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설 <아리랑> 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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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아침.
박철건이네 부대의 참가하에 5월1일경기장에서는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 주신 과업을 제기일내에 무조건 관철하기 위한 《아리랑》국가준비위원회 전체 상무보장성원, 출연자들의 궐기모임이 진행되였다.
김정일동지의 커다란 신임과 사랑에 접한 참가자들은 《아리랑》의 중요성과 의의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였으며 그이께서 주신 과업을 지상의 명령으로 간주하고 공연준비를 하루빨리 다그쳐 충정의 보고를 드리겠다는것을 맹세했다. 닷새만에 끝난 경기장지붕막이공사에 이어 부문별관통련습에 총진입한 참가자들은 배가의 열정을 발휘하여 훈련을 진행하였다. 하여 보름도 못되는 사이에 《아리랑》은 전반적인 예술적체모를 완전히 갖추게 되였으며 열흘후에는 총시연회를 하고나서 당에 보고를 드릴수 있게 되였다.
총시연회를 앞둔 어느날 저녁.
퇴근시간이 퍼그나 지나서야 훈련을 마무리지은 한정미는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손에 들었다. 그 녀자는 밤색대형유리로 만든 육중한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나섰다. 눈이 와서인지 날씨는 푸근하였고 내리는 눈발속에 아물거리는 가로등빛이며 맞은편아빠트창문의 불빛들은 어떤 아늑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처녀는 두손바닥을 펴들고 눈송이가 내려앉는 모양을 보며 생그레 웃었다. 처녀가 웃음을 지은데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얼마전 한정미는 외국과학기술통보서에 실린 어떤 론문을 읽다가 문득 이 기술을 탄력기재에 도입하면 위험성을 줄이는 한편 공중비행시 출연자의 공전속도도 두배로 높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안전기사 민유남과 토론해보니 그 역시 흥분하는것이였다. 민기사는 이 기술을 물결날기에 사용하는 기재에도 도입하자고 하였다. 정미는 민기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며칠밤을 꼬박 새워 도면을 완성하였다. 그바람으로 시교외에 자리잡은 어느 한 공장에 간 한정미는 그곳 기술자들과 만나 합의를 보았으며 수일간에 제품을 완성해주겠다는 확답까지 받아놓았다. 그래서 기다리던중이였는데 오늘 공장에서 기재를 생산해놓았다는 소식이 왔던것이다.
한정미는 무척 즐거웠다. 해놓은 일이 스스로도 놀라왔고 자기도 교예장에 무엇인가 크게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들어서였다. 정미는 혜영이와 이 기쁨을 나누고싶었다.
털목도리틈사이로 스며드는 한줄기의 찬바람에 가볍게 진저리를 치고난 정미는 봉화산려관을 바라고 걸음을 떼였다. 그러던 한정미는 몇걸음 못 가서 무춤 서버리고말았다. 필경 그는 봉화산려관이 아니라 이 시간에도 5월1일경기장에 있을것이다. 설사 려관에 있다고 해도 그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요즘 한정미는 왜 그런지 혜영이가 일부러 간격을 두려 한다고 짐작하고있었다. 진호와의 결별을 말해주었을 때, 정확히는 휴양을 갔다와서 심혜영을 만난 이후부터였을것이다. 그때 그들사이에는 어떤 말들이 오갔었던가.
-정미, 요즘 네가 훈련지도를 못하겠다고 제기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니.
-옳아.
-어째서?
-몰라서 묻니? 담당창작가와 의합이 맞지 않아서 그래. 이젠 남남보다 더한 사이가 된 사람과 무슨 편한 감정을 가지고 일을 할수 있겠니. 아마 하는 일들이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고 눈뿌리만 아플게다.
-넌 정말 진호동지와 그만둘 결심이니?
-그게 뭐 애들 놀음이라고 이랬다저랬다 하겠니.
-옳지 않아. 정미, 난 네 태도가 옳지 않다고 봐. 사업에 감정을 앞세우면 일이 안된다. 바른 말로 넌 저번 사고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았으면 분발해야 하지 않니.
