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설 <아리랑> 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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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훈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장영수네 중대는 훈련중간총화를 하려고 경기장 48호구앞에 모여앉았다. 총화모임은 자못 엄격하였다. 요즘 훈련이나 학과학습에서 뒤꼬리를 차지하는 원인이 중대장 황태식의 그릇된 사업방법때문이여서 모임의 초점은 자연 그에게 쏠리였다. 분대장이상 중대초급일군들은 태식이의 자기비판이 끝나자마자 너도나도 일어나 그를 비판했다.
훈련시 집중하지 않아 오자를 내거나 속도를 보장하지 못해 배경대 총지휘자의 지적을 받는 학생이 있으면 그 주위의 학생들이 어어- 하고 소리를 지르며 몰아주는 비판방법을 생각해낸것, 중대별훈련시 앞에 나서서 바지괴춤에 두손을 찌르지 않으면 팔짱을 끼고 하는 안하무인격인 훈련집행자세, 무슨 일에서나 녀동무들을 차별하는 문제, 지어 녀학생들의 노래소리가 작다고 그들만 따로 남겨놓고 처벌로 15분동안 대렬행진을 시킨 어느 고망날의 일을 꺼드는 녀학생도 있었다.
평상시에 대대축구팀의 주장이며 오락대장으로 이름이 높아 모두 선망에 차서 바라보는 제1중대장 황태식이였으나 정작 비판이 제기되니 그가 가지고있는 결함은 우점과 결코 짝지지 않았다.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앞줄에 앉아있던 한 녀학생이 도톰한 입술을 감빨며 일어났다.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는 리혜련학생이였다. 늘씬한 키에 이목구비가 이쁘장하게 생긴 혜련이는 그의 되박이마에 날카로운 눈총을 박고 맵짜게 토론했다.
《여러 동무들의 비판이 옳습니다. 그러나 태식동무, 동무의 가장 큰 결함이 무엇인줄 압니까? 학생의 본분을 저버리고 생활하는것입니다. 동무는…》
훈련이 바쁘다는 구실을 대고 또는 복잡하고 드바쁜 이른바 중대장사업의 특수성을 전면에 내걸고 정기수업을 내놓고는 중대별대항 외국어경연을 비롯한 각종 경연들, 일체자학습, 과제검열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조직사업조차 바로하지 않았다는것이다.
《중대장이며 동시에 학급장이기도 한 태식동무자체가 학과학습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이러하니 우리 학급이, 우리 1중대가 오늘 어떤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공부에서도 1등을 놓지 않던 어제날의 우리 최우등중대가 이 한달사이에 반통중대가 되다못해 나중엔 빈통중대가 돼버리고말았습니다. (황태식이네 중대는 보름전에 진행한 배경대적인 외국어경연에서 우등으로 밀려났으며 어제 있은 수학경연에서는 보통으로 밀려났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훈련이 시작되자마자 배경대지휘부에서는 《아리랑》국가준비위원회와의 밀접한 련계밑에 교육성적인 수업진도를 드티지 않기 위하여 야외수업, 이동수업을 적극 조직하는 한편 자연과학과목과 인문계통과목별경연을 자주 진행하였는데 그때부터 배경대참가자들은 우등을 반통, 보통을 빈통이라고 이름지어 부르고있었다.)
다행히 영수동무가 점수를 높게 받았길래망정이지 어제 수학경연에서도 프로수가 차지 않아 우린 아예 뒤전에 밑려날번 했습니다. (영수는 리혜련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마뜩지 않아서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혜련이 하는 비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는것을 깨닫자 슬그머니 눈길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동무는 자극을 받고 채심을 했습니까? 그까짓거 너무 신경쓰지 말라, 총시연회나 끝내놓고 와짝 달라붙어 하문 돼, 이 황태식이 결심하면 우리 중대학과실력은 쑥 올라가. 이건 태식동무가 어제 저녁 총화때 한 발언입니다.
태식동무, 그럼 물어보자요. 학과학습을 잘해서 실력을 쌓는 일이 그래 모래무지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것처럼 하루에 되는 일이고 깜빠니야적으로, 힘내기로 되는 일입니까.
황태식동무는 채심을 하지 않고있습니다. 자고자대하고있습니다. 이런 동무가 중대장자격이 있습니까.
