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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14. 창살없는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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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7,984회 작성일 16-11-19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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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14. 창살없는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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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북녘동포
기사입력 2016-11-19

[편집자 주: 정말 이렇게 많은 탈북자들이 남녘의 비인간적인 감시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줄은 몰랐ㄷ. 이글을 통해 당국자들이 꼭 느껴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왜 우리는 대만과 중국처럼 서로 결혼도 하고 자유롭게 오갈 수가 없을까. 탈북자들이 마음 놓고 북 가족과 연락하고 또 솔직한 마음을 표한다고 해서 남녘이 무너지기라도 한 단 말인가. 그럴 것 같으면 아예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정도 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남녘 사람들이 북을 동경하여 혼란이 발생할 정도라면 그게 사회이고 나라인가.

남녘이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는다면 탈북자들의 북녘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은 더욱 더 깊어만 가지 않겠는가. 이제는 정말 발상의 전환이 절실할 때이다. 딸 자식이 탈북을 했다고 죄책감에 추운 겨울 냉방에서 그것도 누워 자지도 못하고 앉아서 잔다는 한 탈북자의 어머니의 충격적인 이야기에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딸을 보내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드리게 할 수는 정녕 없는 것일까. 왜 남녘은 그런 인간적인 나라가 되면 안 되는 것인가.

탈북을 했다고 해도 북녘에 있는 부모형제 만나고 싶은 마음까지 탈북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인간성을 버린다면 그게 사람인가. 그런 사람을 탈북자라고 무조건 챙겨주어야 옳은가. 북녘의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며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고 남녘에서 그 실현을 위해 북녘과 적극 협상을 해야할 일이 아닌가.]

 

▲ 평양에 들어간 신은미 씨 페북으로 김련희 씨와 문자를 주고 받았던 평양의 가족 남편과 딸 


두차례의 기자회견과 재미교포 신은미선생님의 도움으로 딸과의 대화, 남측축구팀과의 만남으로 복잡다난한 병원생활을 하던 나는 건강이 비교적 회복이 되어 퇴원하기로 하였다.

 

입원한지 한달이 되는 11월 2일 퇴원을 하니 다음날인 3일날 벌써 “보호관찰준수사항위반(여행신고 미이행, 보호관찰관의 생활보고지시 불응)으로 출석요구서가 발송되었다면서 정당한 사유없이 소환에 불응시 구인,유치, 집행유예취소 등의 불이익한 처분을 받을 수 있다는 통보가 왔다.

 

참으로 숨막히고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다.

 

감독관의 말에 의하면;

 

1. 내가 입원할 때 보고 하지 않고 입원했다는 것.

 

2. 입원 중에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에 나갔다는 것.

 

3. 퇴원해서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참을수 없는 울분으로 보호관찰소에 항의하기로 하였다.

 


[항의서]

 

1. 보호관찰대상자의 재범방지를 위하여지도하고 보살피며 도움으로써 사회복귀를 촉진하고 숙소 및 취업의 알선등 그들의 개선과 자립을 위하여 애쓰시는 보호관찰소분들게 감사를 드립니다.


2. 11월 3일 보호관찰준수사항 위반(여행신고미이행, 보호관찰관의 생활보고지시 불응)으로 출석요구서를 받았습니다.


3. 9월 16일 보호관찰 과장님과 담당관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까지 주 1회 면담이었던 사항이 월 2회로 변경되었다는 것과 담당관으로부터 지금까지 성실하게 생활하였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4. 그러면 보호관찰 준수사항 위반(여행신고 미이행, 보호관찰관의 생활보고지시 불응)은 10월에 해당된다고 보여짐으로 10월 한달간의 현황을 다시 되짚어 봅니다.


“보호관찰법 제 32조 4

주거를 이전하거나 1개월 이상 국내외 여행을 할 때에는 미리 보호관찰관에게 신고할 것“

 

9월30일 외신 인터뷰를 위해 3일간을 예정으로 서울로 갔으며 도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10월 2일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10월 입원기간 보호관찰 담당관과의 연락상황;

 

-10월 8, 13, 15, 16, 20, 27, 30일로 7일에 거쳐 9차례의 전화통화를 하면서 병원에 입원한 사실과 병원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었고 확인을 위해 담당관의 병원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10월 16일 병원 입원확인서를 보호관찰소에 제출,

 

결과 보호관찰관을 월 2회 만나게 되어있는 사항이었지만 병원에 입원한상태에서 전화통화 9회, 직접 면담 1회 진행되었습니다.


5. 11월 2일 병원에서 퇴원했으며 11월 3일 3시 13분 감독관은 전화로 “입원했으면 병치료나 하지 왜 언론에 나갔느냐, 퇴원했으면 빨리 신고해야지 왜 연락하지 않았냐”라고 압박을 가한 후, 20분이 지난 3시 36분 보호관찰준수사항위반 출석요구서를 문자로 발송했습니다.

 

-환자가 입원기간에 단 한순간도 사적인 일로 외출할수 없다는 이 나라 의료법규정을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합법적으로 2시간동안의 병원 외출증을 떼여 가지고 기자회견에 참가 했습니다.

 

-11월 2일에 퇴원했는데 하루가 지난 3일에 감독관은 전화로 퇴원한 것을 신고하지 않았다며 압박하고 20분 후에는 보호관찰준수사항 위반 출석요구서를 발송했습니다.

 

입원 환자가 퇴원하면 단 하루의 여유도 없이 그날로 무조건 신고해야 한다는 규정을 준수사항에서 본적이 없습니다.

 

본인이 모르고 있었다면 보호관찰 대상자는 병원에서 퇴원하면 그날로 감독관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사항을 알려주지 않은 감독관의 직무태만이 문제라고 보아집니다.


6. 이러한 10월 한 달간의 현 상황을 볼 때;

 

보호관찰준수사항 위반(여행신고미이행, 보호관찰관의 생활보고지시 불응)출석요구서가 발송된데 대하여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강경하게 항의합니다.

