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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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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486회 작성일 17-04-0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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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사는 당대에 쌓아놓은 공적으로 하여 시대의 각광을 받은 녀성사회활동가나 녀걸들을 수많이 기록하고있다거기에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피어린 투쟁의 길에서 배출된 수많은 녀성영웅들과 녀성혁명가들의 가지가지의 위훈들도 새겨져있다.

하지만 동서고금의 력사의 그 어느 갈피를 들추어보아도 위대한 김정숙녀사와 같이 선군의 어머니로 받들리우시는 그런 녀장군녀성영웅은 일찌기 없었다.

20세기가 낳은 항일의 전설적녀장군 김정숙녀사!

그이의 길지 않은 한생은 혁명의 군복차림으로 백두산총대와 더불어 민족의 태양김일성장군님께서 개척하여오신 우리 민족의 선군혁명력사에 별처럼 빛나는 자욱을 수놓아오신 영원불멸할 한생이다.

력사의 닻을 올린 선군혁명의 폭풍우속에서 성장하시여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신 김정숙녀사께서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장장 수십만리 항일의 혈로를 헤쳐오시면서 언제 어디서나 장군님의 선군사상과 령도를 충직하게 받드는 친위전사의 영예로운 직분을 훌륭히 수행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항일대전의 피바다불바다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운명인 혁명의 수령을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사수하는 숭고한 수령결사옹위정신과 그 빛나는 모범을 창조하시였으며 총포성 울부짖는 가렬처절한 격전장들과 지하전선들마다에서 백발백중의 사격술과 능란한 지략으로 원쑤 일제를 격멸소탕하고 광범한 반일대중을 의식화조직화하는데서 특출한 위훈을 세우시였다또한 해방후 정규무력건설의 나날에 위대한 수령님의 군건설위업을 제일선에서 받드시여 불멸의 업적을 쌓으시였다.

항일의 녀장군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선군혁명의 불길속에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백두광명성으로 받들어올리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선군혁명위업계승의 시원을 열어놓으시고 조국과 민족에게 영원불멸할 장군복태양복을 안겨주시였다.

정녕 김정숙녀장군의 한생은 혁명의 군복을 입고 총대로 불바다 혈전만리를 헤쳐온 백두의 녀장군위대한 군인의 력사이며 선군조선의 미래에 대한 숭고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니시고 혁명의 대를 꿋꿋이 이어놓으신 절세의 위인의 영웅서사시이다.

김정숙녀장군의 한생은 비록 길지 않으나 그것은 선군혁명의 개척자이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불같은 충정과 헌신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일관된 위대한 혁명가의 빛나는 생애였다.

위대한 혁명가만고의 영웅전설적녀장군으로서의 김정숙녀사의 선군혁명업적과 위대한 혁명생애는 한생을  오로지 선군혁명위업을 승리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선군의 어버이 김일성장군님과 오늘 류례없이 복잡다단한 세계적인 대정치풍파속에서도 선군혁명위업을 빛나게 계승완성해나가시는 위대한 선군태양 김정일장군님의 선군혁명력사선군령도업적과 나란히 현대조선의 선군혁명실록에 빛을 더해주며 오늘도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의 승리적전진을 떠밀어주는 위대한 선군의 어머니의 고귀한 업적이고 생애이다.

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그것은 선군혁명위업수행에서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녀사가 차지하는 특출한 위치에 대한 력사의 정의이고 영원불멸할 업적에 대한 시대의 평가이다시대와 력사가 드리는 이 호칭에 혁명의 총대와 더불어 선군의 길에 바치신 어머님의 위대한 헌신과 고귀한 사랑이루어놓으신 불멸의 혁명업적에 대한 조국과 민족인류의 최상최대의 찬양이 담겨져있다.

오늘 우리 민족과 더불어 세상사람들속에서는 항일의 전설적녀장군 김정숙어머님에 대한 열화와 같은 칭송과 흠모의 목소리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있다.

정녕 선군의 길에서 김정숙녀장군께서 쌓아올리신 불멸의 업적은 조종의 산 백두산과 같이 위대하고 그에 시원을 두고있는 압록강두만강의 푸른 물결과 같이 영원하다.

본사편집부는 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의 선군혁명력사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저 하는 해내외동포들과 세계 진보적인민들의 지향과 요구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백두산 녀장군의 선군전기도서 《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을 출판하여 내놓는다.

 

주체96(2007) 10

편 집 부



   1   

 

선군의 첫 기슭에서

 

 1. 혁명만이 살길이라는 각오를 지니시고

  

주체6. 12. 24 - 회령의 고향집

 

회령은 우리 나라 북변을 굽이굽이 감돌아흐르는 두만강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백두대산줄기에서 뻗어내린 험준한 산발들이 점차 낮아져오다가 봉긋한 덕을 이루고 회령천과 팔을천이 의좋게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들어앉은 회령은 산이 수려하고 물이 더없이 맑아 예로부터 함북명승으로 일러왔다특히 오산덕은 봄이면 연분홍진달래와 하얀 살구꽃이 만발하여 회령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풍치의 수려함을 뛰여넘어 회령은 예로부터 북관6진으로 유명하다옛사람들은 마천령마루에 올라서서 그 북쪽에 있는 지대를 바라보며 북관땅이라고 불러왔는데 바로 그 북관6진중의 하나가 회령인것이다.

15세기에 와서 두만강과 압록강류역의 요충지마다에 외적의 침입을 막는 긴 행성을 쌓고 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이 세워졌다압록강중류지대에 려연자성무창우예 등 4군의 설치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두만강 중하류류역지대인 경원부회령부종성군경흥군 등 4진이 설치되게 되였고 이것이 그후 온성과 부령까지 합쳐져 6진으로 불리워졌다압록강과 두만강의 남서쪽기슭에 설치된 46진으로 진출한 인민들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싸움을 줄기차게 벌림으로써 국토방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지령이 인걸이라고 이런 아름답기 그지없고 국토방위의 최전방지역인 회령의 애국적인 독립운동자의 가문에서 주체6(1917) 12 24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녀사께서 탄생하시였다.

시일야방성대곡의 통한이 반일함성으로 바뀌고 삼천리강토를 휘감은 압제의 쇠사슬을 끊어버리려는 조선인민의 항거와 반일투쟁의 불길이 거세차게 타오르던 격동의 시기였다오래전부터 조선에 침략의 마수를 뻗쳐온 일제는 1905년에 강도적인 방법으로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강점 첫날부터 총검에 의한 무단통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인민을 닥치는대로 검거투옥학살하고 가혹하게 착취하였다극도에 달한 일제의 강도적인 식민지적폭압과 략탈은 조선인민의 민족적분노를 격발시켰고 반일항전을 고조시켰다조선인민의 반일독립운동은 반일정치운동과 애국문화운동반일의병투쟁과 독립군운동 등 여러가지 형태로 광범히 진행되였다전국도처에서 일제의 침략과 략탈을 반대하는 로동자농민청년학생들의 투쟁이 련이어 벌어졌으며 특히 우리 나라에서 반일독립운동의 주요구성부분을 이루고있었던 의병투쟁이 1910년대에 독립군운동으로 전환되여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지방에서는 독립군운동을 위한 군사간부양성사업적을 습격하여 무기를 마련하고 무장부대들을 편성하고 훈련하는 사업이 활발히 벌어졌다더우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1917 3월 조직규모가 제일 큰 반일지하혁명조직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시고 정력적인 혁명활동을 벌리심에 따라 조선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은 더 높은 단계에서 거세차게 벌어졌다.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항거하는 조선인민의 민족적분노는 바야흐로 폭발적인 3.1인민봉기에로 육박해가고있었다.

세계적으로 볼 때 로씨야에서 사회주의10월혁명이 승리하여 처음으로 로동자농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력사적사변이 일어났으며 이 10월의 열풍은 아시아나라들에도 세차게 불어왔다.

바로 이러한 격동적인 시기에 회령 오산덕기슭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초가집에서 한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따스한 온기이련듯 힘찬 고고성이 울리였다위대한 선군의 해발이 되시여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선군혁명위업을 누구보다도 앞장서 받들어나가실 김정숙녀사께서 수난겪는 조국의 딸로 탄생하신것이다.

김정숙녀사의 일가는 조선독립을 위한 무장항전의 높은 뜻을 지니고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의 앞장에 선 애국가정이였다.

김정숙녀사의 일가분들은 이곳저곳에 자리를 옮겨사시다가 할아버지대인 1895년경에 이곳 회령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소작살이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시던 일가분들은 녀사께서 탄생하실무렵에는 빚값으로 지주놈에게 소작지를 빼앗기고 초가집마저 헐리워 더는 한집에서 모여살수도 없게 되였다그리하여 할머님과 삼촌네 식구들은 두만강을 건너 연길현 북구에 가게 되였고 녀사의 아버님네는 오산덕에 있는 남의 집 곁방을 얻어살지 않으면 안되였다.

비록 지지리도 못살고 한뙈기의 땅도변변한 집도 없는 극빈한 가정이였지만 일가분들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늘에 닿고 기개는 씩씩하였다.

할아버님은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하시였으며 일찌기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농민봉기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우시였고 농민봉기가 실패하자 고향을 떠나 회령에 오신 후 세상을 떠나시였다.

