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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16. 베트남 대사관에 돌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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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038회 작성일 16-12-0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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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16. 베트남 대사관에 돌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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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북녘동포
기사입력 2016-12-03

[편집자 주: 국가보안법을 고려하여 북 지도자 호칭을 생략하였음에 대해 필자와 애독자 여러분의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 2016년 5월 17일 "남녘 동포 여러분, 제 딸을 안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평양주민' 김련희 씨는 자신의 송환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기자회견장에서 지난 5년간 만나지 못한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 마르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은 더욱 급해지는데 건강은 날로 나빠져 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더는 마냥 기다릴 수만 없었다. 무엇이든 해야 했고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무엇이든 찾아야 했다. 하여 국제적십자사에 편지를 쓰기로 했다.

 


국제적십자사에 드립니다.

 

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5년전까지도 저는 그곳에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이없게도 가족과 떨어져 체제가 완전히 다른 자본주의국가 남조선, 대한민국에서 탈북자의 이름으로 하루하루 힘들고 아프게 살고 있는 김련희라고 합니다.

 

본의 아니게 부모, 형제, 자식과 생이별하고 혈육한 점 없는 이 낮선 곳에서 4년의 긴 세월동안 오로지 가족을 그리며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뼈아픈 고통을 더는 참아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내 진정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저의 안타까운 소원을 부디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삼가 이글을 드립니다.

 

저는 2011년 6월, 저의 신병치료를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식 여권을 가지고 고향 평양을 떠나 중국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조선족인 사촌언니가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탈북 브로커의 속임에 빠져 여권을 빼앗긴 채 여기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국정원에 도착한 첫 순간부터 국정원에 저의 이력을 말하고 브로커에 완전 속아서 어처구니없이 남한에 오게 된 사실을 강력히 피력했습니다. 저는 국정원에서 계속 다음과 같은 저의 변함없는 생각을 주장하고 주장했습니다. ‘정말 속아서 본의 아니게 잘못 왔으니 제발 내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눈물로 하소연도 하고 단식도 하면서 강경하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남조선(South Korea)은 끝내 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언제든 북한으로 도망갈 수 있다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 여권도 발급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태는 인간의 초보적인 인권 즉 보편적 권리마저도 짓밟아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부모님과 딸자식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날 벼락같은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밀항을 시도해 보기도하고 위조여권도 만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저의 의지는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법치 자본주의 국가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렇게 행동한 것은 저의 잘못이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북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이 나라 법을 전혀 몰랐던 저는 ‘혹시 간첩이라도 되면 국제법으로 강제추방이라도 되지 않을까’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17명의 탈북자들의 주소, 성명을 저의 휴대폰에 입력하고 경찰서에 전화를 하여 내가 북측에 보낼 정보를 수집했다고 허위로 알려줌으로써 일부러 간첩행세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말도 안 되는 간첩감투를 쓰고 징역형까지 받아 감옥살이까지 하였으나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 자식의 천륜이 한 국가의 정책으로 강제로 끊어졌으며 저 김련희의 인생은 처참하게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토록 가슴 찢어지는 생이별의 고통을 안고 부모님과 딸을 만날 수 없는 걸까요?

 

인간으로 태어나 가족의 품에서 살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이것을 가로 막는 것은 반인륜이고 반인권며, 반민주주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어떤 자유나 물질적 유혹이 온다 해도 내 가족과 가정보다 소중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인권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면, 이 땅에 정의와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부디 제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국제적십자사에 간절히, 간절히 호소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살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김련히 드림 

 

Dear Mr.& Mrs related to 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I was born in North Korea,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And I grew up and was educated in the North. Until 5 years ago that I had been living a happy life, married. But now I live in South Korea separated from my family as one of North Korean defectors in the capitalistic South Korea, completely different from North Korea. I am Kim, Lyunhee and my life here is harsh and miserable.

 

Against my will, I was separated with my children, parents and sisters. I have lived in South Korea for 4 long years in this unfamiliar place, hoping to see my family again. But I can't stay here any longer and I can’t stand the excruciating suffering any more. I am writing this to tell 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under UN, that my wish is to come back to my family. I hope my earnest plea will be answered.

 

In June 2011, I had left my hometown of Pyeongyang to China, with my DPRK passport, to get a treatment for my chronic illness, and one of my cousins lived in China. During my stay at my cousin’s place, I was told that South Korea is a rich nation, and a few months of work in the South would get me a fortune. Believing what I was told I decided to come to South Korea hoping to earn my medical expenses. However, I was fooled by brokers. They gave me wrong and deceiving information.

