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설 <대박산마루> 제 27-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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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뉴욕에서;
녀성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소리가 울렸다.
이국의 들가에 피여난 꽃도
내 나라 꽃보다 곱지 못했소
돌아보면 세상은 넓고넓어도
내 사는 내 나라 제일로 좋아
…
노래소리는 뉴욕의 중심거리를 달리는 승용차안에서 울리고있었다. 망향객인 리금순이 차안에 타고있었다.
조선반도에 선포되였던 준전시상태는 미국의 항복으로 일단락 막을 내렸다. 해외교포들은 정견과 신앙, 리념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기뻐하였다. 그들은 민족의 공멸을 초래할 전쟁을 바라지 않았던것이다.
얼어붙은 조선반도의 정세가 해토되자 일시 중단되였던 북과 남, 해외교포들의 접촉과 교류가 다시 활발해졌다.
하여 중국의 베이징에서도 북과 남, 해외교포들의 회합이 진행되였는데 이 회합에 대종교의 교주 안효식이 참가하였다.
그는 돌아올 때 북측 대표로부터 카나다에서 발행되고있는 교포신문인 《배달신보》의 편집인 리금순에게 전달해달라는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김일성주석님의 편지였다.
김일성주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리금순이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을 회고하였다.
리금순은 김석진과 경성제대동창이였다. 해방직후 김석진을 따라 평양에 와서 교편을 잡았다. 행복했던 몇년세월이 꿈같이 흘렀다. 그다음 전쟁이 터지고 모든것이 허물어졌다. 《리조실록》을 구출하러 서울로 나갔던 김석진이 적구에 떨어진채 소식이 없는것이다.
녀인에게 남편은 하늘이였다. 하늘이 무너졌다. 남편잃은 젊은 녀인의 넋은 끝없이 방황했다. 절망과 공허, 불우함… 서울에는 그의 부모형제, 친척들이 있었다. 거기에 가기만 하면 남편의 행처를 알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방황하는 녀인의 넋은 그들에게로 쏠렸다.
서울에 나온 리금순은 부모형제들이 한강다리대참사에서 다 희생되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야 자기의 실책을 깨달았다. 그후 이국에서 망향객의 설음이 짙을수록 그 후회는 녀인의 심혼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김석진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공화국의 력사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는 소식이 들어올 때마다 그는 공화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베개머리를 적시였다. 그러나 공화국에로의 길은 막혀있었고 그리로 갈 렴치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김일성주석님께서 한갖 먼지같은 존재에 불과한 녀인에게 친히 편지를 보내주시였고 해외교포학자들과 함께 공화국에로의 입국을 주선해주시였다. 녀인은 한생 잊지 않고있던 주석님의 목소리를 다시 되새기였다.
그리고 그분께서 편지에서 당부하신 일을 성의껏 하리라 마음을 다졌다.
하여 그는 뉴욕의 맨하탄에 살고있는 허진경을 찾아가고있는것이였다. 주석님께서는 민족적량심을 조금이라도 가지고있는 사람이라면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민족대단합의 기치밑에 묶어세울데 대하여 녀인에게 당부하시였던것이다.
그러나 정작 허진경을 찾아가고있는 지금 녀인의 마음은 몹시 번거로왔다. 안효식은 녀인에게 주석님의 편지와 함께 강동의 단군릉에서 원시조의 유골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던것이다. 허진경은 그 통에 우상이라는 말뚝을 박은 당사자였다. 본의든 본의아니든 그로 하여 해방후에도 단군연구에는 장막이 드리워있었다. 수십년간이나 발굴사업이 진행되지 않은데도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것이다. 더우기 리금순 자기가 애써 정리해놓은 단군초상 고증서를 불살라버렸다. 그렇다면 오늘 이 경이적인 사변앞에서 그는 어떻게 처신할것인가.
맨하탄거리의 세집을 찾았을 때 허진경은 록화기로 공화국에서 새로 만든 영화 《민족과 운명》(최현덕편)을 보면서 두눈에 그렁하니 눈물을 담고있었다. (당시 교포들속에서 이 영화가 널리 퍼져있었다.)
리금순이 방에 들어서자 허진경은 얼른 눈물을 훔치며 잘못을 저지르다가 들킨 사람처럼 거북해하였다.
그러자 리금순이 직판 들이대였다.