아버님 김춘산선생님은 일찍부터 두만강을 넘나들며 반일독립운동에 참가하신 애국자이시였고 어머님 오씨는 남편의 애국투쟁을 적극 도우시며 자제분들을 열렬한 애국자로견결한 혁명투사로 키우신분이였다.

오라버님 김기준선생님은 위대한 수령님의 선군혁명로선을 받들어 모든것을 다 바쳐 싸우신 열렬한 혁명가이시였다김기준선생님은 공산당원으로서능숙한 정치공작원으로서 지하혁명활동을 벌리시다가 불행하게도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장렬하게 희생되시였다아동단원이였던 김기송동생도 항일의 전장에서 생을 마친 슬기롭고 용감한 소년혁명가이시였다.

김정숙녀장군의 일가분들은 이처럼 모두가 투철한 반일항전의지를 지니시고 총대와 더불어 조선독립의 초행길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뜻이 높은 선각자열혈의 애국투사들이시였다.

이런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가정에서 김정숙녀사께서 탄생하신것은 조선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선군혁명위업을 높이 받들어나가는데서 특출한 의미를 지니는 일대 사변이였다.

유서깊은 오산덕의 백살구향기를 생의 자양분으로조국의 숨결로 하여 아름답고 억세게 성장하신 녀사께서는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손에 총을 잡으시고 위대한 수령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항일의 준엄한 전구를 앞장서 헤쳐오시였다항일혁명의 영광찬 투쟁사의 어느 페지를 펼쳐도 거기에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사상과 령도의 결사옹위결사관철의 1번수가 되시여 조국해방새 조국건설의 초행길을 개척해나가신 김정숙녀사의 거룩한 발자취가 뚜렷이 찍혀져있음을 보게 된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유년시절 망국의 설음을 안고 두만강에 피눈물을 뿌리며 사랑하는 고향땅을 떠나신 후로 다시 귀향하지 못하시였다해방후 항일혁명의 산아인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앞세우시고 온 겨레와 회령사람들의 축복을 받으시며 고향집사립문에 들어서실수 있으셨건만 위대한  수령님의 건당건군건국위업을 앞장서 받드시느라 시간을 내지 못하시였다.

하지만 회령은 김정숙녀사의 마음속에 한시도 떨어져서는 살수 없는 조국의 모습으로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의 모습으로 뜨겁게 간직되여있었으며 그이의 혁명활동과 투쟁의 출발점에 놓여있었다.

김정숙녀사께서는 후날 고향 회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하시였다.

《나는 회령을 떠난 후 한번도 고향생각을 잊은적이 없습니다장군님 모시고 산에서 투쟁할 때 기쁜 일이 생겨도슬픈 일이 생겨도 내 고향 회령을 생각하였습니다행군을 하고 전투를 할 때에는 좀 나은데 밀림속 숙영지에서 유난히 밝은 달을 바라볼 때면 고향의 나무 한그루풀 한포기조약돌 하나하나가 눈앞에 삼삼하였습니다.

녀사께서는 마음속에 고향 회령을 불같이 뜨겁게 안으시고 망국노의 수치와 아픔을 원쑤격멸의 총포성으로 바꾸시였으며 혈전만리의 고난과 시련도 《사향가》의 선률로 이겨내시며 항일의 녀장군의 기개를 떨치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김정숙녀사를 대신하여 주체80(1991) 8 27일 회령고향집을 찾으시였다.

어디서나 흔히 볼수 있는 수수한 농가의 마당에 들어서신 수령님께서는 뜨락에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시다가 토방에 올라서시여 방안을 유심히 살펴보시였다네댓㎡ 되나마나 한 작은 곁방에는 변변한 가장집물이란 하나도 없었다가난의 흔적이 너무도 짙게 서린 그 작은 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시다가 다시 뜨락에 내려서시여 어두운 안색으로 추녀낮은 고향집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오산덕에 있는 김정숙동무의 생가에 와보니 그의 일가가 곁방살이를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김정숙녀사를 고향집앞에 내세우시지 못한 회한총포성이 울부짖는 항일혁명투쟁 그리고 새 조국건설의 초행길에서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가장 힘겨운 위치를 지켜서시여 누구보다도 뜨거운 혁명열을 폭발시키시며 헌신의 자욱자욱을 수놓아오신 김정숙녀사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수령님께서는 더 말씀을 잇지 못하시고 유서깊은 생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녀성의 몸으로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항일의 결전장에 떨쳐나 혁명만이 살길이라는 력사의 진리를 온넋으로온몸으로 실천하시여 항일의 녀성영웅선군혁명의 총대녀장군으로 추앙받으시는 김정숙녀사의 위대한 혁명력사혁명업적을 만대에 길이 빛내여주시는 불멸의 화폭이였다.

동서고금의 력사에 녀성혁명가녀걸이라 일컫는 위인들이 적지 않았지만 김정숙녀사처럼 한평생 손에 무장을 틀어쥐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개척을 위한 길에 그렇듯 크나큰 삶의 흔적을 남긴 녀성영웅녀장군은 없다.

그 영원불후의 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고저 인민들은 백살구향기 넘치는 오산덕기슭에 김정숙녀사의 동상을 정중히 모시였다녀사께서는 오늘도 혈전만리의 풍상고초가 그대로 어려있는 항일군복차림의 백두산녀장군의 모습으로 거연히 서계시며 군민을 선군혁명위업수행에로 고무추동하고계신다.

 11

아버님의 유언

 

191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회령은 일제의 조선침략무력의 집결지로서 지방폭압통치기구들과 경제략탈기구들이 집중된 곳으로 변하였다북관6진중의 하나로 알려진 이 유서깊은 요새지가 일본군 라남19사단소속의 75련대본부와 비행대가 자리잡은 군사적요충지로 되였다.

일제는 1917 10월에 저들의 통치기관인 회령면사무소를 내온것을 비롯하여 군내 8개의 면에 면사무소를 설치하였고 1918 12월에는 회령군청을 앉히였으며 1919 8월에는 새로 경찰서를 개설하고 관내에 7개의 경찰관주재소들과 4개의 출장소 또는 파출소를 두었으며 인민들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그무렵 회령에는 2,000여명의 왜놈들이 1,062호의 주택을 쓰고 살았다.

이 지역의 무진장한 자연부원을 탐낸 일제는 1918 9월에 계림탄광주식회사를 설치한것을 비롯하여 봉의탄광회령탄광팔을탄광화풍탄광죽포탄광회령전기회사회령영림창출장소두림제지회사회령종묘장과 같은 수많은 경제략탈기관들을 두고 석탄과 목재 등을 제멋대로 략탈해갔다.

일제의 식민지략탈책동과 지주자본가를 비롯한 친일주구들의 착취와 억압악랄한 수탈로 하여 회령인민들은 생사기로에서 헤매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망국의 고통으로 강산이 몸부림치던 당대 사회상은 어리신 김정숙녀사의 가슴에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참을수 없는 증오심과 일떠서 싸워야 한다는 애국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이러한 녀사의 성장에세계관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것은 바로 독립운동자이신 아버님의 교양이였다.

3.1인민봉기를 전후하여 두만강연안 북부조선일대와 간도지방에는 인민들의 반일기운이 팽배해지고 각이한 명칭을 가진 독립운동단체들이 활동하고있었다.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1920년 봄 간도 룡정과 명동일대를 거쳐 회령에 나오시여 독립운동자들의 모임을 여시고 독립운동단체들의 단합과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며 광범한 민중을 조직동원하여 독립성전에 떨쳐나서도록 이끌어주시였다.

회령을 비롯한 북부조선일대와 간도지방에 독립운동의 불길이 그 어느때보다 세차게 타오르고있던 시기 김정숙녀사의 아버님이신 김춘산선생님께서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자들과 련계를 맺으시면서 나라찾는 위업에 한몸바쳐 나서시였다.

반일독립운동에 나서신 아버님께서는 한해치고 집에 오시는 때가 별반 없으시였지만 자제분들가운데서도 제일 총명하고 때이르게 철이 드시는 김정숙녀사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어리신 가슴에 애국의 넋을 심어주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시였다.

오산덕의 제일 높은 마루에는 옛 봉화터가 있었다.

오랜 세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에 신호의 불길을 올리던 곳이였다.

일제침략자들은 회령에 기여든 후 이곳에 있던 봉화터도 무참히 짓밟아버리였다예로부터 외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것으로 간주되여온 봉화터가 그대로 있는것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제놈들은 성벽처럼 쌓았던 돌들을 마구 헐어서 제놈들의 관사를 짓는데 써버리였다그리하여 옛 봉화터에는 얼마간의 돌밖에 남지 못하였다.

1921년초 집에 들리시였던 아버님께서는 김정숙녀사와 함께 봉화터에 오르시여 애국의 뜻이 깊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였다.

아버님께서는 봉화터에 놓인 바위돌을 가리키시며 이 돌은 원래부터 이 오산덕에 있은 돌이 아니라 옛날 할아버지들이 먼산에 가서 소발구로 실어온 돌이라고 일러주시였다.

어리신 김정숙녀사께서는 무엇때문에 큰 바위돌을 가져다가 여기에 쌓아놓았는가고 물으시였다.

