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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6. 해외 여행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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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130회 작성일 16-10-2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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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6. 해외 여행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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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북녘동포
기사입력 2016-10-08

▲ 낙성대 만남의집 비전향장기수를 찾아온 김련희 북녘동포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2011년 6월 3일 부모님과 형제. 남편과 딸, 친우들의 바래움을 받으며 평양역을 떠났다.

 

건강하지 못한 딸을 멀리 여행보내는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같았지만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가는 해외여행이라 설레는 마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조선의 국경인 신의주를 통과하여 중국의 단동세관을 거쳐 개찰구로 나오니 인근 여관방 주인들이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소리치고 있었다.

 

“조선에서 오시는 분들은 여기로 오세요”

 

중국에서 조선말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마중한다는 것이 너무 기뻐 함께 동행한 8명의 여행자들이 모두 그 여관방 주인을 따라 갔다.

 

여관은 단동역에서 5분정도 거리였는데 주인은 여행자들이 가고자 하는 친척집들에 일일이 전화연결을 시켜주고 가까운 거리는 차편을 알려주어 도움을 주었고 먼거리를 가야하는 여행자는 자기네 여관방에서 자고 가도록 해주었다.

 

주인은 나의 언니에게도 전화를 해주었는데 통화가 끝나고 나서 나의 언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이 캄캄하였다.

내가 다시 전화를 해보았지만 상대는 남자였고 중국어로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어쩌면 좋은가. 언니와 연락할 방법도 없었고 그대로 돌아가자니 너무나 안타까워 금시 눈물이 나왔다,

 

그때 여관에서 한참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왜 그러냐고, 뭐 속상한 일이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물에 빠진 자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초면인 그 사람에게 평양에서 중국에 사는 언니를 만나려 왔는데 전화번호가 틀려 연결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 하였다.

 

그 사람은 자신이 도와주겠다면서 다시 전화를 하여 상대와 중국말로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언니를 찾았다며 다른 전화번호를 눌러 언니를 바꾸어주었다,

언니는 전화번호가 바뀐 것을 미처 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대련까지만 오면 마중하는 사람이 있으니 배를 타고 산동성 위해시까지 오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언니를 찾아준 그 사람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 사람의 배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데리고 기차역까지 가서 도중식사와 과일들, 기차표까지 자기 돈으로 사주고 좌석에 앉혀주고야 기차에서 내렸다.

정말 세상에는 고마운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이, 그토록 고맙게 생각했던 이 사람이 내 인생에 가장 최악의 상황을 안겨줄 사람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련역에 내리니 “김련희”라는 표말을 들고 서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언니의 부탁으로 마중나온 그 여인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6월 5일 드디어 산동성 위해시에 있는 언니의 집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형제간의 감격적인 상봉이 있었다.

 

편지로만 이야기하던 조선의 동생을 만나니 평양의 삼촌을 만난 것 같다며 중국의 거리와 음식점들을 구경시켜주며 온갖 성의를 다해주었다.

언니는 단동에서 전화를 해주고 기차표까지 사준 그 사람에게 전화하여 동생을 찾아주셔서 너무 고맙다고, 산동에 한번 놀러오시면 식사대접이라도 하고 싶다고 인사도 드렸다.

 

그렇게 한 달을 즐기는 동안 나는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힘들어져 갔다.

또다시 간복수가 온 것이다.

 

나는 대학병원에서 침상에 있는 나를 지켜보시며 매일 같이 눈물을 흘리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라 이렇게 아픈 몸으로 부모님 앞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해외에 나온 김에 치료도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부모님 앞에 나서고 싶은 욕심에 중국에서 치료받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착각한 것이 조선은 무상치료제라 병원에 가면 돈한 푼 안내고 진료받는데 중국도 사회주의 국가이니 조금은 비슷할 거라 생각을 한 것이다.

