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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김일성 장군 (김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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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705회 작성일 17-05-16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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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이 사이 이순신·권율(權慄)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 일본군이 1593년 4월 남쪽으로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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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해 전 TV 연속극 <불멸의 이순신>은 많은 감동을 주었다.
선조가 아니라 이순신장군이 왕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고무적이다. 사람들은 출중한 영웅, 애국자, 위인을 알아보고 존경하는 법이다. 리순신장군의 투쟁은 <난중일기>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원균이나 권률과의 갈등, 조정, 선조와의 갈등 등 자세한 내용을 캐낸다 해도 리순신장군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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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들이란 전부 제국주의 자본세력의 집사에 불과하지만 그 중 카터는 비교적 량심적인 인물이었다.
1994년 그는 조선을 방문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만난 후, 생각이 바뀌고 말았다. 그는 말했다. "김일성주석님은 내가 제일 존경하는 미국의 대통령들을 다 합친 것 보다 더 위대하다." "김일성주석은 진정으로 우수하고 위대한 영도자이며, 모든 면에서 탁월하고 풍부한 경험자이며, 그의 능력은 세상에 아무도 견줄 자가 없다." 
마치 조선중앙방송에서 하는 말 처럼 들리지 않는가? 카터가 조선의 프로파간다 요원이 되기라도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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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주의자 김구는 반공매국노 장개석 국민당 소속의 독립군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미 군정과 괴뢰 리승만에게 멸시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반공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48년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련석회의에 참석하려고 북조선으로 갔다. 거기서 김일성장군과 김두봉을 위시한 조선의 대표들을 만나고 김장군의 조부모님들도 만났다. 김구는 반공에서 친공, 련공으로 돌아섰고, 젊은 김장군을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상해림시정부의 옥새를 맡아달라고 했다. 김장군은 사양했다.
친공, 련공으로 돌아선 낌새를 채자 미 CIA는 1949년 김구선생을 암살해버렸다. (CIA 암살명령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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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보천보습격전투가 보도되자 조선애국자들의 가슴에는 피가 끓었다. 려운형은 단숨에 현장으로 달려가보았다. 해방 후 그는 서울에서 김일성장군 환영대회를 조직했고 수차례 월북해서 김장군을 만났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김장군을 지도자로 보았고 존경했다. 자신의 아들 딸들을 위탁했다. 그 아들 딸들은 어린 김정일위원장을 업어주기도 했다. 
려운형은 1947년 서울에서 우익매국노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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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순신장군은 왜곡되지도 악마화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남녘사람들이 감정적 거부감 없이 존경하는 것이다.
김일성장군, 위대한 수령님은 리순신장군과는 비교도 안되는 분이시다. 군사, 전략, 인품 뿐만이 아니다. 수천만 인민과 전 세계를 지휘하여 조선혁명을 성공시키고 조선의 자주와 존엄을 지켜낸 민족의 영웅이며 어버이시다. <난중일기>는 금서가 아니지만 <세기와 더불어>를 비롯한 조선혁명에 관련된 책들은 금서가 아니가 !
국보법이라는 사상 최악의 범죄적 악법으로 인하여 남녘의 인민들은 조국도 잃고 력사적 진실도, 절세의 애국자도, 영웅도, 지도자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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