아버님께서는 외적이 쳐들어오고 란리가 나면 다른 마을에도 알리고 서울에도 알려야 하겠는데 그때는 우편국이 없는 때여서 전보도 칠수 없고 전화도 걸수 없었다고 하시면서 여기에 큰 불을 지펴놓으면 다른 마을에서 그 불을 보고 또 불을 지펴 그다음 마을에 알리는 방법으로 온 나라에 알리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며 봉화터에 있는 바위돌들이 단순한 돌이 아니라 외적을 물리치는데서 큰 역할을 한 돌이라는것을 아시게 된 김정숙녀사께서는 이끼오른 그 바위돌 하나하나가 매우 귀중하게 생각되시였고 녀사의 마음속에는 봉화터를 마구 헐어버린 일제에 대한 가증스러운 분노가 끓어오르시였다.

아버님께서는 그후에도 녀사의 가슴속에 일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심어주시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시였다.

한번은 아버님을 따라 오산덕에 오르신 김정숙녀사께서 짐을 가득 싣고 달리는 기차를 보고 무엇을 실어가는가고 물으신적이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어리신 따님을 안아올리시며 《… 똑똑히 보아라저것은 일본놈들이 우리의 쌀과 석탄돼지를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가는것이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잠시 생각하시던 김정숙녀사께서 《왜놈들은 우리를 못살게 하는 나쁜놈들이야요.》라고 말씀하시자 아버님께서는 《네가 옳게 말했다왜놈들은 진짜 나쁜놈들이다.》라고 하시였다.

자주 오산덕에 오르시여 일제의 폭압기관들이 있는 큰 건물들을 가리키며 왜놈들을 하루빨리 몰아내야 우리 조선사람들이 마음편히 살수 있다고 깨우쳐주시는 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시며 김정숙녀사께서는 어린시절부터 《왜놈들은 우리를 못살게 구는 제일 나쁜놈들》이라는 의식을 지울수 없이 가슴속에 깊이 새기게 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봄이면 온 시가지가 백살구꽃속에 묻히군 하는 그처럼 아름다운 고향 회령에서 불과 몇년밖에 살지 못하시였다.

녀사께서 고향과 조국을 뒤에 두고 이국땅을 찾아 두만강을 건늘 때는 대여섯살의 어린 소녀였다.

김정숙녀사의 일가가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것은 조국땅에서 더는 살아갈수 없게 된 어려운 생활처지때문만이 아니였다가정을 회령에 두고서는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할수 없다고 보신 김정숙녀사의 아버님께서 가족들을 간도로 이주시킬것을 결심하시였던것이다.

아버님께서 인편을 통하여 간도로 들어오라는 기별을 보내왔을 때 어리신 김정숙녀사께서는 더없이 슬프고 마음이 괴로우시였다.

하지만 나라찾는 일에 나서신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그 한가지 생각으로 슬픔과 괴로움을 애써 참으시였다.

주체11(1922) 4월 김정숙녀사께서는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고향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시면서 두만강을 건느시였다.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느라면 별의별 설음을 다 겪기마련이다그러나 그 모든 설음가운데서도 가장 큰 설음은 나라를 잃은 설음이며 망국노가 되여 조국을 떠나는 설음이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아직은 철도 들기 전인 너무도 어리신 나이에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정든 고향어머니조국의 품을 하직하는 수난자의 집단류랑민행렬의 일원이 된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정숙녀사께서는 그처럼 아름다운 고장 회령에서 몇년밖에 살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철이 들면서부터 그의 눈에 비쳐든것은 마적들이 먼지를 뿌옇게 일구며 싸다니는 북간도의 거치른 산야였다고 서술하시였다.

두만강을 건느신 김정숙녀사의 일가분들은 북간도의  여러 고장을 옮겨다니시며 소작살이를 하시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정숙녀사의 마음속에 애국의 넋과 원쑤 왜놈을 미워하는 정신을 심어주시려는 아버님의 교양은 계속되였다.

그때 왜놈들의 고문으로 하여 운신조차 못하게 되신 아버님께서는 집으로 돌아와계시였는데 김정숙녀사께 총을 든 일제와는 반드시 총으로 맞서야 한다는데 대하여 알기 쉽게 깨우쳐주시였다.

아버님께서는 자제분들을 몸가까이 불러앉히시고 망국의 비운이 짙게 드리운 조국에 대하여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아야 할 력사적사명이 피끓는 조선의 남녀청년들에게 있다고 자주 말씀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실 때마다 아름다운 조국땅을 짓밟고 우리 인민에게 노예의 멍에를 들씌운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으로 가슴불태우시였다.

어느날 김정숙녀사께서는 조용한 기회에 아버님으로부터 의병들과 독립군들의 투쟁이야기를 들으시였다.

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나서 김정숙녀사께서는 이렇게 물으시였다.

《녀자는 총을 들고 싸우는 군대가 될수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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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아버님께서는 한동안 김정숙녀사를 정겹게 바라보시다가 나라를 사랑하고 원쑤를 미워하는 마음이 녀자라고 다르겠느냐, 녀자도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군대가 될수 있다고 하시였다.
아버님께서는 따님의 가슴에 힘있게 움터자라는 강의한 의지와 반일애국의 넋, 투쟁의 갈망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름있는 녀걸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였고 독립군안에도 남자들 못지 않게 총검을 비껴들고 일제군경놈들을 요정내는 싸움에서 이름을 날린 녀성군사가 있었다는것을 알려주시였다.
그 말씀을 들으신 김정숙녀사께서는 또다시 물으시였다.
《지금은 녀성군대가 없습니까?
밝은 세상을 가져오기 위하여 싸운다는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순간 아버님께서는 놀라운 시선으로 따님을 바라보시였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님께서는 따님의 장래를 준비시키기 위하여 이야기하신것인데 녀사께서는 그것을 현실적인 요구로 감수하시고 당면한 문제로 제기하시는것이였기때문이다.
아버님께서는 남달리 영특하시여 한 가정의 기둥으로만이 아니라 나라의 기둥감으로 내세우고싶으셨던 따님에게 자신의 한생에 대한 총화라고도 할수 있는 의병과 독립군운동의 쓰라린 패배와 피의 교훈에 대하여 숨김없이 알려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시였다.
《네가 묻는 그 사람들은 지금 거의 없다. 총을 들고 왜놈들과 싸우던 그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다 자취를 감추고말았다. 모두 무기를 감추고 초야에 흩어졌거나 이 아버지처럼 병만 얻고 집에 파묻힌 몸이 되였다.
왜 그렇게 되였겠느냐? 뜻을 품고 나서는 사람들, 2천만의 우리 겨레들을 한덩어리로 튼튼히 묶어세워 이끌어나갈 출중한 령수가 없기때문이였다.…》
아버님께서는 림종의 시각에 뜻을 이루지 못한채 이역땅에 묻히게 되였으니 분하고 원통하다고 하시면서 왜놈들을 몰아내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망국노의 치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독립혈전에 몸바쳐나서서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이 조국을 찾을데 대하여 당부하시였으며 싸움에서 이기자면 그 싸움을 옳게 이끌어갈 령수를 잘 받들어야 한다고 절절히 강조하시였다.
흐느껴우는 따님의 얼굴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다가 아버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였다.
《나는 죽더라도 조선에 묻히고싶었다. 흙이 되더라도 조선의 흙이 되고싶었다. 그런데 그 소원마저 이룰수 없을것 같구나. 너는 어데 가서나 고향을 잊지 말고 조선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조선을 위해 싸워라.》
조선을 위해 싸워라!
이 말속에는 의병과 독립군운동의 쓰라린 패배와 피의 교훈을 잊지 말고 총을 든 원쑤를 반드시 총으로 때려눕혀야 하며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기어이 찾아야 한다는 아버님의 일생의 념원과 절절한 당부가 깃들어있었다.
아버님의 서거, 그것은 김정숙녀사께 있어서 너무도 가슴아픈 상실이였다.
온 집안의 기둥이며 희망이던 아버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늦은 밤, 이른새벽을 가림이 없이 이국의 광야를 줄달음치시던 아버지, 병석에 누워서도 늘 나라찾는 싸움에 몸바쳐나서야 한다고 일깨워주시던 아버지!
그러한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다니…
김정숙녀사께서는 너무도 원통하시여 몸부림치며 우시였다.
눈물속에 아버님을 영결하시며 어리신 김정숙녀사께서는 어디 가서도 고향을 잊지 말고 조선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고 하신 아버님의 절절한 유언을 가슴깊이 새기시였다.
(사랑하는 조국과 그리운 고향을 짓밟고 아버님을 빼앗아간 원쑤 일제를 쳐부시는 싸움길에 내 기어이 나서리라!)
참으로 아버님의 유언은 나어린 김정숙녀사에게 반일애국의 뜻, 조선독립의 뜻을 깊이 심어주었으며 그것은 후날 김정숙녀사로 하여금 모진 풍상고초를 다 겪으시면서도 굴함없이 무장투쟁의 한길을 꿋꿋이 걸어나갈수 있게 한 마음의 기둥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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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빛나는 《새별》
 
