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련희 수기] 13. 남편과 딸을 4년만에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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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13. 남편과 딸을 4년만에 보다 | ||||||||||||||||||||||||
기사입력: 2016/11/12 [17:2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9월 20일 미국 언론 CNN에서 전화가 왔는데 빠른 시일 안에 인터뷰를 좀 해주었으면 한다는것이었다. 나는 다음날인 21일 인터뷰를 위해 서울 광화문 오피시아빌딩 CNN사무실로 찾아갔다.
인터뷰가 시작되는데 갑자기 노트북을 꺼내놓으며 동영상을 켜주는 것이었다. 미국언론이여서 좋은 감정이 없는 상태인데 먼저 노트북을 꺼내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니 나는 북에 대한 안 좋은 동영상으로 나를 나쁘게 몰아가려 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겨 무척이나 긴장되었다.
잠시 후에 동영상이 켜졌는데 나는 깜짝 놀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면에는 4년 전에 17살에 헤어졌던 나의 딸이 나와 마주 앉아있는데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미처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놀란 마음으로 “이게 누구지?” 하고 잠시 주춤하는데 순간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쳐 나오면서 “어떻게요, 어떻게요, 내 딸이잖아요.”하며 그만에야 21살로 성장한 딸을 알아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기자의 말이 cnn기자가 평양에서 가족을 만나 인터뷰를 한 영상을 보내왔는데 지금 평양에서 나의 인터뷰영상을 가족에게 보여주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슴이 컥 막힌다. 숨이 넘어가지 않는다. 칼이 사정없이 내 가슴을 찌른다. 엉엉 목 놓아 통곡을 한다.
영상 속에서 나의 딸은 가슴을 치며 눈물 속에 부르짖는다.
“왜, 왜, 왜, 우리 엄마가 돌아오지 못하나요?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요?”
이번에는 남편의 모습도 나온다. 남편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4년 세월 소식이 없어 애태우던 안해가 남녘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억이 막혀 말을 잇지 못한다. 그냥 눈물만 주루룩,,, 20여년 함께 살며 남편의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 엄마가 왜 못 오냐며 가슴을 치는 딸의 얼굴을 쓸어보고 남편의 손을 잡아보며 우리는 4년만에 켬퓨터 화면을 사이에 두고 함께 목 놓아 울었다.
나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CNN기자의 도움으로 가족에게 영상편지를 보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4년만에 영상으로 나마 볼 수 있었던 남편과 딸의 모습으로 받은 충격으로 2일 동안 자리를 펴고 누워 앓았다. 도무지 손가락하나 움직일 힘이 생기지 않았고 그냥 가슴이 활랑거리고,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길이 없고, 너무나 억이 막히고 가슴이 찢어져와 방바닥을 쾅쾅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는데 여러 곳에서 전화가 빗발치듯 요란스럽다.
인터넷에 CNN동영상이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동영상을 찾아보면서 또다시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딸은 4년만에 엄마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며 어린애 마냥 엉엉 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한 딸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진다.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을까! 아직 어린데, 엄마가 곁에 있어야 하는데, 너무 외로울텐데, 저 어린 게 어떻게 견뎌낼까!”
간절히 빌어본다.
... ...제발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았으면, 부디 건강해서 밝게 자라주었으면,,, ,,,
이렇게 4년만에 이루어진 영상속의 우리 가족의 만남은 그야말로 가슴을 찢어내리고 눈물속의 절규가 담긴 너무나도 아픈 순간이었다.
* 관련 cnn보도를 소개한 미디어인 뉴스 보도 바로가기
그리하여 10월 2일 서울 대림성모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정말로 2일 동안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3일정도 되니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된 것 같다.
