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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아리랑> 22-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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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538회 작성일 16-01-23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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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회색너울을 드리우며 멎는듯싶었던 폭우는 중낮이 되여올무렵에 사나운 모습을 드러내며 또다시 울부짖기 시작했다. 숲, 산봉우리들, 우불구불 휘여돌아간 도로, 개울들. 모든것이 폭우속에 휘감겨 몸부림치고있었다.

관하구분대들의 장마대책정형을 알아보려고 부대지휘부를 출발한 박철건은 3대대 1중대숙영지근처에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더 가지 못하였다. 벗겨지려는 비옷모자를 손으로 잡으며 장갑차에서 뛰여내린 그는 운전사에게 달려갔다.

《안되겠어?》

《안되겠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운전사의 손을 따라 눈을 주던 철건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산허리가 뭉청 끊기는통에 웃부분이 흙사태를 일으키며 밀려내려와 한 백메터쯤 되는 구간을 아예 메워버렸던것이다.

《그놈의 폭우가 되겐 사나운데.》

《폭우가 사나운것보다 이 아근의 지층이 사토질이여서 그럴거요. 가만.》

운전사의 말을 정정하던 박철건은 언뜻 련상되는것이 있어 등뒤에 서있는 참모장에게로 얼굴을 돌리였다.

《요전에 분명 1중대가설병실을 산 바투 등지고 지었댔지요?》

《그렇습니다. 토피를 빚어 든든하게 세웠지요.》

박철건은 불길한 예감에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흙빛하늘은 통구멍이 난듯 여전히 비줄기를 쏟고있었다. 한시간? 혹은 30분? 아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위험은 그보다 훨씬 빨리 닥쳐올수 있다. 철건은 참모장에게 돌아섰다.

《참모장동진 빨리 지휘부로 돌아가십시오. 가서 대대들에 알아보고 산을 등지고 지은 병실이 있으면 즉시 이동명령을 주십시오. 난 1중대에 가보겠습니다.》

《거긴 내가…》

《그러지 마십시오. 1중대야 코앞이 아닙니까. 그리고 달리는데서야 젊은 내가 낫겠지요.》

박철건은 그에게 웃어보이고나서 비옷자락이 펼럭이지 않게 두끝을 꽉 잡아매였다.

그다음의 일들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100여메터구간 돌파. 중대경비초소까지 15분, 중대 폭풍.

명령은 간단하였다. 중대전원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를 가지고 병실로부터 800메터 떨어진 장소로 즉시 이동할것.

중대앞마당은 삽시에 혼잡해지였다. 시커먼 연기를 토하며 차고에서 빠져나오려고 우물거리는 장갑차들, 쉴새없이 독촉하고 꾸짖는 목소리들, 쉬임없이 달려가고달려오는 병사들.

박철건도 그속에 섞여 포탄상자며 쌀마대들, 전투기술기재를 날랐다. 그가 네행보쯤 오갔을 때에야 이동은 완전히 끝났다.

《인원들을 점명하오,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들도.》

박철건은 숨을 헐썩이며 달려와 이동완료를 보고하는 중대장에게 다음명령을 주었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흙빛구름과 비말에 잠겨 부옇게 보이는 산정수리를 쳐다보다가 병실쪽으로 눈길을 옮기였다. 그 순간 철건은 너무 놀라 온몸이 쫄아드는것 같았다. 저쯤 떨어진 병실 앞마당에서 한 병사가 뛰여오고있었던것이다. 올해에 입대한 김중철병사였다.

그런데 중철병사는 자기에게 어떤 위험이 드리워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달려오다말고 진창속에서 무엇인가 찾느라고 두리번거리고있었던것이다.

《야 중철이, 죽자구 그래.》

철건의 벽력같은 목소리에 와뜰 놀라 이쪽을 보던 중철은 손에 주어든것을 주머니에 넣으며 냅다 달려온다. 그러나 박철건이 서있는 언덕이 아니라 그 아래방향으로 달려오고있었다.

《이쪽이야, 이쪽.》

그는 소리치다말고 댓길이 넘는 언덕경사지를 뒹굴다싶이 하며 달려내려갔다. 그의 손을 잡은 박철건은 달음에 경사지를 되짚어달려 언덕우에 거의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땅이 부르르 진동했고 산정수리가 녹아버리듯 자취를 감추더니 이내 우- 하는 바람이 터지며 거대한 흙사태가 맹렬한 속도로 지쳐내리는것이였다.