아버님을 잃은 후 김정숙녀사의 일가는 주체18(1929)년 6월 연길현 부암동 하촌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부암동은 연길(국자가)에서 북쪽으로 60리가량, 팔도구에서 30리가량 떨어져있는 마을이였다.
동네사람들로부터 일가는 《회령집》으로 녀사께서는 《회령집 작은딸》로 깊은 신뢰를 받았으나 겹쳐드는 불행으로 하여 어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김정숙녀사께서 10살 되시던 해 봄에는 빚때문에 언니를 지주집머슴으로 빼앗기고 그에 항거해나선 오빠마저 불구가 되고말았는데 또 몇해후에는 김정숙녀사께서 머슴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불행을 당하였다.
1930년 어느날 마을에서는 녀인들이 낟알을 얼마간씩 모아 음식을 만들어 함께 들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되놀이를 조직하였다.
가을걷이전이여서 어느 집이나 다 식량사정이 어려웠지만 김정숙녀사의 집은 더구나 어려웠다.
어머님과 형님이 신병으로 일을 변변히 하지 못하였고 얼마전에는 할머님의 장례까지 치르다보니 되놀이에 가지고 갈 쌀이 없었다.
배짱이 센 기송동생이 낫을 들고 소작밭에 나가 잘 여문 수수 몇이삭을 잘라다가 누나의 되놀이쌀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되놀이를 한 며칠후 이것을 알게 된 지주놈이 제 아들놈까지 데리고 녀사의 집에 달려와 타작도 하지 않은 소작밭에서 누가 마음대로 수수이삭을 잘라왔는가고 발을 구르며 《도적》의 루명을 씌웠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네 집에 와서 한해 겨울 연자방아를 돌리라고 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관헌에 신고하여 집을 헐어버리고 땅을 떼며 김기송동생을 꼴머슴으로 끌어가겠다고 을러메였다.
일가는 너무도 너무도 억울하고 분하였으나 당할수가 없었다.
당장 땅을 떼우면 온 집안식구가 굶어죽게 될것이였으므로 김정숙녀사께서는 자신께서 지주집 연자방아를 돌리기로 결심하시였다. 사랑하는 어머님과 형님에게 노예의 멍에채를 메게 할수 없고 더우기 어린 동생에게 지주집머슴살이를 시킬수 없다고 생각하신것이다.
이렇게 수수 몇이삭때문에 녀사께서는 그해 10월부터 머슴살이를 강요당하게 되였다.
머슴살이는 참으로 고되고 피눈물나는것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쳐드는 한지나 다름없는 연자방아간에서 헌 토스레옷을 걸치고 연자방아를 돌리고 또 돌리시였다. 악착한 지주놈은 방안에 있다가도 연자방아소리가 멎기만 하면 달려나와 고함을 질러대군 했으며 밤낮없이 몰아대며 일을 시켰고 어느 하루 쉬우지 않았다.
그해 12월 24일, 녀사의 어머님께서는 열세번째 생일을 맞으시는 따님을 하루만이라도 집에 데려다가 푹 쉬게 해주고싶으시여 지주놈에게 청원하였는데 사람의 가죽을 썼을뿐 량심이란 단 한쪼각도 없는 리지주놈은 대번에 거절하였다.
할수없이 어머님께서는 따님의 생일날 어린 아드님과 함께 베보자기에 밥 한그릇을 싸들고 연자방아간으로 찾아가시였다. 생일날에까지 멍에채를 잡고있는 딸이 너무도 애처로와 어머님께서는 밥보자기를 풀어놓고 아드님과 함께 연자방아채를 잡으시였다.
그때 김정숙녀사께서는 어머님과 동생의 손을 잡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어머니, 그만두십시오. 무엇때문에 어머니까지 이 집 연자방아를 돌리겠습니까. 어머니와 기송이가 이 집 쌀 한말 더 찧어준다고 우리 집 처지와 내 처지가 달라지겠습니까. 그저 가슴만 더 아프지…》
애써 눈물을 참으시며 어머님과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신 녀사께서는 다시 멍에채를 잡으시였다.
녀사의 가슴속에서는 이 세상을 그대로 두고서는 가난과 치욕, 모멸에서 벗어날수 없으며 불의한 이 세상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결심이 활화산같이 타올랐다.
인민의 피땀을 짜내는 저주로운 세상과 결판내기로 싸워 가슴에 서린 원한을 기어이 풀리라는 심장의 맹세를 다지신 김정숙녀사께서는 1931년초에 치욕스러운 머슴살이에서 뛰쳐나오시였다.
고역과 학대속에서 보낸 머슴살이는 녀사로 하여금 원쑤 왜놈과 지주, 자본가놈들과는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으며 반드시 이 불공평한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투철한 혁명의식, 계급적각오를 더욱 굳게 가다듬게 하였고 분연히 혁명의 길에 나서게 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김정숙녀사의 일가가 모진 수난과 불행을 겪으시던 이무렵 간도땅은 항일의 열풍으로 서서히 달아오르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을 묶어세우시며 기존세력들의 투쟁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조선독립의 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계시였던것이다.
피바다에 잠긴 삼천리조국땅과 수난에 몸부림치는 겨레의 운명을 한몸에 안으시고 혁명의 길에 나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로 주체15(1926)년 10월 17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참다운 혁명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결성하시고 선군혁명사상의 시원으로 되는 《ㅌ.ㄷ》의 강령을 발표하심으로써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의 새 출발을 온 세상에 알리시였다.
망국의 비운속에서 민족의 운명을 구원해줄 걸출한 위인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조선인민은 이때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르며 주체혁명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나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ㅌ.ㄷ》를 결성하신 이후 화전에서 길림으로 활동무대를 옮기시며 《ㅌ.ㄷ》를 반제청년동맹으로 발전적으로 개칭한데 이어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시고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과 일본상품배척투쟁을 현명하게 령도하시였으며 그후 주체19(1930)년 6월 력사적인 카륜회의에서 무장투쟁로선을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기본로선으로 제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선군사상, 항일무장투쟁로선을 받들고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이 두만강연안의 넓은 지역들에 나가 무장투쟁준비를 다그쳤다. 그들에 의하여 마을마다 야학이 세워지고 대중을 혁명화하기 위한 사업이 활발히 벌어졌다.
부암동에도 야학이 생겼는데 야학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청년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어진 혁명조직의 한 성원이였다.
야학에서는 주로 국어와 산수, 우리 나라의 력사와 지리 등을 배워주었다.
어리실 때부터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달리 높으시였던 김정숙녀사께서는 야학에 남먼저 나가시여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시였다.
한때 부암동에 와서 활동하면서 김정숙녀사의 일가와 깊은 인연을 맺은 항일혁명투사 림춘추는 그 시절의 김정숙녀사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하였다.
《김정숙동지는 그때 나이에 비하여 매우 숙성해보였다.
김정숙동지는 례절이 바르고 총명하였으며 배우려는 열망이 남달리 높았다. 마을에 야학이 서는 날 그는 누구보다도 선참으로 야학에 달려왔으며 그후 어느 하루도 야학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녀사께서는 국어든 산수든 무엇이나 다 놀라울 정도로 잘 리해하시였는데 어느것이나 다 현실과 결부하여 그 본질을 깊이 파악하시였다.
당시 야학생들이 제일 애타하는것은 산수응용문제였다.
어느날 늘 녀사의 곁에 앉는 동무가 선생으로부터 받은 응용문제를 제힘으로 풀지 못하고 주저앉고말았다.
공부가 끝난 후 김정숙녀사께서 그에게 우리에게 오련발짜리 총이 열자루가 있다고 하자, 거기에 총탄을 다섯발씩 재우려면 모두 몇발이 있어야 하는가고 묻자 그는 제꺽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웃으시며 그러면 열에 다섯을 곱하면 몇인가고 재차 물으시였다. 그제서야 그는 머리를 들며 쉰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는 동무를 대견히 바라보시며 김정숙녀사께서는 말씀하시였다.
《이다음에 네가 군사 열을 거느리게 된다고 하자. 그때 군사 한사람에게 총탄을 다섯개씩 나누어주려면 쉰개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제꺽 계산해내야 하지 않겠니. 응용문제를 푸는것은 이렇게 실지 써먹을수 있는 지식을 익히는 학습이야.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응용문제라도 제힘으로 푸는 습성을 붙여야 해. 그러면 신심도 생기고 한문제라도 더 풀어보려고 애쓰게 돼.》
