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 28.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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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숙녀장군께 있어서는 결혼사진이나 다름없는 한장의 소중한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이 바로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녀장군께서 결혼후 처음으로 맞는 잊을수 없는 봄에 찍은 사진이다.
주체30(1941)년 정초 하바롭스크에서는 국제당의 명의로 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민혁명군과 중국항일무장부대 대표들, 쏘련원동군 대표들의 회의가 소집되였다. 세 나라 무장력대표들의 회의였다.
하바롭스크회의에서 중심으로 토의된 문제는 동북항일련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앞으로의 활동방향에 관한 문제였다. 회의에서는 론의끝에 앞으로의 활동에서 기본은 소부대활동, 군중공작, 실력배양에 두기로 하였다.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소할바령회의에서 제시하신 방침과 일치한것이였다. 그리고 회의에서는 쏘련측이 자기 나라 경내에 마련하여주는 훈련기지를 근거지로 삼고 조선과 만주의 넓은 지역에서 소부대활동을 벌리기로 합의하였다.
하바롭스크회의가 있은 다음 쏘련의 원동지역에 남야영과 북야영이 개설되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남야영에 집결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하바롭스크회의가 있은 이후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을 소부대로 편성하여 국내와 만주일대에 파견하도록 하시였으며 자신께서도 한개 소부대를 이끄시고 백두산동북부와 국내에 나가 군사정치활동을 벌리실 결심을 밝히시였다. 그리고 김정숙녀장군에게는 백두산밀영에 나가 국내각지와 장백일대에 파견되여있는 소부대, 소조들에 사령부의 작전적의도를 알려주며 소부대, 소조들과 혁명조직들의 활동을 지도할데 대한 임무를 주시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 백두산지구로 나가시는 문제가 처음 제기되였을 때 지휘성원들은 걱정이 많았다. 그도 그럴것이 일제는 대쏘침략전쟁을 꿈꾸며 이미 지난해 초가을부터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최후발악적인 공세를 감행하는 한편 조선인민에 대한 미증유의 파쑈적폭압과 략탈을 강화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각처에 널려져있는 소부대, 소조들의 활동을 지도하는것은 매우 아름차고 어려운 일이였다. 더우기 안팎의 정세가 복잡다단한 때 위대한 수령님의 사업을 몸가까이에서 보좌해드려야 할 김정숙녀장군께서 오래동안 수령님곁을 떠나 활동하신다는것은 심중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백두산밀영에서 수행할 그 어렵고 중대한 과업을 김정숙녀장군외에는 감당해낼 사람이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그들이여서 사령관동지께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였다.
바로 이때 김정숙녀장군께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사령관동지, 제가 백두산밀영에 있으면서 사령관동지의 의도대로 꼭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였다.
언제 어디서나 위대한 수령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면 물과 불속에라도 뛰여들어 기어이 해내고야마시는 김정숙녀장군께서 이번에도 그 중대한 임무를 반드시 빛나게 수행할 결의를 다지실 때 지휘원들은 모두가 그이의 숭고한 풍모와 열화같은 충실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날부터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몸소 소부대를 이끄시고 원정에 오를 준비를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적극 보좌하시는 한편 자신께서도 백두산지구에 나가 장기간 국내와 압록강, 두만강연안의 소부대, 소조, 혁명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실 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어나가시였다.
그러던 어느날 대원들이 수령님을 찾아가 사진을 찍었으면 하는 소청을 말씀드리였다. 사령관동지께서 소부대공작을 떠나시면 언제 다시 뵙게 되겠는지 모르겠는데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서 기념으로 남기자는 뜻에서였다.
어느 대원은 벌써 사진기를 가지고와 수령님께 무랍없이 청을 드리였다. 지휘성원들인 최현, 안길도 같은 심정으로 밖에 나와서 사진찍을 자리를 잡아놓고 수령님께서 나오시기만을 기다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의 소원이 정 그렇다면 오늘 날씨도 좋은데 사진을 찍자고 하시며 쾌히 밖으로 나오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봄물이 오르기 시작한 자작나무앞에서지휘성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시였다. 그리고 대원들과도 몇장 찍으시였다. 자애로운 어버이사랑으로 대원들의 소원을 다 풀어주시였다.
그런데 누구도 그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수령님을 모신 행복한 자리에서 생각은 모두 한곬으로 모아졌다. 이때 누군가가 모두의 심정을 담아 위대한 수령님께 소부대공작을 떠나시는 기념으로 김정숙녀장군과 함께 사진을 찍으셨으면 한다고 말씀드리였다.
그 말을 들으시자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얼굴을 붉히며 녀대원들의 등뒤에 가서 숨으시였다.녀대원들이 김정숙녀장군의 등을 떠밀어 위대한 수령님곁에 세워드리였다. 김정숙녀장군께서 부끄러워 웃으시며 수령님곁에 밀려와 서시는 순간 사진기의 샤타가 눌려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타향에서 맞이하는 그 봄을 영원히 기념하고싶어 사진뒤면에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941. 3. 1. B야영구에서라는 글을 써넣으시였다.
봄물이 오르기 시작한 자작나무, 그옆에서 수령님과 어머님께서 정겹게 웃으시며 찍으신 사진, 머리모양새를 알수 없는 김정숙녀장군의 그 모습속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충정의 사연을 담고있는 사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그 사연에 대하여 뜨겁게 회고하시면서 김정숙은 다른 녀대원들과 꼭같이 중발머리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머리모양새를 도저히 알수 없습니다, 머리칼을 군모안에 모조리 뭉그려넣었기때문에 알수 없게 되여있습니다, 그게 다 사연이 있습니다라고 교시하시였다.