-사고얘기는 그만둬. 그건 이미 비판된 문제고 또 네가 뭐라고 오지랖넓게 신경을 쓰니.
-난 지나간 일을 일부러 뒤지며 네 가슴을 아프게 하자는것은 아니다. 네가 한 행동이 왜 그런지 진실치 못하고 내가 알고있는 정미라는 인간이 이상하게 달라지고있어 그러는거야.
전에 진호동지와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그저 심상하게 여겼댔어. 둘사이에 지난 시기 다툼도 있고 오해하는 일이랑 더러 있었기때문에 사랑싸움이겠거니 했댔지. 그런데 보니 그게 아니구나. 어쩌면 그럴수 있어. 자기의 의향을 따르지 않는다고 사랑을 깨버리고, 작품완성에 힘을 합칠 생각은 않구 사람이 싫다며 왼새끼를 꼬고. 무슨 일이든 제 리해관계를 앞에 놓는 자기 중심주의. 난 요즘 네 마음속에 이런것이 자라서 삐뚜로 나가지 않는가 하고 생각된다.
-듣기 거북하구나. 나한테 그런 식으로 충고하다니.
-나 역시 이런 말을 하기가 편안치는 않다. 아프겠지만 마저 들어줘, 부탁이야. 진호동지를 더는 괴롭히지 말아줘. 너도 그가 지금이 제일 힘든 고비라는걸 알거다. 무슨 옥감정때문에 결별할 결심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그보다 교예장을, 《아리랑》을 앞에 놓아야 옳지 않겠니.
-그래? 호- 혜영이, 난 네가 그렇게 훌륭한 녀자인줄 몰랐구나. 그다지나 그 사람의 일을 걱정하며 왼심을 쓰는줄은. 어쩌겠니, 너한테 내가 이상하게 변한 녀자로 보였으면 별도리가 있니? 난 구태여 꼬치꼬치 발명하고싶지 않다. 마음대로 생각하렴.
-비꼬지 말아. 난 진정을 말했을뿐이다.
-진정을? 난 그 사람이 작품을 성공시킨다고는 본다. 원래 꼬주흐처럼 검질기고 지꿎은 사람이니까. 내가 불쾌하게 여기는건 보조창작가의 자리에서 벗어나자마자 무섭게 달라지는 그의 인간됨이야. 하긴 그게 그 사람의 진짜모습인지도 모르지. 난 진속을 모르고 그를 지지해주는 고지식한 외할아버지를 보면 기분이 나쁘고 가슴이 아프다. 그에게 이때껏 진정을 바쳐온 나자신이 불쌍해. 내가 훈련지도를 맡지 못하겠다고 제기한건 네 말마따나 사고를 친 장본인은 나기때문에 량심에 꺼리낀것도 있지만 보다는 이런 감정때문이였어. 이런 사람과 내가 어떻게 한길을 계속 갈수 있으며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하면 얼마나 잘 되겠니. 같이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그리고 혜영인 사랑문제에선 풍파를 겪어 못 봐서 그러는것 같은데 모르면 남의 속을 함부로 넘겨짚지 말았으면 해. 혜영동무야 장래가 근심되는게 뭐가 있어? 애인은 전도유망한 사람이니 앞으로의 생활은 모든 면에서 념려없을것이고, 때가 되면 식을 올리고 행복을 누리면 되지 않니.
-정미, 아무 말이나, 넌.
-됐어. 동병상련이라고 옛날부터 같은 병을 앓아봐야 남의 아픔을 안댔어. 내 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와 그만두려고 결심한것은 하루이틀의 감정을 가지고 그런건 아니다. 그동안 여러 기회를 통해서 루적된 감정의 결과야.
정말 그렇지 않는가. 한정미는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계속 자기의 견해를 정당화하며 변호하려고 애를 썼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정미가 강진호를 통해서 혜영이를 알게 된것은 썩 오래전부터였다. 지난해초에 5월1일경기장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이런 연고로 해서인지 얼굴을 익히자마자 친숙해졌다. 남자친구들의 애인들끼리니 무슨 이야긴들 나누지 않았겠는가.