어리신 김정숙녀사의 뇌리에는 언제나 손에 총을 잡고 일제와 싸울 반일항전의식이 깊이 자리잡고있었던것이다.
김정숙녀사께서는 학습토론에도 언제나 열성적으로 참가하시였다.
어느날 야학에서는 상급반, 초급반이 한데 모여 《우리 소작인들은 왜 못사는가?》라는 제목으로 토론을 하였다.
토론에 참가하신 녀사께서는 부암마을 지주가 소작인들을 어떻게 착취하는가 하는것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생동하게 설명하시였다.
땅없는 농민들은 일년내내 뼈빠지게 일하여 거두어들인 곡식의 절반이상을 지주놈에게 소작료로 빼앗기고 거기에다 땅세요, 인두세요, 거류민회비요, 가축세요, 굴뚝세요 하는것들까지 다 물면 결국 보리고개를 넘기기도 바쁘다, 그래서 하는수없이 지주놈에게서 장리로 쌀을 꿔오고 돈을 꿔오게 되며 그렇게 되면 거기에 리자가 붙고 그 리자가 또 새끼를 쳐서 결국 빚더미우에 올라앉는다, 그러니 소작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김정숙녀사께서는 여기 간도지구사람들은 누구나 다 일제놈들과 지주놈들때문에 살기 좋은 고향땅을 버리고 산설고 물설은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살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자기 집에서도 회령땅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며 이곳에 온 후에도 지주놈의 착취와 천대를 받고있다고 절절히 이야기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야학에서 진행되는 학습과 토론을 통하여 자신의 지식을 높여나가시였을뿐아니라 야학에서 진행하는 이야기모임에도 적극 참가하시여 사상의식수준을 높여나가시였다.
녀사께서는 특히 야학에서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끝없는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게 되시였다.
당시 혁명조직성원인 야학선생은 야학생들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 민족의 태양으로 출현하신 전설같은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료하천변의 캄캄한 밤하늘에 새별이 솟아 온 천지를 환히 밝혀주고있다.》
《새별처럼 온 천지를 환히 밝혀주시는분이 산을 주름잡아 다니시며 왜놈들을 한칼에 베일 도를 닦고있다. 그분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서시는 날에는 조선이 독립된다.》
김정숙녀사께서는 그 이야기를 들으시며 짓밟힌 조국과 민족을 구원해줄 위대한 령도자를 마음속으로 그려보시였다.
그런 위대한분이 정말로 계신다면! 그분을 따라 그분의 군사가 되여 일제와 지주, 자본가놈들을 때려부시는 싸움에 나설수 있다면!…
이것은 그 시절 어리신 김정숙녀사께서 품으신 가장 간절한 소망이였다.
이 시기 김정숙녀사의 김기준오라버님은 반제동맹의 핵심성원으로서 혁명활동에 참가하고있었다. 그러나 집안식구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있었다. 어느날 안해가 무슨 일로 밤잠을 잊고 다니는가고 물었을 때 오라버님은 밤이슬을 받아마시면 약이 된다고 하기에 한번 시험해보는중이라고 대답하였다. 안해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으나 김정숙녀사께서는 오라버님이 그 어떤 큰일을 위해 밤길을 걷는다는것을 감촉하시였다. 녀사께서는 그 길은 곧 나라를 찾는 투쟁의 길이라고 생각하시였고 자신께서도 기어이 그 길에 나서리라 마음다지시였다.
이튿날 김정숙녀사께서는 야학선생에게 밤이슬이 약이라는데 그 약을 어떻게 하면 마실수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야학선생이 밤이슬은 나라를 찾기 위해 밤길을 많이 걷는 사람에게만 약이 된다고 대답하자 김정숙녀사께서는 《나라를 찾기 위해 맞는 이슬이라면 저도 맞아보고싶습니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였다.
김정숙녀사의 마음속에 간직된 깊은 뜻을 헤아린 야학선생은 우리는 오직 무장투쟁으로써만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망국노의 치욕에서 벗어날수 있다는데 대하여 그리고 혁명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탁월한 령도자가 있어야 하며 그 령도자를 받들어 광범한 인민대중이 굳게 뭉쳐야 한다는데 대하여 감명깊게 설명해주었다.
야학선생은 창문에 비낀 밤하늘을 내다보며 조용히 이러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캄캄한 조선의 밤하늘엔 유난히 밝은 새별이 솟아 짓밟히는 삼천리강산을 밝게 비쳐주고있습니다.
내가 야학에서 말하던 새별이야기가 생각납니까? 사실은 그 별이 전설에 나오는 별이 아니라 지금 솟아있는 별입니다. 그 별이 앞길을 환히 밝혀주고있기에 이제 억눌리고 짓밟힌 캄캄한 조선땅에 동이 터올것입니다.》
야학선생이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김정숙녀사께서는 언제인가 료하천변의 밤하늘에 솟았다는 새별이야기와 백두산에서 도를 닦고있다던 젊은 장수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라 흥분되는 심정을 걷잡을수 없으시였다.
그 시각, 김정숙녀사께서는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시던 말씀을 생각하시였다. 오랜 기간 독립운동에 전심하였으나 투쟁을 옳바로 이끌어갈 걸출한 령수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밝은 세상도 못 보고 간다고 가슴치며 통탄하시던 아버님의 말씀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언을 되새겨보시며 캄캄하고 숨막히는 조선에 동이 트게 하고 밝은 세상을 가져다줄 새별, 왜놈군사를 한칼에 베일 도를 닦고있는 젊은 장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고 또다시 물으시였다.
야학선생은 김정숙녀사의 손을 꼭 잡고 녀사께서 알고싶어하시는 새별의 참뜻을 이야기하였다.
《정숙동무, 기뻐해주시오.
조선에 새별이 솟았습니다. 아니, 태양이 솟았습니다!
조선혁명의 령도자께서 출현하시였습니다.
그이는 바로 김일성동지이십니다.…》
야학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몇해사이에 일어난 력사적사변들에 대하여 녀사께 하나하나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벌써 5년전에 화전에서 《ㅌ.ㄷ》라는 혁명조직을 뭇고 투쟁의 홰불을 올리시였으며 지난해 여름에는 카륜에서 항일무장투쟁로선을 제시하시여 민족해방의 진로를 환히 밝혀주시고 온성지구에 진출하시여 국내에서 처음으로 되는 당조직을 친히 무어주신데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특히 부암동에서 멀지 않은 연길현 조양천에까지 왔다가셨다는 이야기는 김정숙녀사를 무한히 격동시켰다.
조양천에 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 및 공청일군들에게 무모하고 극좌적인 5.30폭동과 8.1폭동의 후과를 빨리 수습하고 인민대중을 교양결속하여 두만강연안의 광활한 지역을 혁명의 전략적거점으로 꾸릴데 대한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었다.
이날 밤 야학선생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상세히 들으신 김정숙녀사께서는 왜 그토록 오빠가 낮에 밤을 이어 집을 나다니는가를 알게 되였고 자신께서도 그 길을 꿋꿋이 걸어나갈 결심을 가다듬으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 야학선생과 헤여져 집으로 가실 때 밤하늘에는 뭇별들이 총총하였다.
(저 별들은 해빛이 있기때문에 캄캄한 밤에도 저렇게 반짝인다지!…)
조선의 새별이시고 태양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
김정숙녀사께서는 온 민족의 숙원이 담긴 존함을 거듭거듭 외워보시였다. 그분은 어떤분이실가, 그분께서는 반드시 우리 민족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아주시고 우리 인민에게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세상을 마련해주실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 나라를 짓밟고있는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거꾸로 된 이 세상을 바로잡아주실것이다, 우리 운명의 태양이신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길에서 한생을 싸워가리라!
유난히도 밝은 빛을 뿌리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시며 김정숙녀사께서는 자신께서도 태양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별들처럼 민족의 태양의 따사로운 해빛을 받아안고 캄캄한 조선에 밝은 새날을 가져오기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리라 굳게 마음다지시였다.
 33
 소년선봉대 입대
 