무슨 힘으로 중철병사를 던지다싶이 밀어내뜨렸는지 몰랐다. 그다음 박철건은 잔등을 치는 둔중한 타격에 떠밀려 자기의 몸도 중철이쪽으로 휘뿌려지는것을 느꼈다.

 

어디선가 멀리서 철건아 하는 애정겨운 목소리가 아슴푸레 들려온다. 오, 이건 어머니군. 그런데 어디서 찾을가. 부대장동지! 철건동지! 뒤이어 들리는 애절한 부르짖음. 처녀같기도 하고 중철이같기도 하고. 누굴가, 누구의 목소리인가.

차츰 어둠이 희부옇게 가셔지고있었다. 슬며시 눈을 뜨던 박철건은 망막이 시그러워나 도로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야에는 흰 위생복을 입은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정치위원이였다. 그는 박철건이 웃몸을 일으키려는 거동을 눈치채고 두손으로 철건의 어깨를 부드럽게 누르는것이였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아- 》

박철건은 온몸을 강제로 잡아당기는듯 한 아픔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내뿜었다. 몇분이 지나서 안정을 되찾은 그는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따뜻한 해빛이 쏟아져들어오는 크고 맑은 창문, 그밑에 놓여있는 화분들, 물병, 링게르병, 고뿌들. 모든것이 눈에 설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군단병원입니다.》

《그렇습니까? 이 박철건이 명이 길긴 길군요.》

《롱담마십시오. 하도 흙사태중심구역이 아니라 가녁에 있어서 그렇지 하마트면 큰일날번 했습니다. 그리고 부대장동진 오늘까지 이틀밤동안 의식을 잃고있었습니다.》

《것 보십시오. 명이 길지 않고서야 그런 판에 살아나겠습니까.》

정치위원의 얼굴에 너우룩한 웃음이 비꼈다.

《중철이는 어떻습니까?》

《무사합니다, 중대도 부대도 다.》

《한데 그녀석이 그때 왜 늦었을가요. 무엇때문에 늦게 나왔답니까?》

《최고사령관동지께서 보내주신 선물록화테프가 든 통을 찾아가지고 나오느라 늦었답니다.》

《그래요.》

박철건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희디흰 천정에 매달려있는 전등을 응시하였다. 가슴속에 애정이 그들먹이 차오른다. 대끝에서 대가 나온다더니 역시 김명철의 동생이 다르다.

《부대장동지.》

무엇인가 말하려고 입을 우물거리던 정치위원은 입원실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오자 단념하는것이였다.

몸은 어떤가, 기분상태는? 맥박을 재시오, 체온도. 곧 군의들과 간호원들이 박철건을 에워쌌다. 그 바람에 그들의 대화는 끊기고말았다.

《동진 누굽니까?》

조금 지나서야 방안에 외인이 앉아있는것을 띄여본 한 군의가 엄격하게 정치위원에게 물었다.

《전 원장동무의 승인을 받았는데 말을 안합디까?》

군의의 얼굴에 주춤거리는 기색이 어렸으나 그것은 한순간이였다. 그는 일어나라는 손짓을 하며 다른 손으로 문쪽을 가리켰다.

《왜 이러시오. 시간이 안됐소. 아직 내겐 허락받은 시간이 5분이나 있단 말이요.》

《기가 막히군. 정신을 겨우 차린 중환자에게 군의일군도 아닌 사람이 턱 들어와앉아있다니. 전탕 제 마음대로라니까. 우린 그런 명령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간호장, 이 군관동지를 당장 내보내시오.》

정치위원은 흘러내리는 위생복을 추스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량해를 구하는 뜻으로 성난 얼굴을 한 군의의 팔굽을 툭툭 치더니 철건에게 말하는것이였다.

《하여튼 의식을 희복한걸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다 나은 다음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주겠습니다. 그러니 치료를 잘 받으십시오. 그럼.》

《자자, 기쁜 소식이구 뭐구 빨리 나갑시다.》

군의는 안되겠던 모양인지 제잡담 정치위원의 두팔을 잡아 빙그르르 몸을 돌려놓고는 우격다짐으로 등을 떠밀었다. 입원실문을 닫은 군의는 두손을 소독수건에 깐깐히 문대며 저 혼자 두덜거리였다.