《당신은 평양 강동의 단군릉을 우상이라고 했지요?》
《…》
입이 붙은듯 서있던 허진경은 한참만에야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금순씨도 거기서… 유골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있어요. 공화국에서 당신이 말뚝을 박아놓은 장소에서 유물을 찾았단 말이예요! 그러니 이제는 세상에 진실을 밝히세요!》
《…》
허진경은 대답대신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내가… 내가… 대역죄를 지었소!》
《민족반역자!》
이렇게 웨치며 리금순은 그의 뺨을 후려쳤다. 허진경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았다.
두사람이 공화국을 떠나온 동기는 각각이여도 남조선사회에 침을 뱉고 돌아선것은 같은 동기에서였다.
박정희의 독재시기였다.
하루는 《청와대》의 문화수석이란자가 력사학회의 부회장을 지내고있던 허진경을 찾아왔다. 《청와대》수석은 그를 학생 대하듯 하며 처음부터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허진경씨, 요즘 북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을 부정하고있는데 당신이 이를 반론하는 글을 써야겠소.》
그때 허진경은 그 요구를 들을수 없었다. 학자의 견지에서 볼 때 북의 주장이 과학적이였기때문이였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을 부정하면서 북은 신라의 봉건통치배들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들을 욕되게 한 매국배족행위라고 지탄하였다.
학자인 허진경은 북의 주장이 그른데 없다고 인정하고있었다. 실지 첫 통일국가인 고려를 세운것은 고구려의 유민들이였으며 고려의 시조 왕건자체가 첫 통일국가의 국호를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라고 붙였다.
학자로서의 진지성을 가지고있던 허진경은 력사의 페지를 더듬는 과정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진리이고 과학이였다.
《북에 대한 박대통령의 국시는 흡수통합이요. 그러니 우리에게 한국정권의 정통성이 필요한거요. 당신도 이것을 알고있을텐데?》
《청와대》수석은 정치의 요구를 숨김없이 털어놓으며 다시금 강박했다. 그리하여 지금껏 정치의 요구로 대종교를 반대하느라 시달려온 허진경은 또다시 정치의 시녀로 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였다.
《청와대》수석의 요구는 집요했다.
《박대통령이 당신을 지켜보고있소. 어쩔래요?》
《음…》
허진경은 몸부림쳤다. 정치를 위해 과학을 날조하다니? 이거야 너무하지 않는가? 북에 등을 돌리고 돌아서긴 했지만 북에서야 이런 일이 어디 있었던가?
때마침 수석관이 북을 건드리며 나왔다.
《북정권이 고구려를 내세우고있는만치 우리가 신라를 내세우는것은 마땅한 일이요!》
《북이 내세우는건 민족의 정통성이요. 내가 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걸로 알고있소!》
허진경은 학자적량심으로 항변했다.
그러자 군부출신인 수석은 습관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허진경은 눈을 꾹 감아버렸다.
허진경에게서 실패한 수석은 리금순에게도 같은 요구를 제기했다. 리금순이 그의 요구를 들을리 없었다.
그들은 각기 미국에 망명하였다. 리금순도 망명후에 허진경이 미국에 건너와있다는것을 알고있었으며 허진경이도 리금순의 행적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번도 만나기를 희망하지 않았다. 얼마전에 있은 기자회견장에서 그들은 수십년만에 얼굴을 띄여보았다.
허진경은 말없이 방 한가운데 고목처럼 서있다.
리금순이 비로소 그가 사는 세집을 둘러보았다. 몇㎡도 되지 않았다. 미국력사학회는 대종교를 몰아대는 기자회견에서 저들의 기도를 파탄시킨 허진경을 제명해버렸다. 실업자가 된 허진경은 이러한 세방마저 겨우 얻어사는 형편이였다.
세간살이도구란 거의 없고 방 한구석에 가스콘로 하나에 양재기 몇개가 놓여있을뿐이였다.
리금순은 그가 다시 측은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찾아온 용건을 말할 때가 되였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허진경씨, 저는 김일성주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엉?!》
《놀라지 마세요. 김일성주석님은 편지에서 전번에 있은 안효식대교주의 기자회견을 록화실황으로 보았다고 하시였어요.… 그때 저는 물론 허진경씨도 눈박아보시였다고 하시였어요.…》
이렇게 말하는 리금순은 자기도 모르게 격동되였다.
《그분께서… 김일성주석님께서 나를 알고계신단 말이요?》 허진경의 아래턱이 눈에 띄게 덜리였다.