 

Arriving in South Korea, from the very first day of the education programs for North Korean defectors, I told over and over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that I was fooled by brokers and I had no intention to defect. I consistently and strongly raised my demand to be sent back to my hometown telling that I was not meant to become a defector and just a victim of greedy brokers. I argued, pleaded, begged, and even went on a hunger strike. However, the South Korea government has rejected my plea of going back to North Korea. Even more, they have refused to issue a passport to me over 4 years up until now, saying that I might flee. This is a sheer violation of basic human rights and universal rights.

 

I even made several attempts to stow away and get a fake passport to go to North Korea and reunite with my parents and daughter. But each time my dreams of going back home was shattered in pieces. I admit that I was wrong to violate law and order of the South, but I did that because I had to be back to my family.

 

Ignorant of South Korean laws, I came up with a very bad and foolish idea that if I become a spy, I might be deported to North by the international law, so I enlisted 17 North Korean defectors and their name and address in my mobile phone and reported to the police that I collected secret information for North Korea. In the end, I was convicted of being a North Korean spy and had to serve a jail term, which won’t help me meet my family again in the North.

 

My family was separated by wrong national policy and my life has been gradually demolishing to complete ruins. Why do I have to live in such misery and pain, not being able to see my parents and daughter again. My heart is tearing apart.

 

I believe it’s more than natural and a basic human right that a person wishes to live with his/her family, and anything that prevents it is inhumane, anti-human rights, and anti-democratic. To me, freedom and prosperity, no matter how tempting, is always less than my family and home.

 

If you believe in human rights and if justice and democracy do exist, please help me go back to my family. I implore wholeheartedly the International Red Cross to hear my plea.

 


Wishing to reunite with my family in North Korea by Kim, Lyeunhee

 

▲ 2016년 2월 24일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김련희 씨가 24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무기한 1인시위에 돌입했다.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리고 나서 2016년 2월 24일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주최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송환촉구 기자회견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무기한 1인시위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며칠 전 발목을 다쳐 깁스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 오랜 시간은 못하고 점심시간에 통일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11시부터 1시까지 2시간씩 하기로 했다.

 

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통일부 앞 정문 앞에 피켓을 들고 섰다. 난생 처음해보는 일이라 자못 어색하고 이상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지만 가족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에 힘을 얻어 용기를 가지고 섰다.

 

잠시 후에 통일뉴스 기자가 나에게 오더니 인터뷰를 요청했다.

 


통일뉴스 : 오늘 1인시위에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5년입니다. 5년 동안 다른 것 바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가지고 누리고 있는 초보적인 인권, 내 집에 가고 싶은 것, 사랑하는 남편과 딸과 함께 살고 싶은 것, 그것 밖에 바라는 게 없습니다. 남의 것 빼앗고 남의 것 가지자는 것 아니예요.

 

통일부에서는 절대로 나를 보낼 수 없다고 입장을 발표하고 있고, 적십자에서는 전쟁 때 산생된 이산가족이나 책임지지 나 같은 것은 관심이 없다고 해요. 이 나라 정부를 지금까지 믿고 언젠가는 보내주겠지 기대하고 5년 세월을 정말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지만, 지금에 와서 내가 정말 믿을 수 없는 걸 믿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은 나의 인권을 이 나라 정부가 지켜주고 찾아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찾고 지켜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인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통일뉴스: 북측 가족들도 북측언론을 통해서 돌아오길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기회에 북측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아버지, 어머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정말 많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제가 가는 날까지 꼭 건강하셔서, 살아계셔서 저를 맞아주시기 바라고요,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딸, 엄마가 갈 때까지 제발 건강하길 바랄게.

 


통일뉴스: 최근 들어 남북관계가 더 얼어붙은 상황입니다. 이전 비전향장기수 송환 경험을 보더라도 남북관계가 풀렸을 때 송환 가능성이 더 높던데, 지금 상황에 대해 한마디 해 주세요.