《원 참 뻔뻔스럽기란,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둘러치는걸 보지.》

아마 간호원을 슬슬 구슬려가지고 들어온 모양이였다. 철건은 시뭇이 웃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이란 뭘가.

박철건은 그에 대하여 오래 음미해볼 사이가 없었다. 한시간후에 고열이 나며 다시 의식을 잃었고 저녁에는 평양의 중앙병원에 후송되였던것이다.

 

×

 

인간은 언제 어느때 자기가 걸어온 생의 길을 뒤돌아보게 되는것인가. 생의 황혼이 짙은 로년기인가. 아니면 어느 노래에 있는것처럼 마지막순간에 뒤돌아볼 때 웃으며 추억할 그날인가.

몰랐다. 박철건은 몰랐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해놓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시절, 혈기방장한 한창시절에 사는 그가 아니였던가. 그래서 철건은 생의 직선주로를 달리면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언제한번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오직 앞으로, 앞으로만 전진하며 희망과 꿈, 래일에 대해서만 생각해왔다. 그랬던 박철건에게 현실은 갑자기 그가 걸어온 서른두해라는 인생길을 더듬어보게 하였으며 그 길의 장래를 수정하도록 요구하고있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일을 할수 있는가.

절망적인 의학적진단을 받은 이후부터 박철건은 자기에게 계속 물어왔다. 오후해빛이 알맞춤하게 흘러드는 이날도 그는 창문곁에 누워 그 해답에 골몰하고있었다.

지금 박철건은 오전에 면회차로 병원에 왔던 군사대학동창생 최문성과 나는 이야기를 상기해보고있었다.

최문성이 입원실에 들어서자 철건은 롱조로 감탄하며 시까슬렀다.

《저런, 별 하나 늘었군. 대좌라, 하여튼 부의 문서군들은 승급이 빠르다니까. 부서장이라도 된게지?》

《부국장으로 임명됐어. 미안하네 철건동무. 인계사업을 이자 끝내다나니 오늘에야 시간을 냈어.》

《뭐라나, 큰 간부야 바쁘기마련이지.》

《제발 비꼬지 말게. 진짜 미안하다니까. 자, 몸이 어떤지나 말해주게, 진단은 무엇이고.》

《거 덤베북청성격은 여전하구만.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눌 짬도 안주나?》

박철건은 문성을 탓하며 눈인사를 하는 그의 안해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몸은 회복기에 들어섰음. 진단결과는 슬개골파손, 요추골절, 따라서 군사복무불가능. 다야.》

《그러니까 감정제대?》

최문성은 놀라서 멍하니 철건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펀뜩 정신이 드는지 안해에게 음식을 차리지 않고 뭘하는가고 독촉하는것이였다.

《그래 제대되면 뭘하려나?》

최문성은 식탁우에 차려지는 음식을 물끄러미 주시하다가 물었다. 박철건은 허거프게 웃었다.

《글쎄 뭐랄가. 고향의 해수욕장, 그 근처에 있는 영예군인공장에 들어가서 사출장화며 비닐소랭이를 만드는 일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시계수리공, 혹은 정문경비원. 하여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이거 중병을 앓으면 정신이 허해진다든데 철건동무, 사람이 약해진거 아닌가?》

《내가 정신이 허해졌다?!》 박철건은 입속으로 되받으며 입원실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여전하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격한 감정이 깔려있었다. 《사람을 어떻게 보구 하는 소린가. 약해지다니, 이 철건이가 나약해질수가 있는가. 이 손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강철처럼 벼려졌어. 그런 병사들이, 그런 부대장병들이 자기의 지휘관을 지켜보고있단 말이네. 내가 여러가지 번거로운 생각을 하게 된것은 다만 어떤게 박철건이다운 일인가 이걸 몰라서였어.》

《사람두. 됐네, 됐어. 내 말이 자넬 노엽혔다면 용서하게.》 최문성은 불깃해나는 눈굽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리며 중얼거리였다. 《그러니까 아직 선택을 못했구만.》

《…》

옳다.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나는 아직 장래의 일을 선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백하다. 당원답게, 군인 박철건이답게 무엇을 하든지간에 최고사령관동지의 중하를 덜어드리는 가장 적중한 일을 해야 한다는것이다. 문제의 심지를 바로박고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났다.…

똑똑똑.