 

이것은 철저한 직권남용이며 간경화로 어려운 투병 속에 있는 환자에 대한 지독한 정신적 압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인은 출석요구서에 대한 대구보호관찰소의 철저한 해명이 있기까지 보호관찰소에 출석할 수 없음을 분명히 표명합니다. [2015년 11월 8일 김 련 희]

 


보호관찰소에서 좀 만나보자고 여러 번 전화가 오기에 며칠  후 보호관찰소에 갔더니 담당관은 출석요구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한 달에 두 번 씩만 만나주면 된다며, 자신들도 사정을 다 알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직업적으로 어쩔 수 없는 사항이라 좀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는 법무부에서부터 과장이 특별히 관리하라는 지기가 내렸다면서 담당이 바뀌어 과장이 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과장은 나를 만난 첫 자리에서 사정은 다 알고 있어 이해가 된다며 자신은 보호관찰관이 아니라 상담사로써 나를 대하겠다며 무척 상냥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내가 감옥에서 경찰조사를 받을 때 보안수사대 팀장이 하던말 이 생각났다.

 

“당신을 진심으로 도와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신변보호경찰관도 믿지 말고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며 오직 우리에게만 솔직히 말하라. 우리만이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

 

속에는 독가시를 품고 곁으로는 인간적인 척, 상대의 마음을 도적질하려는 그들의 외교적인 술책을 나는 더 이상은 속지 않을 것이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2018년 4월까지 보호관찰기간이다.

 

보호관찰기간 처음 5개월 동안은 주 1회 담당관을 만나 한주동안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를 시시콜콜 보고해야 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한 달에 2회 담당관을 만나 보고하게 되었다. 말이 한 달에 2회이지만 병원에 보고 없이 입원했다고, 퇴원하는 즉시 보고를 안했다고, 입원기간 보고 없이 언론에 나갔다고 전화가 빛발치고 출석요구서가 발송되는 상황이다.

 

그 뿐 아니라 경찰서 보안계 담당형사는 본청의 전화 독촉에 시달려 경찰을 때려치고 싶다며 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이렇게 보호관찰소와 경찰서 보안계의 지긋지긋한 감시 속에서 남녘에서의 하루하루가 그 무엇에 조여드는 것 같은 정신적 압박감에서 편하지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서울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갈 때였다.

 

동대구역에 가기 위해 “사월역” 지하철에 들어가 전동차를 타려고 하는데 웬지 내 뒤에 이상하게 계속 전화를 하며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따라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스쳐보냈지만 떨어지지 않고 계속 따라붙는 그 사람이 하도 이상하고 괘씸하여 가던 길을 돌아서서 뒤따르는 그 사람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나는 그 사람 앞에 서서 당신은 지금 나를 감시하며 따라오는 것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실수로 이 사람을 노엽히는 것은 아닌지 내심 불안하기도 하였다.

 

“아니요. 나는 당신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가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그 사람의 대답을 들으며 하도 억이 막히고 치솟는 반발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이 땅은 정말 철창 없는 감옥이고 숨막히는 지옥이로구나. 내가 이 나라에 뭘 그리 잘못했을까, 나는 그냥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인데!”

 


한번은 경산의 임대아파트 집에서 혼자 너무 괴롭고 힘들어 친구네 집에 가면 위안이나 될까 싶어 저녘 10시 쯤에 집을 나와 아파트 단지 정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련희씨, 어디 가세요?”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보안수사대 형사였다. 이들은 밤에도 나의 집을 감시하고 있다가 내가 밖을 나서니 제제하는 것이었다. 내가 ‘나는 한발작도 움직일 수 없냐고, 내가 기어코 가겠다면 어쩔거냐고, 감옥에 잡아갈거냐고,’ 대들자 형사는 가는 곳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형사를 뿌리치고 내가 갈길 을 그냥 가다가 보니 형사가 차를 타고 내 뒤를 계속 따라오는 것이었다.

 

내 가까이 와서 차를 세우고는 어디까지 가는지 자신이 차로 태워다 준다며 계속 자기의 차에 타라는 것이다.

 

내가 싫다며 계속 걸어가자 형사는 차를 타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내가 도중에 택시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보니 형사의 차가 그때에야 떨어진 것인다.

 

다음날 그 택시 운전사에게 전화하여 다른 일이 없었냐고 묻자 운전기사님은 뭔 일이 있냐면서 나를 내려주고 조금 지나서 경찰이라고 하며 전화가 왔는데 그 여자를 어디까지 태워주었는지, 내가 내린 장소를 알아보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택시를 탈 때 형사는 택시 번호를 알아두고 미행을 그만둔 것이다.

 


또 언젠가는 주말이라 친구네 집에 놀려 가는데 버스를 탈 때도, 걸어갈 때도 꼭 같은 차가 항상 옆에 있어 이상해서 택시를 타고 가면서 뒤를 살펴보니 그 차가 계속 따라오는 것이다. 친구네 집주변에서 택시를 세우고 보니 그 차고 내가 탔던 택시 조금 뒤에 세우는 것이다, 처음 와보는 친구 집이라 택시에서 내려 주변사람들에게 주소를 물어보다가 얼핏 따라오던 차를 돌아보니 글쎄 그 차 뒤에 숨어 나를 지켜보다가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는 그 차 앞으로 지나가면서 차번호를 기억해두었다.

 

다음날 경찰서 담당형사에게 이것은 좀 너무한 것 아니냐고 야단을 치자 담당형사는 그것은 자신들이 한 게 아니고 지방 경찰청 보안수사대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차량 번호까지 알려주며 이젠 좀 그만들 하라고 짜증을 냈다.

 

나중에 보안수사대에서 내 뒤를 따랐던 그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었는데 그때 수사대팀장이 하는 말이 “련희씨, 이 차 번호를 알고 계신다면서요?”하며 웃는 것이었다.