 

-참 안타깝죠. 그전에는 나 하나만의 아픔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 오랫동안 가족과 생이별하고 고통 속에 생활해 보니까 나 하나만이 겪는 고통이 아니고 나 하나만의 슬픔이 아니라는 것, 이 한반도의 모든 국민이 아파하고 힘들어 하고 모두가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처음에는 나를 가족과 생이별시킨 이 정부가 미웠고 증오스럽고 정말 욕이 나갔지만 지금은 그런 미움 같은 것은 다 가슴에 묻었어요. 그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분단이 죄이죠. 그 사람들도 아마 집에 가면 자기 처자나 부모님 볼 때마다 ‘우리가 저 여자 보내야 하는데 보내지 못하는 것 좀 안타깝다’ 이런 생각을 한번씩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저 인도주의적으로 보내주기만을 기다렸지만 남북관계가 더 긴장되고 보니 내가 집으로 가는 길이 좀 더 늦어지지 않을까 겁을 먹게 되고 두렵기도 하죠.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이럴 때, 이렇게 남북 간에 실오리같은 명줄인 평화의 개성공단까지 끊긴 이 상황에서 인도주의적으로 나를 북으로 보내주면 남북이 좀 더 한발짝 가까이 갈 수 있고 서로 평화와 화해로 가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통일뉴스: 오늘 1인시위에 성원하는 이들이 함께 나온 것 같은데요?.

 

-남녘에서의 5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런 순간이었지만 지금 보면 혈육 한 점 없는 낯 설은 타향에서 내가 눈물 흘릴 때 내 눈물 닦아주고, 아플 때 내 상처 어루만져주고 내가 힘들고 지칠 때면 내 곁에 있어준, 내 손 잡아주신 분들이 바로 소중한 남녁의 동포들이었죠.

 

특히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에서 처음에 내 기사가 나갔을 때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냥 사상과 체제 그런 것 떠나서 인도주의적으로 ‘이건 종교인들인 우리가 맡아서 고향으로 보내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처음부터 시작했고, 오늘도 1인시위인데 불편한 몸이니까 걱정도 되고 해서 가지 못하고 옆에서 계속 기다리는 것 같아요.

 

이분들 정말 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평생 내가 잊지 못할 따뜻한 분들입니다.(이상)

 

▲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최재봉 목사가 1인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 자주시보


1인시위를 하는 동안 누가 연락하고 순번을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매일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30분씩 돌아가며 나와 함께 해주셨다.

 

점심식사시간에 통일부정착지원과장을 여러 번 만났지만 그들의 모습은 굳어있었고 쓴 외 보듯 하며 지나가군 하였다.

 

10여일이 지나도록 1인 시위를 계속 해왔지만 통일부는 말 한마디 붙이는 사람도 없고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나는 결심하였다. “인권은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쟁취에 있다. 나의 인권은 그 누가 찾아줄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서 지켜야겠다. 더는 기다릴 수도 참을 수도 없다. 이 나라 정부가 끝끝내 나를 가족에게 보내주지 않는다면 내가 그 길을 찾아서 열어야겠다. 제3국의 대사관으로 들어가자. 망명을 신청해서라도 나의 가족 곁으로 기어이 돌아가자.”

 

1인 시위가 끝나면 대사관들을 다니며 통과할 수 있는지 주위환경과 경비상태를 확인해보았다 여러 대사관들을 둘러보았는데 경계가 얼마나 심한지 감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고심 끝에 베트남대사관으로 확정지을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 ***주석님과 호지명선생님의 친분관계와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이 나의 마음을 잡았다.

 

하루는 1인 시위를 마치고 기독교장로회 원로이신 문대걸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은 이미 안면이 있는 분이시어서 무척 반가워하셨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아이구, 련희씨가 어떻게, 정말 반갑습니다.”

 

“목사님. 중요하게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련희씨의 부탁인데 제가 도울 수만 있다면 도와 드려야죠”

 

“저 집에 가려고 합니다.”

 

‘예. 그거야 알죠, 련희씨가 가족에게 가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거야“

 

“목사님, 저 다른 나라 대사관으로 들어가 망명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네? 대사관에요? 그게 가능한가요?”

 

“저 목사님 손잡고 가고 싶어요. 목사님이 저의 손을 잡아주시면, 목사님과 함께라면 저 대사관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김련희씨의 부탁으로 듣지 않았어요. 내가 신봉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련희씨, 제가 손잡아 드릴게요.”

 

나는 눈물이 왈칵 나왔다. 이게 어떤 길인지 목사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

 

년세도 많으시고 집에는 사모님도 계시는데 이미 목사님은 감옥행을 각오하시고 저의 손을 잡아주신 것이다.