정치지도원선생님, 전 태식동무가 계속 이런 식으로 사업하는 한 우리 집단은 학습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배경대훈련을 아주 망치게 될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전 중대장사업을 다른 동무에게 맡겨야 한다는것을 정식 중대청년동맹위원회에 제기하고싶습니다.》
리혜련이 비판을 하는 동안 땀을 뚝뚝 흘리며 숨만 거칠게 몰아쉬던 태식은 정녕 못 참겠던지 혜련의 마지막말이 끝나기 바쁘게 소리치다싶이 부르짖었다.
《흥, 어처구니가 없구나. 동무가 뭐길래 맡기라 말라야. 지도원선생님, 이건 진짜…》
초급일군들이 와- 하고 들고일어났다. 학과학습에서나 훈련에 있어서나 전 배경대적으로 가장 우수하고 집단력이 강했던 우리 중대를 이꼴로 만들고도 무슨 할말이 있는가. 례의 잘못한 점들에 대하여서는 이미전에 여러 기회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지적과 충고가 있었는가. 중대장 황태식의 독단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사업에 대해서는 우리 초급일군들만이 아니라 중대의 학생대중전체가 의견이 있어한다. 비판은 한층 심화되였고 마감에는 중대장사업을 넘기는 정도를 릉가해서 배경대에 있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론의되였다.
황태식은 감정에 못이겨 한마디 뻐꾹소리를 냈다가 졸경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완전히 풀이 죽어 중얼중얼하며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였다.
은테안경을 낀 30대초반의 수학분과장(정치지도원이다.)이 일어나 훈련과 꼭같이 병행해야 할 학과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나서 태식의 문제는 대대청년동맹위원회의 의견을 받기로 하고 총화모임을 끝마쳤다.
장영수는 퍼그나 속이 알알해났다. 태식이 범한 잘못이 전부 그의탓만은 아닌것이다. 학급에서 제일 가까운 친구인 내가 그의 사업과 생활에서 나타나는 부족점을 보면서도 언제한번 따끔하게 일러준적이 있었는가. 기껏해야 롱조로나 한두번 충고했고 어떤 때는 오히려 같이 맞장구를 친적도 있었다.
영수는 조용한 기회에 한번 태식이와 마주앉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래일 어느 시간을 타서 중대정치지도원선생님을 만나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서도 허심하게 비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중간휴식시간이 되여 장영수는 아침에 채 하지 못한 기하방정식문제를 마저 풀려고 품속에서 자학습과제학습장을 꺼내들었다. 5분도 못되여 아래쪽에서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황태식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무슨 일인지 태식이는 벗어든 까만 스키모로 허공을 마구 휘저으며 찾고있었다.
《영수- 내려와. 빨리, 빨리 내려오라는데.》
저건 아무때 봐야 소란꾸러기라니까. 장영수는 투덜거리며 학습장을 든채 일어섰다.
《왜 그래?》
《야, 저거 중철형 아니가? 아, 저거, 저 병사 말이야.》
《뭐? 중철형?》
중철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열린 영수는 《조선의 태권도》 출연자들에 대한 훈련지도를 끝마치고 질서정연하게 3호수문으로 빠져나가는 군인대렬(박철건이네 부대)을 어방대고 더듬었다.
《어디, 어디야?》
《아, 요기, 요기 있잖아. 아, 맞다.》
심장이 후드득 뛴다. 대렬의 맨 뒤쪽에서 활개치며 걸어가는 애젊은 병사, 비록 다른 군인들과 똑같이 발목우까지 졸라맨 군화를 신고 얼룩얼룩한 위장복바지에 흰 스프링을 받쳐입어 가려보기 힘들었으나 그 병사는 틀림없는 김중철이였다.
《중철형!-》
둘은 약속이나 한듯이 일시에 소리쳐불렀다. 목소리가 하도 커서 김중철과 그 주위의 군인들, 대렬지휘관까지도 머리를 들어 올려다본다. 대렬지휘관은 짐작을 했는지 중철을 불러내더니 손목시계를 한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뭐라고 말하는것이였다. 그다음 중철이 어깨를 펴며 거수경례를 하는것이 보였다.
