곬을 파며 비물이 흐른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수도 뒤채일수도 없다.
진웅의 임무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우리측 지역으로 들어오는 적의 정찰을 견제하는데 있었다. 전연군인치고 가장 어려운 임무였다.
입대한지 불과 몇달 안되는 진웅이가 이러한 임무를 맡게 된것은 상위 김인철(평양역에서 례영의 물건을 전달해준 인솔군관)의 덕이였다.
중대장인 그가 인솔해갈 신입병사들의 명단에서 진웅의 이름을 눈박아 본것은 그 이름이 낯이 익었기때문이였다.
독서가인 그는 어느 과학잡지에서 고조선의 글자에 대해 쓴 론문을 흥미있게 읽은적이 있는데 그 필자의 이름이 신진웅이였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이름모를 처녀의 편지를 전달해주고 이름을 물었더니 진웅이라고 했다.
두이름의 임자가 한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된 김인철은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중대의 주둔지(전투구역) 깊은 골짜기에는 오랜 비석이 서있었는데 그것이 학식가인 김인철의 눈을 끌었다. 그런데 비석이 서있는 골짜기가 군사분계선이 지나간 우리측 구역이긴 하지만 바위벼랑밑이고 전쟁시기에 매설된 지뢰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구역이여서 들어가 볼수 없었다.
김인철은 쌍안경의 확대배률을 최대로 놓고 비석을 훑어보는 과정에 이끼속에서 드문드문 드러나는 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도 아닌 해괴한 새김을 발견하고 력사유물이라고 단정했다.
학자들이 보면 흥미를 가질텐데…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생각을 가졌지만 학자들을 분계연선으로 데려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러한 김인철이 진웅이를 만났으니 쾌재를 올릴만도 하였다. 그를 데려가면 기회는 얼마든지 생길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상급에 제기하여 진웅이를 자기 중대로 끌어왔던것이다.
김인철이 지금 그의 곁에 엎디여 고명하신 학자선생님을 잘 돌봐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초소근무를 함께 수행하고있었다.
그가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졸리오?》
《예.…》
《배고프오?》
《예.…》
《모기가 꽤 성활 부렸지?》
《비내리기전까지는 혼났습니다.》
《솔직해서 좋소. 이것 보오, 진웅동무. 참아야 하오. 참고 이겨내는것이 군인생활이지.》
김인철이 진웅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진웅은 자기보다 두살아래인 중대장의 손길에서 맏형의 살뜰한 정을 느끼며 참말 좋은 지휘관을 만났다는 생각을 하였다. 김인철은 그가 만난 첫 전우이고 지휘관이였다. 그에게서 받은 첫 인상 또한 얼마나 놀랍고도 충격적이였던가…
렬차가 평양역을 출발하자 김인철은 대렬점검을 시작하였다. 그가 부르는데 따라 군인들은 《옛.》하고 힘차게 대답하며 일어서서 자기의 얼굴을 선보였다.
중간쯤에 진웅의 이름이 있었다.
《신진웅동무.》
《옛!》
김인철은 진웅의 선을 다른 사람보다 좀 오래 보고나서 점검을 계속했다. 100여명 군인들에 대한 점검은 퍼그나 오래동안 진행되였다. 마지막인원까지 확인하고난 김인철은 대렬명단을 차곡차곡 접어서 전투가방에 건사하더니 진웅의 앞으로 다가왔다.
《우린 구면이로구만!》
《저도 그렇습니다.》
두사람은 방금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을 념두에 두고 이렇게 인사를 나누었다.
《앉아도 좋겠소?》
《예, 어서 앉으십시오, 상위동지.》
진웅은 군인의 례법대로 일어서서 지휘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의 곁에 앉은 김인철이 군인식으로 직판 물었다.
《학자선생이 옳소?》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지내기요. 내 이름은 김인철이요.》
그는 진웅의 손을 잡아흔들고나서 과학잡지에서 론문을 본 소리를 꺼내더니 론문의 내용을 쭉 이야기하는게 대단한 학식가라는것이 느껴졌다.
무릇 사람들은 자기가 쓴 글에 흥미를 가지는 독자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법이다. 진웅은 녀자처럼 곱게 생기고 마음 또한 고와보이는 이 지휘관에게 대번에 마음이 끌렸다.
학문하고는 인연이 멀다고 생각한 군인이 학문에 흥미를 가지는 사실에서 더욱 호감이 갔는지도 모른다.