 

1인 시위가 15일째인 3월 7일 나는 드디어 베트남대사관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1시에 1인 시위를 마치고 함께 해주신 분들과 그 주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차를 타고 경북궁을 지나 베트남대사관으로 향했다.

 

차안에 함께 타고 있던 기자는 말했다.

 

“련희씨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저는 남쪽에서 떠나는 날은 정말 기쁠 줄 알았어요,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정작 오늘 여기 남녘땅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파요. 그동안 저의 곁에서 함께 해주신 고마운 분들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다시는 그분들을 만나볼수 없을 텐데, 그 분들 보고 싶어서 또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할지 저 많이 아풀 것 같아요,”

 

차창 밖을 내다보며 다시는 볼 수 없고 밟을 수 없을 거리를 내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대사관 앞에서 문대걸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은 사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하시고 편지를 써놓으시고 집을 나셨다고 하신다.
대사관 앞에는 그동안 힘든 나날을 함께 해오면서 언제나 나를 친동생처럼 위해주고 사랑해 주신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목사님들도 와 게셨다.

 

목사님들은 차례로 나를 꼭 안아주시고 놓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목사님들은 내 앞이여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셨지만 끝내 눈시울을 적시고야 말았다.
나는 대사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목자단에 남녘동포들에게 전하는 손 편지를 남겼다.

 


남녘 동포형제 여러분께 드립니다.

 

저는 평양에서 태어나 사랑하는 남편, 딸자식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북녘의 평범한 한 아낙네였습니다. 그러던 중 2011년 6월 중국의 친척 방문을 위한 해외여행을 갔다가 탈북 브로커에 속아 본의 아니게 여기 남녘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입국한 첫 순간부터 국정원에서 저의 가족이 기다리는 나의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 것을 단식도 하면서 강경하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국민의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국정원을 나설 수 없다고 위협하여 저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국정원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5년 간의 일은 아마 일반적인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가 경험한 일은 이해할 수도, 상식적이지도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더 가슴 아픈 일은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며, ‘자유, 민주’를 국가이념으로 한다는 나라에서 인간의 초보적인 인권마저도 짓밟아 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북과 남은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픔은 이미 나이 드신 지난 세대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라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아픔입니다.

 

자식이 아플 때 부모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저 역시 아픈 자식이며 자식을 키우는 어미였습니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 왔습니다. 국가의 이념이 어떻든지, 사상이 어떻든지 가족은 가족이요, 자식은 그저 품안의 자식일 뿐입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어느 공무원이 자신에게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주고 다른 나라가서 살라면 살 것이라고 하였던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천만금을 준다 해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저의 가족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 정부가 아무리 저를 압박하고 탄압해 온다 해도 한시라도 헤어져 살수 없는 것이 가족입니다.

 

저는 어머니 산고의 고통 속에서 생명을 가지게 되었고, 아버지 사랑 속에서 자라왔습니다. 저 역시 산고의 고통 속에서 내 자식을 낳았고, 내 남편이 그 자식을 애지중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족을 천만금으로 바꿀 수 있다니요. 결코 나는 내 가족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나라가 어떤 사상과 체제가 있든, 국가가 부모, 자식 간의 천륜을 끊는 일은 천추에도 하지 말아야 하며 이것은 반인륜적, 반인권적 행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미 중국으로 가기 전부터 앓아왔던 간경화로 인한 투병 속에서 건강은 날로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5년 전에 생이별한 딸자식을 그리는 이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오직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찾은 결론은 그 누가 인권을 찾아주고 지켜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권은 내가 찾아야 하며 내가 지켜야겠다는 것입니다.

 

가족과의 사랑도 누군가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없이 베푸는 것이듯이, 인권은 시혜적 차원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쟁취 속에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 허락하며, 베풀어 주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나의 집으로 내가 직접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걸음은 사상과 체제, 분단의 장벽을 누군가 허물어 주는 것이 아니듯이 내가 그 장벽을 내 발로 넘어 걸어가려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족과의 이별이었던 남녘에서의 5년간은 가장 고통스럽고 아픈 시간들이었지만 죽을 때 까지 잊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제가 혈육한 점 없는 이 낮선 땅에서 혼자 눈물 흘릴 때 저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너무 힘들어 쓰러지려 하면 친 부모, 언니가 되어 저의 손을 잡아주신 고마운 나의 형제들, 병원에 입원하여 외로이 있을 때면 가족이 되어 면회를 와주시고 입맛이 없다면 맛있는 음식으로 나를 달래주시던 그 따뜻한 사랑을 어찌 제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소중한 분들의 그 따뜻한 사랑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뜨거운 동포애 속에서 그 사랑의 결실을 맺어보려 합니다.