《중철형님!》
둘은 또다시 크게 부르짖으며 달음에 경기장바닥으로 달려내려갔다. 껴안고, 얼싸안고, 부여잡고.
《헤, 형님은 영웅이 된다더니 결국 여기에 왔구나. 그렇게 해가지구 언제 영웅이 되겠어요. 야- 막 실망하게 된다야.》
반가움을 나누던 끝에 태식이 아주 락심해서 중얼거리였다. 영수는 김중철이를 쳐다보았다. 중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그가 누구든 무엇으로든지 값을 푸짐하게 치러주던 중철형님이였는데 가만있는걸 보니 군사복무를 하면서 달라진것 같았다. 하긴 상대가 태식인데 뭐라고 하겠는가. 태식이의 말도 정 그르진 않은것이다. 우리 학교, 우리 모란봉구역의 전체 학생들의 믿음과 선망속에 떠나간 형님, 지금쯤은 전연초소에 있거나 혹은 훈련장에서 무쇠주먹을 벼리지 않으면 깊은 숲속에서 고강도행군을 하고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중철형님이 여기에 와있다니. 영수 역시 실망감이 있었고 불만스러웠다.
《자식, 한다는 소리가.》
김중철은 게면쩍어하면서 두루거리로 물었다.
《배경대훈련 하는걸 보니까 여간 힘들지 않겠구나. 그래 다들 여전하겠지?》
《그렇지 않으문요. 영수는 소대장을 하라는걸 뿌리치고 평대원이 됐구요, 난 학급장을 하다가 중대장사업을 해요. 하, 더 세졌지요.》
장영수는 속으로 피씩 웃었다. 중대장사업을 하며 관료주의적으로 일하던 끝에 말밥에 올라 몇시간전에 열린 중간총화모임에서 혼쌀이 단단히 나가지고도 아주 뜬뜬히 제 몸값을 올리려드는것이 우스웠던것이다. 사실 황태식의 문제는 단순히 비판이나 하는것으로 끝나지는 않을것이다. 중대초급일군들과 전체 중대학생들의 불만과 의견을 산데다가 정당한 비판을 하는데 대하여 감정적으로 반발했으니 태식이 암만 제가 잘못했노라고 하였지만 누가 그걸 곧이듣겠는가.
그러건말건 태식이는 언제 비판을 받았던가싶게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중철형, 이 영수는 암만 봐야 리해를 못하겠어요. 소대장을 하라는것두 거절해, 요전번엔 그 좋은 자리를 놔두고 맨 꼭대기에 올라가지 않았겠어요. 경기장지붕 착 밑에 말이야요. 거기가 어떤덴줄 알아요? 한여름에두 얼음물이 녹지 않는데예요.》
《그만해, 태식이.》
영수는 김중철이 어딘가 모르게 초조해하는것을 눈치채고 친구를 제지시켰다.
《중철형, 승인받은 시간이 된것 같은데 가시라요. 이젠 함께 있으니 만날 때가 있겠지요 뭐.》
《응, 정말 빳빳이 시간을 받았어.》
김중철은 영수의 권고를 선선히 받으며 수문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하지만 후엔 무슨 후에? 오늘 만나게 되겠는데.》
오늘?
영수는 머리를 기웃하였다. 오늘 시간을 받을걸 왜 지휘관은 이자 오분도 안되게 여유를 줬을가.
《에이 참, 랑패구나.》
김중철이 뛰여가는것을 보며 태식이 탄식했다.
《륙전대에 나간다구 온데 소문을 내놓고 이게 뭐가? 중철형이 이런데 파견될줄은 꿈에도 몰랐다야. 잘못 걸린것 같애.》
《뭐가 잘못 걸려?》
《정찰이나 저격, 륙전대엔 지망자가 많아 대렬일군들이 골치가 아파서 그런대. 마지막엔 달라는대로 일반부대에 막 보낸다질 않니. 내가 군대에 나갈 땐 똑똑히 알아보고 행동해야겠어.》
《그럼 너두 륙전대에 갈라구 했댔니?》
《그렇지 않으문.》
《흥, 잘두 생각했다.》
《왜, 내가 륙전대원이 못될것 같니?》
《중대장사업두 바루 못해 몰리면서두 꽤 특수병을 해내겠는지 믿음이 안 가서 그래.》
《너두 참, 딱 아픈델 찌르는구나.》
태식은 한풀이 죽어 스키모를 쓰면서 중얼거리였다. 그래도 중철에 대한 실망감은 여전하다.
