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 45. 수령님의 해군무력건설구상을 받드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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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님의 해군무력건설구상을 받드시여
세 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조선반도는 력사적으로 바다로부터 외적의 침입이 그칠새 없었다. 조선반도의 지정학적특징으로 보나 조성된 정세로 보나 해방된 조국에서 해군무력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군종이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정규적해군무력을 창설하기 위하여 주체35(1946)년 6월 5일 해안경비임무를 수행하는 보안대를 수상보안대라 하자 하시고 서해수상보안대를 조직하시였으며 그후 동해수상보안대도 내오시였다. 수상보안대의 조직으로 우리 나라에서 해군무력이 창설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군의 군사간부들을 전망성있게 키워내기 위하여 수상보안간부학교를 내오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념려하시는 수상보안간부학교창설문제를 두고 누구보다 깊이 마음쓰고계시던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주체36(1947)년 2월 23일 해당 부문 일군들을 몸가까이 부르시였다.
그들과 허물없이 자리를 같이하신 김정숙녀사께서는 지금 장군님께서는 수상보안간부학교를 세울것을 계획하고계신다고 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우리 나라는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해양국입니다. 과거 우리 나라 력사를 돌이켜보면 외래침략자들이 주로 바다로부터 많이 침입하였습니다. 우리가 조국과 인민의 안전을 믿음직하게 보위하자면 륙군과 공군뿐아니라 강력한 해군무력도 가지고있어야 합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수상보안간부학교를 세우고 장차 해군무력의 골간이 될 해군간부들을 양성할것을 구상하고계십니다. 우리가 조국의 바다를 믿음직하게 보위하자면 수상보안대를 빨리 확대강화하고 그에 토대하여 정규적인 해군무력을 창설해야 합니다. 여기서 선차적으로 나서는 문제는 해군무력의 골간이 될 해군간부들을 많이 양성하는것입니다. …
계속하여 녀사께서는 수상보안간부학교 위치를 확정할수 있도록 일군들에게 실태조사를 책임적으로 빨리 하여 그 정형을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드릴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그후 그들로부터 정확한 실태자료를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몸소 현지에 나가시여 수상보안간부학교의 창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다.
백두의 녀장군께서는 청소한 해군무력을 하루빨리 강력한 불패의 대오로 키우시기 위하여 불면불휴의 심혈을 다 기울이시였다.
주체37(1948)년 6월 23일 김정숙녀장군께서는 어느 한 해군구분대를 찾으시였다.
지휘관들의 인사를 받으시고나서 경비정에 오르신 김정숙녀장군께서는 배의 설비와 기재들과 해병들의 생활정형을 일일이 료해하시였다.
그러시고나서 녀장군께서는 해병들에게 서해바다를 잘 지켜야 한다고, 장군님께서는 남포를 평양의 관문이라고 하시였다고 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요즘 적들의 도발책동이 동해보다 서해에서 더 심합니다. 동무들은 경각성을 늦추지 말고 바다를 튼튼히 지켜야 합니다. 서해는 동무들이 맡아야 합니다. 동무들이 조국의 서해바다를 튼튼히 지키자면 무엇보다도 인민군대가 항일유격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군대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맡은 경비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합니다. 해병들은 바다에서 싸우는 군인인것만큼 의지가 강하고 몸이 튼튼해야 합니다. …
해병들의 가슴마다에 그토록 큰뜻을 심어주시며 위대한 수령님을 보좌하시여 해군무력의 군사장비강화를 위하여 어머님께서 걷고걸으신 길은 그 얼마였으랴.
강력한 해군무력을 창설하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구상과 의도를 누구보다 가슴깊이 간직하시고 세찬 바다바람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해병들을 찾아 걷고 또 걸으시던 어머님께서는 주체38(1949)년 5월 4일 남포조선소 군함건조장을 찾으시여 이곳 로동계급이 새로 건조하는 경비함도 돌아보시였다.
한창 건조중에 있는 경비함이였으나 벌써 군함으로서의 위용이 살아나고있는것을 보시고 못내 만족해하시던 어머님께서는 먼저 군함에서 침식을 하게 될 해병들의 생활문제부터 념려하여주시였다.
어머님께서는 취사장에 아직 설비들을 들여놓지 못했는데 취사장을 잘 꾸려야 한다고, 배가 흔들릴 때 화식기재들이 놀지 않게 해주고 밥가마와 국가마는 깊숙하게 걸어놓아야 한다고, 병실은 배가 크지 않은 조건에서 해병들이 잠도 자고 식사도 하고 학습이나 오락장소로도 리용할수 있도록 깨끗하고 문화적으로 꾸려야 한다고, 해병들이 바다에 나가 여러날씩 생활하여야 하는것만큼 음료수저장탕크도 크게 만들어 설치해야 한다고 세심하게 가르쳐주시였다.
이윽하여 어머님께서는 《장군님께서는 경비함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고계십니다.》라고 하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주체적인 군함건조원칙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시였다.
《앞으로 해병들의 전투훈련도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우리 식으로 해야 합니다.》
어머님께서는 해병들을 만나실 때마다 동무들은 군사훈련을 강화해서 맡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수 있게 잘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기도 하시였다.
남달리 해병들을 사랑하시며 해군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해 바치신 녀장군의 로고가 있어 청소하던 우리의 해군무력은 그처럼 짧은 기간에 그 어떤 강적도 단매에 쳐부시는 무적의 대오로 자라나게 되였다.