《예, 허진경씨, 김석진원사에게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셨다고 해요.》
《그렇다면 그분께서 나의 죄까지 알고계신단 말이요?》
《그래요, 허진경씨가 말뚝을 박은데서 유골이 나오지 않았나요. 하지만 그이께서는 저에게 허진경씨를 꼭 찾아가 만나보라고 하시였어요. 당신이 몹시 괴로워할거라고 하시며…》
《그런데도?》
《정말 그분은 하늘같이 큰분이예요!》
《아!…》
허진경의 두눈에서 또다시 진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윽하여 리금순이 가지고온 구럭을 풀고 수지물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걸 마셔보세요.》
《그건?》
《〈금강산샘물〉이라고 하는 고국의 물이예요. 주석님께서 편지와 함께 이것도 보내시였어요.》
《아, 이런…》
허진경은 목이 꺽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물을 병채로 걸탐스레 꿀꺽꿀꺽 마시고난 그는 남은 물을 자기의 머리와 온몸에 주르륵주르륵 쏟았다.
《성수로구나, 성수야. 고국이 죄많은 이놈의 명복을 빌어 자비를 베풀어주는구나!》
금순은 아무런 만류도 하지 않고 그에게서 떨어져 창밖을 내다보며 그가 진정하기만을 기다였다.
맨하탄은 미국에서 제일 번화가였다.
자본의 초기축적을 시작한 양키들은 200년전만 해도 자그마한 어촌이던 여기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무역항을 꾸리고 거리를 세웠다.
현대적인 건축재료로 일떠세운 번쩍거리는 초고층의 건물들과 네온등들이 지랄발광하듯 하는 밤의 정경은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을 자랑하고있었다.
밤마다 집집마다에서는 향연이 벌어지고있었다. 간계와 음모, 협잡과 사기, 모략, 강도질로 살찐자들이 술과 녀자, 마약으로 벌리는 향연이였다. 이 향연이야말로 약육강식과 황금만능밖에는 정치도 없고 력사도 문화도 전통도 없는 미국의 돈많은 《신사》의 란무였다.
이것이 밝은 창문너머의 밀월의 세계이며 화려한 이 거리의 리면이고 진면모였다. 맨하탄의 앞바다가 그렇듯이 탁류가 범람하는 거리였다.
이윽고 허진경이 그에게로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고맙소, 금순씨! 금순씨를 보고나니 저승길을 눈앞에 둔 내 마음이 다소나마 가벼워지는것 같소.》
그는 봉인되여있는 두툼한 서류뭉테기를 내밀었다.
《난 이미 유서를 써놓았소. 저승에 가서 조상들을 만나기가 두렵지만 어찌겠소. 내가 이승에서 할 일은 이것밖에 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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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을 단군이 출생한 날이라고도 하고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이라고도 한다.
단군이 20대에 나라를 세운것으로 봐도 그가 출생해서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20년은 반만년에 비하면 하나의 점에 불과하므로 더 작은 점인 단군이 출생한 날이나 나라를 세운 날을 두고 옴니암니 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그저 민족의 시원이 열린 날로 보면 된다.
이것은 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의 시원을 어느 골짝, 어느 샘이라고 하지 않고 산의 이름을 붙여 말하는것과 같은 리치이다.
민족의 시원이 열린 날을 10월 3일로 찍은것은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를 일떠세운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 쓴 력사책 《단기고사》이다. 그후에 나온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에도 10월 3일이라는 날자가 나오는데 《단기고사》의것을 옮겨놓은것인지 아니면 제나름으로 출처를 따져서 기록해놓은것인지는 알수 없다.
아무튼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개천절을 민족의 시원이 열린 날로 여겨왔다.
1993년 10월 1일.
우리 나라의 신문사들이 법석 끓었다.
조선중앙통신사로부터 중대소식이 있다고 하여 기다리고있는데 시간이 퍼그나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때문이다. 신문사들에서는 통신사에 대고 독촉전화를 걸어댔다.
조선중앙통신사 사장 김필건은 그 전화들을 눌러놓고나서 조바심이 나서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도 영문을 알수 없다. 당중앙위원회에서 중대자료를 보내겠다고 한것이 아침시간인데 감감 무소식이기때문이다.
간혹 이런 때도 있었다.
그것은 중요로작이 발표된다든가 당과 정부급에서 내는 중대발표가 있을 때였다.