《가만 보니까 중철형네 부대는 태권도랑은 잘하는데 어쨌든 인민군대에선 그리 쎈 부대는 아닌것 같애. 그러니까 후방에 와서 돌아가지.》
《됐어됐어, 올라가기나 하자꾸나.》
장영수는 저도 모르게 차오르는 실망을 애써 누르며 태식이를 재촉했다.
그로부터 몇시간후.
경기장회의실에서 진행한 모범군인들과의 상봉모임에 참가한 영수는 주석단을 쳐다보다가 놀라서 눈을 비볐다. 주석단에 앉은 세명의 병사들속에는 김중철의 의젓한 모습도 있었던것이다. 더욱 놀라운것은 그가 한 토론이였다.
이 얼마나 좋은 밤인가. 불그스름한 가로등빛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깊은 이밤, 이따금 지나가는 차들, 한적한 거리, 밤의 애무에 취한듯 꿈속에 든 창문들을 품고 기척없이 서있는 아빠트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보아오던것이였지만 이밤만은 그것들이 류다르게 보이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온 김중철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흥분이 잦지 않아 그런것 같았다.
장영수와 태식은 누구 하나 말을 건네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하였다. 오히려 말을 걸어오거나 입을 떼면 그 싱싱하고 깨끗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사그라질가봐 서로 약속이나 한것처럼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봉화산려관앞에 이르러 그들은 습관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두 소년은 각기 제집이 있는 방향으로 갈라져가야 했다. 장영수네 집은 서흥인민학교(당시)부근에, 태식이네 집은 평양담배공장뒤에 있었다.
《이젠 헤여져야겠구나.》
황태식이 먼저 퍼그나 감상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태식의 얼굴에는 마치 영리별이라도 하는것처럼 쓸쓸하고 처량한 빛이 가득 떠올라있었다.
《그래.》
《저, 영수.》
팔짱을 낀채 서성거리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태식이가 솜옷깃에 파묻고있던 턱을 들었다.
《아까 총화모임때 말이야. 날 속으루 꽤나 욕했지?》
《나도 같애, 친구라는게. 태식이, 곁에서 잘 도와주지 못해서 안됐다야.》
《뭘? 이건 순전히 내 잘못인데 뭐. 에이 참, 총화모임이 끝난 담에두 몰랐댔는데 중철형얘기를 듣고보니 가책이 되더라. 인민군대가 할 일이 없어서 5. 1경기장에 왔겠니. 중철형이 말한것처럼 우리가 하는 〈아리랑〉이 그만큼 중요하구 그래서 아버지장군님께서 형네 부대를 여기에 보내신게 아니니. 이제부터 단단히 채심할테야.》
《그러자꾸나. 참, 태식이, 거 혜련이 비판한거 말이야. 너 퍽 마깝지 않아서 그러는것 같은데 남자가 좀 속을 눙치라마.》
《고거 재수때같은거.》
황태식의 얼굴에 진하게 떠올랐던 쓸쓸하고 처량한 빛이 언제 그랬던가싶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태식은 쓰겁게 내뱉았다.
《갸말은 하지두 말아. 생각만 해두 기분이 잡쳐.》
《뭘 그래. 솔직히 말해서 혜련이 비판이야 어디 그른거 있니?》
《비판이 안 내려가서 그러는게 아니야. 겉과 속이 다르게 놀아서 그래. 너두 봤지? 일전에 우리 대대가 배경대적인 축구경기에서 1등 했을 때 꽃다발을 걸어준다, 식당조직을 해준다 하며 내 주위에서 알랑거리며 돌아가던걸. 그때 내가 신고나갔던 축구화두 갸가 사준거였어. 전엔 또 어쨌는줄 아니?
