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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 너는 누구냐] - 1&2 (김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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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247회 작성일 17-02-25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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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성조기에는 ‘호전성’이 도사리고 있다
[미국아, 너는 누구냐] - 1

한국인들의 집회 광장에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등장하는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참 개돼지 같은 백성들’이라는 감정이 즉흥적으로 치밀지만, 결코 그들만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들은 불쌍한 존재들이다.

오늘날 언론 중에서 조중동만 친미인 것은 아니다. 한겨레의 친미는 이미 조중동의 수준과 비슷해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거리에 나오는 수구기층민들이 성조기를 둘러맸다고 해서 그들을 ‘무개념’이고 ‘비자주’라고 비웃고 말기에는 왠지 허탈하다.

문제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오 마이 미국’을 가르친 것은 지식인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윤치호, 서재필, 박헌영, 이승만 등은 정치인이자 지식인들이었다. 오늘의 전원책, 유시민, 진중권, 조국 등 한국 사회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들 역시 맹목적인 친미주의자에 해당한다. 유력대선후보라는 문재인과 안희정과 안철수의 친미는 또 어떠한가?

지식인, 정치인들의 친미는 1차적으로 그들의 보신주의에 기인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미국에 대해 극히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또한 차갑게 말해서 할배들의 친미만 무개념인 것은 아니다. 나는 촛불집회에 때 없이 등장하는 애국가와 태극기도 무개념이라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게다가 반미라고 해서 언제나 정당한 것도 아니다. 어째서 반미인지 근거를 댈 수 없는 반미는 성조기 못지않게 위험할 수도 있다. 미극은 어떤 나라인지를 사실적으로 아는 일이 긴요하고 화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다음 달 미국 관련 강연도 예정되어 있는 터라서 겸사겸사 미국을 알리는 글을 연재하기로 한다. 이 연재 글은 약 15회 정도가 될 것 같다.

광장의 성조기가 문제인 것은 무개념, 비자주인 데에도 있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의 힘’을 고대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서 미국의 힘이란 기실 ‘미국의 폭력’이고 그것은 전쟁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요컨대 광장의 성조기는 곧 ‘호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부활과 희망을 준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은 오로지 살육과 절망만을 낳았을 따름이다. 우리 민족은 현대전 사상 가장 처참했다고 평가되는 '6.25 전쟁'을 체험했다. 그럼에도 가상한 한국인들은 그 처참했던 과거를 딛고 번영과 평화를 일구어내는 듯했다.

2000년 꿈과 같이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민족의 지혜와 평화의식을 스스로 확인하는 동시에 외방에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이후 한 차례 더 남북정상회담을 이루어내는 사이 한국의 경제력은 호전되었다. 이로써 부활과 희망을 주는 것은 평화이지 결코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걸핏하면 ‘제재론’과 ‘응징론’을 부르짖는다. 한국의 조중동과 종편들은 미국의 선제타격론을 반기며 보도한다. 제재론이란 동족대결의 문을 여는 것이고 응징론과 선제타격론이란 명백히 전쟁을 시작하자는 주장이다. 미국이 나서 동족을 제재, 공격하는 데 동족과 한 편이 되어 싸우지는 못할망정 왜 우리가 외국군대에 봉사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승만 정권 때 국방장관이던 신성모는 남북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큰소리쳤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들이 민족을 불행과 도탄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허세와 폭력으로 점철된 언어뿐이다.

1950년의 6.25전쟁은 전시작전권을 쥐고 참전한 미국과 중국의 의도대로 전개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직선의 38선이 사선의 휴전선으로 대체되었을 뿐, 그 통에 민간인 100만 명을 포함해 최소로 잡아 200만 명이 사망·실종됐고 1천 만 이산가족이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동서양 없이 언제나 전쟁을 선동하는 것은 언론이다. 1840년 아편전쟁 직전 영국의 <더 타임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직전 <뉴욕월드>와 <뉴욕저널>, 그리고 태평양 전쟁 직전 <아사히> 등의 일본 신문은 연일 '불의에의 응징'을 내세우며 국가의 자존심과 국민의 애국심을 들먹였다. 결과 나라 전체가 순식간에 전쟁의 광기에 휩싸였다.

지금의 우리도 다르지 않은 형국이다. 조중동 수구 언론은 평시에도 걸핏 하면 북한 때리기와 종북 모략질에 여념이 없다가, 북의 위성이나 미사일 발사가 있으면 때를 만났다는 듯이 제재론과 응징론을 제기한다. 심지어 최근 실체가 모호한 ‘김철급사사건’에도 전혀 관련이 없는 사드와 테러지원국 지정 등의 응징론을 불러다가 쓰고 있다.