《사장동무, 래일 신문을 내라는거요, 말라는거요?》
《사장동무, 책임질줄 알란 말이요.》
편집국장들이 아니라 책임주필들이 직접 전화를 하며 독촉이라기보다 위협했다.
그러자 김필건은 오히려 배심이 생겨 호기있게 소리쳤다.
《기다리시오! 기다리란 말이요!》
그는 늦어져도 이제 신문에 대서특필의 기사가 실리겠는데 뭘 그러느냐고 혼자 말하며 배포유하게 앉아있었다.
이러한 그도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고 오후시간도 기울어지자 또다시 저도 모르게 긴장해졌다. 머리를 기웃거리며 당중앙위원회에 전화를 걸면 거기서도 그가 신문사에 대고 하듯 기다리라는 말뿐이였다.
신문사들은 물론 통신사까지 긴장하게 만들고있는 원인을 아는 사람은 불과 몇몇 사람뿐이였다.
김석진원사는 몇몇 능력있는 학자들과 함께 밤을 세워 《단군릉발굴보고》를 완성하여 새벽이 다 되여 당중앙위원회에 올렸다. 바로 그들이 그 내용이 2일 신문들의 1면에 실릴것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신문사들에 《비상사태》가 일어난데 대하여서는 관계없이 자기들이 만든 문건이 어떻게 결론되겠는가 하는데만 신경을 쓰고있었다.
그들은 아침밥을 먹을 생각도, 자기들이 긴밤을 꼬박 새웠다는것도 잊고있었다.
오전 10시경에 당중앙위원회로부터 단군조선의 국토문제에 대한 보충설명을 요구해왔다.
김석진 등은 자기들이 만들어올린 문건에 그 부분 설명이 허약하다는것을 느끼며 서둘러 보충문건을 만들어올렸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수도와 국호가 긴밀히 련계되였다는것은 력사의 상례이다.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라는것은 이미 올린 보고에 상세히 서술되여있다. 그런데 건국관계기사들에는 평양과 함께 아사달이라는 지명이 나오고있다. 평양과 아사달의 의미와 그 호상관계를 파보는것으로 고조선의 국호문제를 해명할수 있다. 평양의 평은 리두표기에서 《부루, 바라》에 대한 소리옮김으로서 《벌판》의 《벌》의 옛 형태인 《바라, 버러》에 대한 뜻옮김으로 쓴것이다. 후기신라때 《현웅현》의 옛지명《미동부리》의 《부리》가 고려시기에 와서 《남평》, 《영평》의 《평》으로 개칭된것이 그러한 례이다.
한편 평양의 《양》은 《내ㅡ천》을 가리킨 말이다. 《내》는 겹모음을 쓰지 않던 시기에는 《나》였으므로 결국 평양은 고대 우리 말로 《부루나》에 대한 리두식표기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일명《불내성》혹은 《위나암성》이였다. 《불내》의 《불》은 받침이 쓰이지 않던 시기의 우리 말로는 《부루ㅡ부리》이며 《내》는 《나》이므로 역시 《부루나》의 소리옮김임을 알수 있다.
《평양》이나 《국내》가 다 고구려의 수도이름이였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본래 동일한 《부루나》ㅡ《불내》에서 온것이였다는것을 결론을 도출하게 한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강을 《부루나》라고 하였는데 점차 그 강을 끼고있는 마을을 역시 《부루나》로 불렀고 나중에는 나라의 도읍을 가리키는 명칭도 《부루나》라고 하였던것이다.
이런것을 전제로 평양과 함께 쓰이는 아사달에 대하여 밝혀보기로 한다.
먼저 아사달의 위치문제이다.
단군릉의 동북쪽에 아사달과 관련이 있다고 인정되는 아달산이 있으며 현재 단군릉의 뒤에는 대박산(한박산)이 있다는데 대해서는 이미 올린 보고문건에 언급하였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대박산의 《박산》은 《밝은 산》의 뜻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백악산 아사달의 《백악》과 통한다. 《백》과 《박》은 음이 통하여 《흰 백》은 《밝다》는 의미를 가지고있다.
이와같이 대박산, 아달산이나 백악산, 아사달은 동일한 뜻의 서로 다른 표기에 불과하며 이것은 강동이 아사달의 하나였다는것을 반증하여준다.