사실 사진을 찍던 그날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녀대원들도 그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었다.
그날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녀대원들이 류달리 까맣고 탐스럽던 녀장군의 머리채가 왜 보이지 않는가고 묻자 그저 요긴하게 쓸데가 있어 좀 잘랐다고 말씀하시였다.
소부대를 데리고 훈춘방향으로 행군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상하게 발이 후끈후끈해나는것을 느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처음에는 행군을 많이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히 생각하시였는데 걸음을 옮기실적마다 발바닥에 무엇인가 따뜻하고 부드러운것이 와닿는 감촉을 느끼시였다.
신발을 벗어보니 신발바닥에 머리칼로 만든 깔개가 깔려있었다. 그것은 김정숙녀장군께서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 만드신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는 그때에야 김정숙이 방안에서도 별스럽게 군모를 벗지 않고 지내던것을 상기하고 그가 나를 위해 머리카락을 솎아서 신발깔개를 만들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김정숙이 군모를 쓰고있은것은 숱이 성글어진 머리를 남들에게 보이기가 멋적어서 그랬을것이라고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후대들에게 길이 전해질 그 위대한 충정의 이야기는 이렇게 세상에 밝혀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녀장군께서 타향에서 봄을 맞으시며 찍으신 사진에는 비단 그 사연만이 깃들어있는것이 아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와 김정숙이 결혼하던 날 전우들은 우리들을 위해 무엇인가 마련해보려고 하였으나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였다고, 온 부대가 식량이 떨어져 끼니도 잇지 못하는 때에 어디서 무엇을 마련할수 있었겠는가고, 새 세대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그럴수가 있는가 하고 머리를 기웃거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의 형편에서 달리야 될수 없지 않는가고, 모두가 그런 식으로 혼례를 치르었다고, 오히려 그것을 멋으로 여기였다고, 래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고난을 달게 받아들이며 참고 견디는데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것이 바로 항일유격대원들의 락이였다고, 우리 투사들이 해방된 조국에 와서 결혼은 많이 했지만 다들 식은 소박하게 했다고, 나는 그게 늘 속에 얹혀 내려가지 않았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래서 김정일동무는 그들이 생일 60돐, 70돐을 맞을 때에는 상도 차려주고 선물도 보내주군 한다고 하시며 다음과 같이 절절히 교시하시였다.
《그런데 김정숙이만은 그런 락도 보지 못하고 30살을 넘기기 바쁘게 이렇게 사진만 남기고 우리곁을 떠나갔습니다.》
돌이켜보면 김정숙녀장군은 한생에 언제 한번 따끈한 밥 한그릇 들어보지 못하시고 춘하추동 새옷 한벌 입어보지 못하시였다. 그렇다고 옹근 하루밤 휴식 한번 편안히 해본적도 없으시였다. 그러나 김정숙녀장군은 타향의 그 봄날 사진에 비껴진 모습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가장 가까운 동지로서 언제나 수령님과 함께 계시였다.
하기에 김정숙녀장군께서는 그 기념사진을 찍으시던 그날 녀대원들에게 이렇게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나는 지금까지 혁명의 길에서 죽으면 죽었지 두려울것이 있는가, 나는 사령관동지의 전사로 혁명하다가 죽는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자랑으로 생각한다, 이런 든든한 배심을 가지고 싸워왔기에 시련이 겹쌓인 혁명의 길을 꿋꿋이 헤쳐올수 있었고 위험한 고비에 부닥쳤을 때에도 살아날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령관동지를 모시고 사진을 찍은 오늘의 이 영광을 잊지 말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사령관동지께서 계시면 두려울것이 없다는 든든한 배심을 가지고 조국광복의 그날을 위하여 힘차게 싸워나갑시다.》
그런 신념과 의지를 지닌 항일의 녀성영웅이시기에 김정숙녀장군께서는 항일대전의 기나긴 나날 쏟아지는 탄우속에서도, 생사를 판가름하는 시련의 고비에서도 위대한 수령님을 한치의 드팀도 없이 충직하게 받들어모시였다.
주체46(1957)년 4월 5일.
조선혁명박물관의 전신인 국립중앙해방투쟁박물관을 돌아보시던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찍으신 사진영상을 우러러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나는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의 사진을 볼 때마다 생각이 깊어집니다. 어머님께서는 우리 혁명이 제일 어렵던 시기에 위대한 장군님을 받들어모시기 위해 충성을 다하시였습니다. 나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혁명전사의 신념과 의리에 대하여 생각하군 합니다. 신념과 의리가 없는 사람은 혁명가라고 말할수 없습니다. 한번 결심 품고 혁명의 길에 나선 사람은 천백번 죽더라도 변치 않는 신념을 가져야 하며 혁명의 수령에 대한 고결한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우리 혁명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철석같은 신념, 고귀한 정치적생명을 안겨주시고 혁명가로 키워주신 수령님의 고마운 은덕에 기어이 보답하려는 뜨거운 혁명적의리, 바로 어머님의 충성심은 여기에서 나온것입니다. 이것은 혁명가의 제일생명이며 가장 고결한 풍모입니다. 나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어머님처럼 위대한 수령님을 잘 받들어모시고 충성다하리라 마음다지군 합니다.…
타향에서 봄을 맞으시며 김정숙녀장군께서 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찍으신 사진에 비껴있는 인자하시고 다정하신 미소, 그것은 바로 가장 고결한 신념과 의리의 세계를 지니신 백두의 녀장군, 위대한 수령님의 가장 가까운 혁명동지로 성장하신 김정숙녀장군께서만이 꽃피우실수 있은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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