조심스러운 손기척소리가 울렸다. 박철건은 손을 뻗쳐 탁자우에 있는 중철병사의 편지를 집어들며 응답했다. 다음순간 철건은 편지를 든채 그만 굳어져버리였다. 문가에 팔소매끝이며 치마단에 은색장식을 한 연분홍빛치마저고리차림의 심혜영이 불룩한 풀색구럭지를 두손에 모두어잡고 서있었던것이다.

웃몸을 일으키려던 철건은 괴로운 신음을 내며 도로 털썩 누워버렸다. 바삐 그에게로 다가온 처녀가 망설이다가 어깨에 손을 얹으려 한다.

《다치지 마오.》

박철건은 무뚝뚝하게 내뱉았다. 둘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길게 흘렀다.

《절 많이 욕하셨겠지요?》

심혜영이 먼저 입을 떼였다.

《탓할거 뭐가 있어. 남남이나 같은데.》

《…》

《내가 여기에 있는건 어떻게 알고 찾아왔소?》

《정치위원동지가 말해줘서 알았어요.》

《?!》

《철건동지가 제게서 떠나간 이후에 정치위원동지에게서 편지가 왔댔어요. 그때부터 전 그분과 아는 사이가…》

《음, 그랬댔군. 결국 정치위원동지의 꾸준한 설복에 떠밑려왔겠소? 돌아가시오, 심혜영동무. 부러 먹은 마음 며칠이나 가오? 사실 동무가 나를 동정할 리유란 아무것도 없고 나 역시 그따위 서푼짜리 동정이나 위로 같은건 더더욱 받고싶지 않단 말이요.》

《전 철건동지에게서 그 어떤 모진 소리를 듣는다 해도 말 못할 녀자예요. 그러나 철건동지, 여기엔 달리할수 없는 필연이 있어요. 제 오늘 여기 온건…》

《또 말 못할 사연인가?》

박철건은 쓰겁게 웃으며 되뇌이였다. 심혜영은 철건이 그러건말건 치마뒤부분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의 침대발치에 놓인 의자에 조용히 앉는것이였다. 혜영은 몇오리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쓰다듬고나서 차분한 어조로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심드렁해서 듣고있던 박철건은 차츰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혜영동무, 우리 부대장동무의 몸에는 동무의 피가 흐르고있습니다. 동무의 원인모를 태도때문에 그는 고통스러워하고있습니다. 이 정치위원에게 툭 털어놓고 사연을 이야기해주면 안됩니까?

-전 그 애들의 어머니가 될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걸 알면 철건동지는 기꺼이 아버지가 되는데 동의할것입니다. 때문에 독한 마음을 먹은것이니 부디 저를 리해하여주십시오.

저는 당이 아끼는 철건동지에게, 앞으로 더 큰일을 해야 할 그 동지에게 부담을 주고 짐을 얹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사이에 오간 첫번째 편지내용이라고 한다.

두번째 편지내용은 이러했다.

-부대장동무는 전투임무수행중 한 병사를 구원하고 사경에 처해있습니다. 군의일군들의 말에 의하면 림상상태가 현재 대단히 나쁘며 생명은 구원한다치더라도 군사복무의 가능성은 거의나 령이라고 합니다. 인차 중앙병원에 후송되는데 짬을 내서 꼭 가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정치위원이래서가 아니라 한 당원이 하는 부탁입니다.

-꼭 가겠습니다.

혈관속의 피가 뛰는것이 감촉되였다. 그것은 풀떡거리며 가슴속에 독사진을 간수하던 일이며 미술박물관에서의 상봉, 사랑을 약속하던 그때의 일들을 동화상처럼 떠올리는것이였다. 혜영이, 너는 역시 달리는 살지 못할 녀자야. 바로 그런 너였기에 애들의 어머니가 되려 했고 사랑하는 애인을 위하여 정을 끊을 독한 마음을 먹었던거야.

《혜영이 아니, 혜영동무.》

박철건은 퍼그나 힘들게 입을 뗐다.

《나를 위해주겠다는 마음은 진정으로 감사하오. 그런데 일이 잘 안됐구만. 난 썩전에 동무가 어째서 갑자기 회답편지를 보내지 않았는지 원인을 알고있었소. 그래서 생각해보다가…》

《네?》

《동무를 잊으려면 빨리 가정을 이루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부모님들로부터 오래전에 피뜩 말이 있었던 한 녀동무와… 그러니.》

그는 이상하게 여겨보는 심혜영의 눈길을 피하며 말을 채 맺지 못하였다.