약소국에서 벌이는 강대국들의 전쟁은 언제나 약소국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들끼리의 나눠먹기식 야합으로 일단락되었다는 것을 근·현대의 전쟁사는 뚜렷이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잔인한 기억을 결코 현실화해서는 안 된다. 할배들의 성조기에는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 있는 모골송연한 호전성이 도사리고 있다.



“땅보다 돈이 좋아”, 미 제국주의의 출발과 전개
[미국아, 너는 누구냐] - 2

19세기 말에 들어 아시아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와 함께 조선에 출현했다. 미군은 두 차례 탐문 항행을 실시하면서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노리고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른바 신미양요라는 사건이었다.

미군은 조선에 해상 탐측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후,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에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당시 강력한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퇴각을 요구하였다.

미군은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무력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867년 미국은 태평양 미드웨이 군도를 획득했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에이커 당 2센트의 염가로 매입했다. 또한 미국은 1875년 하와이에서 타국의 권리 행사를 배타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하와이를 미국의 도서로 편입시켰다.

이어 1878년에는 태평양의 무역 중계 요지라 할 수 있는 사모아 군도에 해군기지를 둘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미국이 우리 조선과 정식으로 만난 것은 1882년 중국의 알선으로 맺어진 조미우호통상조약에서였다.

미국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 진출보다는 늦은 편이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의 기독교 지식인들은 앞장서서 미국의 팽창주의를 부추겼다. 조시아 스트롱 목사는 “앵글로 색슨의 우월한 문명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로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학자 존 피스크도 “앵글로 색슨의 언어, 정치, 종교가 세계에 퍼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가들은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해군력의 강화였다. 특히 알프레드 머헨이 해군대학에서 행한 강연 <제해권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898년 쿠바 문제로 일어난 미·스페인 전쟁은 미국이 제국주의로 치닫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뉴욕 허스트 계 신문 <저널> 지와 <월드> 지 등은 노골적으로 전쟁을 선동했다. 그들은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는 쿠바인의 실상을 과장해서 보도했다.

미국의 대통령 매킨리는 쿠바 문제에 신중히 대처하려고 했지만 허스트 계 신문들은 ‘주미 스페인 대사가 미국 대통령을 모욕했다’ 등의 자극성 기사로 여론을 몰아갔다. 그러던 차에 아바나 항에 파견된 미 선박 메인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로 장병 266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의 신문들은 ‘리멤버 더 메인’이라는 활자를 연일 크게 박아 보도하면서 스페인에 대한 선전포고를 부추겼다. 여론에 밀린 매킨리 정부는 스페인에 쿠바의 독립을 요구했는데 뜻밖에도 스페인은 이에 응했다.

전쟁을 해 봤자 미국은 얻을 것이 많은데 반해 스페인은 잃을 것만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전혀 보도도 되지 않은 채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전쟁 개시와 더불어 미국 동양함대 사령관 존 듀이는 필리핀의 스페인함대를 기습했다. 사전 극비 명령이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전선을 확대하여 쿠바 인근의 푸에르토리코와 태평양의 괌을 침공했고 여력을 몰아 필리핀까지 모두 장악해 버렸다.

스페인의 제의로 파리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쿠바의 독립이 승인되었고, 미국은 전쟁 배상 조로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양도받았으며 7,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을 2,000만 달러의 뇌물을 주고 차지했다.

참고로 미국이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한 가격은 720만 달러였다. 필리핀은 한반도 면적의 1.4배이고 알래스카는 필리핀 면적의 5배나 되니까 알래스카 땅값이 딘연 싸게 먹힌 셈이다.

<뉴욕 트리뷴> 지의 기자 출신인 미 국무장관 존 헤이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스플랜디드 리틀 워’, 즉 ‘빛나는 작은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이것은 앞으로 더 큰 전쟁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필리핀을 점유했을 당시 미국의 대 중국 무역량은 2%에 불과했다. 무역량 확대를 노린 미국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공략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다른 열강들에게 ‘오픈 도어 폴리시’, 즉 문호개방을 요구했다. 이것은 미국에게도 대등한 무역 조건을 달라는 것이었다.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은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들이 모두 동의한다면 우리도 동의하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이것은 제국주의 열강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인지를 알려 주는 사건이었다. 또한 약자에게는 무자비한 그들이 강자에게는 얼마나 타협적인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중국의 영토가 보전된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땅보다 재화를 원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중국 시장이 어느 한 나라에 넘어가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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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짐신사님의 댓글

봇짐신사 작성일

김갑수씨가 아주 좋은 계몽운동을 시작하고 계시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어느정도 알아야 사드를 배치할 것인지의
판단을 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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