10월 7일에는 유엔인권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게 되어 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 쓰러진다 해도 내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7일 나는 담당의사선생님께 사연을 이야기하고 2시간의 외출증을 받아 유엔인권사무소로 갔다. 기자회견장에는 교도통신, 신화통신, 자주시보, 등 여러 언론들이 와있었고 목자단 목사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자단 목사님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주재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앞에서 “인권이 있다면 김련희를 보내라, 김련희를 보내지 못하면 인권을 말하지 말라”는 안건으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호 소 문]
여러 언론에 보도된바와 같이 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 4년 전에 인신매매를 일삼는 브로커 꾀임에 속아 여기 남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땅을 밟으면서부터 실수로 왔음을 분명히 밝혔고, 저의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달라고 눈물로 하소연도 하고 단식도 하면서 강경하게 요구하였지만 끝내 저를 탈북자로 만들어 가족의 품으로 보내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나중에라도 북으로 도망갈 수 있다면서 <신원특이자>로 분류하여 4년 세월 여권도 발급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태는 인간의 초보적인 인권, 즉 보편적 권리마저도 짓밟아 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부모, 자식의 천륜이 한 국가의 정책으로 강제로 끊겼으며 본의 아니게 부모, 형제, 자식과 생이별하고 혈육 한 점 없는 이 낮선 곳에서 오로지 가족을 그리며 4년의 긴 세월을 하루하루 가슴 찢어지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처절한 삷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가족의 품에서 살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이것을 가로 막는 것은 반인륜적이며 반인권적이며 반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24일 미국CNN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4년만에 처음으로 저의 남편과 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딸은 가슴을 치며 눈물로 호소합니다.
“왜, 왜, 왜 어머니가 돌아오지 못하냐고,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당신들에게도 부모가 있냐고, 자식이 있냐고,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냐고,”
이러한 피의 절규 앞에 남조선 당국은 그 무슨 “자유의사”니 뭐니 하면서 황당한 궤변을 늘여놓으며 한사코 제가 가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저의 사랑하는 딸은 4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야속한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오늘도 눈물로 보내고 있습니다.
유엔 대북인권사무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나라 안팎에서 눈만 뜨면 북의 인권실태를 입에 거품을 물고 성토하는데 있지도 않는 그 무슨 북의 인권에만 관심이 있고 남쪽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나 인권유린은 관심 밖이란 말입니까?
마지막으로 서울 주재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관계자분들께 호소합니다,
저는 간경화로 병이 깊을 대로 깊어져 무척이나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버티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유일한 희망 때문에 죽을 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습니다.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진정으로 인권을 소중히 여긴다면,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란다면 저를 사랑하는 부모님과 딸, 남편의 품으로 돌려보내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호소문을 유엔인권사무소에 제출하려고 청사에 들어가려고 하자 경찰들 수십명이 문을 가로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진을 치는 것이다.
우리는 경찰들에게 그냥 호소문만 전달하고 내려오겠다고 하자 경찰들은 우리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유엔사무소가 아직 일을 보지 않는다면서 막무가내로 사람 벽을 쌓고 우리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길을 열어줄 때까지 앉아 기다리겠다고 경찰들 앞에 앉자 이번에는 와르르 달려들어 목사님들의 팔과 다리를 들고 거리로 내동이치는가 하면 십여명의 여경찰들이 팔에 주사바늘을 꽃은 채로 앉아있는 나에게 달려들더니 나의 팔과 다리 머리를 들어 무작정 거리에 끌고 가는 것이었다.
경찰차까지 동원되어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모두 구속하겠다고 위협공갈하면서 우리를 한참을 끌고다녔다.
목사님들은 입원환자로 건강이 심히 약한 내가 십여명의 경찰에게 끌려다니는 것을 보고 더는 무리라고 하면서 나의 건강부터 챙겨야 한다며 그만 돌아가자고 하였다.
하여 끝내 호소문을 전달하지 못한 채 나는 병원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 기자회견 관련 보도기사 바로가기
“당신들도 인간이세요? 병원에 입원했다면 먼저 건강은 어떤지, 병은 심한지, 차도는 있는지,’물어보고 나서 당신들에게 필요한 감시를 하든, 병원을 확인을 하든, 호출을 하든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아파서 쓰러진 사람이 입원할 때 언제 퇴원하는지 계획을 하고 입원합니까? 어떻게 아픈 환자에게 전화해서 무턱대고 언제 퇴원하는가, 병원확인서부터 내라고 하는 게 초보적인 인간성이라도 있는 행동입니까? 입원 중에 기자회견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는가요? 나는 내 가족에게 갈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할 겁니다.”
병원입원생활이라고 하지만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여러가지 스트레스로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고 있던 때인 10월 15일 오전 11시쯤 되었는데 손전화기에서 알림음 소리가 나기에 펼쳐보니 인터넷에서 이름을 들은 적 있는 재미교포 신은미선생의 메시지가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신은미입니다. 지금 가족을 만나고 있습니다.”
헉/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미국에 계시는 분이 평양에 있는 우리 가족을 어떻게?’