가정소개, 자라온 경력, 성격, 습관, 이렇게 시작된 화제는 그런것들이 막물이 지면서 생기를 잃는듯싶었으나 사랑의 동기와 과정, 장래의 희망에로 이어지자 대뜸 빛을 뿌리며 서로 귀를 기울이게 하였다. 심혜영이보다 정미쪽이 더 그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였다.
적막과 어스름이 짙게 깃든 청천강기슭,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젊은 륙전대원, 목욕바구니를 들고 코노래를 부르며 강으로 나오다가 그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 뒤걸음치는 녀학생, 온몸이 물주머니가 되여 그를 끌고가는 심혜영, 병원침대에 누워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나이, 미술박물관에서의 기이한 상봉, 어느 토요일 밤의 불같은 고백, 무언의 허락, 포옹, 한달이 멀다하게 오가는 다정한 편지들, 이 얼마나 랑만적이고 멋있는 사랑인가. 이들의 결혼생활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가. 혜영동무는 행복할거야. 그는 그저 남편을 잘 내세우고 자식들을 잘 키우면 될것이다.
원래 환상적인데가 다분한 정미는 사랑담을 솔깃하게 듣다가는 저도모르게 제식대로 발을 달아 이런 공상을 펴군 하였다.
그다음에는 항상 불만이 뒤따랐다. 심혜영이네 사랑에 비교해볼 때 자기들에게는 즐겁게 추억할만 한 일이 없었다고 인정되였던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혜영이네와는 달리 처녀쪽에서, 한정미의 주동적인 행동으로 시작되였다. 정미가 평가한데 의하면 진호는 부모들의 직업이며 가정환경, 본인의 경력을 비롯해서 아주 평범한 청년이였다.
기껏 너그럽게 쳐준다면 그네잡이를 하는 보조공중교예배우시절의 덕택으로 조화롭게 발달한 체격이라고 할는지, 하지만 그것도 랭정하게 따져보면 남들보다 나은 점은 못되는것이다. 그렇다면 한정미는 강진호에게서 무엇을 보고 반했던가.
《진호동지는 꼬주흐예요.》
언젠가 내게서 무엇이 마음에 들었댔는가고 묻는 그에게 정미가 한 대답이였다.
《쎄라피모비치의 〈철의 흐름〉을 봤지요? 전쟁판에서 기관총명사수로는 공적이 대단했지만 겨우 소위보가 된 주인공, 그렇지만 끈덕진 노력으로 목적을 달성하고야마는 주인공, 진호동지의 성격은 여불없는 꼬주흐예요. 거기에, 음- 》
거기에 또 무엇이 있었던가. 남의 아픔과 괴로움을 제일처럼 여기고 도와주고싶어하는 다정다감한 인정미였다. 정미가 이것을 함께 배우생활을 하면서 여러번 직접 체험해보았었다.
동기는 이것이였다. 성실성에 끌리고 인정에 무르고무르며 랑만으로 충만된 시절, 사춘기를 갓 벗어난 그 나이의 처녀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이 한정미도 여기에 마음이 끌려 스스럼없이 사랑을 고백하였다.
한정미에게는 진호가 례의 우점을 내놓고는 확실히 평범한 청년이였다. 그랬기에 정미의 심중에는 늘 진호에게는 자기와 같은 대상자가 과남할것이라는 의식이 잠재해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것은 대수롭지 않게 밀어버리고 그를 대하였다. 어려운 세월에 그가 나에게 준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있는건 사실이지만 그건 내가 기울인 정에 비하면 새발의 피나 다름이 없지 않는가. 그런데 보조창작가의 자리에서 벗어나 단독작품을 맡자마자 변하였다. 내가 왜 애초에 그의 진짜 속을 몰라봤을가.
누가 말했던가, 사랑을 주는 사람은 사랑을 받지 못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절대로 사랑을 주지 않는다. 옳아, 우리 사이가 그렇지 않는가. 우린 사실 서로 선택을 잘못했어.