《그 동무는 어데서 무슨 일을 하는가요?》

《그런것까지 알 필요가 있겠소? 그저 아량있게 생각해주길 바랄뿐이요.》

《그럼 정치위원동지는 어째서 나를.》

《…》

《동진, 동진 어쩌문 그렇게…》

한동안 꼼짝 않고 앉아있던 혜영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럼 치료를 잘 받기 바래요.》

처녀는 침착하게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인사를 하고는 몸가짐 하나 흐트리지 않고 걸어나갔다.

고통스러울것이다. 우직한 방법으로 잘랐으니까. 말이라도 부드럽게 해줄걸. 박철건은 아픈 마음을 누르며 멀어져가는 처녀의 걸음소리에 귀를 강구었다. 하지만 심혜영의 표현을 빈다면 이것 역시 말못할 사연일것이다. 혜영이, 난 달리는 못하겠어. 이것도 사랑일거야. 너처럼 좋은 녀성, 너처럼 불같이 사는 녀성에게 내 줄수 있는것은 이것뿐이구나. 잘 가라. 부디 행복하기를.

 

 

23

 

자강도 현실체험을 갔다온 뒤 강진호의 교예장은 새로운 모습으로 일신하였다. 김정일동지의 교시대로 진호는 작품의 고루하고 도식적인 여러 부분을 대담하게 들어내고 굵직굵직하고도 참신한 요소종목들을 넣었으며 그와 동시에 새 기재의 제작과 조립을 다그쳐 인차 5월1일경기장에서 실동훈련을 할수 있게 준비하였다. 걸린 문제는 요소종목들에 출연할 배우들의 인원수가 결정적으로 모자라는것이였다. 특히 난도가 제일 높은 포탄비행과 물결날기를 담당할만 한 실력자가 없었다. 물론 극장에는 더러 있었으나 그들은 현재 외국공연에 나갔거나 국제교예축전을 준비하고있는중이였다. 그렇다고 그들을 소환해서는 안되였다.

며칠전부터 이 문제때문에 극장이며 조선체육대학을 나들던 강진호는 오늘도 오전내껏 교예학원에 가서 인원을 선발하다가 실망하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경기장에 들어선 진호는 먼저 림진우총연출가의 방부터 찾아갔다. 대기실과 록빛주단을 깐 넓은 사무실을 거쳐 그와 맞붙어있는 아담한 창작실에 들어선 강진호는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앞차대에는 무용동작을 표기한 종이장들과 바닥대형그림들, 배경대축소판그림들이 되는대로 널려있었고 림진우는 눈을 감은채 진밤색3인용쏘파의 한쪽등받이에 웃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있었다. 두귀가 처지게 꾹 다물린 입술, 무거운 고뇌의 상징인듯 볼편이며 이마를 깊숙이 파며 질러간 주름살들, 옆차대우에 널려있는 커피통이며 잔들, 접시들, 창턱에 뭉그려놓은 겉옷.

강진호는 의혹에 차서 그것을 일별하며 조용히 뒤걸음쳐나왔다. 왜 그럴가. 물론 창작중일것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림진우의 모습이였고 창작실의 어수선한 광경이였다.

진호는 총연출가를 잘 안다. 같이 일하며 체험한데 의하면 림진우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단정한 분위기에서 책상우에 종이장 하나만 놓고 창작에 집념하는 절제가 강하고 정돈된 창작가였다. 주위가 산만하고 무질서하면 그것이 그대로 작품에 담겨진다고 하며 창작가들속에서 어설픈 창작태도가 나타나면 늘 엄격하게 꾸짖던 그가 아니였던가. 무슨 일일가?

강진호는 지하층에 있는 연출실에 이를 때까지 의혹을 풀지 못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김재근책임연출가며 여러 연출가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주시한다. 원탁에 다가간 진호는 보온병을 기울여 물을 한고뿌 마시고나서 단마디로 대답해주었다.

《안되겠습니다.》

《그래? 쓸만 한 대상자를 하나도 고르지 못했단 말이지.》

김재근의 물음이였다.