에이- 내 쓰거워서, 더 말하지 말자. 물론 잘못한것은 사실이지. 아, 그럼 친한 사인데 인간적으로 말해주문 못쓰는가 하는거야. 그게 뭐가? 사람들앞에서… 하, 이마가 다 따갑드라야.》
《…》
《흥,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시 오기만 해봐라. 영수, 래일부턴 너두 그 애하군 상종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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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이제껏 배집이 흔들거리는것을 겨우 참고있던 장영수는 허공중에 입김을 뿜어대며 하하하 하고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눈앞에서 식지손가락을 흔드는것도 우스웠지만 리혜련이에 대한 어마어마한 분석에 더는 참아낼수가 없었던것이다.
《그건 그때 가서 보자마. 어쨌든 우리 이제부터 잘해야 돼.》
둘은 굳은 결심을 나누고 헤여졌다.
봉화산려관을 에돌아 집근처에 이르니 어머니가 아빠트밑에서 기다리고있었다. 이맘때면 늘 집에서 내려와 그를 맞아주는 할머니며 어머니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머니 혼자뿐이였다.
장영수는 어깨에 멘 배경대책을 벗기려는것을 만류하며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추웠지요, 어머니.》
《괜찮다. 영아는 아까 왔는데 넌 퍽 늦었구나.》
《훈련은 제 시간에 끝났는데 공부를 하느라 이자 와요. 근데 할머닌 왜 보이지 않나요?》
《영아랑 함께 봉화산려관에 갔다.》
며칠전에 강이가 감기에 걸려 앓는다며 근심하시더니 아마 그때문에 가신가부다. 영수는 어머니의 팔굽을 쥐며 재촉했다.
《추운데 어서 가시자요.》
집에 들어선 영수는 전실 한구석에 배경대책을 벗어놓기 바쁘게 몸을 씻는것도 잊고 제 방에 건너갔다. 책장을 연 그는 이미전에 그려놨던 그림들을 찾으려고 두손을 뻗쳐 맨 꼭대기를 더듬었다. 비여있었다. 다른데도 뒤져보았으나 그림은 없었다. 영아의 손이 간 모양이였다.
《영수야, 뭘하니? 국이 식겠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재촉한다. 영수는 락심하며 책장문을 닫았다.
《아 어머니, 내 방에 영아를 들여놓지 말라구 했는데 잊었댔나요?》
《왜 그러니? 뭘 잃어졌니?》
《전에 내가 건사한 그림들이 몽땅 잃어졌어요. 에이, 고건 그저 짬만 있으면 뒤적질이라니까.》
영수는 투덜거리며 동생이 자는 할머니방에 들어갔다. 요즘 딱지바람이 불어 종이를 보면 오금을 못쓰는 영아이니 혹시 거기에 있나해서였다.
《그럴것 같애서 내가 건사했다. 여기 오려무나.》
그는 귀가 번쩍 트이여 부리나케 전실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옆차대밑을 손더듬하더니 문제의것들을 꺼내는것이였다.
《세보럼. 혹시 장수가 모자라지 않는지.》
영수는 그림을 받아들고 성급히 장수를 세여보았다. 속으로 셈해놓았던 장수가 맞는다. 장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야, 다행이네. 다 있어요.》
《한데 들어오자바람으루 그건 어째서 찾니?》
《이거요? 챠, 이거 사연을 설명하자문 꽤나 긴데, 오 그것부터 말해야겠구나.》
갑자기 대답이 궁해있던 영수는 실머리가 잡히자 반색을 했다.
《어머니, 중철형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 우리와 함께 있어요. 우리처럼 〈아리랑〉에 참가하고있단 말이예요.》
《중철이가? 아닌 밤중에 그건 무슨 홍두깨같은 소리냐. 그 애야 지금 한창 군사복무를 할텐데.》
장영수는 다소 응석기가 어린 어조로 말하며 한손으로 배를 쓸어만졌다.
《아- 배고프다. 빨리 밥 먹자요, 어머니. 내 밥을 먹으면서 이야길 해줄게요.》
밤은 더욱 깊어갔다. 하던 일을 마무리지은 영수는 일에서 손을 뗐다. 그림을 들고보니 마음에 들었다. 이만하면 아버지장군님께 드릴수 있을것 같았다.