 

저는 이제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조국을 경험하고 갑니다. 사상과 체제, 분단의 장벽으로 갈라진 조국이 아니라, 저에게 베풀어 주던 잊지 못할 그 뜨거운 동포애로 넘어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조국을 경험하고 갑니다.

 

이제는 사상과 체제, 분단의 장벽이 죄를 만들고, 사상과 체제, 분단의 장벽이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건널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평범한 사랑하는 남편, 딸자식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북녘의 평범한 한 아낙네조차 넘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의 결실이 평화통일로 맺혀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통일조국에서 남녘동포 형제들과 다시 만날 감격적인 그날을 간절히 그리며

김련희 올립니다.

 


드디여 나는 문대걸목사님의 손을 꼭 잡고 함께 대사관을 통과하여 베트남대사관 1등서기관을 만나게 되었다.

 

서기관은 우리를 커다란 방으로 안내하였다.

 

우리는 미리 준비했던 “인권보호신청서”를 전달하였다.

 

서기관은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말을 능숙하게 잘하기에 의사소통에는 불편이 없었다. 서기관은 왜 망명하려고 하는가, 어떤 정치적 탄압을 받았는가, 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시더니 좀 의논을 해야 한다며 밖에 나갔다가 한참 후에야 들어왔다.

 

서기관은 북과 남, 베트남과의 관계문제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기 매우 힘든 상황이라며 다시 연락을 할 때까지 밖에 나가 있으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문대걸 목사님이 간절하게 이야기하셨다.

 

“이분은 여기 대사관에서 나가는 길로 감옥으로 끌려갑니다. 벌써 밖에는 경찰들이 와 있을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나갈 수 없으니 꼭 좀 이분의 신변을 지켜주십시오”

 

그러자 서기관은 본국에 연락하고 답을 받으려면 2~3일 걸리는데 그 동안 만이라도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정말 황당하였다. 이게 지금 신변보호를 신청한 망명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밖에 들락날락 할 수 있다면 왜 망명을 신청하려 그 위험한 남의 나라 대사관에까지 뛰어들었겠는가.

 

나는 서기관에게 애타게 간청했다.

 

“2~3일 기다리라면 여기 대사관 구석이나 창고에서라도 기다리게 해주세요. 저 여기서 나가면 그길로 잡혀갑니다. 그러면 대사관에서 승인을 한다고 해도 제가 다시는 여기를 올수 없습니다. 죽은 둣이 가만히 있을 테니 여기에 있게 해주세요”

 

서기관은 다른 직원과 뭐라고 이야기 하더니 함께 나가 버렸다. 우리는 혹시 좋은 소식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한국경찰 여럿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지금 상황에 너무도 놀라 한참을 쳐다보았다.

 

서울 종로경찰서 외사계장과 보안계장은 우리를 보자 대사관측에서 경찰에 퇴거를 요구했다며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앞이 캄캄하였다. 얼마나 고심하고 힘들게 들어온 길인데 어떻게 그냥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아니요, 저는 여기서 단 한발작도 나가지 않을 겁니다. 지금 딸이 손꼽아 가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들도 자식이 있잖아요, 어떻게 저보고 자식을 포기하고 나가라고 하십니까, 안됩니다, 절대로 나갈 수 없어요”

 

▲ 북한이탈주민 김련희씨가 2016년 3월 7일 오후 서울 주재 베트남대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다가 대사관 요청을 받고 출동한 경찰의 인도 아래 대사관을 다시 나온 뒤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 한겨레신문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하지만 우리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끌려나오고 말았다.

 

방에서 끌려 나오니 밖에 1등서기관과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서기관에게 말했다.

 

▲ 베트남대사관 앞마당에서 대사관 관계자(오른쪽)에게 자신의 퇴거를 결정한 것에 항의하고 있는 김련희씨     © 한겨레신문 강재훈 선임기자

 

“부끄럽지 않으세요? 한 나라 외교관에 어떻게 망명을 신청한 사람을 끌어내기 위해 자기 대사관안으로 한국경찰을 불러들입니까”

 

대사관 철문을 나서니 뉴욕타임즈, CNN, 을 비롯한 내외 기자들이 앞을 막고 상황을 물어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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