《정 없는건 아니고 한둘이 있긴 한데 언제 그들을 훈련시키겠습니까.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줍니까?》

《문젠 문제구만. 혹시 지방체육학원에 사람이 있지 않을가?》

《거기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거기서 선발하느니 차라리 체육대학이나 체육단 예술체조에서 데려오는게 낫지요. 재근아바이, 내 오면서 생각해봤는데 준비위원회나 우리가 뛰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문제는 큰 범위에서 풀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큰 범위?》

《예, 당적으로 말입니다. 외국공연날자를 얼마간 뒤로 미루든지 아니면 공중작품을 빼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아리랑〉에 동원시킬수 있지 않습니까.》

김재근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래서 내 이자 총연출가동지와 토론해보려고 방에 갔댔는데 아참, 그 아바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들어가보니 고민하는것 같기도 하구 창작중인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기분상태가 썩 좋아뵈지 않습니다.》

《그 사람 요즘 작품때문에 그럴거네. 두번씩이나 공전했으니까.》

《통일장이야 창작년조로 보나 생활경력을 봐도 총연출가동지에겐 파악이 있는 작품이 아닙니까.》

《글쎄 말이네.》

김재근책임연출가도 리해가 안되는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건 그렇고. 이보게 진호동무, 여하간에 당에 보고를 올리는건 고려해보세. 당에서 〈아리랑〉이 제기하는것이라면 무엇이나 풀어준다구 가볍게 손을 내밀면 경우가 안되지.》

강진호는 불만스러웠지만 우기지 못하였다.

《오, 그리고 아까 아동장의 심혜영선생이 찾아왔댔네. 오면 자기에게 꼭 전화를 하라고 하데.》

강진호는 책임연출가의 책상우에서 송수화기를 끄당겨 들었다. 곧 약간 쉰듯 한 심혜영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진호동지, 오늘 어느때든 시간을 내줄수 없겠어요?》

《시간, 마침 점심시간인데 지금이 좋지 않소? 그런데 왜? 무슨 일이 생겼소?》

《인차 알게 돼요. 그럼 제 먼저 청류벽쪽 유보도에 나가겠어요.》

 

점심시간이여서 그런지 오전내껏 경기장의 바깥원형광장에서 울리던 구령소리, 음악소리도 잦아들어 유보도는 오직 귀 따가운 매미소리가 들릴뿐 한적하기만 하였다. 원형광장을 가로질러 유보도에 내려선 강진호는 강기슭 바투 계단에 앉아있는 심혜영을 띄여보고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진호는 혜영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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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진호는 혜영이 일어서려 하자 손짓으로 제지시키며 그 녀자곁에 다가가 퍼더버리고앉았다.

《에- 참, 낮에 거 집단체조 연출부장이 새 탁구알까지 들고와서 도전을 하길래 한바탕 스트레스를 푸는가 했는데.》

《시간을 뺏어서 정말 안됐어요.》

진호가 롱담조의 푸념을 했건만 그래도 미안해하는 처녀였다.

《그래 말해보오. 아직도 강이가 영아를 떨구오?》

진호는 심혜영의 부탁을 받고 리강의 조형훈련을 종종 맡아해주군 하였다.

《아니, 아니예요.》

《그럼?》

《진호동지, 철건동지가 평양에 와있어요.》

《어- 철건이가?! 언제 왔게. 어디 있다오?》

《병원에 입원해있어요.》

강진호는 움쭉 놀라 두팔에 실었던 웃몸을 바로세웠다.

《건 또 무슨 소리요? 입원해있다니.》

《그건 이제 차차… 저, 진호동지.》 심혜영은 그의 이름을 불러놓고는 웬일인지 망설이다가 소심한 말투로 다시 이었다. 《근간에도 철건동지와 편지거래가 있었겠지요?》

《그렇지 않구.》

《그럼 혹시 철건동지가 편지에 이성문제라든가 제 얘기를 거든 일은 없는지.》

《없었소, 전혀.》 진호는 처녀를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버럭 증을 냈다. 《혜영동무, 한데 왜 자꾸 빙빙 에돌기만 하는거요? 철건인 어떻게 입원하게 되였구 동문 왜 갑자기 이성문제를 거들며 심각해서 그러는가 직판 말해야 할거 아니요.》

심혜영은 대답없이 입을 꼭 다물고 바지가랭이의 끝단을 매만지였다.

《야- 이거 답답하구만. 어서 말하오, 대체 무슨 일인지.》

《그러니까 진호동지에겐 아무 내색을 안했군요.》

처녀는 애매하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심혜영은 자기가 진호를 찾은 사연을 말해주었다.