신은미선생이 평양에 여행을 가서 고맙게도 나의 가족들을 만나주신 것이었다.
“엄마, 나 련금 잉” 딸이 신선생의 페이스북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가슴이 뛴다. 얼마만에 해보는 딸과의 대화인가,,,
나는 한참을 딸과 함께 문자를 주고 받았다.
* 오마이뉴스의 문자 대화 관련 기사 바로가기
사랑하는 딸과 직접 문자를 나누며 가슴을 설레였던 날로부터 일주일지난 22일 서울 “김련희 송환촉구준비모임”은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 후문 앞에서 20여명의 인권, 종교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송환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양심수후원회, 민들레국가폭력피해자와 함께하는 모임, 민주사회를 위한 강남서초시민모임, 민주사회를 위한변호사모임통일위원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불교인권위원회 등 8개 단체로 이루어진 송환촉구준비모임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인권과 인도주의, 동포애 정신에 입각해 즉각 송환할 것을 촉구했다.
기자회견 후 우리는 송환촉구 입장서를 통일부 사무관을 거쳐 통일부장관에게 전달하였다.
지난 20일부터 금강산에서는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쟁 시기 등 남북으로 흩어져 수십 년 동안 고통을 안고 살아온 가족·친척들의 상봉은 당사자들 뿐 아니라 겨레 모두의 염원이었으며 기쁨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처절했던 전쟁 시기도 아니고 피할 수 없는 자연재앙 때문도 아닌, 사람들의 잘못으로 가족끼리 생이별되어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어 세상 사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미 <한겨레신문>, <뉴스타파> 등 국내언론과 <CNN>, <뉴욕타임스> 등 외신을 통해 자세히 보도되었고,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등 종교단체의 기자회견, 민가협 목요집회, <주권방송> 등에 출연해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호소한 탈북자 아닌 탈북 신분이 된 김련희 씨가 그 장본인이다.
김련희 씨는 2011년 중국에 친척방문 여행 중 탈북 브로커의 유혹에 속아 여권을 빼앗긴 채 한국으로 끌려왔고, 도착하자마자 국정원에서 ‘본의 아니게 속아서 왔으니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단식을 하며 요구했지만 끝내 거부당하고, ‘신원특이자’라며 여권도 내주지 않았다.
김련희 씨는 한때 절망상태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가족 품으로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혹은 ‘밀항’을 시도했고, 혹은 ‘위조여권’을 만들려 했지만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는 한국 법을 전혀 모른 채 ‘간첩’이라도 되면 ‘강제추방’당하지 않을까 하여 17명의 탈북자 명단을 수집했고, 이를 경찰에 스스로 신고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모두가 가족으로 돌아가려는 집념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국가보안법에 걸려 ‘간첩’혐의까지 씌워졌지만 이 사건 항소심재판부는 김련희 씨가 탈북의사가 없었음을 인정하였고 간첩 혐의도 그 진정성에 의심된다며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
물론 김련희 씨가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하려 했다는 정부당국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할 증거들은 많이 있었다.
대구고등법원형사1부(재판장 이범균)의 항소심 선고에서도 확인됐고 김련희 씨와 중국에서 함께 입국한 탈북자 ‘ㅈ’씨의 증언, 국정원 정보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ㅇ’씨의 증언, 김련희 씨를 ‘하나원’에서부터 돌보아온 적십자사 관계자들 다수의 증언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김련희 씨를 여권을 빼앗긴 채 본의 아니게 남한으로 끌려오기 전 상태로 원상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인권과 인도주의, 동포애 정신으로 송환시켜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는 인권차원에서 송환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 ‘모든 사람을 생명, 자유 및 신체의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3조) 했고,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나라(자국을 포함한)에서든지 떠날 수 있으며, 또한 자국으로 돌아 올 권리를 가진다’(13조 2항)고 했다.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서도 ‘모든 사람은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누구든지 자의적으로 체포되거나 억류되지 아니한다’(9조 1항) 했으며, ‘모든 사람은 자국을 포함해서 어떠한 나라로부터 자유로이 퇴거할 수 있으며(12조 2항), 어느 누구도 자국에 돌아올 자유를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않는다’(12조 4항)고 했다.
우리 헌법에서도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10조), ‘모든 국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가진다’(14조)고 했다. 거주 이전의 자유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여행, 해외 이주의 자유, 바로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여행하거나 이주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되고 있다.
