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의 호화궁궐인 고국원왕릉이 전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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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호화궁궐인 고국원왕릉이 전하는 이야기
황해남도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벽화무덤이 처음으로 발굴된것은 주체38(1949)년이였다.
안악지방에서 3기의 고구려벽화무덤이 발굴된 사실은 세상사람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고구려시기의 발전된 문화를 고증할수 있는 또 하나의 산 력사자료가 세상에 나타났기때문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있는 안악고분벽화는 고구려시기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예술적재능과 발전된 문화, 당시의 사회계급관계, 사람들의 생활풍속 등을 생동하고 다양하게 담고있어 우리 나라 력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매우 가치있는 민족문화유산으로 되고있다.
안악에 있는 세 무덤중에서 3호무덤은 가장 크고도 화려하여 고구려벽화무덤의 대표적인 무덤이라고도 할수 있다.
안악3호고분에는 세련된 필치로 그려진 벽화가 있는데 그 그림은 무덤의 주인공이 살아있을 때의 생활을 형상한것이다.
여섯개나 되는 큰 방으로 이루어진 이 고분은 벽에 화려한 벽화가 장식되여있어 지하궁전을 련상케 한다.
무덤의 벽화들은 주인공의 초상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각계각층 인물초상들과 그들의 생활모습, 생활도구들을 하나의 대화폭으로 펼쳐보이고있다. 그림들이 화려하며 조화된 그 색채와 능숙한 구상 등은 해당 시기의 실로 놀랄만 한 예술적솜씨를 보여주고있다.
- 서쪽곁칸서벽의 남자주인공의 정사도 -
- 서쪽곁칸남벽의 녀자주인공과 시녀 -
그런데 이 벽화의 대화폭을 두고 고고학적고증을 하던 력사학자들속에서는 한때 열기띤 론쟁이 벌어졌다.
론쟁의 초점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는것이였다. 고분의 주인공이 어느 나라 사람이며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벌어진 력사학계의 론쟁은 심각하였다.
그러던 주체47(1958)년 3월하순 안악3호무덤을 찾으신 위대한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무덤의 양식과 벽면에 그려져있는 인물들의 초상, 거기에 씌여있는 글자풀이를 통하여 그리고 무덤안칸의 동쪽벽에 있는 무용도 등을 분석하시며 안악3호고분은우리 민족의 고귀한 유산이라고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김정일대원수님께서는 주체51(1962)년 1월 몸소 현지에 나오시여 고분안에 있는 벽화들을 주의깊게 살펴보시였다.
여러 벽면들에는 벽화 《행렬도》를 비롯하여 인물도들과 풍습도들이 펼쳐져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다보니 적지 않게 퇴색되기는 하였으나 그 기법은 간결하고 선명한 전통적인 조선화의 기법이였다.
- 동쪽회랑의 동벽행렬도 - - 행렬도에서 고취악대 -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벽화를 보시다가 관리원에게 이 고분은 누구의 무덤인가고 물으시였다.
오랜 력사전문가인 관리원이 인차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조선사람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고 다른 나라 사람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벽화를 다시금 살펴보시였다. 벽화의 회화적기법은 물론 행렬의 기발과 인물의 의상은 틀림없는 고구려의것, 그것도 왕의 행차를 상징하고있음이 분명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확신에 넘친 음성으로 수레앞에 나붓기는 저 기발은 이 무덤의 주인이 고구려의 왕이라는것을 확증하여주는 《성상번》이라는 표시기라고, 무덤이 발굴되던 초기에 일부 사람들속에서 무덤의 주인이 조선사람이 아니라는 론의가 있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론의였다, 안악고분은 조선사람의 무덤이다, 우리는 방금 왕이 흰 덧관을 쓰고 앉아있는 그림을 보았다, 옛 기록에 의하면 흰 덧관은 고구려왕만이 썼다고 한다, 그것만 보아도 안악고분은 고구려무덤이라는것을 알수 있다고 이르시였다.