그러면 아사달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사달의 《달》은 산의 고어이며 《아사》는 《아침》, 《아시》, 《새》로 풀이될수 있다.
《아사》란 말은 일본어에 그 모습이 비교적 성하게 보존되여있다.
《아침》을 뜻하는 일본말은 《아사》로서 그것이 고대조선에서 유래됐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하여준다.
《아사》는 아시저녁=초저녁, 아시김=애벌김, 아시빨래=애벌빨래 등의 용례로 보아 《처음》, 《첫》이라는 뜻으로서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의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또 아침이 되는것을 《날이 새다》고 하는데 《아사》가 《새》와 통한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아사》는 태양 및 동방과도 관련되며 그 어원은 《붉》, 《밝》에 있음을 찾아보게 된다.
날이 새려면 해가 솟아야 하는데 그 빛이 붉고 밝은데로부터 해빛은 흔히 《해발》로도 표현되고있다. 또한 날이 새는것을 동이 튼다고 하며 아침해는 동쪽에서 뜨는데로부터 《새》는 태양 및 《동방》과 관련된다. 동풍을 《새바람》, 동쪽을 《새쪽》이라고 하는것도 그러한 례증이다.
이처럼 아사달이란 《동방》, 《아침》, 《새로운》, 《밝은 산》에서 유래한것이며 그 근원은 《불》, 《발》에 두고있음을 알수 있다. 말하자면 《아사》란 밝게 빛나는 아침, 광명을 가리켜주는 동방의 뜻을 내포하고있다.
평양의 《평》도 부루ㅡ붙이고보면 《벌》이란 뜻에서 전화되여 《아사》와도 그 뜻이 통한다. 결국 평양의 《평》에도 《밝음》의 의미가 포함되고있다.
《조선》은 《빛나는 아침》으로 풀이되는데 그것은 사실 《아사》와 동일한 뜻을 나타내고있으며 또한 《평》의 의미도 포함하고있다는것을 알게 한다.
우리 나라의 첫 국호 조선은 국가가 일어선 성지이며 수도인 평양 아사달과 태양이 솟은 동방의 나라라는 고유한 사상관념의 폭넓은 반영이다.
이미 올린 보고에 언급한것이지만 다시 강조하면 단군의 《단》은 박달을 의미하며 《군》은 임금을 말한다.
《박달》의 《박》은 《밝》과 통하며 《달》은 산의 고어이므로 《박달》은 밝은 산을 이르는 말이다.
《밝은 산》을 가리키는 《박달》은 단군의 출신종족명이자 고장이름이다.
고조선의 건국집단은 하늘(해)신을 최고신, 조상신으로 숭배하면서 자신들을 하늘신의 후손으로 자처한데로부터 《밝음, 광명》의 뜻을 가진 《박》을 종족명으로 삼아 《박달족》으로 불렀다.
단군은 처음 박달종족의 우두머리로 있다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박달(배달)임금》으로 불리웠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단군이라는 칭호속에는 《태양의 후손》, 《하늘이 낸 임금》이라는 뜻이 담겨져있다.
이로부터 빛나는 아침으로 풀이되는 국호 조선과 그 통치자로서의 단군칭호는 서로 깊은 련관속에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보는바와 같이 국호 조선은 건국의 터전이 마련된 평양과 아사달이라는 지명, 단군이라는 군주칭호, 《박달》이라는 종족명과 깊은 련계를 가지고있으며 그것들은 다 조선민족의 모체를 이룬 단군조선의 주민들의 고유한 신앙과 사상에 뿌리를 두고있다.
국호 조선의 유래는 참으로 유구하다.…
김필건은 당중앙위원회에서 보내온 문건을 받아들고 첫페지를 번져보다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첫장 머리에 《단군릉발굴보고》라는 전혀 뜻밖의 일곱글자가 찍혀있었던것이다.
…
이튿날 신문에 《단군릉발굴보고》가 난것을 본 김석진을 비롯한 사회과학자들은 깜짝 놀랐다.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민족의 단일성에 대한 확증》이라고 《단군릉발굴보고》의 표제가 첨가된것이였다.
이것은 발굴보고의 주제를 강조한것이였다. 힘들게 보고서를 작성한 학자들로서는 이 표제의 첨가가 가지는 의의를 대뜸 짐작하였고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그들은 계속 더듬어나갔다.