영수가 자동차설계를 시작한것은 몇달전 어느날 누구에게선가 아버지장군님께서 전선시찰을 하면서 때로 운전대를 잡기도 하시고 어떤 날엔 길이 너무 험해 야전차를 밀고 령을 넘으신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그 어간에 그는 고심을 하며 숱한 그림들을 그렸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자동차들을 모두 본따서 그렸으나 왜 그런지 하나도 눈에 들지 않았으며 원인을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면 연구를 하던중이였는데 오늘 모범병사들과의 상봉모임에서 김중철이 한 이야기를 듣자 드디여 원인을 알게 되였다. 다이야의 크기와 홈들에 문제가 있었다. 지난번에 영수는 차를 그릴 때 다이야보다 크고 화려한 차체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아버지장군님께서 타신 차는 멋있기도 해야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든든하고 힘이 세야 하는것이다.
영수는 그림을 방바닥에 놓으며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연필을 집어든 그는 자동차옆구리에 날개를 그리였다. 바퀴로만 달려서는 안된다. 정 험하면 날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장군님께서 안전하게, 힘들지 않게 전선길을 다니신다. 날개까지 달아놓고보니 흡족했다. 이제 총시연회를 치른 다음 영수는 이 그림을 학급동무들에게 보여 다른 의견이 없으면 자동차공장에 직접 들고가서 만들어달라고 할 작정이였다.
기지개를 한껏 켜며 일어선 장영수는 잠자리에 들려고 불을 껐다. 기다린듯 짙은 어둠이 한꺼번에 방안으로 밀려든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으나 정신은 새록새록 맑아지기만 하였다. 모범병사들과의 상봉모임에서 받은 감흥이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다. 연탁에 나서서 김중철이 한 토론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우리 중대를 찾으신것은 저희들이 아침기상을 한지 한시간후였습니다. 뜻밖에 닥친 영광이 너무나도 꿈같아 저희들은 그이의 팔에 매달려 기쁨과 행복에 취해있기만 하였습니다. 그이의 야전복이며 신발이 어째서 푹 젖어있었댔는가도 모르고 말입니다.
후에 알게 되였습니다. 부대를 찾으신 최고사령관동지께서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의 자리에 저희들이 빠졌다는것을 아시고 그 밤중으로 철령을 넘어오시였다는것, 그리고 저희들의 단잠을 깨우지 않으시려고 비내리는 이른새벽 로상에서 기상시간을 기다리고계셨다는것도 말입니다. 학창시절 신문과 방송, 텔레비죤을 통하여 매일같이 전해들은 최고사령관동지의 전선시찰소식,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아온 장군님의 전선길이 어떤것이였는가를 저희들은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였습니다. -
장영수는 끙 하고 한쪽으로 돌아누우며 한팔을 머리밑에 고였다. 느닷없이 불쑥 솟구치는 그리움에 가슴이 젖어든다.
아버지장군님께선 이밤 어디에 계실가. 령길을 넘으실가, 바다길을 가실가, 아니면 쪽잠에 드셨을가,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아버지장군님께선 더운 식사랑 제때에 하시는지. 혹시 길녘에 차를 세우고 밤을 새지나 않으시는지. 김중철이 마냥 부러웠다. 중철형님은 좋겠구나. 군대에 나가자마자 아버지장군님을 만나뵈웠으니까.
장군님께선 형님의 손을 한번 아니, 두번씩이나 잡아주셨다지 않는가. 자동보총을 안겨주시면서는 군사복무를 잘해서 조국과 인민이 아는 훌륭한 병사가 되여 공화국영웅인 형님의 이름을 빛내라고 하셨다지. 중철형님은 행운아야.
영수는 부러움에 차서 입속으로 중얼거리였다. 난 언제면 형님처럼 아버지장군님을 만나뵈올수 있을가. 중학시절엔 안될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군대에 나가야 한다. 군복을 입고 조국을 지키는 병사가 되여야 장군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닐수 있는것이다. 에이, 시간은 왜 이리 더디게 흘러가는지. 몇달 있으면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지만 그것마저도 지루하게 생각되는것이였다. 장영수는 졸업을 앞두고 지망서를 쓸 때 중철이처럼 1지망도 군대, 2지망도 군대라고 쓸것이며 그것도 김중철이 복무하는 부대에 보내달라고 쓸 결심을 다시금 굳혔다.
창밖너머 멀리서 새벽 4시를 알리는 인민대학습당의 은은한 종소리가 흘러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