두사람은 구면친구처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인철의 요구에 의하여 진웅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자기 말을 흥미진진하게 들어주는 상대앞에서 지금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있다는것과 연구과정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시간가는줄 모르고 이야기했고 김인철은 연신 고개를 끄덕여가며 열중해서 들었다.
어느덧 차창밖이 어두워지고 차내전등이 켜졌다.
두사람의 이야기는 저녁식사시간을 내놓고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진웅의 이야기가 거의 바닥이 날 무렵 김인철이 문득 물었다.
《아까 내가 전달해준 편지말이요. 그걸 전해달라던 처녀가 대단한 미인이던데 혹시 애인이 아니요?》
애인말이 나오자 진웅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전 애인이 없습니다.》
《하긴 그렇소. 그 처녀가 애인이라면 편지를 동무한테 직접 주었겠지. 하지만 남몰래 동무를 사모해온 처녀일수 있지 않소?》
《그것도 아닙니다.》
《편지를 보았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인지 압니다.》
《함께 보지 않겠소? 혼자만 봐야하는것이라면 관두고…》
《아니요. 이제 보십시오.》
진웅은 선뜻 응하며 배낭뒤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편지를 꺼내주었다.
《먼저 보십시오.》
《무슨 사연이 있는 편지같은데…》
《하찮은 내용일겁니다. 아무런 력사적의의가 없는…》
진웅은 자포자기상태에 있었다.
《력사학자가 돼서 그렇소? 모든 일을 력사적의의가 있는것과 없는것으로 구분하는 버릇이 있구만.》
인철은 웃었다.
《얼마만큼이나 하찮은것인지 내가 먼저 보지.》
《…나는 숯불처럼 이글거리던 동무의 눈길이 잊혀질것 같지 못해요. 그때에도 나는 동무가 야속하기만 했어요.
저는 동무를 남부럽지 않게 차려내세우고싶었어요. 이 생각은 결코 그때, 바로 영식이라는 동창생이 내 앞에 나타나 사심없는 자기의 성의라고 하면서 외화를 쥐여줄 때 생긴것은 아니였어요. 한생을 과학밖에 모르고 살아온 나의 아버지, 한달에 한번 생활비밖에 들여오는것이 없는 그 남편을 하늘같이 여기고 일생을 의탁해오는 어머니의 소박한 생활관을 어릴적부터 체질화해온 저였습니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한생에서 제일 귀중한 사람, 오빠이기도 하고 애인이기도 한 제목숨 열을 준대도 아깝지 않을 동무가 남들처럼 잘 차려입지 못한것이 늘 내 잘못만 같아 죄스러웠어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제일 귀중한 사람들이, 남들보다 열배, 백배로 잘입고 잘살아야 할 그런 사람들이 고지식한것으로 하여 남들에게 동정을 받는것 같은 불쾌감이 언제부터인지 내 마음속에 깃들어있었던거예요. 저는 그 영식이라는 청년이 내앞에서 그렇게 푼푼하게 쓰는 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마련되는것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의 허식과 만용을 만류하지 않았어요. 그는 나를 만날적마다 성의를 표시하지 못해 안달아했어요. 동무가 나의 애인이라는 소리를 듣자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왜 그런지 퍽 나이들어보이더구만.〉하는것이였어요. 그러면서 저에게 돈을 또 쥐여주는것이겠지요. 〈그 사람도 아마 잘만 차려입고 나서면 10년은 젊어보일거요.〉하는 그 말을 사심없는것으로 여기고 기꺼이 돈을 받아들었어요. 관심과 성의는 말이나 행동으로뿐아니라 돈으로 표시될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무는 나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동창생의 성의를 받았다는 리유로 말입니다. 전 동무의 격분이 리해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창생앞에 미안했습니다. 그의 진정을 모욕했기때문에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가 어떻게 나왔는지 압니까.
내가 동무의 〈몰리해〉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글쎄 어떻게 나왔는지 아세요.
〈차라리 잘된셈이 아니요. 그 사람은 평생 곰팽이내 나는 고서적이나 뒤질 팔자요.〉
무도회장에서 만난 후 여직껏 나에게 연구사들을 존경한다느니, 자기가 뭘 도와줄게 없느냐느니 하면서 관심을 표시한것은 다 나의 환심을 사기 위한 기만이였습니다. 저는 경악한 심정으로 다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례영이, 우리 부모들이 이제 곧 장기해외출장에서 돌아오오. 난 부모님들께 동무를 소개할 생각이요.〉
그 순간에야 저는 그의 검은 속마음을 들여다볼수 있었고 또 왜서 동무가 저에게 정도이상의 격분을 표시했는지 깨닫게 되였어요.
