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을 따르는 길에 통일이 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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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을 따르는 길에 통일이 있다》(1)
민족우에 계급이 있을수 없고 애국우에 주의주장이 있을수 없다는것이 위대한 수령님들의 민족관, 민족대단결철학이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민족의 근본리익을 중시하고 북남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와도 기꺼이 손잡고 나아갈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애국애족의 마음을 안고 헌신한 사람이라면 주의주장과 리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애국렬사로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그런 사람들가운데는 한때 조국을 버리고 반역의 길에 들어섰던 재미동포 홍동근선생도 있었다.
젊은 시절 홍동근선생은 출세와 성공의 기회, 행운을 바라며 고향을 떠나 남조선으로 가보았지만 생활은 그에게 위안을 줄수 없었다.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로스안젤스에서 교회를 창립하고 목사가 되여 자기처럼 외로운 사람들, 고향을 버린 사람들, 흩어진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위안해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지는 정신적공허감과 고독감, 심중의 압박감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그가 고향방문을 결심하게 된것은 주체70(1981)년이였다.
사실 고향방문신청을 하면서도 지난날 조국앞에 지은 죄때문에 우려가 컸지만 조국은 그를 너그러이 품어주었다.
그해 9월 꿈결에도 그립던 고향을 방문한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을 만나 뜻깊은 상봉을 하게 되였다.
대륙과 대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가 수십년이 지나서야 다시 찾아온 그에게 어머니조국은 지금껏 꿈속에서나 그려보던 귀중한것을 다 안겨주었다.
어머니는 고운 자식, 미운 자식 가리지 않는다는 말의 참뜻을 그는 조국방문의 나날 페부로 느꼈다.
후날 그는 조국에서 받은 충격을 자기가 집필한 도서에 이렇게 피력하였다.
《젊어서 내가 저주하고 떠나온 땅인데 지금 돌아와 어머님과 가족을 만나고 고향나라의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나는 이 나라가 재더미에서 일어날 때 한삽의 흙조차 뜬 일이 없다.…》
하기에 그는 어디간들 조국땅에 뿌리를 박고 방황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동포들에게 조국방문에 대한 소감을 들려주고 통일을 위해 나설것을 열렬히 호소하였으며 고심분투하여 《미완의 귀향일기》(상, 하)라는 표제로 조국방문기를 썼다.
또한 자신이 직접 창립한 통일신학동지회, 북아메리카주협회사업도 철저히 조국의 통일성업에 이바지하는 립장에서 해나갔다.
어머니조국은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활동에 나선 홍동근선생을 공화국창건 40돐행사에 초청해주었으며 그로부터 한해가 지난 주체78(1989)년에는 평양에서 성대히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또다시 불러주었다.
주체78(1989)년 7월 8일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는 영광을 지니게 된 홍동근선생은 너무나도 소박하고 허물없이 대해주시는 수령님의 인자하신 인품, 평민적인 모습에 완전히 매혹되였다.
그날 조국통일에 대하여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는 그가 한생토록 간직하고 구현해야 할 고귀한 지침이였으며 배신으로 멍들고 불신으로 얼어붙었던 그의 가슴을 순간에 녹여내는 생명수와도 같은것이였다.
홍동근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접한 후부터 붓대를 더욱 억세게 틀어잡고 통일애국의 길로 동포들을 힘차게 추동하였다.
그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과 2권을 보고 크게 감동되여 저술발표한 독후감을 보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좋은 글을 써서 발표했다고,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과분한 치하를 해주시였다.
그가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권과 4권을 보고 심장으로 절절히 노래한 독후감도 위인숭배의 결정체였다.
그후에도 그는 숙명적으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창조적으로 살것이라고, 이제 어디 가나 이 땅에 든든히 뿌리를 박고 허무하게 방황하지 않으리라 굳은 결심을 품고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을 받들어 민족통일의 그날을 앞당기는 성업에 량심과 의리를 지키고 심신을 다 바치였다. (계속)
《위인을 따르는 길에 통일이 있다》(2)
조국의 통일성업에 이바지하려는 홍동근선생의 활동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더욱 빛을 뿌리게 되였다.
재미동포전국련합회 고문이였던 홍동근선생은 해외에서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위업에 이바지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이미 도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와 《백두산의 노래》를 집필하여 만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그는 어버이수령님 탄생 90돐을 맞으며 《김일성주석 덕성일화 100》을 쓰기로 결심하고 불철주야로 집필활동을 벌리였다. 그나날에 선생은 방대한 자료작업을 마치고 초고를 탈고하였으며 마지막 마무리작업을 하기 위하여 조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던 선생은 긴장한 집필활동을 하던중 오랜 병환끝에 책상을 마주한채 조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체90(2001)년 11월 어느날 재미동포 홍동근선생이 조국에 체류하던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장군님께서는 한생을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열렬한 흠모심을 간직하고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길이 빛내여주시기 위하여 뜨거운 은정을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미국에서 그의 가족이 조국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례를 치르도록 하시고 홍동근선생의 애국충정을 높이 평가하시여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여주시였다.
진정 천만마디의 말이나 수천권의 책으로도 다 전할수 없는것이 민족의 위대한 태양 김정일장군님의 대해같은 사랑이고 믿음이였다.
하기에 위대한 장군님의 한없는 은정에 접한 홍동근선생의 부인은 격정에 넘쳐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늘 말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조국땅에 묻어달라고 하였는데 그 소원을 위대한 장군님께서 풀어주시였습니다. 저의 주인은 위대한 장군님의 품에서 영생하게 되였습니다.》
이렇듯 이국에서 파란만장의 세파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 홍동근선생은 인생전환의 궤도에서 통일을 위해 심신을 바쳐 일하다가 조국의 품에서 빛나게 생을 마쳤다.
하기에 그는 오늘도 민족성원들에게 절절히 말하고있다.
《위인을 따르는 길에 통일이 있다.》
조국에 대한 불타는 애국심을 간직하고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한 량심인이 되여 정력적으로 투쟁한 공로있는 애국자 홍동근선생, 그의 삶의 흔적은 따사로운 태양의 빛발아래 오늘도 겨레의 마음속에 별처럼 빛나게 새겨져있다.
어찌 홍동근선생 한사람뿐이랴.
해외동포들에게 한없는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시고 애국애족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신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은덕을 소중히 전하며 한덕수선생, 손원태선생 등 조국을 위하여 헌신하고 민족의 량심을 지켜 분투한 사람들의 모습들도 애국렬사릉에 거연히 빛나고있다.
오늘은 사상과 정견, 신앙이 서로 다르고 인생행로도 각이한 수많은 동포들이 또 한분의 절세위인이신 경애하는김정은원수님의 품에 안기여 애국애족의 삶을 빛내이고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설사 지난날 반통일의 길을 걸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에게 민족적량심이 남아있다면 주저없이 손을 잡고 마음을 합쳐 통일애국의 길을 함께 가야 한다는것이 우리 당의 민족대단결리념의 참뜻이라고 말씀하시였다.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민족대단결리념을 심장마다에 새기고 통일애국의 길에 적극 떨쳐나서 뚜렷한 애국의 자욱을 남기며 참다운 삶을 빛내여야 할것이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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