어머니가 될 결심, 사랑의 일방적인 포기, 정치위원과 편지로 나눈 이야기내용, 박철건의 입원소식, 면회시 취한 철건의 랭정한 태도. 강진호에게는 이 모든것이 처음 듣는 말이였다. 그리고 심혜영이 말하는 문제가 자기로서는 체험해보지 못한것이여서 그 녀자에게 뭐라고 조언을 주어야 할지 몰랐다. 그저 혜영이라는 처녀를 다시 보게 되였고 친구가 진짜 좋은 녀성의 사랑을 받고있었구나 하는 부러움뿐이였다.

《그래서 철건일 의심한다는거요? 그러지 마오. 나는 철건동무를 소꿉적부터 잘 아는 사이요. 철건인 동무가 그랬다 해서 마음을 갈아대는 사람이 아니요.》

《…》

《혜영동문 아직두 철건일 사랑하오?》

심혜영은 대답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럼 믿소. 나두 친구의 태도가 리해되지는 않지만 무슨 사연이 꼭 있을것 같구만.》

《글쎄 그랬으면 좋으련만.》

《오늘 저녁에 내 갈테요. 가보면 알게 되겠지. 한데 혜영동무.》 강진호는 한무릎을 그러안았다. 《자기에게 지나치게 모질지 않을가? 처녀의 몸으로 두 아이를 끌어안은데다가 역시 일생 다심한 거둠새가 필요한 철건동무를 놓지 않겠다고 하니. 우리끼리니 내 하는 말인데 혹시, 음- 》

심혜영은 웃었다.

《왜 마저 얘길 안해요. 그대로 표현하기가 두려운거지요. 말을 고르지 말아주세요.》

《까짓거, 그럼 툭 털어놓지 뭐. 난 심동무의 결심을 지지하고 높이 사. 그러나 혜영동무의 결심은 왜 그런지 의무감이라고 느껴지거던.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철건동무를 위해서도 그의 의향을 따르는것이 옳지 않을가?》

강진호는 혜영이 응대를 안하자 머리를 짓수굿하고 계단짬에 돋아난 쇠뜨기를 잡아뜯었다.

《무엇이나 바로 결심한다는것도 힘들지만 결심한걸 똑바로 실천하는것이 더욱 힘든거요. 동문 지금 자기에게 엄청난 요구를 제기하고있고 그걸 실천하려 하고있소. 두 아이를 데리고 사는것도 여간한 일이 아닌데 또 철건동무까지.

공명? 아닐거요. 량심? 이것도 맞지 않아. 오직 의무감, 의무감이라고밖에 달리는 볼수 없거던. 난 많이 못살아봐서 인생은 잘 모르오. 그렇지만 혜영동무의 결심을 놓고는 조언줄수 있소.

심사숙고하오. 의무감에 떠밀려가다가 나중에 훌륭한 내 친구의 이름을, 이제껏 내가 높이 보았던 혜영동무에 대한 나의 좋은 인식이 흐려지지 않도록 해주기 바라오.》

흑- 하는 흐느낌소리가 났다. 강진호는 계속 이으려다가 얼굴을 싸쥐고 어깨를 떠는 혜영을 띄여보고 그만두었다.…

원형광장쪽에서 심혜영의 이름을 겨끔내기로 부르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혜영은 급히 눈굽을 훔치고 옷차림을 바로하며 몸을 일으켰다. 강진호도 따라일어섰다.

심혜영의 대답소리를 듣고 인차 아동장담당창작가며 여러 유치원의 교양원들이 진호네가 있는 장소로 달려왔다. 강진호에게 눈인사를 하고난 담당창작가는 다짜고짜 혜영의 두손을 잡으며 황급히 묻는것이였다.

《혜영선생, 강이 어데 있는지 모르지?》

《지금 렬차에 앉아서 한창…》

《아유- 까막천지구나.》

그 녀자는 혀를 차며 지청구를 했다.

《렬차가 다 뭐나. 평양역에서 좀전에 애순이라는 렬차원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개찰구에서 애를 잃어버렸대.》

《그럼 그 애가 또 달아났군요.》

혜영은 속상해서 부르짖었다.

《빨리 가자요. 어디 있는지 찾아봐야 할거 아니야.》

《진호동지!》

강진호는 무엇인가 말하려는듯 입을 우물거리는 심혜영에게 손짓을 하며 빨리 따라가라고 재촉했다.

《내 철건동무를 만나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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