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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9. 남녘생활의 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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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919회 작성일 16-11-0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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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9. 남녘생활의 적응
김련희 북녘동포 icon_mail.gif
기사입력: 2016/10/30 [22:36]  최종편집: ⓒ 자주시보

[편집자 주: 국가보안법에서는 남과 북을 대조하여 남은 나쁘고 북은 좋다고 찬양하는 것을 찬양고무죄 위반으로 보고 있는데 이 글에 남측의 고속도로 통행료, 병원 의사 상담비 등은 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남과 북의 차이를 지적한 내용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속도로 유지보수를 위한 통행료 징수의 내막이나 남녘의 주택 건설 방식에 있어 거의 무보수로 군대와 건설돌격대가 집을 짓는 북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남녘 병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느낀 차이점이며 그것을 남녘 사람들이 익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기에 북을 찬양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향후 남과 북의 교류가 늘고 통일을 자연스럽게 이루기 위해서는 이런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글이라 판단하여 이 글을 소개합니다. 특히 따뜻한 남녘 사회의 인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일부 문제가 소지가 있는 부분은 삭제하고 올렸다는 점도 아울러 밝힙니다.]

 

▲ 김련희 북녘동포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6개월만 기다리면 여권이 나온다는 말이 나에게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 실오리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다행한 일이었다.

 

이 6개월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나는 여기 남쪽에서 패션디자인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어 민족전통옷의 근본은 같지만 70년을 헤어져 살면서 너무나 많은 문화적 차이를 가지게 되어버렸다. 

나는 북과 남 사이의 그 벌어진 패션문화적 차이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의류기술을 찾고 싶었다.

 

교차로신문 모집광고를 보고 바로 신청하여 2012년 4월부터 대구 중앙로에 있는 패션디자인 직업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학급은 30명 정도였고 나이층도 다양하고 성격과 취미도 각각이었다. 

한국사회에 나온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때라 처음으로 남쪽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아직 낯설고 경계심도 있어 처음에는 많이 불편했지만 하루하루 모르는 것은 서로 배워가고 나누어가며 생활하다나니 어느새 친근해지고 다정한 벗이 되었다,

점심식사 때는 집에서 도시락을 가져와 모여앉아서 나누어 먹군 하였는데 내가 얼마나 음식을 맛이 없게 하는지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이 내 찬그릇이어서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어느새 나의 양장기능이 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짬시간만 있으면 나에게 모여와 서로 묻고 배워달라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만 되면 친구들에게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체득한 의류가공기술들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여러 가지 옷설계기술과 다리미로 천에 기계잔주름을 잡는 방법, 넓은 판고무줄을 정확한 간격으로 일정하게 잡아주는 방법, 봉제과정에 요구되는 기술적 요령들 등..... 

그들은 내가 북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매일 맛난 음식도 가져다주고 옷을 선물로 주는 친구도 있었다.

 

졸업을 앞둔 9월 선생님은 양장기능사 국가기술자격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3명이 이 시험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선생님은 문화도 다르고 표현어휘도 많이 달라 이론시험은 힘들 테니 큰 욕심 내지 말고 이번은 연습 삼아 한번 해보라고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신다.

 

그런 것 같다.
생소한 외래어가 나를 긴장시켰고 모르는 말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2명의 친구들은 나에게 모르는 외래어를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전공부분의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시험날짜를 하루 앞둔 날 아침에 학교에 도착하니 우리 학급의 친구들이 힘을 내서 꼭 시험에 합격하라며 어떤 친구는 엿을, 또 다른 친구는 찰떡을 해 가지고 와서 시험에 응시하는 우리 3명을 응원하는 파티를 마련해 주었다. 

며칠 후 이론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는 모두가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고 소중한 추억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5개월간의 학교생활은 나에게 한국사회에 대한 거부감을 해소하고 남녘동포들의 따스한 정을 느끼게 하여준 첫 걸음이었다. 

졸업한 후에도 친구들은 시간 있으면 나에게 전화해 밥도 함께 먹자고 청했고 시내구경도 시켜주군 하였다. 

9월에 학교를 졸업하고 10월에 실기 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94점으로 양장기능사 국가기술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북과 남의 공동 의류양장사가 된 셈인가! 

 

여권을 기다리는 동안 남녘에서의 나날들은 놀랍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후회 없이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는 못 잊을 나날들이었다.  