 


대구에서 살지만 송환운동을 위해 서울에서 생활하는 날이 더욱 많다.

 

아마 그런 사정으로 대구 보호관찰소에서는 서울보호관찰소와 협력하여 함께 나를 관리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저녘 8시 30분쯤 되었는데 갑자기 전화벨소리가 나기에 핸드폰을 열어보니 전화번호판에 “위치추적관제센터”라는 이름이 뜨는 것이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 다시 생각해보니 성질이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서울 보호관찰서입니다. 김련희씨지요?”라는 상대의 말이 들렸다. 갑자기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나는 대들었다.

 

“거기가 어디예요? 보호관찰소 맞는가요? 왜 위치추적관제센터라고 이름이 뜨는거죠?”

 

“서울 보호관찰소 맞습니다. 대구보호관찰소에서 의뢰해서 련희씨에게 전화했습니다.”

 

“당신들은 행정시간이 따로 없는가요? 길고 긴 하루 종일 왜 가만 있다가 지금 저녘시간에 이렇게 무리하게 전화하는거죠?”

 

“우리는 아무 때나 보호관리대상자들에게 전화할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에게는 인권도 없습니까? 밤이고 새벽이고 당신들이 전화오면 무조건 받아야 하고 당신들이 만나자고 하면 무조건 만나야 합니까? 대체 뭐가 그리도 급한 일이기에 저녘에 전화를 합니까? 내일 오전까지 기다릴 수 없는 일이었던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대구에서 의뢰해 왔기에 전화 한겁니다”

 

“그럼 내일 행정시간에 다시 전화하세요”

 

“내일 언제 전화할가요?”

 

“당신은 행정시간을 모릅니까? 제가 가르쳐드릴까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당신들 행정시간입니다. 그러니 내일 그 시간 안에 다시 전화하세요”

 


다음날 오전 9시에 보호관찰소에서 전화가 왔는데 집을 방문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11시쯤 감독관이 내가 거처하고 있는 서울 관악구 행운동 ‘만남의집’에 찾아왔다.

 

감독관은 나의 동향과 만나는 사람들, 어떤 일정이 있는지를 파악해서 대구에 서류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감독관에게 말했다.

 

“당신들 자그마한 양심쪼가리라도 남아있다면 내 앞에서 최소한 미안함을 가지셔야 합니다.

 

자그마한 죄책감은 가지고 있어야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당신도 부모가 있을거고 처자가 있을테죠. 당신 자식을 5년 동안 생이별 했다고 생각하면 심정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당신 안해가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어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꽤 견디실 것 같습니까? 나는 연약한 여자입니다. 딸자식을 가진 엄마입니다. 제 심정 이해할 수나 있으시겠어요? 나는 내가 부모님과 생이별을 하고 딸자식을 떼우고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정말 이상할 뿐이에요. 어떻게 제정신일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나에게 더 큰 것을 요구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마세요. 내가 필요한 시간에 당신들을 만날 것이고 내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뭐든지 할 수만 있다면 전국 그 어디에라도 갈  것이고 그 누구라도 만날  것입니다. 그것이 못 마땅하고 법에 어긋난다면 나를 다시 감옥에 쳐넣으셔도 좋아요. 당신의 나라는 이렇게 천륜도 강제로 끊고 한 인간을 5년 동안 강제억류하면서 국제법과 인륜도덕법을 어기면서 어떻게 나보고는 당신들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요? 부끄러운 줄 아셔야 합니다.

 

당신은 직업이 참 고약하네요. 좋은 밥 먹고 항상 남의 뒤만 캐고 다녀야 하니......”

 

“저도 자식이 있는데 마음이 아픕니다.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하니 참 안타깝습니다. 보호관찰이 아직 2년이 남아있는데 그래도 주의하시고 꼭 가족에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으며 생각한다. 그렇다. 이 사람들이 뭔 잘못이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이 다 분단의 죄인 것이다.


분단의 죄...

 

이런 사회에서 탈북자들의 운명은 누구나 다를 봐 없다.

 

탈북자 자체가 분단의 희생물이다. 그들은 북의 고난의 시기 오직 생존을 위해 중국에 나왔던 사람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북에서 죄를 짓고 죄 값을 치르기 싫어 도망나온 사람들도 여럿 있다.

 

나의 기사를 읽고 반갑다며 연락을 해온 한 탈북녀성의 문자를 보며 그들의 인권과 아픔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되었다.

 

그와의 대화를 여기에 그대로 싣는다.

 

▲ 김련희 북녘동포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그쵸. 저는 48살이랍니다.”

 

“저도 언니처럼 북한에 가족 전부가 있습니다.”

 

“아 그럼 고향 북이세요?”

 

“저도 혈혈단신 홀로 남에 갔었어요. 엄마 아버지 동생 다 북에 있어요. 한 2년 전 쯤에 유럽으로 왔어요”

 

“아 그렇군요”

 

“저도 북에 가고 싶어서 언니가 인터뷰하신 내용을 보고 일부러 찾아서 이렇게 연락하게 되었어요”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 가족들을 만날 날이 꼭 올 겁니다.”

 

“저는 함경북도 출신이고 청진 제1고등중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다 북이 한참 살기 힘들 때 저도 주변 친구들 따라서 두만강 몇 번씩 넘다가, 어쩌다 보니까 남조선에 오게 되었어요. 정말 살기 힘들었어요. 주변에 아무도 없고 언니처럼 언론에서 나 북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말하기는 무서웠어요.”

 

“그랬군요”

 

“난 배고파도 북에 있을 때가 참 좋았어요. 조국이 정말이지 그리워요”

 

“그 심정 층분히 이해됩니다”

 

“언니는 한국에서 그렇게 싸우고 계시지만 저는 비겁해요. 그렇게 당당하지 못했어요.”