주체20(1931)년에 들어서면서 만주를 집어삼키려는 일제의 야망은 더욱더 로골적으로 드러났으며 온 만주땅에 전쟁분위기가 급격히 짙어갔다. 한편 일제의 파쑈적폭압통치에 항거하여 일떠선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이 대중적이며 폭력적인 성격을 띠면서 세차게 일어났다.
이러한 시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활동무대를 두만강연안으로 옮기시고 무장투쟁준비를 더욱 다그쳐나가시였다.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기 위한 준비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나선것은 혁명대오를 꾸리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 및 공청간부들과 조선혁명군 성원들을 연길, 안도, 화룡, 왕청, 훈춘 등 간도의 넓은 지역과 국내의 여러곳에 파견하시였다. 그들은 혁명의 핵심력량을 튼튼히 꾸리며 광범한 인민들을 반일의 기치밑에 결속하기 위한 조직정치사업을 활발히 벌려나갔다.
연길현 부암마을에 파견된 정치공작원들은 계급적으로 빨리 각성되고 사상의식수준이 높은 청년들을 실천투쟁을 통하여 혁명적으로 단련시키는데 선차적인 힘을 넣고 이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주체20(1931)년 봄 김정숙녀사께서는 혁명조직으로부터 동네집들과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장소에 격문을 살포할데 대한 첫 임무를 받으시였다.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농민들이여!
우리 선조들의 뼈가 묻혀있는 삼천리금수강산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발굽밑에 짓밟히고있다.
강도 일제와 반동적지주, 자본가놈들은 우리 농민들을 억압하고 고혈을 짜내여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호의호식을 하고있다.
농민대중이여, 궐기하라!
강도 일제를 타도하자!
일제의 주구들과 악질지주들을 타도하자!
조선혁명 만세!》
김정숙녀사께서는 민첩한 동작으로 격문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의 담벽과 대문, 기둥에도 붙이고 우물가의 돌우에도 올려놓으시였다. 그리고 격문을 악질적인 지주집 대문짝에 붙여놓으시고 담장안에도 던져넣으시였다.
녀사께서 첫 임무를 수행하고 집에 돌아오시였을 때는 밤이 이슥하였다. 첫 혁명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기쁨과 감격으로 하여 녀사께서는 좀처럼 잠을 이룰수 없으시였다.
이튿날 새벽, 온 부암동이 들썩 끓었다.
사람들은 《간밤에 때아닌 백설이 내렸다!》고 웅성이며 격문을 읽었다.
녀사께서는 자신께서 뿌리신 격문을 읽고 힘과 용기를 얻는 사람들을 보시며 투쟁의 보람과 긍지를 느끼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그후에도 적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팔구의 여러 마을들에 대한 통신련락과 적정탐지 등 어려운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시였다.
당시 부암동을 비롯한 팔구관내에는 혁명조직들이 새로 조직되거나 복구되여 움직이는 때였으므로 조직과 조직간의 밀접한 련계를 맺고 행동의 일치성을 보장하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나서고있었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적암동, 풍덕골, 금광촌, 룡수평을 비롯한 여러 마을들에 대한 통신련락임무를 스스로 맡아안으시고 혁명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과 대담성, 뛰여난 지혜를 발휘하여 그것을 어김없이 수행하시였다.
녀사께서는 때로는 산나물 팔러 가는 산골소녀로, 때로는 공부하러 가는 학생으로, 혹은 동생과 함께 친척집에 나들이가는것으로 가장하면서 적들을 속여넘기고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군 하시였다. 언제인가 봉림동혁명조직에 급히 전해야 할 중대한 련락임무를 받으시였을 때에는 조카애를 업고 기저귀속에 쪽지를 넣어 적들을 감쪽같이 속여넘기고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시였다.
혁명조직이 주는 임무를 수행하던 나날은 김정숙녀사께서 준엄한 실천투쟁속에서 혁명가로서의 품격을 훌륭히 갖추어나가는 성장의 나날이였다.
실천투쟁속에서 혁명의 진리를 깊이 체득하시고 혁명가의 품격을 훌륭히 갖추어오신 김정숙녀사께서는 주체20(1931)년 9월 12일 위대한 수령님께서 무어주신 혁명적인 반군사조직인 소년선봉대에 입대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소년선봉대에 입대하면서 조직앞에 다음과 같이 맹세하시였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전사된 영예를 안고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순간까지 굳세게 싸울것을 조직앞에 엄숙히 맹세합니다.》
소년선봉대 입대, 이것은 김정숙녀사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겨주신 고귀한 정치적생명을 지니시고 자신의 운명을 민족의 운명, 인민대중의 해방이라는 무한히 거창하고 성스러운 위업과 결합시킨 빛나는 새삶의 시작이였으며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영광스러운 투쟁대오에 들어서는 뜻깊은 첫걸음이였다.
이때부터 김정숙녀사의 혁명투쟁이 시작되였다.
세계혁명운동사의 갈피갈피에는 수많은 유명무명의 녀성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의 이야기가 기록되여있지만 김정숙녀사와 같이 어리신 나이에 반군사조직에 입대하는것으로부터 혁명투쟁을 시작하고 일생 총과 운명을 함께 한 그런 녀성혁명가, 녀성투사는 없다.
소년선봉대에 입대할 당시 김정숙녀사의 나이는 열네살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그 어리신 나이에 벌써 고귀한 정치적생명을 지니고 조직생활에서 모범을 보이시였으며 30여명이나 되는 부암동 소년선봉대원들의 앞장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이끄시면서 투쟁에로 능숙하게 조직동원하시였다.
녀사께서 소년선봉대에 입대하신지 며칠후인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의 심양 북대영 서쪽 류조구에서 일본 만철회사소유의 철도선을 폭파하는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구실로 만주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한 일제는 《후방의 안전》을 기한다는 미명밑에 조선인민에 대한 반동공세를 전면적으로 강화하였다. 놈들은 특히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새로운 혁명력량이 급격히 자라나고있는 동만을 비롯한 조선인거주지역들에서 폭압만행을 더욱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부암동의 혁명조직에서는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의 침략적본성을 폭로하고 대중을 반일투쟁에로 더욱 적극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마을사람들의 집회를 조직하였다.
집회는 부암동 중촌학교 운동장에서 열리였다.
삼단같은 우등불이 타오르는 운동장에서는 수많은 군중들이 일제와 지주놈들을 단죄하는 구호들을 웨쳤다.
《강도 일제를 타도하자!》
《악질지주를 타도하자!》
수많은 군중이 모인 학교운동장은 불야성을 이루었고 투쟁의 함성으로 들끓었다.
군중의 기세가 한창 고조되는 가운데 소년선봉대원인 김정숙녀사께서 연단에 오르시였다.
녀사를 알아본 마을사람들은 《회령집 작은 딸이요!》하고 수군거리며 놀라움으로 웅성거리였다. 이처럼 큰 군중집회에서 녀성이, 더구나 나어린 소녀가 연설하는것을 본적이 없는 그들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일제침략자들의 학대와 구박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거치른 이역땅에서 아버님을 잃고 수난의 생활을 거듭해오신 생각으로 분노와 증오가 솟구쳐올라 목이 메였다.
이윽고 김정숙녀사께서는 연설을 시작하시였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 여러분!