혜영이, 넌 이걸 알기나 해? 내가 리기적인 녀자라고? 네가 아마 나처럼 겪어보았으면 그렇게 표현하지 못할거야. 생활은 교과서가 아니야.
한정미는 고독하고 외로왔다. 정미는 눈물이 절로 나와 장갑을 낀채로 눈귀를 훔쳤다.
불현듯 울리는 차동음소리에 한정미는 눈을 들었다. 저기 주차장에 금방 들이닿은 백색소형뻐스에서 외할아버지며 《아리랑》국가준비위원회 일군들이 내리고있었다. 저녁 8시에 교예장때문에 협의회를 한다니 그 회의에 참가하려고 오는 모양이였다. 그들속에는 강진호도 있었다. 무심결에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정미를 띄여본 그는 총총히 다가온다. 진호는 어딘가 모르게 퉁명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어디 볼일이라도 있소?》
처녀는 쓰거워서 두입귀를 내려뜨리였다. 뭐가 안심치 않은지 근간에 자주 훈련장을 찾아오는 강진호이다. 와서는 아주 딱딱하고 실무적인 자세로 부족점만을 지적하군 했는데 매번 정미의 마음속에 원인모를 반발심만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왜 또 왔을가. 퇴근시간을 딱 맞춰온걸 보니 트집을 잡고싶어 그러는거야. 에이, 이거야 어디, 한정미는 발끈해서 내뱉았다.
《퇴근시간이예요.》
《배우들은 있겠지?》
《?》
기가 막혔다. 그런가부다하는 만만한 어조도 그렇지만 자기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태도에 부아가 났다.
《있어요.》
한순간 더운 바람이 풍겨왔고 화가 난듯 계단을 뛰여올라가는 진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정미는 일종의 야릇한 쾌감을 감수하며 흘러내린 진흑색털목도리를 추슬러올렸다. 가자. 그런데 어째서인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망설이는 사이에 쇠울타리너머 저 앞도로에서는 평양역쪽으로 가는 궤도전차가 벌써 서너대는 더 되게 지나갔다. 마침내 망설임을 털어버린 정미는 돌아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무대로 들어선 한정미는 전에 없이 긴장한 분위기를 느끼고 그 자리에 못박힌듯 멈춰섰다. 약속이나 한것처럼 두손을 앞에 모두어잡고 한켠에 서있는 배우들이며 두손을 허리에 얹고 그들의 등뒤 어딘가를 응시하며 우두커니 서있는 강진호가 시야에 비껴들었던것이다.
《돌아들가오.》
배우들은 진호가 손짓하자 조심조심 무대뒤쪽으로 흩어져갔다. 그러면서도 강진호며 정미의 기색을 연신 훔쳐본다.
《좀 남아있소.》
그들이 뒤를 따라 나가려던 한정미는 문손잡이에서 손을 놓았다.
《어째서 단계별고공극복훈련속도를 늦잡고있소?》
《훈련은 일정대로 나가고있어요.》
《늦소. 교예장은 하루라도 앞당겨서 빨리 경기장을 타야 한단 말이요.》
정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술만 감빨았다. 물결날기며 포탄비행을 담당한 배우들도 아직 선정이 되지 않았는데 경기장을 타야 한단다. 더구나 야외훈련조건도 채 구비되지 못한 이 엄동설한에. 한번 사고를 쳤으니 믿음이 안 간다는건가.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사실 우리보다 급한거야 다른 형상요소를 맡을 담당자나 경기장조건이 아닌가요.》
《그래서 야간훈련도 조직하지 않고 여느때처럼 정상퇴근을 하는거요?》
《글쎄, 장 전반속도에 지장을 안주면 되지 않아요.》
《동문 포탄비행이나 물결날기를 념두에 두는것 같은데 거기에 훈련속도를 맞추면 안되오. 경기장훈련조건도 그렇지. 조건이 아무리 어려워도 야외훈련장은 반드시 꾸려야 하며 조만간에 기재설치작업은 시작될거고 되는 차제로 훈련을 병행해야 하오. 래일이라도 그래 당장 실동훈련에 들어가면 어떻게 할셈인가.》
《…》
《너무해, 이건 너무하단 말이야. 한쪽에서는 시간을 분초루 쪼개가며 일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밤을 새우는데 여기선 건들건들 무사태평이구만. 지금 경기장에선 누구들이 뭘하고있는지 알아? 아동장출연자들이, 쪼꼬만 어린것들이 밥을 날라다먹으며, 그것도 매일같이 야간훈련을 하고있단 말이요.