 

“괜찮아요.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 조국을 잊지 않고 살면 되는 거죠.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유럽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여 남편을 따라서 2년 전 쯤부터 프랑스에서 살게 됐어요. 외국 나오니까 더 간절하게 부모님들이 그립고, 고향생각에 가슴이 아파서 잠을 이를 수가 없어요.”

 

“참 대단하세요. 영어를 배우셨군요”

 

“한국에서 한 9년 정도 살았거든요. 배운 것은 북한사람임을 숨기는 방법과, 영어밖에 없어요. 그런데 프랑스는 영어권이 아니어서, 프랑스어를 다시 배우고 있어요.”

 

“참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런데 저는 북한에서 아주 어린나이에 넘어왔고, 한국에서 또 오래 살다보니 여러모로 불안하기도 하고, 용기도 안 나고 그래서 언니께 조언을 얻고 싶어요”

 

“네 말해 보세요”

 

“사실 저는 조국에 죄를 지은 사람이잖아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원인에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그렇죠”

 

“아니예요. 고난의 행군시기 어쩔수 없었던거예요”

 

“조국에 다시 연락하면 저를 받아줄까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러나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이 참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조국에서는 탈북자들의 집도 그냥 관리하고 있어요. 언제든지 꼭 돌아올거라고, 돌아오면 집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라고 했대요”

 

“저의 아버지랑 어머니는 제가 떠나올 때 살던 집에 그냥 살고 계시더라구요. 제 남편을 데리고 가도 될까요? 남편은 아예 100% 프랑스 사람이거든요.

 

저의 집 동네에 쏘련 여자분과 사는 남자를 본적 있긴 한데 여자분이 조국에 적응을 못하고 끝내 쏘련으로 돌아갔어요”

 

“동생같은 사례가 처음이라 저는 잘 모르겠네요”

 

“주변에 저희처럼 조국 그리워하는 탈북자들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이만갑 같은데 나와서 조국 헐뜯는 나쁜 사람들을 미워하는 탈북자들도 정말 많아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숨기거나, 알리지 않죠. 어차피 그 사람들은 한국에 살아야 하니까 두렵기도 하고 잘못하면 간첩으로 매장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요.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죠. 이 사회에서는 탈북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가 없죠”

 

“저도 비록 한국국적이지만,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언니와 같을 거예요. 조국에서 나를 공부도 시켜주고, 배려로 좋은 학교에도 보내주고 했는데 배가 조금 고프다고 다 버리고 왔으니 죄책감이 커요”

 

“인간이잖아요. 조국도 모두 용서했어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조국에서 끝까지 남아서 잘 버텨내고, 이겨낸 분들이 너무 존경스러워요. 나라 없는 백성은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뼈 속까지 경험했어요”

 

“남쪽에 와서 돈 몇  푼에 고향과 부모 형제를 팔아먹는 금수만도 못한 일부 탈북자들은 꼭 후회할 날이 올 것이고 그 죄 값을 받을 거예요”

 

“조국을 버린 대가는 마음에 상처와 죄책감뿐이더라구요, 누구도 그런 사람들을 사람취급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마음만은 양심으로 살려고 했어요.
저도 이만갑에서 연락을 받았었어요. 저는 단칼에 거절했어요. 조국을 팔아, 이웃 팔아, 동무들을 비난해서 먹고살 마음이 없다고 말했어요”

 

“여기 있는 모든 고향 친구들이 동생처럼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 동무는 한국에서 어떻게라도 잘 먹고 잘살아 보려고 이만갑에 나갔었는데,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있고, 우리도 그 동무 싫어서 만나지도 않고 그랬어요. 
또 한 동무는 한국이 너무 살기 힘들어 대만남편이랑 결혼해서 대만으로 갔어요. 한국은 우리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죠”

 

“ㅋㅋ 그렇죠.
그런 생각가진 사람들은 이만갑에 못나가죠...”

 

“저와 마음과 뜻이 맞는 분을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언니가 이렇게 용기 내주신 덕분에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동무들이 힘을 낼 거예요. 다들 자기들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 고치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래도 마음이 밝고 깨끗해서 너무 대견해요. 우리 나중에 평양에서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지금 상상만 해도 너무 즐거워요. 저의 어머니랑 아버지는 시골분이셔요. 제가 부모님 속 너무 썩혀서 지금은 많이 늙고 아프시다 들었어요”

 

“네 제가 북에 가면 동생 부모님께 인사 전해드리죠”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꼭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으면 너무 좋겠어요. 남편이랑 언니 얘기 했었어요. 한국 나가면 꼭 함께 만나보고 싶다고 그래요”

 

“네. 반갑네요. 저도 만나보고 싶네요”

 

“저 오는 4~5월쯤 한국 가니까 그때 꼭 함께 만나요”

 

“그래요. 내가 제일 맛있는 걸 동생이랑 남편에게 사줄께요”

 

“언니는 저에 대해 잘 모르시지만 저는 언니에 대해서 언론 기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어요. 자주시보에 실린 글 다 읽었어요. 이런 글 실어줘서 고마워요”

 

“북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예요”

 

“언니. 저는 부모님들이 함경도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고, 저의 집안에는 노동당원이 한명도 없어요. 그래도 나는 북한이 좋아요.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고, 조상들이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저를 좋은 학교 보내주고 공부시키고, 내가 배고프다고 조국을 사정없이 버렸음에도 부모님들을 보호해주고, 너무 고마워요”

 

“어린 나이에 왔는데도 그 모습이 너무 순결하네요”

 

“언니. 저 북에서 학교 다닐 때 공부 진짜 잘했어요. 1고등도 다니고, 그래서 그런지 조국에 고마운 거 정말 많아요.”

 

“그래요. 동생은 꼭 성공할거예요. 꼭 조국에 돌아갈 거예요.”