우리 조국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얼마전에 <만주사변>을 조작하고 대대적인 무장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의 늙은 부모들은 조국을 그리다가 원한을 품은채 이 거치른 이국땅에서 쓰러져가야 하며 어찌하여 우리 젊은이들이 피눈물나는 고생속에서 시들어야 합니까.
이것이 무엇때문이며 누구의 탓입니까? 그것은 우리 나라를 빼앗은 강도 일제와 악귀같은 지주놈들때문입니다.
일제와 악질지주는 우리의 철천의 원쑤입니다.
원쑤를 때려부시지 않고서는 누구도 편안하게 살수 없습니다.
모두다 강도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하나와 같이 떨쳐나서야 합니다.》
군중들은 김정숙녀사의 연설에 격동되여 틀어쥔 주먹을 쳐들고 강도 일제와 악질지주놈들을 타도하자고 웨쳤다. 그리고 홰불을 휘두르고 혁명가요를 부르면서 장재촌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녀사께서도 홰불을 드시고 군중들과 함께 걸으시였다.
이때부터 김정숙녀사는 연길현 팔도구일대의 인민들속에 대중의 선봉투사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소년선봉대에서 활동하는 전기간 높은 책임성과 헌신성을 발휘하여 통신련락, 밀정감시, 군중선동사업을 비롯하여 조직에서 주는 모든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시였다.
주체21(1932)년 3월 중순 김정숙녀사께서는 팔구혁명조직으로부터 남선혁명조직에 보내는 긴급통신련락임무를 받으시였다.
부암동 채영에서 팔구남선혁명조직이 있는 대마록구 서골까지는 70리가 넘었는데 연길강을 건너 질러가면 60리정도 되였다.
그때 연길강의 얼음이 풀려서 떠내려오고 강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었으나 김정숙녀사께서는 중요한 통신을 빨리 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저없이 강물에 들어서시였다.
통신련락쪽지를 가지고 도착하였을 때 녀사의 얼굴과 손은 말할것도 없고 옷은 꽛꽛하게 얼어붙어 가죽처럼 되여있었다.
임무수행의 긴박성을 예리하게 판단하시고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시바삐 통신련락임무를 앞당겨 수행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운 지름길을 택하신 김정숙녀사의 행동은 혁명임무에 대한 높은 책임성, 창발성, 무한한 헌신성을 보여주는것이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소년선봉대원으로서 능숙한 조직적수완과 혁명적열정을 발휘하여 대중을 각성시키고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데서도 특출한 공적을 쌓으시였다.
대중을 각성시키고 그들을 불러일으킬줄 아는 조직선도자적수완은 누구에게서나 찾아볼수 있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민대중에 대한 사랑과 믿음, 인민대중을 위해 자신의 한몸을 바치려는 투철한 각오, 대중의 심금을 울릴줄 아는 감화력, 선동력을 지닌 혁명가들만이 지닐수 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0(1931)년 여름 연길현 태평구에서 당 및 공청일군들에게 혁명군중을 더욱 단련시키고 혁명정세를 성숙시키자면 대담하게 실천투쟁을 조직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우선 간도의 각 혁명조직들에서 소작료를 낮추기 위한 농민들의 합법적인 경제투쟁을 조직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당시 중국국민당 길림성정부는 농민대중의 분노와 혁명적진출을 무마하며 회유할 목적으로 동만일대 조선농민들의 소작료를 4,6제, 3,7제로 실행한다는것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지주놈들의 항거로 성정부포고는 유야무야해지고말았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만의 전체 혁명조직들이 성정부의 포고를 리용하여 농민들을 합법적인 소작료감하투쟁에로 이끌며 그 투쟁을 정치투쟁, 폭력투쟁으로 발전시킬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이해 가을 전동만의 넓은 지역에서 일제와 악질지주들을 반대하는 대중적인 폭력투쟁이 벌어지게 되였다.
추수투쟁을 앞두고 부암동의 혁명조직에서는 투쟁위원회를 뭇고 선전대, 규찰대, 주구청산대, 구호대 등을 조직하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선전대에 속하여 활동하시게 되였다.
어느 한 농가의 조가을을 하던 날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품앗이 나온 녀인들과 함께 일하시다가 조 열단을 날라다 가지런히 세워놓으시고 그중에서 석단을 추켜올리시며 말씀하시였다.
《요 석단이 리지주네 몫이구요, 나머지 일곱단은 우리 작인들 몫이예요. 이것이 우리가 하자는 3,7젭니다.》
녀사께서는 다시 조단을 여섯단과 넉단으로 갈라놓으시고 4,6제도 설명해주시였다. 3,7제, 4,6제란 말은 한두번만 아니게 들어온 녀인들이였지만 실물로 그것을 보게 되니 기어이 3,7제를 실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니 우리는 꼭 이겨야 해요. 이기자면 힘을 단합해야 해요. 놈들이 아무리 날친다 해도 우리 농민들이 한사람같이 뭉치기만 하면 무서울게 없구 그 힘을 당할자가 세상에 없답니다. 뭉치면 이기니 뭉쳐서 싸우자요!》
신심에 넘친 김정숙녀사의 말씀은 녀인들의 가슴에 힘과 투쟁열의를 북돋아주었다.
김정숙녀사의 정력적인 선전사업에 의하여 군중은 급속히 각성되여갔으며 마침내 부암동의 남정네들은 물론 녀성들, 늙은이, 어린이들까지 모두가 추수투쟁에 떨쳐나서게 되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선전대의 임무뿐아니라 소년선봉대와 아동단대렬을 이끄시고 규찰대의 임무도 수행하시였다. 그때 소년선봉대원들은 손에 붉은 수기와 곤봉을 들고 2∼3명씩 조를 무어 규찰대로 행동하였다.
부암마을의 군중이 구호를 부르고 노래를 부르며 지주 리춘팔의 집으로 갔을 때 지주놈은 3,7제를 절대로 못하겠다고 뻗대였다. 그자가 하도 살기등등하게 나오자 일부 군중들속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이 순간 김정숙녀사께서는 소작인들의 피땀을 빨아먹는 악질지주의 착취상과 죄상을 마을사람들앞에서 낱낱이 폭로하시였다. 그 단죄의 말씀은 참아오던 마을사람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몽둥이와 농쟁기들이 수풀처럼 쳐들렸다. 지주놈은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말았다.
소년선봉대원들이 지주의 집마당에 쌓여있는 낟가리에 붉은 수기를 꽂자 행동대원들이 달려나가 낟가리를 헐어버렸다. 부암동 소작인들은 자기들이 가져야 할 7할의 몫을 당당히 찾아냈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10여만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추수투쟁은 일제와 그 주구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승리로 끝났다.
추수투쟁을 통하여 각성되고 기세가 오른 군중은 이듬해 봄에 다시 춘황투쟁에 일떠섰으며 일제와 친일반동지주들을 반대하는 실천투쟁속에서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은 튼튼히 꾸려져갔다.
추수, 춘황투쟁의 나날 자기들의 요구조건을 관철하기 위하여 지주집을 포위하고 밤을 새우는 군중들을 위해 한몸의 피로도 무릅쓰면서 불을 피우고 더운물을 끓여 고무하여준 김정숙녀사의 헌신적이고도 정열적인 모습, 적기마경찰대놈들이 달려들어 군중을 포위하려는 때 군중앞에 나서서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힘있는 선동연설을 하신 나어린 김정숙녀사의 용감하고도 헌신적인 행동은 그 어떤 곤난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맞받아나가는 불굴의 의지와 혁명적열정, 조직선도자적수완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이렇듯 김정숙녀사께서는 소년선봉대에 입대하여 일제의 《만주사변》의 본질을 폭로하는 투쟁과 추수, 춘황투쟁의 나날에 혁명위업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과 높은 조직성, 능숙한 조직자적수완과 정치사업능력을 지닌 선군혁명의 믿음직한 투사로, 미래의 녀성영웅으로 더욱 억세게 준비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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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마을의 첫 녀성공청원
 
