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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의 북녘생활 5. 도시처녀의 고난의 행군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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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285회 작성일 16-07-01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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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의 북녘생활5] 도시처녀 김련희의 고난의 행군 체험기
김련희 북녘동포 icon_mail.gif
기사입력: 2016/07/01 [13: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016년 초 봄 두물머리에서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편집자 주: 김련희 북녘동포가 최근 정부에서 대구시에 월 2만원에 거의 무상으로 지급한 방 한 칸짜리 새로 지은 깨끗한 빌라에 들었다. 정부 고위관리가 선물도 가득 사들도 찾아와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묻고 갔다고 한다. 북서향이라 햇볕이 들지는 않았지만 층이 높아 습기는 없었고 방에 에어컨도 달렸고 깨끗한 화장실도 달려있어 혼자 살기에 큰 불편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자주시보에 다시 글을 연재하기로 하였다. 워낙 바쁘게 살고 있어 부정기적으로 연재할 예정이다.

 

이번 글은 김련희 씨가 체험한 북의 고난의 행군이다. 북의 군대와 북 주민의 관계 등 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여 소개한다. 어법은 남측에 맞게 바꾸었다. 

 

김련희 씨는 엄마가 오기 전에는 시집도 가지 않겠다고 전해온 고명딸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연로한 부모님과 홀로 고생할 남편을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면서 어서 빨리 자신을 북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호소하였다.]

 

▲ 손재주가 좋은 김련희 여성은 이렇게 자수도 놓으면서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강연을 다니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앞으로는 양복, 한복 등 옷도 주문받아 만들어 생활비도 자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 자주시보

 

▲ 정부에서 지원한 대구의 김련희 씨의 집, 새로 지은 빌라(작은 규모의 공동주택) 방이 작기는 해도 깨끗했다. © 자주시보

 

 

✦ 고난의 행군

 

우리 북녘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가 있었다.

 

우선 극심한 자연재해, 홍수와 가뭄으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계속되는 경제난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또한 소련,및 동유럽의 사회주의 나라들이 좌절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되면서 사회주의시장이 무너졌다.

 

다음으로 미국과 제국주의 연합세력이 세계 가장 최악의 대북경제봉쇄정책으로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없도록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우리는 호시탐탐 북을 붕괴시키려고 남쪽에 많은 핵무기와 세균무기를 끌어들이고 해마다 한미군사훈련을 진행함으로써 한반도에 항시적인 전쟁위협을 가져오는 상황 속에서 다시는 외세에 나라를 빼앗길 수 없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선군정치를 앞세워 대미 핵억제력을 키워나가야 했다.

 

식량이 부족하여 인민들에게 식량배급을 할 수 없었으며 전기가 없어 저녘마다 캄캄한 방안에서 등잔불과 함께 해야하는 등 일상생활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웠다.

 

흥년세월엔 뱀이 조이삭을 먹는다는 말도 있다.

 

사람도 먹을 게 없는데 집에서 기르는 개들도 먹을 게 없으니 강냉이 밭에 들어가 풋강냉이가  익기 전부터 먹어버리군 하였는데 그래도 얼마나 여위였는지 배가 등뒤에 가 붙어 마치 굶주린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강에는 물고기가 자취를 감추고 산에는 산짐승이 말라버렸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어린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해먹기도 하였다.

 

소나무 껍질을 삶고 삶아 부드럽게 한 후 거기에 강냉이 가루를 뿌려 범벅을 하면 송기떡이 된다.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시절 정말 어려워 나물죽을 먹고 식사를 거르는 일도 있었지만 누구도 국가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모든 주민들은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 후대들에게는 외세의 침략이 없고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나라의 주인으로써의 책임을 다하였으며 그 길에서 자신의 청춘과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쳤다.

 

북 주민들은 ‘지금의 고난이 일시적이며 당과 수령만 믿으면 앞으로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고한 신심에 넘쳐 혁명적락관주의 속에 하루하루를 내 나라 부강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 도시처녀 김련희 씨가 군의관 아내로 농촌에서 보낸 고난의 행군

 

나는 ‘고난의 행군’의 전 기간을 지방에서 보냈다.

 

남편이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군부대 주변의 농장마을 집에 가보면 하얀 쌀밥은 눈에 보이지 않고 노란 강냉이쌀밥이 드문드문 있고 대부분 산나물이나 감자를 썰어넣어 만든 잡곡나물밥이었다.

 

어떤 집은 감자2알로 한 끼를 에우기도 하였고 손님이 오면 제일 난처해해서 방문할 때는 일부러 식사 때를 피하군하였다.

 

우리 부대에서는 군인들에게 3끼 밥이 다 차례졌지만 아침, 점심식사를 하고 저녁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군인들이 자신에게 차례진 밥을 줴기밥(주먹밥)으로 만들어 부대 주변 마을 어린이가 있는 집들에 가져다 주군하였다.

 

그러면 그 집 아주머니들이 다시 부대로 찾아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우리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먹어야 한다며 항의 하군하였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그 집 문 앞에 몰래 놓고 도망가군 하였다.

 

우리 어른들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만은 절대로 굶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군관가족들의 생활도 넉넉지 않았다.

 

국가에서 군인들에게 고기와 부식물을 넉넉하게 공급해 주지 못해 우리 군관가족들은 자신들의 가정살림보다 군인들의 식생활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했다.