 

“언니, 우리 북에서 노동을 하면서 살아도 사람대접 받으면서 살았잖아요. 사실 얼마나 평등한 관계었어요. 지배인도, 당비서도, 분조장도, 작업반장도”

 

“그렇죠”

 

“자존심을 팔고, 노예처럼 살면서도 쌀밥과 고기를 먹고 사느냐 아니면 자존심 지키면서, 사람대접 받으며 옥수수 먹고 사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저는 죽물 우려먹더라도 노예로는 못살겠어요.”

 

“그래서 세월이 가도 인간중심의 그 제도를 잊지 못하는거예요”

 

“그러니까요”

 

“북에서도 이제는 식량이 원만히 해결되었다고 해요. 2012년 유엔식량기구에서 발표했더라고요.”

 

“정말요? 다행이예요, 
언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진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돈이 인간의 신념과 철학까지 바꾸지는 못해요. 저도 함경도 구석진 변방 시골에서 살았지만 서울의 화려한 불빛이 아무리 밝아도, 내 고향의 반딧불 보다 못하더라구요”

 

“ㅋㅋ 그렇죠”

 

“언니는 평양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시골은 정말 아름다워요. 
물맑고, 공기좋고, 개구쟁이 동무들 ㅠㅠㅠ.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사람들”

 

“기회되면 동생네 집도 가보고 싶네요”

 

“꼭 놀려 가세요. 우리 부모님들 너무너무 좋은 분들이예요. 고난의 행군 때 그렇게 배고프면서도 가로수 사과 한  알도 마음대로 따 먹지 못 할 만큼 순수해요.”

 

“네. 동생을 보니 부모님이 그러실 것 같아요”

 

“요즘 프랑스 티비에서 맨날 북조선 뉴스 나와요.
DPRK, 한국보다 훨씬 더 유명해요.ㅎㅎㅎ
뿌듯해요“.

 

“네 그렇죠. 저도 여기서 당당하고 긍지 높아요”

 

“언니. 지내시는데 불편한 거 없으세요?”

 

“네. 지금은 서울에 비전향장기수분들과 함께 있는데 선생님들이 너무 잘해주셔요”

 

“저도 서울 살 때 외로워하지 말고 그분들 찾아 갈걸 그랬어요. 하긴 무서워서 못갔겠어요. 국정원에서 잡아갈가봐. ㅋㅋㅋ
언니. 그분들 술은 마시나요? 저 한국 나갈 때 꼬냑이나 한병 사갈까 하고요. 물론 북의 인삼주 보단 못하겠지만요”

 

“성의인데 고마워하시죠. 마음이 소중한거에요.”

 

“아이고. 한국은 밤이 깊었겠네요, 언니 피곤하시겠다. 언능 주무세요”

 

“ㅋㅋ 그래요. 동생과 재미있게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됬네요”

 

“조국이야기는 항상 즐거운 거 같아요. 저는 집 나온 지 15년 됬어요. 집이 그립고 엄마가 보고 싶어 죽겠어요. 한국에서 탈북자들 먹고 살기 힘들어요. 돈 때문에 힘든 때가 수없이 많았지만 그래도 부모형제를 돈으로 팔 수는 없죠. 그렇게까지 짐승이 되고 싶진 않더라구요.”

 

“나도 이렇게 힘든데 어린 나이에 타향에서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지 짐작이 되요.”

 

“한국온 거 너무 후회되고 힘들어서 죽고 싶었어요. 진짜 고향 떠나면 어디가나 고생인 것 같아요. 엄마 옆에서 사는 게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요?”

 

“저는 함경북도 새별에서 태여났어요. 어머니는 62년생이예요. 엄마가 38살 되던 해에 집 나왔어요. 내가 나올 때 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젊었었는데 지금은 많이 늙으셨을 것 같아요. 딱 한번만이라도 만나 뵜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꼭 소원이 이루어질거예요. 제가 먼저 가면 딸의 인사라도 전해드릴가요?”

 

“그럼 고맙죠 언니. 엄마한테 지은 죄가 많아요”

 

“그래서 자식이죠”

 

“평생 농장에서 일해서 손끝하나 성한데 없는 우리 엄만데 가슴에 피멍까지 가득 안겼으니 ㅠㅠㅠ
남북관계가 이렇게 복잡하게 흘러서 언니가 평양 가는 건 시간이 늦어지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그쵸 저도 안타깝죠”

 

“언니는 현제 외국 나오는 거 불가능한거예요?”

 

“네. 북으로 도망간다고 여권을 절대 해줄 수 없다네요”

 

“저번에 유튜브에 언니 가족 영상 봤어요.

 

너무 슬퍼서 같이 울었어요. 언니는 얼마나 가슴 아플까 생각했어요, 가족이랑 떨어져서 살고, 만날 수 없고, 우리 심정은 다 갖지 않겠어요. 가슴 찢어지게 아프더군요.”

 

“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싸우고 있어요. 꼭 돌아갈거라 믿어요”

 

“저도 언니 꿈 이룰 수 있으리라 믿어요. 저는 언니가 존경스럽고 부러워요. 탈북자들 보면 다들 죄책감 안고 살아요. 겉으로는 행복한척 하지만, 속내는 다들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힘들어해요.”

 

“저는 탈북자들이 좀 더 당당해 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싶었어요. 근데 주변에서 저를 의심하더라구요. 간첩아니냐고 하면서 ㅋㅋㅋ
이게 참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니까요. 간첩의심 안 받으려면 부모형제 사는 곳을 비난해야 하고, 역성들면 간첩이라고 하고 ㅠㅠㅠ”

 

“참으로 슬푼 현실이죠”

 

“저는 언니랑 이야기 하고 나면 어머니랑 이야기 한 듯한 기분이 들어요,
저의 어머니도 언니처럼 자식 사랑이 끔찍했었거든요.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이야기 했어요, 엄한 아버지 사랑까지 다 합쳐서 저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고,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어머니는 잘했다고, 사랑한다고 이야기 했어요.”