주체21(1932)년의 봄, 간도땅에 위대한 전환의 봄이 왔다. 봄은 망국의 설음으로 덕지앉은 사람들의 가슴에 류다른 환희와 크나큰 희열을 밀물처럼 그들먹이 채워주며 찾아왔다. 약동하는 삶의 서곡인양 그해의 봄에 안도의 태고연한 원시림을 뒤흔드는 선군혁명의 우뢰소리가 울려퍼졌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마침내 주체21(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시고 그를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던것이다.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 그것은 강도 일제에 대한 조선인민의 선전포고였으며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고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위대한 항일혁명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장엄한 선언이였다. 그것은 또한 혁명무력이 없었던탓으로 망국노의 굴욕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조선인민이 자기의 혁명적무장력을 가지려는 오랜 숙망을 실현한 민족적경사였으며 일제의 멸망을 예고하는 력사적사변이였다.
이때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의 선군혁명령도가 시작되였으며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은 실패와 우여곡절을 모르고 승리의 한길로 줄달음칠수 있었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였다는 격동적인 소식에 접한 김정숙녀사의 가슴은 남다른 감격과 흥분으로 설레이였다.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없는 이국의 산야에 묻히신 아버님, 아버님의 피맺힌 유언을 받으시며 비록 녀자의 몸일지언정 손에 총을 잡고 빼앗긴 조국을 찾는 길에 나서리라 굳게 맹세다진 그때부터 일제침략자들을 물리칠 혁명군대의 탄생을 애타게 기다리신 김정숙녀사이시였다.
그러기에 혁명무력의 탄생소식을 들으신 김정숙녀사께서는 민족의 태양이시며 선군혁명의 개척자이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와 흠모의 정을 억제할수 없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신 후 여러 지방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시여 이미 활동하던 소규모의 무장대오들을 반일인민유격대로 편성하는 사업을 정력적으로 이끌어나가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 계시던 연길지방에서도 소규모의 무장대오에 핵심적인 반군사조직성원들을 망라하여 반일인민유격대가 편성되였다.
이 력사적인 시기에 김정숙녀사께서는 반일인민유격대조직과 유격구역을 창설하기 위한 투쟁에 적극 참가하시였다.
무기탈취에 앞서 진행하는 정찰, 마을의 경계, 통신련락과 선전활동 등 김정숙녀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무렵 동만의 각 현마다에서 태여나 우후죽순처럼 자라나는 항일유격대오와 인민들의 앙양된 혁명기세에 질겁한 일제는 반일혁명력량을 요람기에 압살해보려고 미쳐날뛰였다.
간악한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사람 백명을 죽이면 그중에 적어도 한명은 공산당원이거나 공청원일것이라고 하면서 온 간도땅을 피바다, 불바다로 만들었다.
닥치는대로 죽이고 빼앗고 불사르는 일제의 악명높은 《삼광정책》으로 말미암아 1932년 한해동안에 연길현에서만도 무려 1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이 학살되였으며 수많은 집들이 불에 탔다.
일제의 간도대학살만행은 김정숙녀사의 가슴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남기였다. 이해 7월 15일에 있은 부암동에 대한 일제의 《토벌》에 사랑하는 어머님과 형님을 한날한시에 잃는 불행을 당하시였던것이다.
그날 김정숙녀사께서는 아동단원들의 아침모임을 지도하시려고 뒤산에 오르시였다. 오빠는 조직의 일로 나가고 집에는 어머님과 형님만 있었다.
김정숙녀사께서 아동단원들의 아침체조를 지도하시고 하루의 사업분공을 하고계실 때 마을에서 갑자기 개짖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어 기관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였다.
이윽고 곳곳에서 삼단같은 불길이 치솟아오르고 귀청을 째는 총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 아우성소리가 들렸다.
마을에 달려든 일제《토벌대》놈들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리지 않고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사격을 퍼부었다. 집안으로부터 사람이 나오지 못하게 해놓고 불을 지르고 불길에 쫓겨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늙은이, 아이 할것없이 총으로 쏘고 총창으로 찔렀다. 온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 피바다가 되고 총소리, 고함소리와 함께 가슴을 째는듯 한 비명소리, 아우성소리가 하늘땅에 차고넘치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두주먹을 부르쥐시였다. 당장 마을로 달려내려가 원쑤놈들과 사생결단하고 인민들을 구원하고싶으시였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가 없으시였다. 이 어려운 시각에 아동단원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자신마저 그렇게 행동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녀사께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다잡으시였다.
아동단원들은 금시에 불타는 마을로 달려내려가려고 몸부림쳤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두팔을 벌려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며 안타깝게 말씀하시였다.
《동무들처럼 내 가슴도 막 터지는것 같아요. 나도 달려가서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을 구원하고싶어요.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여서는 안돼요. 우리는 아동단원들이며 우리의 몸은 조직의 몸이예요.》
마을에서는 적들의 총소리가 더욱 자지러지게 울리고 사람들의 피타는 부르짖음이 계속 들려왔다. 김정숙녀사께서는 그 원한의 총소리와 절규를 페부에 새겨넣으시였다.
부암동에 대한 일제《토벌》로 인한 피해는 참혹하였다. 마을의 집들은 모두 불길에 휩싸였고 사람들은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김정숙녀사께서 불타는 집에 이르시니 형님은 이미 숨을 거두었고 어머님은 참혹하게 화상을 입어 쓰러져있었다.
녀사께서는 어머니를 마구 흔들며 애타게 부르짖으시였다.
《어머니, 이게 웬일이세요?!》
한참만에야 가까스로 눈을 뜨신 어머님께서는 분노에 떨리는 음성으로 물으시였다.
《그 악귀같은 왜놈들이… 그, 그놈들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비록 말소리는 약하였으나 그 마디마디에는 일제살인귀들에 대한 용서할수 없는 분노, 천년을 두고도 잊을수 없는 저주와 원한이 서려있었다.
왜놈들이 이제는 모두 달아났다고 말씀올리자 어머님께서는 따님의 손을 잡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정숙아,… 네 형님이 불에 타죽으면서두… 네 이름을 부르더라.… 조카애를 버리지 말구 길러달라구.… 내 이 말을 외우자구…》
어머님께서는 잠시 가쁜숨을 몰아쉬더니 《내 눈으로 …저 악귀같은 왜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 보자고 했는데… 원쑤를 갚아다우.…》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시고 숨을 거두시였다.
《어머니!》
김정숙녀사께서는 와락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고 몸부림치며 우시였다.
이게 정말 꿈아닌 사실이란 말인가, 한뉘 고생속에도 모진 시름, 모진 설음을 다 억누르며 대바르고 강직하게 살아오신 어머님, 독립혈전에 나서신 아버님의 뒤바라지를 하시느라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시면서도 자식들의 밝은 앞날을 위해 모든것을 바쳐오신 어머님!
이제는 일제를 족치고 조선의 해방을 안아올 반일인민유격대도 무어져 밝은 앞날이 눈앞에 다가오고있는데 일제에 대한 그 깊은 원한도 풀지 못하고 이렇게 가시다니…
김정숙녀사께서는 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꺼져내리는것만 같으시였다. 녀사께 있어서 어머님과 형님의 희생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였다.
하지만 김정숙녀사께서는 이 인간비극의 절정에서 슬픔에만 잠겨있을수 없으시였다.
목놓아우는 동생을 달래시며 녀사께서는 속으로 굳게 맹세다지시였다.
어머님의 유언을 지켜 혁명의 한길을 억세게 걸으리라고… 비록 녀자의 몸이기는 하지만 결단코 원쑤를 천백배로 복수하고 희생된 부모형제와 겨레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주리라고.…
총을 잡고 혁명하는것만이 살길이라는 혁명의 진리를 녀사는 이렇게 피맺힌 생활체험을 통하여 뼈저리게 새겨안으시였다.
그 어떤 슬픔도 시련도 김정숙녀사를 굴복시킬수 없었다.
후날 김정숙녀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 눈물도 안나왔습니다.
험하고 모진 세상에서 젖먹이조카애를 키울 생각을 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듯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울어도 몸부림쳐도 벗어날수 없는 그 절망속에서 나를 다시 일떠세운것은 혁명에 대한 자각이였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혁명의 길에서 끝까지 굴함없이 싸워나가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기에 나는 그 큰 불행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굳세게 다시 일어설수 있었습니다.》
오직 한마음, 혁명의 진두에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서계시고 그이께서 이끄시는 한 조국해방의 밝은 앞날은  반드시 오고야말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지니시였기에 김정숙녀사께서는 그 모진 슬픔을 박차고 계속 혁명의 길을 꿋꿋이 걸어나가실수 있었다.
언제인가 김정숙녀사를 형상한 어느 한 영화의 주제가창작을 지도하시던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노래 《빨찌산녀전사의 노래》는 무엇보다도 가사가 진실하다고, 가사에 어머님의 시련에 찬 생활을 그대로 가식없이 담았다고, 《어렸을 때 부모잃고 동생도 잃고 머슴살이 천대속에 헤매던 이 몸》이라는 노래구절은 꾸밈이 없다고 하시면서  《한마디로 말하여 혁명의 길에 나서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었던 어머님의 절절한 심정이 가슴뜨겁게 안겨옵니다.》라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사실 민족수난의 그 엄혹한 시기에 나어린 녀성의 몸으로 만고풍상을 다 겪어야 하는 혁명의 길에 나선다는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김정숙녀사께서는 삼천리강토를 피로 물들이고 간도땅에까지 와서 온갖 재난을 다 들씌우고있는 일제침략자들과는 끝까지 싸워이겨야 한다는 굳센 혁명적각오와 강철같은 의지를 지니시고 일신상의 모진 고초를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시고 항일혁명의 길에 용약 떨쳐나서시였다.
이무렵 팔구공청위원회는 준엄한 혁명의 폭풍속에서 온갖 불행과 슬픔을 꿋꿋이 이겨가시며 참된 투사로, 혁명가로 성장하신 김정숙녀사를 공청대렬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일제놈들의 《토벌》에 의하여 어머님과 형님을 잃은지 열흘째 되던 날인 주체21(1932)년 7월 25일이였다.
부암동 막바지에 있는 자그마한 농가에서는 김정숙녀사의 공청가맹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부암동공청세포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김정숙녀사의 가슴은 파도마냥 설레였다.
민족의 태양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몸소 창건하시고 이끌어주시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선군혁명의 믿음직한 후비대, 젊은 투사들의 전위대오! 바로 이 자랑찬 혁명대렬에 자신께서 들어서게 되신것이다. 이보다 더 영예롭고 보람찬 일이 또 어데 있겠는가.
이윽고 회의가 시작되였다.
공청원들은 앞을 다투어 김정숙녀사의 가맹을 지지하여 토론하였다. 그들은 녀사께서 나어린 녀성의 몸으로 마을을 혁명화하는 투쟁의 앞장에 서고 격문살포, 통신련락, 적정탐지 등의 혁명임무수행에서 특출한 모범을 보인데 대하여 지적하였다. 어떤 동무는 김정숙녀사께서 추수, 춘황투쟁때 군중의 앞장에 서시여 대중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킨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녀사의 무비의 용감성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어떤 동무는 적들의 《토벌》에 어머니와 형님을 잃고도 그 모진 슬픔을 이겨가면서 꿋꿋이 싸워나가시는 혁명임무에 대한 녀사의 끝없는 헌신성에 대하여 격정에 넘쳐 토론하였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김정숙녀사를 공청대렬에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동무들의 두터운 신임과 기대에 끝없이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면서 조직앞에 엄숙히 선서하시였다.
《나는 영광스러운 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맹하면서 동맹의 한 성원으로 된 영예와 긍지를 심장깊이 간직하고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싸우겠습니다.
나는 공청원답게 조직의 규률을 엄격히 지키며 조직의 결정과 지시를 성실하게 집행하고 공청을 혁명적이며 전투적인 조직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겠습니다.…
나는 투쟁과 생활에서 대중의 모범이 되며 언제나 앞장에서 그들을 이끌어나가는 조선혁명의 참된 전위가 될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이 엄숙한 선서는 김정숙녀사께서 위대한 수령님앞에, 조국과 혁명앞에 다지시는 심장의 맹세였다.
공청원들은 엄숙히 손을 들어 김정숙녀사의 가맹에 찬성을 표시하였다. 이리하여 녀사께서는 혁명적청년전위조직인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맹하시였다.
이날부터 김정숙녀사께서는 마을의 첫 녀성공청원으로서의 영예를 빛내이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고 단련하시면서 혁명의 한길에 일생을 바쳐가게 되였다.
김정숙녀사께서 공청원의 영예를 지니신 후 받으신 첫 분공은 적암동인민들을 혁명화하여 조직에 묶어세우는것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먼저 추수투쟁때 잘 싸운 핵심들을 장악하고 교양하시는 한편 의식수준이 낮은 마을사람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마을에서 실지 있은 사실을 가지고 연극을 준비하여 공연하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각성되여가는 인민들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려고 날뛰는 악질지주, 친일주구들을 조직을 발동하여 처단하게 하시였다.
녀사께서는 군중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점차 각성되여가는데 맞게 당조직과 공청조직을 도와 적암동마을에 농민협회, 반제동맹, 혁명호제회, 부녀회를 비롯한 혁명조직들을 내오시였다.
혁명조직이 준 임무에 대한 높은 책임성과 문제해결의 묘술을 찾아내고 풀어나가는 능란한 사업방법, 능숙한 선동방법을 지니신 김정숙녀사의 활동에 의하여 적암동은 혁명화되게 되였다.
1932년 가을 공청세포위원으로 선거되신 김정숙녀사께서는 적들의 《토벌》만행으로부터 혁명군중을 보호하기 위한 사업을 스스로 맡아나서시였다. 적《토벌대》놈들의 동향을 탐지하여 놈들이 쳐들어올 기미만 보이면 마을사람들을 미리 피신시키기도 하시고 로약자들과 어린이들속에서 한명의 피해자도 나지 않도록 세심한 대책을 세우기도 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 비발치는 적탄속을 헤치고 미리 피신하지 못한 한 할머니를 업어 산에 피신시킨 이야기는 그후 오래도록 마을사람들속에서 전설처럼 전해졌다.
이처럼 김정숙녀사께서는 부암마을의 첫 녀성공청원으로서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의식화, 조직화하기 위한 사업과 혁명군중을 보호하기 위한 사업을 능숙하게 벌리시여 사람들로부터 《마을의 보위자》, 《생명의 은인》으로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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