매번 와봐야 그 식이 장식인데 일정을 맞추긴 무슨 수로 맞춰내, 정신이 틀려먹었는데. 주위를 좀 둘러보라우. 멀리는 몰라도 제 할아버지나 혜영동무가 어떻게들 일하나.》
《뭐예요? 내가 무사태평으로 일해요?》
외할아버지는 그렇다치고 혜영이가 그의 입에 오르자 반발심이 세차게 일어 얼굴이 달아올랐고 숨이 가빠났다. 한정미는 목에 꼭 달라붙은 털목도리를 신경질적으로 내리끄당겼다.
《좋아요. 거기 말대로 내가 분위기에 맞지 않게 일한다고 하자요. 그럼 거긴 왜 부득부득 배우들을 야외에 끌어내지 못해 안달이예요. 제 알기에는 교예장훈련은 기상조건이 성숙된담에 시작한다고 들었는데 준비위원회와 토론이 있었는가요?》
《…》
《주관에 빠져 그러지 말아요.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들어봤어요? 다들 잘한다고 춰주니까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덤벙거린대요. 제 주장만 똑 제일인것처럼 우기며 안하무인이래요. 마저 들어요.》
허리춤에서 손을 떼며 강진호가 입을 열려고 하자 정미는 어성을 높이며 매몰스럽게 제지시켰다.
《그리고 혜영이를 무슨 우상처럼 여기는것 같은데 난 거기하군 견해를 달리해요. 심혜영이는 행복한 녀자예요. 앞으로도 그럴것이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가 뭐 아이들을 잘 키워서 나라에 소문이 난 교양원이 됐나, 아니면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 땀을 흘려본적이 있어요? 아니예요. 그야말로 평범하고 어디서나 볼수 있는 흔하디흔한 처녀지요. 이런 녀자가 오늘은 운수가 좋아 전도유망한 멋쟁이총각을 애인으로 만났으니 장래에 무슨 고생이 있겠어요. 그리고 처녀적에 고생을 좀 하면 어때요? 그 고생이라는것도 아마 혜영이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될거예요. 그러니 제앞에서 다시는 심혜영이소릴 꺼내지두 말아요.》
《뭐라구?》
《?!》
《다시 말해봐. 혜영이가 어쨌어?》
무서운 얼굴을 해가지고 다가선 강진호의 거동에 겁이 약간 났다. 흥, 그런다구 할 소릴 못할가. 정미는 코웃음을 치며 마지막말을 꺼리낌없이 되뱉았다.
《다시는 내앞에서 혜영이소리를 꺼내지 말란 말이예요.》
《에익, 이 노랭이같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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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에익, 이 노랭이같은거. 여태껏 참구 보자보자하니까. …내가 왜 몰랐을가. …후회돼. …함부로 모욕하지 말라. 너같은건 열개 있어도 혜영이 하나만 못해. 그들의 사랑이 뭐 어쨌다구? 꼴사납게 탱탱거리는거 막 보기 베차. 교예장에서 손을 떼고 썩 사라져.》
이어 온몸을 후려치는듯이 쾅 닫기는 문소리, 거칠게 투덕거리며 멀어져가는 걸음소리.