 

“그게 부모의 심정이죠”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러던 중 조국에 ‘고난의 행군’이 왔어요. 함경도 쪽은 정말 힘들었어요. 우리 옆집에 굶어죽은 시체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치마로 내 눈을 감싸며 말했어요. 곧 좋아질게다. 꼭 살아야 한다. 근데 언니. 
고난의 행군시기 저는 라진에서 꽃제비를 했었거든요. 중국여행객들에게 돈을 구걸해서 그렇게 먹고 살았어요. 엄마가 처음 화를 내더군요. 굶어죽어도 거렁뱅이는 되지 말라구요. 엄마 가슴에 대 못질을 하는거라구요. 지금 맛있는 것을 먹을 때마다 엄마생각에, 좋은 것을 구경할 때마다 엄마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정말 어려운 시기였죠.”

 

“언니. 지금 어머니가 함경도 그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시사철 이불도 덮지 않고 주무신대요. 딸을 사지로 내몰고, 자식을 잘못 키운 어미는 다리펴고 잘 자격도 없다고, 그래서 앉아서 주무신대요... 언니!!!
그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게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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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네. 저도 가슴이 아프네요. 하지만 부모는 병든 자식을 탓하지 않죠.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부모님 앞에 나서는 것 이상 더 큰 선물이 있을가요? 부모님은 동생이 돌아올 때까지 꼭 기다려 주실거예요. 그러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고 우리 조국에서 꼭 다시 만나 오늘을 즐겁게 추억해요”
 
“네 저도 그날을 위해 열심히 살아갈거예요
언니 정말 고마워요“
 
... ... ... ...
 

▲ 김련희 북녘동포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한번은 서울 녹색병원에서 입원치료를 하고 있는데 경기도에 산다는 한 탈북자가 연락을 보내왔다. 그는 블로그에 북에 있을 때 공장간부들이 그 어려운 시절 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로동자들을 위해 도시락을 양보하며 함께 고난을 견디어 나가던 추억 깊은 고향의 진실을 올렸다고 하여 국가보안법위반 찬양, 고무죄로 8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하였다. 그분과의 대화도 그대로 올려본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아 네. 넘 반갑습니다.
저는 선생의 글에 완전히 반했어요.”
 
“국보법으로 감방가서 살고 나왔더니 항상 감시가 따르고 못살게 굴러 글 안 올립니다.”
 
“동향분이라 더욱 반갑네요”
 
“네. 님이라도 제발 이곳에서 조국으로 돌아가셨음 좋겠습니다. 전 이미 여권도 안 나오고 완전 꼼짝 못합니다”
 
“님의 글 보며 참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사실 그 글을 내리라고 압박받고 내릴까 생각했는데... 안 내리기 다행입니다.”
 
“아뇨. 그런 좋은 글 꼭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보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누님 뉴스 보고 누님 한말 중에 제일 맘에 들었던 것은 조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것, 저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님의 글을 읽고 나서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언젠가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죠. 그래도 누님같은 당당한분 알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저도 정말 기쁘고 반갑습니다. 선생이 가지신 그 문필로 꼭 큰일을 하리라 믿습니다.”
 
“난 한번 감방 갔다오고 모든 게 감시받고 통제 들어오니 그냥 귀찮아서 찌부러졌습니다.”
 
“힘드셨겠네요”
 
“정신적으로 정말 미치겠더군요.”
 
“너무나 훌륭한 동생을 알게 되어 참 좋네요”
 
“누님을 조국이 알아주고 관심 갖게 되어 저도 기쁩니다”
 
“아뇨. 그냥 조국에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입니다”
 
“뉴스 보았는데 ... 정말 맘 아파서 욕밖에 안 나가더군요”
 
“괜찮아요. 여기 와서 비전향장기수분들과도 많은 시간 보내는데 그분들에 비하면 저는 너무 사치죠”
 
“아... 참 누님은 정말 당당하신분이십니다. 나두 그분들이랑 국보법으로 고생하신  분들 보고 싶지만...뒷감당 때문에... 겁쟁이라기보다는 사람 완전 피말려 죽이려고 하더군요”
 
“그 분들 앞에서 저는 너무 부끄러워서 저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렇군요...참 가슴 아프고 울화통 터집니다”
 
“저는 간경화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중이었는데 기자회견을 끝내고 병원에 돌아오니 경찰들이 왔었다면서 퇴원시키더군요”
 
“참 ... 뭐라 위로해 드려야 할지”
 
“아뇨, 동생도 많이 힘들고 큰 아픔 견디고 계시는 줄 알고 있어요.
근데 혹시 북에서 글을 쓰셨어요? 명문필이예요”
 
“하하하 제 꿈이 고등학교 때 로동신문에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누님 만나서 맘 놓고 이야기 하면 좋겠네요”
 
“ㅋㅋ 네 우리 나중에 좋은 시간 함 가져봐요”
 
“항상 건강 챙기시고 혹시 인간 말종들의 개소리에 상처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굳건한 분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자라 맘에 상처 받으실까 걱정됩니다”
 
“네 즐거운 하루였네요. 우리 좋은 인연이었음 좋겠네요”
 
“물론입니다. 일단 누님 가기 전에 만나 뵙겠습니다. 제 부모님께 혹시 소식이라도 전해야죠”
 
“네 그러시죠”
 
“누님. 간이 안 좋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요새 건강 괜찮습니까?”
 
“네 간경화에요 지금 병원에서 입원치료 받고 있는 중이예요”
 
“안타깝습니다. 건강하셔서 딸과 만나야 하는데...”
 