 

우리는 군인들에게 고기를 충분히 먹이기 위해 한해에 고기생산을 80㎏ 수행해야 한다.

 

군인가족들이 집에서 돼지나 염소, 토끼, 오리, 게사니, 개 등을 길러야 하는데 사료를 대주지 못해 한가족당 200평의 밭을 나누어주어 그 밭에서 농사를 지어 집짐승을 길러 부대군인들이 먹을 고기를 보장하게 하였다.

 

군관인 남편과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혼자서 하면서 200평의 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고 집짐승을 길러 한해 80㎏ 고기생산을 해야 하며 부대 군인들이 집 생각을 할세라 명절마다 갖가지 음식들을 만들어 부대에 나가 군인들의 식탁도 차려주는 일들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우리 부대 군인가족들이 총 30여 가구 정도였는데 모든 가족들이 하루 종일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집에 있는 돼지에게 끼니를 끓여주어야 했고 틈나는 대로 토끼풀을 한 바구니씩 뜯어와야 했다.

 

평양에서 부모님곁에서 고이 자란 나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힘겨운,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생소하고 어려운 농사일이였지만 국가에서 우리 군관가족들을 믿고 군인들의 생활을 맡겨주셨는데 남들에게 질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야심차게 농사일을 배워갔고 짐승도 길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손에는 물집이 생겨 아렸고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허리가 쑤시고 다리가 퉁퉁 부었으며 저도 모르게 설음으로 눈물이 쏟아졌고 부모님이 그리웠다.

 

우리 부대 군인가족들은 평양에서 와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로 힘들어 하는 내 마음을 알고 자신들의 밭일을 다 끝내고는 모두가 내 밭에 모여와 함께 웃고 떠들며 흥겹게 일손을 도와주었고 어려운 일이 있을세라 친언니 심정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정말 군관가족들이야 말로 군인들을 위한 일이라면 네일 내일이 따로 없는 큰 한가족이였다.

 

봄부터 여름에는 뙤약볕에 지칠 정도로 힘들었지만 가을에 한해 농작물을 수확할 때는 참으로 흐뭇했다.

 

강냉이, 완두콩, 팥, 감자, 고구마, 제법 농사꾼이 다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해보지 않던 육체적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평양에서부터 앓고 있던 간경화로 그만 쓰러져 군의소에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해 있는 기간 부대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우리 집의 짐승들과 밭일을 도맡아 해주었고 우리 딸도 자신들의 집에 데려다 외롭지 않게 잘 돌봐주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하고 남의 아픔을 항상 자신의 아픔으로 감수하고 한사람이라도 뒤떨어질세라 손잡아 이끌어주는 친 혈육 같은 가족들이 곁에 있기에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온다 해도 무섭지 않고 이러한 가족들과 우리 군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다른 가족들은 한해에 돼지를 두 마리씩 길러내는 집도 있는데 우리 집 돼지는 야속하리만큼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한해에 돼지 한마리 50㎏, 개 한 마리 10㎏, 토끼 10마리 30㎏, 이정도 밖에 더는 능력이 안 되는것 같다. 어떤 가족은 한해에 1톤의 고기생산을 해서 부대 군인들의 식생활에 큰 기여를 해서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너무 부끄럽지만 내가 군인들의 친누이가 되어 진정으로 그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우리 부대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애병의 날’이 있다.

 

이 날은 3명씩 가족들이 조를 무어 한조가 20명 정도 군인들이 먹을 반찬을 만들어 부대에 가져가 가족들이 직접 식탁을 차린다.

 

군인들이 항상 부대밥을 먹으면 집에서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그리워 할 것 같아 한 달에 한 번씩 가족들이 만든 집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다.

 

반찬종류는 정해진 것이 없고 각 조들에서 의논하여 5가지 이상의 찬을 만든다.

 

내손으로 만든 음식을 내 동생 같은 병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뿌듯하고 흐뭇하다.

 

그 외에도 1월1일, 음력설, 2월16일(김정일국방위원장 생일), 4월15일(김일성주석 생일), 4월25일(조선인민군 창건일), 7월27일(승전기념일-휴전기념일), 8월15일(광복절), 8월28일(청년절), 9월9일(당창건 기념일), 10월10일(공화국 창건일), 12월24일(김정숙여사 생일)을 비롯한 국가 명절들에는 가족들이 떡, 튀김, 여러가지 음식들을 해서 군인들을 대접한다.

 

나는 만두를 빚는 것이 특기라 항상 만두를 빼놓지 않고 하군하였는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은 모양이 너무 예쁘다며 부러워하였다.

 

우리 가족들은 전국에서 모여온 분들이어서 음식도 전국의 특색 있는 음식을 다 먹어볼 수 있었다. 명절 때는 가족들이 군관들, 병사들과 함께 조를 뭇고 써클공연도 하였고 체육대회도 하군하였다.

 

그럴 때면 언제나 우리 딸이 앞에 나서서 태권도 시범동작을 하군하였다.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면서 봄철에는 군관들 본인만 식량이 공급되고 가족들의 식량이 몇 달씩 끊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 군인가족들은 집에서는 조금 어려워도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되는 “병사의 날”만은 어김없이 진행하였고 부대 주변 농장마을의 유치원에 자주 찾아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군 하였다.

 

주민들은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군인가족들만큼 고생스럽겠냐고 하면서 자기 가족보다 군인들과 이웃마을 인민들과 아이들을 위하는 우리군인가족들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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