 

▲ 오늘은 어디서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아랫목 삼아 잠을 청해야 하는지? 5월 가정의달 서울역앞 가정잃은 노숙자는 한보따리 개나리 봊짐을 내려 놓고 근심중이다.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제일 놀라웠던 상황은 지하철역 안에 여러 명의 남자들이 쭈그리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처음 보는 상황이라 그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집에 못가고 지하철역에 쓰러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노숙자“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나는 신문 한 장을 담요삼아 밖에서 잠을 잔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집이 없지? 저 분들은 가족이 없을까? 직장에 출근 안하고 저렇게 밖에 누워있으면 어떻게 먹고 살지?)
나는 집 없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평생내집마련“이라는 말을 자주 들으면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 집이 없으며, 집을 왜 내가 마련해야 하며, 그것도 평생 동안 모아 내집마련한다는 말이 너무 이상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우리처럼 태어나면 집이 있고, 시집, 장가가면 돈 한 푼 안내고 국가가 배정해 주는 집에서 사는 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여기 남쪽분이 나에게 “우리는 아무 곳이나 가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북쪽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지 않은가!”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진정한 거주이전의 자유라는 말이 무엇인가? 당신은 서울 강남의 제일 좋은 빌딩에서 살고 싶다면 살 수 있는가? 또 내가 알기로는 돈이 없어서 단칸 고시원에서 살다가도 돈이 허락되지 않으면 그나마도 거리에 나와야 하는 형편 아닌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어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돈이 결정하는 것이지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돈에 의한 예속이다. 하지만 북에서는 돈 한 푼 내지 않고 국가로부터 집을 배정받으며 직장을 옮기게 되면 그 지역으로 집을 교환해준다. 전세, 월세, 계약이라는 말을 모르고 살며 죽을 때까지 그 집의 소유권은 자기 본인이다. 당신이라면 어느 선택을 할 것 같은가?”라고 말해주었다.

 

또 놀랐던 것은 아는 분과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가는데 도중에 잠간 서더니 한 아줌마에게 돈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왜 돈을 주냐고 물었더니 이 분이 하는 말이 누구나 도로를 지나가려면 돈을 내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 길도 주인이 따로 있냐고, 국가길이 아니냐고, 어떻게 길 지나다니는 값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한번은 인터넷에 피부과에서 녀성들의 기미와 잡티를 없애준다는 광고를 보았다.
북에서는 피부과라고 하면 상처나 습진, 피부병을 치료하는 곳인데 여기 피부과에 대한 소개를 들으니 나도 여자인지라 무척이나 호기심이 갔다.

 

나는 집주변에 있는 피부과에 가서 접수를 하고 과장선생님을 만났다. 과장선생님에게 얼굴에 기미가 많은데 여기서 없애준다고 해서 찾아왔다고 하자 250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남쪽에 온지 몇 달 안 되었던 나는 깜짝 놀라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와 가려고 하자 복도에 있던 간호사가 돈을 내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저 지금 약도 안 먹고 주사도 안 맞았어요. 치료받지 않았는데 무슨 돈을 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간호사는 과장선생님과 상담비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병원은 치료만이 아니라 말을 나눈 값도 내야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여기 남쪽에서도 여러 번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의사선생님들도 정성을 다했고 간호사들도 친절했다. 다만 퇴원할 때 쯤 되면 ‘병원비가 얼마 나왔을까!’ 하는 걱정만 없다면 다른 것은 모두 편하고 좋았다.  


나는 하나원을 나온 지 8개월 후인 9월 경산시청에 여권을 신청하였다. 며칠 후에 시청에서 여권을 발급할 수 없다는 전화 연락을 받고 ‘아직은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11월 쯤 되어 다시 시청에 가서 여권을 신청하려 왔다며 내 주민등록증을 보이니 두말없이 당신은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며 신청서조차도 받지 않았다...나는 어이가 없어 직원에게 당신은 여권을 신청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 직원은 자신들은 잘 모르고 국정원에서 하는 일이라며 난처해하였다.

 

그토록 간절하게 여권이 나오기만을 기다려 왔는데 이제 와서 여권이 안 된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경산 경찰서 보안계 담당형사를 불러 앞에 앉혀 놓고 국정원 111에 전화하였다. 내 이름을 밝히자 내가 여권 내용을 말하기도 전에 국정원 여직원은 여권 때문에 그러냐고 하면서 여권발급을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여권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당신은 내 이름만 듣고 어떻게 내가 여권 때문에 전화했다고 생각하냐고 물었으나 직원은 다른 말없이 그냥 여권이 안 된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현재 한국에서 중국에 있는 북쪽사람들을 데려오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탈북브로커를 만나 국정원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데 어떤 이유인지 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브로커는 내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국정원이라고 쓴 여러 개의 전화번호들을 한참 돌리더니 어느 한 번호를 찾아 전화하였다.