“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누님. 언론에 나갈 때 북한으로 말하지 마시고 이북, 또는 북쪽, 북측 이렇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항일유격대 토벌해 죽이고 간도의 우리 민족을 살육하던 일제의 개들과 그 후손들이 주인 노릇하는 이곳을 나라라고 생각한적 한 번도 없습니다. 나라든 가정이든 그 근본이 올바른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남쪽과 북쪽 어디가 그 근본이 올바른 지는 잘 아실 겁니다. 오죽하면 가짜 김일성까지 만들었겠습니까! 그리고 이북에 대해 뭐가 남쪽에 비해 좋다는 식으로는 이야기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국보법에 걸어 누님 피를 말리려고 할 테니... 누님 병은 스트레스가 맹독인거 아실 겁니다.”
 
“네 고마워요.”
 
“누님은 지금까지 충분히 잘하셨습니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정확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는 누님께 부끄럽죠”
 
“여기 남쪽에 있는 탈북자들의 인권은 제대로 보장받고 있는가요? 아니잖아요. 그럼 북인권 타령하지 말고 현재 여기 탈북자들의 인권부터 책임지라고 항의해야죠”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두 감옥 들어갔다오니 꼼짝 못하겠더군요. 감옥보다 더 무서운게 감시통제입니다. 하루 서너 번은 전화옵니다 일하는 회사에도,,,
 
헌데 누님 정말 힘들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누님이 가면 너도 나도 가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날 걸 여기서도 잘 알기에...“
 
“그래서 기어이 가겠다는  거예요”
 
“전에 설문조사에서 처벌만 면하게 해준다면 돌아가겠다는 탈북자가 열에 여섯이라더군요. 그게 설문조사에 속마음 숨기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쓰레기들 빼고는 다 돌아가고 싶다는 거죠”
 
“조국을 믿어야죠. 그리고 죄를 지었으면 죄 값을 치루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자식들 앞에 떳떳한 마음으로 살 수 있으니까요”
 
“저는 조국의 처벌이 두려운 게 아니라 무슨 낮 짝으로 고향 동무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정말 좋은 마을 사람들을 마주 볼지...저는 2003년도에 왔는데 2005년부터 탈북자들을 한명도 안 만났습니다.”
 
“십여년을 하루같이 아직까지도 조국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셔요”
 
“하하하 ... 어찌 잊겠습니까? 짐승도 죽을 땐 제 굴가서 죽는다는데... ”
 
“힘 내세요 꼭 좋은 날이 올 겁니다”
 
“누님이라두 일단 먼저 가기를 바랄뿐입니다. 제 생각에는 탈북자들 중 대부분은 누님 격려하고 싶고 누님 가기를 바랄 겁니다. 그래야 자신들도 기회가 올수 있다고 생각할겁니다. 하지만 두려우니 나서지는 못하고,,, ”
 
“네 그렇겠죠, 동생은 앞으로도 더 좋은 글을 많이 올려주시기 바래요. 글이 너무 좋아요”
 
“내 서프라이즈라는곳에 500편 넘게 글 올렸는데 다 삭제 당했더군요. 정론직필에는 조금 밖에 안 됩니다. 서프에 올린 것 때문에 감옥 간거죠”
 
“아쉽네요. 보지 못한게,,, 감옥에는 얼마나 계셨죠?”
 
“많이는 안 있었어요. 8개월”
 
“제일 힘든 기간이네요”
 
“아이고... 차라리 그게 더 편했습니다. 나온 다음 감시 관찰이 더 짜증납니다. 요즘은 한 달에 한번 정도 전화 오지만 전에는 하루 두 세 번씩 왔습니다. 전 이곳으로 와서 10년간 요시찰입니다. 하하하”
 
“ㅠㅠㅠ 고생 많네요”
 
“간첩으로 몰리지 않은 것만 으로도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여기서 5년 정도 사니까 늦게 나마 깨달은 게... 이곳에서는 나 같은 생각을 가지면 정신병자, 또라이 취급을 받게 되더라구요.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요. 저에게도 정신병자, 또라이, 어디 사는지 알면 당장 찾아가 찢어 죽이겠다는 협박전화나 문자가 수시로 와요”
 
“참... 가련한 놈들이죠. 영웅이 없는 민족은 슬프고 영웅을 못 알아보는 민족은 가련하다더니... 딱 이곳 사람들 놓고 하는 말이죠”
 
“참 명언이네요”
 
...
 
“누님. 유튜브에 나온 가족들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축하합니다. 지금 너무 기뻐 정신이 없겠군요. 하하하
남편분도 너그러워 보이고 딸은 너무 곱게 생겼고... 정말 좋겠습니다. 부럽습니다. 정말...”
 
“그쵸. 오늘은 정말 명절이네요. 기쁘기도 하고, 한참을 울었어요. 기자 분들 자꾸 연락 오셔서 말하다가 그냥 울고~~~”
 
“그러실 겁니다. 누님 오늘은 온밤 잠 못자겠군요. 그래도 맘 편하게 푹 쉬십시오. 언제 한번 편히 쉬어본적 있었겠습니까?”
 
“그래요, 그래도 가족이 모두 건강하게 잘 있다니 참 기쁘네요”
 
“남쪽 언론 자슥들, 누님 가족 수용소 갔다는 소설 못써서 어쩐 답니까? 푸하하하”
 
“네. 좋은 메시지들도 많지만 그 와중에도 속알머리 없는 놈들도 있네요”
 
“그냥 그런 놈들은 개무시 하십쇼. 그런 저능아들과 놀 시간이 어데 있습니까?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그렇지 ... 하하”
 
“누님. 식사시간인데 .. 식사는 제 때에 꼭 하십시오”
 
“지금 위내시경 하고 병실에 와서 누워 있어요. 밥은 이제 먹어야죠”
 
“아.. 그렇군요.. 부모님과 남편, 따님이 걱정 안하게 건강 제대로 챙기세요
누님 병문안 오는 것처럼 하면서 동향 살피러 형사도 가끔씩 오죠?
 