다음으로 사람의 평등한 인격과 존엄성, 인간애를 바탕으로 인류전체의 복지를 지향하고, 인간성을 존중하는 인도주의 정신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김련희 씨에게는 사경을 헤매며 딸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늙으신 부모님, 어머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딸과 남편이 있다. 부모자식사이, 부부사이는 그 누구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천륜이기도 하다. 어찌 사람 세상에서 천륜을 어길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김련희 씨는 간경화로 어려운 투병을 하고 있는 환자이다. 몸도 마음도 불안정하여 병은 깊어질 수도 있다. 인도주의 정신으로 이들 가족들에게 다시 행복의 웃음을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포애 정신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비록 오늘 우리 민족은 본의 아니게 남북으로 갈라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아니 빠른 시일 안에 자주통일세상을 이루어야 할 수천 년을 한 핏줄로 살아온 혈연공동체이다. 기쁨도 슬픔도 끝내는 함께 나눠야 할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들에 대한 인도주의 실천을 통해서 남북관계 발전의 또 다른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동포애 정신으로 송환시켜야 할 것이다.
김련희 씨 송환과 관련 통일부는 ‘법을 새로 만들면 모를까 현행법 체계에서는 송환시킬 수 없다’고 했고 국정원은 ‘재입북시킬 제도적 장치가 없어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정부당국에서는 김련희 씨의 송환에 법적·제도적 장치가 없다고 주장한 셈이다.
그러나 법이 없으면 새로 만들면 된다. 법이 먼저 있어 인간이 그 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 때문에 법을 만드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이 있다. 1993년 3월 전쟁포로였던 인민군 종군기자 리인모 노인을 북송할 때 ‘북한방문증’을 이용했으며, 2000년 9월 2일 비전향장기수 63명을 송환할 때도 ‘북한주민접촉신고서’를 이용했다. 리인모 노인이나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남쪽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지만 ‘북송할 목적’으로 그 같은 형식을 빌렸던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 ‘가족은 사회의 자연적·기본적인 단위체로서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16조 3항)고 했다. 본인 의사에 반하여 강제입국케 한 반인권, 반인륜 범죄에 법적인 책임을 묻고, 김련희 씨를 문명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인도주의정신, 그리고 동포애 정신으로 송환시킬 것을 촉구한다.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민들레국가폭력 피해자와함께하는사람들, 민주사회를위한강남서초시민모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통일위원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불교인권위원회)
며칠후 병실 침대에 누워 TV를 보는데 평양에서 진행되는 남북축구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남측노동자축구팀이 평양으로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젔다. 뉴스를 보고 나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어 어느 언론사 기자에게 전화하여 축구팀이 어느 비행장에서 떠나는지 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었다. 내고향으로 가는 분들의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었다.
‘저분들은 이제 몇 시간 후면 나의 가족이 있는 내 고향땅을 밟을 수 있을 텐데, 저분들은 내 고향 사람들의 손을 잡아볼 수 있을 텐데, 그토록 잊을 수 없는 내 고향의 맑은 물을 마실 수 있을 텐데,’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비행장 출입구로 나가는 축구팀성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 관련 YTN 방송 바로가기
아,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평양발 인천도착, 우리 언제면 이렇게 평양과 인천을 비행기를 타고 마음대로 오갈 수 있을까?
전광판에 많은 국제비행기 시간표들과 나란히 자리를 함께 하고 당당하게 쓰여 있는 평양발 인천행이라는 글이 너무도 보기 좋았다.
나는 가슴을 조이며 6시 43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비행기가 도착하여 남측노동자축구 참가단이 공항 개찰구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 줄로 개찰구를 통과해 나오는 참가단 성원들을 일일이 손을 잡아보았다.
한명, 또 한명 그들의 따뜻한 손을 하나하나 잡아보며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최할 수가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다녀오셨습니다.”
...이 분들의 손은 나의 고향 분들의 손을 잡아보았겠지, 이 분들은 나의 고향의 맑은 물을 마셔보았겠지, 나의 고향 평양의 거리를 힘차게 걸어 다니셨겠지, 혹시 우리 가족의 소식을 알고 있는 것은 없을까? ...
이런 생각으로 눈물 속에 참가단들과 악수를 나누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대구 참가단의 한분이 저에게 다가오시는 것이었다.
“련희씨, 미안합니다. 우리만 평양 다녀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나 소중한 내 고향의 놋수저...<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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