언니에게 미안해서 치료비를 대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어떻게든 내손으로 돈을 좀 벌어 치료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때 단동에서 나를 도와주었던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그 분에게 나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 분은 너무도 모른다며, 중국사람들도 여기서 돈벌기 어려워 한국 가서 돈벌어 온다고, 자기 옆집사람도 2달 동안 한국 가서 많은 돈을 벌어 왔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한국이라는 말에 너무나 당황스럽고 무서워 한동안 결심을 할 수 없었다.

 

며칠 뒤 그 분이 다시 전화를 하여 많은 중국사람들이 한국 갔다 오는데 괜찮다고, 2ㅡ3달만 갔다오면 치료도 할 수 있고 건강해서 조선에 갈수 있는데 왜 시간을 낭비하냐며 설득하였다.

나는 부모님 앞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서고 싶다는 한 가지 욕심으로 드디어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것은 내 인생에 가장 지독한, 최악의 실수였다.

 

▲ 탈북자들이 해외 집합 장소에 집결하여 대기하고 있는 모습

 

이렇게 되여 한국 가는 일행들과 함께 심양을 거쳐 정주에서 어느 한 건물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7명이었는데 이들도 나처럼 한국에 몇 달 일하려 가는 사람들일 거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니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하면 국정원 3개월, 하나원 3개월 되어야 사회에 나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놀랍고 뜻밖이여서, 그때에야 비로서 2달만에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철저히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옆에 조용히 혼자 앉아있는 한 언니에게 다가가 속아서 온 사연을 이야기해주고 제발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언니는 내 말을 다 듣고는 자신이 도와주겠다며 우리를 안내하는 브로커에게 이 여자는 갈 사람이 아니니 여권을 돌려달라고 하였지만 브로커는 여권이 자기에게 없고 윗선에 올라가 있다며 돌려주지 않았다.

 

밤에라도 도망가려 하였지만 두 겹으로 된 철문을 잠그어 놓아 강금된 상태여서 건물에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중국어가 전혀 안되고 여권도 없이 도망갈 방법이 없었던 나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들은 언어도 다른 완전 남이지만 그래도 한국은 우리 민족, 한 형제인데 사정을 말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을까!’하는 미련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안내원이 이끄는 대로 끌려오게 되었다. 우리가 태국의 어느 수용소에 있을 때 일이다.

 

자그마한 감방안의 구석에 60대 중년의 어머니가 앉아있었는데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울고만 있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하여 왜 그러냐고 물으니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며 기막힌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는 평양에 사시는 분인데 고난의 행군시기에 딸이 중국으로 장사를 갔다가 한국에 갔다는 것이다. 몇 년간을 딸을 만나지 못해 그리워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딸이 중국국경에 나와있는데 어머니를 보고 싶어한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딸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북의 국경까지 갔는데 딸이 지금 강 건너 중국 쪽에 있다고 하여 잠간 건너가서 딸을 만나고 돌아올 생각으로 강을 건너 중국국경으로 갔다.

하지만 중국국경에서 대기하고 있던 브로커는 여기는 공안들의 감시가 심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가야 딸을 만날 수 있다며 그 어머니를 차에 태워 한국행을 강행한 것이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태국까지 끌려오게 됐다는 것이다.

 

다음날 갑자기 그 어머니에게 면회가 있었다.

몇 년 전에 남쪽에 간 딸이 남쪽의 남자와 결혼하고 살았는데 그 사위가 태국에 장모가 도착한 것을 브로커로부터 연락을 받고 우리가 갇혀있는 감방으로 찾아온 것이다.

 

사위는 장모를 위해 여행 가방을 한가득 채워 장모를 만나 주었지만 그 어머니는 그 여행 가방을 밖에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니들도 사람이냐, 지금 집에는 령감과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속여 끌어오냐? 집에 혼자 남은 령감은 어쩌라고 이런 날강도 짓을 하느냐?”

 

그러면서 통곡을 하며 우시는 그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 하나만의 불행만이 아니라 많은 소중한 인생들이 희생당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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