“그 사람들은 뒤에서 몰래 보고 가겠죠”
 
“누님 보내자니... 지금 누님 상황 살피다가 누님 가면 나도 보내 달라는 탈북자들 엄청 많아질거고... 안 보내자니 내외 여론이 무섭고.. 어쨌든 누님 크게 일 낸 것만은 분명합니다. 배짱 좋습니다. 하하하
누님으로 인해 한가닥 희망 가지는 탈북자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 분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당연하죠. 박상학이나 종편 나와 돈 몇 푼에 량심 팔아먹는 쓰레기들 제외 하고요.
누님. 래일 밥이나 같이 먹어야죠.
할 이야기도 많겠지만 ..하하
누님은 뭔 음식 좋아합니까? 특별히 먹고 싶은거..”
 
“글세~~~
비싼거 불러야 겠죠? ㅋㅋ”
 
“하하하.. 당연히 비싼거 부르세요”
 
“ㅋㅋ 삶은 옥수수”
 
“아이고.. 참..누님, 가고 나면 다 추억으로 남겠는데.”
 
“내일 평양에서 저의 딸 동영상 찍었던 싱가포르 아람판 씨가 딸의 선물을 가지고 한국에 와요. 그리고 여기서 내가 부모님께 보내는 선물을 가지고 20일 부모님 칠순잔치에 참가하려 평양에 가요”
 
“아. 잘 되었군요. 확실히 세상에는 정의롭고 정 많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연락이 되어 참 다행입니다. 축하합니다. 부모님께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제가 지금 내일 딸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는데 마음이 참 ㅠㅠ”
 
“아이고... 그랬군요. 그럼 천천히 쓰십시오.”
 
“부모님 생일 선물로 목도리 사서 내가 수를 놓았어요”
 
“그랬군요.ㅠㅠ 빨리 돌아가야겠는데... 결국은 또 해를 넘깁니다. 건강이라도 잘 챙기세요. 언제갈 지 모르지만 ... 건강하게 가야죠”
 
“네 고마워요”
 
“누님.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반드시 가족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동생도 새해 건강해서 웃음 가득한 행복만이 있기를 바랍니다.”
 
... ... ...
 
... ... ...
 

▲ 2016년 8월 13일 김련희씨의 nk투데이 주최 강연, 있는 그대로의 북녘 동포들의 생활을 남녘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자주시보
 
 
잠시 후에 스웨덴에서 문자가 왔다.
 
십여년 동안 인권대표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스웨덴으로 망명하신 분인데 내 기사를 보고 페이스북 메신저로 여러 번 인사를 나눈 적 있었다.
 

“많이 힘들죠?”
 
“네, 정말 힘들고 아프네요 그래도 고마운 분들 많으셔서 힘을 얻습니다. 대표님께서 북송요구하시며 힘든 시간 보내셨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기회 되시면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요”
 
“저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해외에 나왔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의 모든 것을 체크하고 한국에 두고 온 아들이 단련을 받고 있네요, 아무튼 자세한 말씀을 나누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힘내시고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을 텐데 해외에서 정말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저도 선생님의 뉴스를 보고 마지막엔 국적 포기하는 길도 있다는 사실을 새겨보았습니다.”
 
“직접 대화가 아닌 간접대화방식으로 얘기를 하자니 좀 그렇네요. 일단은 자유롭지 못 할거고, 보나마나 출국정지조치를 해놓았을 겁니다. 현제로선 련희 씨가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로워야 전자든, 후자든 결정을 할 텐데 참 난감한 입장일거란 생각이 드네요. 조급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주변에서 조언을 주실만한 지적인분을 모색해 보세요.
 
직접적인 표현을 하고 싶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정부의 탈북자정책과 대북정책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투쟁한 덕분에 저는 북한말로 요시찰 대상입니다. 오히려 나 때문에 조금 더 불편해지지 않까가 걱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주고받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
 
“많이 답답하고 어떻게 이 난관을 헤져나갈지 참 너무 어렵습니다. 이럴떄 지금 제 심정을 다소 이해해주실수 있는 대표님이 곁에 있었음 얼마나 큰 힘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제 생각으론 장기전을 대비해야 하는 만큼 건강에 각별히 신경쓰세요”
 
“네 감사합니다”
 
“정부 반응을 보니까 제가 생각했던 대로 반응을 하였더군요. 아무튼 현 정부의 입장은 대체로 그렇게 일관할겁니다. 자기들의 정책기초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부문이고 2017년 설상 민주당정권으로 바뀌면 모를까, 사실 정권교체는 지금의 민주당 실정을 봐서는 그것도 불투명하구요, 일단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할 텐데 아무쪼록 건강에 유의하시고 먼  길간다 생각하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네. 그래도 저를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이 곁에 계시니 마음은 든든합니다. 대표님, 부디 건강을 챙기시고 용기를 잃지 마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간고한 오늘을 즐겁게 추억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보네요.”
 
“너무도 길고 짙은 밤이지만 그만큼 새벽이 올 날도 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힘들 텐데 격려 감사합니다 현제 련희씨 상황은 다 읽고 있습니다. 아무튼 잘 대처하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긴 얘긴 않겠지만 건강이 일단 우선이고 둘째로 지혜롭게 대처하시길 바랍니다.”
 
“네 대표님은 건강 괜찮으세요? 저는 지금 병원입원치료 중입니다. 경찰과 몸싸움하고 좀 지쳤나 봐요”
 
“이번 기자회견에 경찰의 대응수위가 평상시 하고는 자못 다른 강경적인 형태가 단적인 실례라고 보여지네요. 한마디로 위의 지시상황이 너무 날카로와졌다고 느껴지더군요. 오랜 시간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 게 참 걱정스럽네요. 만에 하나 북송이라는 순리로운 변수도 있겠지만 안 될 가능성도 그와 못지않게 팽팽해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련희 씨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남, 북간 기 싸움이거든요. 아무튼 국내도 중요하겠지만 외신 쪽에서 인권 쪽에 포커스를 맞춰서 이슈화가 계속해서 도마에 오르면 체면유지차원에서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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