…
《우리 민족의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는 단군이 나라를 세운 때로부터 시작되였다.》
…
《단군릉은 조선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의 무덤으로서 우리 인민의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실증해주는 귀중한 력사유적이다.》
…
《종전에 신화적, 전설적인물로 간주되여온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으며 이에 따라 우리 나라는 실지로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동방의 선진문명국이였다는것이 명백해졌다. 단군이 고조선을 창건하고 도읍한 평양이 산수수려한 곳으로서 검은모루유적의 주인공과 〈력포사람〉(고인), 〈만달사람〉(신인), 조선옛류형사람으로 이어지는 인류발상지의 하나이며 조선민족의 발상지이고 첫 국가의 발상지였다는 사실이 힘있게 증명되였으며 조선민족은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떳떳이 자랑할수 있게 되였다. 이런 의미에서 단군릉의 발굴과 단군의 유골발견은 우리 고고학의 승리이며 나아가서 조선민족의 큰 승리로 된다.》
…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북과 남, 해외의 모든 동포들은 정견과 신앙, 재산유무의 차이를 초월하여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같은 민족이라는 물보다 진한 피의 동질성을 우선시하면서 외세에 의해 이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만이 겪고있는 분렬의 비극을 조선민족의 넋, 민족애의 폭넓은 도량으로 끝장내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될것이다.》
…
이밖에도 새로 첨가된 부분이 있었다.
그것들은 객관적론증 일면으로만 흐르던 발굴보고에 비해 민족애, 조국애의 심지를 심어주었으며 보고의 력사적 및 정치적의의를 부각시켜주었다.
그것은 로고이기전에 한 겨레의 피이고 심장이며 열정이였다.
학자들은 통신사와 신문사들사이에 긴장한 전화가 오가고 신문편집이 늦어진 사실은 몰랐지만 완성된 보고에 깊이 감동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전화로 학자들에게 수정가필된 부분에 의견이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을 올려야 하는가. 김석진의 방에 모여있던 학자들은 그저 감격하여 눈물만 흘릴뿐이였다.
통신사사장 김필건에게도 《단군릉발굴보고》는 경이적인것이였다. 그래서 퇴근하지 않고 직접 세계보도계의 반영을 청취하였다.
남조선의 《서울신문》이 먼저 《단군부부유골을 발굴》이라는 제목을 달고 《로동신문》의 단군릉발굴보고의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그밖의 남조선신문들도 같은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일부 남조선신문들이 단군릉발굴보고의 내용을 전재하면서 반신반의하는 남조선학자들의 반영을 소개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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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러나 신문의 론조들은 대체로 객관적이였다.
중국의 신화통신사에서는 《참고자료》에 《조선에서 단군열이 일고있다》는 내용의 글을 냈다. 일본의 통신보도들은 함구무언이였다.
세계의 보도계가 잠잠해질무렵 김필건은 하나의 기이한 기사를 접수하였다. 그것은 해외교포신문인 《배달신문》에 실린 미국력사학회 소속의 남조선계 력사학자인 허진경의 《참회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서였다.
신문은 허진경이 뉴욕 맨하탄 앞바다에 몸을 던지기 전에 남긴 이 유서를 동포녀성인 리금순에게 맡겼는데 미국의 큰 신문사들에 들고다녔으나 어디에서도 받아주는데가 없어서 본 신문에 기고해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유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유서(참회록)
이 우주에서 한점의 먼지에 불과한 본인에게 무슨 소리가 있겠습니까.
소리가 있다 한들 가히 세상을 울리지 못할겁니다.
발에 밟힌 참새의 짹소리는 누구나 듣습니다. 죽어가는 비명인 까닭입니다.
본인은 이국의 바다에 몸을 던지면서 한마디의 비명으로 세상을 크게 울린 루쏘나 똘스또이의 참회록에 감히 목소리를 견주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본인의 유서는 비명입니다. 한생 민족을 욕되게 하며 살아온 매국자의 비명입니다.
본인은 경상북도 안동군 금계동에서 태줄을 끊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워온 저는 마을사람들의 촉망속에 푸른 꿈을 안고 고향산천을 떠났습니다. 부친이 땅마지기를 가지고있은 덕에 본인은 먹을 걱정, 입을 걱정없이 대학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넉넉한 가세를 담보해주는 일제통치가 싫었습니다.