뭐, 노랭이? 내가 꼴사납게 탱탱거리는거 보기 베차다구? 그리고 썩 사라지라? 갑자기 훈련장이 한바퀴 돌다가 선다. 눈앞이 어지러워났다. 심장이 마구 활랑거리였다. 이자 이 사람이 나한테, 진호동지가 정말 내게? 한정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며 아연실색하여 서있기만 하였다. 뒤늦게야 진호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한정미는 따라가 그를 잡아세우고 해보려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정미는 얼굴을 싸쥐며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분함과 서러움이 뒤섞인 눈물이 그칠새없이 흘러나왔다. 강진호, 너 사내가 맞아? 처녀심리두 모르는거 네가 무슨 사내야. 왜 자꾸 속을 꿍지구 날 어제날의 한정미로 여기는가 말이야. 내가 좀 성격을 지나치게 세울수도 있어. 또 녀자라는건 속으로는 옳다고 인정해도 다른 처녀와 자꾸 비교하면 반발심이 생기는거야. 한데 네가 날 이렇게 대하다니. 너 이자 그거 진심의 소리야? 진정으로 한 말이야?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내가 어쨌게? 요즘은 왜 다들 날 못살게 구는걸가.
억울했다. 비록 버그러진 사이였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정끄트머리때문에 속으로는 여전히 진호를 남다르게 대하여왔던 처녀였다. 한정미로서는 그가 내뱉은 무정하고 지어 거칠기까지 한 표현들이 하나같이 모두 삭이기 어려웠으며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것이였다. 강진호, 너 주역을 담당했다고 이젠 나를 업신여겨? 좋아. 난 그밑에서 이런 수모를 받으면서까지 일을 하진 않을테야.
반발심이 솟구쳤고 배신감에 입안에서 쓴물이 돌았다. 한참이나 그냥 앉아 어깨를 떨던 정미는 눈물을 훔치며 일어섰다. 한정미는 볼편의 눈물자욱을 꼼꼼히 닦으며 오연하게 턱을 쳐들고 발을 내짚었다.
《집에 가려니?》
복도로 나와 걸음을 옮기려는데 등뒤에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할아버지를 보자 정미는 웬일인지 눈물이 또 쿡 솟구쳐 고개를 틀었다. 벌써 그가 외할아버지에게 일러준것이 분명했다. 정미는 노염이 치밀어 성급히 눈굽을 찍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난 교예장에서 손을 떼겠어요.》
《?》
《그 사람과는 절대로 일을 같이 못하겠어요.》
《어째서?》
《난 결코 그 사람의 부속물이 되고싶지 않아요. 난 극장에 들어와 다른 일을 하겠어요. 이건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거야요. 내가 그 사람보다 못한거 뭐예요?》
《그래?! 그게 진심의 소리냐?》
재차 묻는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상당히 엄했다.
《네.》
《흐음- 》
외할아버지는 알지 못할 외마디소리를 내뿜는다. 뒤짐을 지고 잠시 푸른 형광빛이 얼른거리는 복도 저켠아래를 응시하던 림진우는 밤색털모자를 쥔 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였다.
《앞서거라. 네 방에 어서 올라가자.》
방에 들어선 림진우는 고뿌에 더운물을 따라 동안뜨게 비우고나서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문가에 서있는 정미에게 의자를 손짓했다.
한정미는 전에없이 엄해진 외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가까이에 있는 의자를 끄당겼다.
《이즘엔 왜 그런지 지나간 일들이 자주 떠오르군 하는구나. 지난 전쟁때의 일이랑, 네 어머니를 키우던거랑. 추억에 산다는건 늙었다는걸 의미하고 내 나이엔 당연한 일이긴 하다만 이 외할아버지가 요즘 되올려보게 되는 과거의 일들은 의미가 다르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한정미는 때아닌 때 외할아버지가 옛일을 거들자 무척 의아했으나 차츰 귀를 강구게 되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전부 자기와 관련되였기때문이였다. 림진우의 말을 듣는 정미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리고있었다.
어쩐지 갑자기 낯이 설어보이는 외할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의 음성은 시종 부드러웠으나 그 하나하나의 말마디들에 너무나도 가혹한 진실이 담겨있어 머리가 휑 하니 들리는것 같고 숨을 쉬기가 가빠났다.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