그는 태연하게 저의 팔을 끼자고 접어들었습니다. 아, 동무가 그때 나의 가련한 모습을 보았다면… 저는 두고두고 그날의 수치를 잊을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의 뺨을 후려갈겼습니다.
〈이 너절한…〉
이 말은 동무가 저에게 한 말이였습니다. 저는 동무의 얼굴에, 부모들의 얼굴에 아니, 신성한 우리 과학자들의 얼굴에 흙칠을 했습니다.
저는 용서를 빌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동무는 그날 보통강유보도에 끝끝내 나타나주지 않더군요. 전 그날 동무가 보는 앞에서 그 물건짝들을 불태워버리리라 작정했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결코 동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이 마당에서조차 나를 변명하는 유치한 인간이여서 이 글을 쓴다고는 생각지 말아주세요. 나같은 인간을 깨끗이 잊었다면 동무에게도 유익할것이라고 여깁니다.
내앞에는 아득한 높이에서 나를 굽어보는 거인이 있습니다. 나같은것은 감히 그 높이를 상상할수조차 없는 그런 아득한 정신적높이에 서있는…
여한이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존재도 어느 한땐가는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남자의 사랑을 받은적이 있었다는 그 한가지만으로도 나는 나의 처녀시절을 설레이며 추억할것입니다.
례영으로부터.》
편지는 길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처녀의 눈물자국이 점점이 찍혀져있었다.
《사연이 있는것 같은데 내가 알면 안되겠소?》
김인철은 편지를 손에 든채 진웅을 쳐다보았다.
진웅은 솔직한 인간이였다. 그는 당조직에 그러하였던것처럼 새로운 상관앞에서 례영이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김인철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나서 처녀의 편지를 그에게 넘겨주면서 읽어보라고 하였다.
진웅은 처녀의 편지에서 진정을 읽을수 있었다. 순간 그는 자기의 가슴에 들어앉아있는 얼음산에 금이 가는것을 의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뿐이고 례영에 대한 새로운 증오로 하여 금이 가려던 얼음산은 다시 들어붙었다.
이때 김인철이 물었다.
《편지를 보니 어떻소?》
《정확하게 썼다고 봅니다.》
진웅이 랭랭한 어조로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의 잘못과 그리고 내가 무엇을 제일 증오하고있다는것을 정확히 알고있습니다.》
《그러니 용서하겠다는거겠소?》
《아닙니다, 상위동지!》
《자기를 반성하고있지 않는가?》
《…》
이번엔 김인철이 신음소리를 냈다. 두사람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김인철이 좀 흥분하면서 말을 이었다.
《난 요새 어버이수령님의 회고록을 읽고있소. 몇번을 더 곱씹어 읽었지. 회고록을 봐도 그렇고 내가 이미 알고있는바에 의하더라도 우리 수령님께서는 20대에 어깨에 날개가 돋고 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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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회고록을 봐도 그렇고 내가 이미 알고있는바에 의하더라도 우리 수령님께서는 20대에 어깨에 날개가 돋고 하루에 천리를 주름잡는 〈백발〉장수로 되시였소. 하늘이 낸 장수말이요. 태양이요, 태양신이란 말이요! 예나 지금이나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지는거요. 그런데 사실은 어떠하오? 수령님도 우리와 꼭같은 그리고 언제나 우리곁에 계시는 인간이시란말이요. 단군도 그렇게 보면 되지 않소? 동무말을 들어보니 어쨌든 지식인들은 좀 복잡해.》
진웅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인철은 《그건 그렇고.》하며 화제를 돌려서 말을 이었다.
《오늘 적들과의 대결은 총과 총의 대결인 동시에 사상과 사상의 대결이요. 그런 의미에서 학자선생들과 언론인들은 사상전선의 군인이라고 할수 있을거요. 과녁은 뭐겠소? 사회주의가치관을 좀먹는 돈이요. 물론 돈은 누구에게나 필요한거요. 그러나 그것이 가치관으로 되는것이 문제요. 돈의 유혹은 말할수 없이 크고 전염력이 강하오. 그러니 누구나 자칫하면 그 유혹에 빠질수 있소. 그렇다고 그런 사람을 다 버리겠는가? 그럴수 없소! 우리의 사상으로, 우리의 가치관으로 그들을 구원해야 하오. 진웅동무, 군인의 심장은 커야 하오. 그리고 뜨거워야 하오!》
진웅은 그와의 첫 대면을 잊을수 없었다.