그런 속에 민족의 넋속에 이 몸을 던지기로 하고 민족사연구의 길을 더듬었고 학우 김석진과 더불어 련공의 길을 걷기로 하고 이북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별치 않은 일로 다시 이북에 등을 돌리고 반공의 길로 전도하여 한생을 그 길에서 늙어온 몸입니다.
회고컨대 그것은 체끼였습니다.
한번 먹고 체한 음식은 아무리 맛있는것이라도 일생 싫은것과 같은 리치라 할것입니다.
정치란 말을 듣기만 해도 역스러웠으며 몸에 두드러기가 돋았습니다.
본인의 체질이 정치알레르기성인가싶습니다. 리승만의 독재에도 박정희의 독재에도 발진을 일으키고 그리스도교도가 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자처하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숭미에 몸을 담그었습니다. 어디 다른것을 믿을데가 없었습니다.
본시 본인은 민족사를 연구하면서 단군연구에 푸른 꿈을 두었던적이 있습니다.
해방후 이남에서 단군교가 잔명을 부지하고있었습니다.
한때 창궐했던 단군교는 력대교주들의 비명참사와 외세의 우리 민족 죽이기의 돌풍에 녹아나 허덕이고있었습니다.
제가 이북에 등을 돌리고 다시 돌아와 그것을 보면서도 외면한것은 한번 체한 음식에 다시 맛을 들이지 못하는 괴이한 체질인 까닭입니다.
이북에서 탈출할 당시 저는 강동군에 있는 단군릉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계획하고 그것을 추진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일부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박해로 탈북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 일부 무지한자들이 밉던 나머지 단군묘에 빈 무덤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단군에게마저도 침을 뱉고 돌아섰습니다. 이것은 몰수당한 지주들이 도망가면서 낟가리에 불을 지른것과 같은 심리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저는 공산당정치를 펴가는 북에서 일이 잘 되여나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정치제도에 대한 반감이 조상마저 욕되게 하는 반역으로 떨어지기까지가 결코 멀지 않음을 이 글에서 명백히 해둡니다. 공산당정치에 체한 저는 분별을 잃었으며 공산당이 좋다 하는 일을 바라지 않았던것입니다.
본인은 인생말년에 이르러 큰 눈을 가지고 이북을 바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북의 정치에서 저의 몸에 붙은것은 그 정치의 시력을 이루고있는 민족의 넋이였습니다. 그 넋은 단군왕검의 넋이였습니다.
단군왕검을 〈죽이고〉도주한 저는 그 사실을 발설하면 민족의 몽둥이에 맞을것 같은 공포로 하여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북에서 제가 박은 말뚝을 뽑아버리고 단군왕검의 실체를 찾았으며 반만년 민족의 력사를 정립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민족앞에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크게 뉘우치고 죽음으로써 속죄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6.25동란때 저의 부모님들은 미군기에 의해 피폭하였고 저의 전도를 촉망해주던 동네여러분들이 미군의 탄사로 인해 참혹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지금껏 미국을 신의 나라로, 그리스도의 나라로 섬겨온 이 미거한 본인은 부모님들과 동네분들앞에 죄지은 몸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민족사를 반세기동안 정지시켜 민족앞에 죄지은 이 몸은 부모님앞에서도 죄를 짓고 이중역적으로 되였습니다. 세상에 역적치고 이런 역적이 또 있겠습니까?
반공이 저로 하여금 이러한 천고의 대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본인은 최후의 심판을 받을 십자가앞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세계는 종말에 이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참회를 받아주실 예수 그리스도는 강림하시지 않았습니다.
강림하신것은 민족의 하느님이신 단군왕검이십니다.
죄지은 이 몸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단군왕검께 소청드리옵니다.
그 어떤 경우든, 그 어떤 미명하에서든 민족앞에 오욕을 남긴자들은 가차없이 처벌하십시오. 신앙과 주의에 혈안이 되여 민족을 잊고 민족을 버리고 민족을 욕되게 한 자들을 모조리 끌어다 지옥에 떨구어버리십시오.
단군민족의 후손들에게 고하나니 단군의 환생을 선포한 이북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시라. 정견과 신앙, 재산의 유무를 초월하여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단일민족이라는 피의 동질성을 우선시하면서 외세에 의해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만이 겪는 분렬의 비극을 끝장내자고 한 이북의 호소에 호응해나서라!
죽음으로써도 씻을수 없는 죄가 이 호소로 덜어지기 바라며 아멘.》
김필건은 이 기사를 당중앙위원회에 올리기로 결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