 

“김련희라고 2011년 9월에 한국에 입국한 여자인데 1년이 되도록 여권이 나오지 않는다는데 좀 알아봐 주세요” 잠시 차를 마시며 기다리는데 5분정도 되었을까, 국정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그쪽에서 하는 말이 김련희는 처음부터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사람이라 나중에라도 북으로 도망갈 우려가 있어 “신원특이자”로 분류되여 여권을 발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국정원 독방에 감금하고 강압적으로 서약서를 받아 국적을 주고 고향으로 도망갈까 봐 여권을 해줄 수 없다니...  

 

여행의 자유는 인간의 초보적인 보편적 권리이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단지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도망갈까 봐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여행의 권리를 짓밟는다는 것은 엄연한 인권유린이다. 그때에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실오리같은 희망이 끊어지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며칠 동안을 애태우며 어떻게 하면 중국까지 갈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생각해낸  것이 밀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누구와 함께 의논할만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어 혼자서 모대기던 나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한탈북자 ㅊ씨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ㅊ씨는 나보다 한 달 늦에 남쪽에 온 사람인데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라 외롭게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때때고 밥도 사주고 자주 이야기 친구도 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사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다년간 살 때 밀수를 여러 번 하면서 그쪽부분에 깊은 연관이 있어 아는 것이 많았다. 나는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꼭 돌아가야 하니 좀 도와달라고 ㅊ씨에게 부탁하였다. 

 

그는 나의 사연을 다 듣더니 자신이 도와주겠다면서 밀항선을 알아봐주었고 며칠 후에는 연락이 왔다면서 밀항비를 2000만원 준비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금액은 남쪽에 온지 1년밖에 안된 나에게는 감히 넘볼 수조차 없는 터무니없이 높은 거금이여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족에게 돌아가는 길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던 나는 간절히 원하면 꼭 길이 열린다는 희망을 가지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매일을 년로하신 부모님과 남편 사랑하는 딸을 그리며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에 2013년 7월 2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되는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 북측녀자축구선수들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 2014년 인천에서 열렸던 아시아경기대회 여자 축구에서 우승한 북 여자축구선수들이 시상대 위에서 환호하는 남녁동포들에게 손을 들어 흔들면서 답례하고 있다. 

 

2년만에 공화국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감격으로 며칠 밤을 지새다가 21일 기차를 타고 서울 상암월드컵 경기장을 찾았다. 보안계 담당형사에게 함께 가자고 했지만 주말이라 함께 가기 어려워 혼자서 가게 되었다. 정말 꿈만 같았다. 나는 입장표를 사고 경기장의 북측응원석에 가서 앉았다.

 

맞은편에는 태극기가 크게 붙어있었고 주석단 맞은편엔 파아란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통일조국기가 힘차게 나붙기고 있었다. 경기시작을 알리자 북측녀자축구팀과 남측녀자축구팀이 경기장에 입장하였고 남측애국가에 이어 북측애국가가 장중하게 울려퍼졌다.

 

2년 만에, 그것도 조국멀리 타향에서 애국가를 들으니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 내 조국의 애국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력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나는 목청껏 따라 불렀다. 2대1로 경기에서 이긴 북측선수들이 공화국기를 날리며 운동장을 한 바퀴 돌다가 내가 앉아있는 응원석 앞에 와서 인사를 할 때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만세를 힘차게 웨쳤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내 조국의 선수들이 있었고 그들의 손을 잡고 당장 평양에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한스러웠다. 

 

내일이면 선수들은 내 고향 평양으로 가는데 나는 왜 내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갈수 없을까!
가슴을 치고 울분을 토하며 고통 속에 몸부림쳤지만 나의 앞에는 분단의 장벽이라는 괴물이 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고향으로 가고야 말겠다는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결심으로 또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인터넷을 여기저기 들어가보는데 위조문서사이트를 보게 되는데 거기에 위조여권조항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저것이면 내가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갈 수 있을 거잖아”

 

나는 바로 사이트에 있는 연락처에 전화하여 중국에 갈수 있는 위조여권을 부탁하였다. 

250만원 합의로 시작된 위조여권이 2일 만에 완성이 되어 이메일로 위조여권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금방 중국으로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쁨으로 그 사람에게 현금 250만을 입금하력고하자 그쪽에서 하는 말이 비자 받는데 돈이 더 필요하다며 500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처음과는 약속이 다르지 않냐고 상대와 말다툼이 벌어지자 그쪽에서 하는 말이 당장 경찰서로 신고하겠다고 하여 그만 위조여권도 성공하지 못하고 2014년 12월 경찰조사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끝내 연락처도 있는 그 사기를 쳤던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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