단순하면서도 명백하고 사리에 밝고 박식한 군인, 불보다 뜨거운 심장을 지닌 지휘관이 지금 곁에 엎디여 다심하게 보살펴주고있다.
문득 검고 큰 그의 눈이 떠올랐다. 떠올리기를 그처럼 주저하고 무서워해온 례영의 모습이였다.
진웅은 김인철이 몰래 한숨을 내쉬였다.
초소의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려명이 멀지 않았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진웅동무, 날이 밝으면 말이요.》하고 김인철이 진웅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진웅동무에게 새로운 전투임무가 제기될거요.》
《예?》
《됐소, 래일이면 알게 되오.》
진웅은 더 캐묻지 않았다. 군인에겐 무조건 수행할 의무만이 있는것이다. …
몇명의 공병들이 지뢰를 해제하면서 통로를 개척하고있었다.
진웅은 공병들이 개척한 길을 따라 포복전진하고있었다.
바로 앞에서 김인철중대장이 통로의 안전상태를 확인하면서 그를 안내하였다.
김인철은 진웅을 중대에 데려다놓고 즉시 골짜기 깊숙이 박혀있는 미지의 비석에 대한 조사발굴을 승인해줄것을 상급참모부에 제기했었다. 이례적인 제기여서인지 상급참모부에서는 오래동안 아무런 결론도 주지 않더니 어제 저녁 금방 근무장소로 떠나려는데 그의 제기를 승인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와 함께 사단의 경험있는 공병들을 파견해주었고 사단정치위원이 직접 와서 이 조사발굴사업을 지휘하기로 하였다.
지금 정치위원은 중대장감시소에서 포대경으로 진웅이네들의 행동을 주시하고있었다. 그러나 진웅이는 김인철까지도 중대장감시소에 더 높은 급의 지휘관들이 내려와있다는 사실을 모르고있었다.
그들은 힘들게 100m구간을 포복전진하였다.
그들이 은밀히 포복전진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은 골짜기가 적들의 시야에 들어있는것만큼 언제 적의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기때문이였다.
앞에서 통로를 개척하는 공병들이 생명을 내대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고있었다. 거의 반세기동안 묻혀있는 전쟁시기의 지뢰를 발견하기도 힘들었거니와 녹이 쓸어서 뢰관을 뽑아내는 일은 여간 아니였다.
몇명의 공병들이 서로 교대하면서 지뢰해제전투를 벌려나갔다. 그러던중 한 공병이 엎디여있는 배밑에서 《딱.》하는 소리를 들었다. 뢰관이 튀면서 내는 소리였다.
지뢰를 깔았던 공병은 위기일발의 순간 날래게 몸을 날려 몇m밖으로 피신하였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지뢰가 폭발하였다. 다행히 공병은 중상은 면했지만 팔에 파편을 맞았다. 피흐르는 팔을 감싸쥐고 뒤로 후송되는 공병을 본 진웅은 울음엉킨 소리를 질렀다.
《중대장동지, 그만둡시다!》
그러자 김인철의 목소리가 맞받아왔다.
《뭐야?! 전우의 피를 헛되게 하자는건가?》 그 소리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고 또 들으리라고 상상해보지도 못한 범과도 같이 무서운 소리였다. 허지만 진웅은 그것을 느낄사이없이 가슴에 뜨거운것이 울컥 치밀어올라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흐느꼈다. 혈전이다, 이것이야말로 혈전이다.
아담한 과학원의 연구실과 자기의 숙소, 힘들다고 우는소리를 하면서 현지조사를 진행하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때 언제 한번 이러한 혈전을 벌려본적이 있었던가. 진웅은 오열을 누르며 한치한치 중대장을 따라 기여갔다. 미지의 비석이 눈앞으로 한치한치 다가오고있었다. 비석이여, 너 설사 막돌일지라도 금돌로 되여지라!
진웅은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중대장감시소에 최고사령부 련락군관이 도착한것은 바로 이때였다. 련락군관은 사단정치위원으로부터 사연을 듣고 진웅이를 소환해갈 자기의 임무를 생각하며 골짜기에 긴장한 눈길을 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