그러시면서 안악고분벽화는 묘사된 생활의 특징으로 고구려의 력사를 고증해준다고 하시면서 옛 무덤에 그려진 벽화의 풍속도 고구려의 풍속이며 따라서 안악고분자체도 고구려의 무덤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안악고분을 돌아보면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있던 뛰여난 예술적재능과 건축술에 대하여 잘 알수 있고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나라의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인 안악고분을 더 잘 관리하며 민족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사업을 계속 강화할데 대하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다녀가신지 얼마 안있어 력사학자들은 이 고분에 대한 연구사업을 더욱 심화시켜 안악3호무덤이 연나라동수의 무덤이 아니라 4세기 중엽 고구려왕의 벽화무덤이라는것을 고증하는 수많은 사료들을 찾아내였다. 그후 황해남도 신원군아양리, 월당리에서 발굴된 큰 도시유적을 통해 고구려의 부수도였던 남평양이 장수산일대에도 있었다는것이 판명되였고 371년에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장의 후방이였던 안악에 안치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안악3호고분은 동수가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후 오래동안 섬기였던 고구려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것이 움직일수 없는 사실로 확증되게 되였던것이다.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세심한 지도가 있어 안악3호무덤뿐아니라 수산리벽화무덤, 약수리벽화무덤, 룡강큰무덤 등 고구려벽화무덤들을 비롯한 이 땅의 문화재들이 국보로, 인류공동의 재보로 더욱 찬연한 빛을 뿌리게 되였다.
본사기자
력사유적-안악3호무덤
1949년 4월에 발굴된 안악3호무덤은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는 고구려 21대왕인 고국원왕(331―371년)의 무덤이다.
4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이 무덤은 규모로 보나 벽화의 내용과 그에 담겨져있는 력사적 및 미술사적가치로 보나 고구려벽화무덤을 대표하는 귀중한 력사유적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이다.
이 무덤은 전망이 좋은 좀 높직한 언덕우에 넓은 움을 파고 그안에 큰 판돌로 여러개의 무덤칸을 만든 반지하의 돌칸흙무덤이다.
무덤칸우에는 방대형의 큰 무덤무지를 쌓아올렸는데 그 크기는 남북 약 33m, 동서 약 30m, 높이 약 6m이다.
무덤칸은 문칸, 앞칸, 안칸, 앞칸동서의 두 곁칸, ㄱ자형의 회랑 등으로 이루어졌다.
지하궁전을 방불케 하는 무덤칸의 복잡한 구조는 고구려왕실귀족들의 웅장하고 화려한 주택을 그대로 옮겨다놓으려고 한데서 생겨난것이다.
이 무덤안에 들어서면 누구나 다 그 돌다루기기술에 놀란다.
여러칸의 매 벽면이 거의 한장의 판돌로 세워졌으며 그중 하나는 그 길이가 4. 68m나 된다.
또한 문칸의 두짝돌문 한장의 무게는 반t이 넘는데 그처럼 크고 무거운 돌문이 가볍게 여닫기고 두 문짝이 잘 맞물리면서도 서로 마주쳐 깨여지지 않도록 서로 비껴맞게 한것은 높은 돌다루기기교를 보여주는것이다.
이 무덤은 인물풍속도를 주제로 한 벽화무덤으로서 벽면과 천정에 화려한 채색벽화가 그려져있다. 벽화는 돌벽우에 직접그렸다.
서쪽곁칸에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고국원왕이 정사를 보는 장면과 왕비가 시녀들을 거느리고있는 장면 등을 그렸다.
무덤의 벽화는 천수백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선명한 색채와 생동한 화법이 그대로 남아있어 고구려회화의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준다.
벽화중에서 특히 잘된것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그림들이다.
주인공의 화상은 조선의 초상미술의 오랜 연원을 밝혀주는 귀중한 그림이다.
무덤의 벽화는 250여명이 넘는 등장인물의 수와 화면의 크기, 복잡하고 다채로운 내용면에서 보아도 조선의 고분벽화중에서 첫자리를 차지하는것은 물론 세계미술사에서도 손꼽힐만 한 걸작이다.
이 무덤은 무덤칸의 구조와 벽화내용을 통하여 고구려의 력사와 풍습, 건축, 회화, 음악, 무용, 무기, 무장 등 여러 분야의 사실을 생동하게 보여주고있다.
오늘 이 유적은 동방의 강국이였던 고구려의 력사와 문화발전면모를 전하며 훌륭히 보존관리되고있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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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짐신사님의 댓글
봇짐신사 작성일
한자 풀이에 의하면, 과거의 역사를 보고 미래의 방향을 정하는
지능을 가진 동물을 사람이라 칭한다고 한다.
과거의 유물을 온전히 보존하고 그 역사를 제대로 살피려는 나라야말로
진정 사람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나라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