하기에 우리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은 해군대학에 우리 나라 건군사상 처음으로 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의 존함을 모시고 해군무력강화의 길에 쌓아올리신 위대한 업적을 길이 전하며 어머님의 뜻대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선군혁명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나가는 해군지휘관들을 양성해내고있다.
기관단총사격과 조국보위기금
국방공업의 강화는 군력강화의 필수적요소이다.
무장력의 렬세는 전패를 가져온다는것이 지나온 력사와 오늘의 현실이 보여주는 교훈이다. 총이 없어 국권을 강탈당해야 했고 총이 없어 조국과 향토를 빼앗기고 선혈을 뿌려야 했던 눈물겨운 리왕조멸망의 치욕의 력사는 이것을 력력히 증명해주고있다. 대포로 무장한 강도와 화승총으로 맞섰던 지난날의 력사적교훈과 날이 갈수록 더욱 악랄해지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책동은 우리 후손들에게 총대강화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해주고있다.
해방후 그처럼 어려운 속에서 자립적인 국방공업을 창설한다는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군사중시, 총대중시사상과 항일혁명투쟁시기 자체로 무장을 갖춘 풍부한 경험에 기초하여 해방후 지체없이 자립적인 국방공업을 창설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우리의 정규무력을 현대적무기와 전투기술기재들로 장비시킬 원대한 구상을 안으시고 주체34(1945)년 10월 9일 해방후 산업건설의 첫걸음인 강선길에 앞서 10월 2일에 군수공업건설의 출발적의미를 지니는 평천길을 먼저 걸으시여 빈터우에서 첫 병기생산기지를 창설하시였다. 해방후 우리 나라 군수공업의 새 력사는 이 뜻깊은 평천길로부터 시작되였다.
그리하여 해방후 짧은 기간에 우리의 로동계급은 자기의 힘으로 총포탄, 수류탄 등을 만들어냈으며 군대를 현대적으로 무장시킬수 있는 물질기술적토대를 마련해나갔다.
이 력사의 갈피마다에도 위대한 수령님의 선군혁명령도를 받들어 군수공업창설에 공헌하신 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의 업적이 깃들어있다. 녀사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심혈을 덜어드리기 위해 4차례나 평천병기공장을 찾으시고 이 공장 일군들과 로동자들에게 우리자체의 힘으로 병기생산을 다그쳐 인민군대를 현대적무기로 무장시키며 병기공업을 창설하고 발전시키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심혈을 덜어드리기 위하여 애국적열성을 다 바쳐나갈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녀사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간곡한 가르치심을 받아 안고 떨쳐나선 이 공장 로동계급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기를 만들어내면 우리 나라는 다시는 침략자의 롱락물로 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심장에 자력갱생의 정신을 창조한 항일유격대원들의 백절불굴의 의지를 깊이 심어주시였다.
어느날에는 해종일 나가시여 로동자들과 함께 일하시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만드는것을 조선사람들이라고 왜 못 만들겠는가, 옛날에 리순신이 거북선을 만들고 최무선이 화약을 만들어내여 세상에 없는 병기기술을 창조하였는데 그 후손들인 우리가 이쯤한 총은 얼마든지 만들어낼수 있다고 고무격려하여주시였다.
그리하여 그처럼 고대하고 바라던 우리의 기관단총이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주체38(1949)년 3월부터 기관단총을 계렬생산하게 됨으로써 우리 나라 병기공업이 새로운 높은 발전단계에 들어서고있던 주체38(1949)년 6월 16일 백두의 녀장군 김정숙녀사께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4번째로 병기공장을 찾으시였다.녀사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생산현장을 일일이 돌아보시면서 병기공장 로동계급이 이룩한 성과에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신 다음 이 공장 로동계급이 자체의 힘으로 만든 기관단총과 탄알로 기관단총시험사격을 하시였다. 사격을 마치신 녀사께서는 오늘 공장을 돌아보고 신심을 가졌는데 우리 로동계급이 만든 총까지 쏴보니 더욱 큰 힘이 생긴다고, 이제는 총에 대한 우리 인민의 세기적숙망이 풀리게 되였다고 하시며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환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러시고 녀사께서는 총이 아주 훌륭하다고,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굳게 뭉쳐 새 조선을 건설하는데서 이 공장 로동계급이 앞장서나가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우리의 기관단총에는 전체 군대와 인민을 자기의 무기로 무장시켜 무장한 인민의 나라로 만드시려는 김정숙녀장군의 크나큰 심혈이 뜨겁게 깃들어있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생의 마지막나날까지도 날로 로골화되는 미제와 그 주구들의 침략책동에 대처하여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 자신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깡그리 바치시였다.
1949년에 들어서면서 미제와 그 주구들은 《북진》의 나발을 요란스럽게 불어대면서 군비확장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미제는 제놈들의 극동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나라를 무장시키는것보다》 남조선을 무장시키는것이 급선무이며 《세계의 어떤 국민보다도 그들이 더 많은 무기를 요구할 정당한 근거가 있는것》이라고 줴치면서 이 시기 12만여정의 총과 150문의 반땅크포, 79척의 함선과 수십대의 비행기를 포함한 도합 1억 1,000만US$의 군사원조를 남조선에 넘겨주었다.
남조선통치배들은 한해의 세출총액 529억 8,900만원중에서 46%에 해당하는 243억원을 군사비로 충당하고도 모자라 세금징수라는 명목밑에 인민들의 돈주머니를 강제로 털어내였다.
이러한 긴박한 정세는 갓 창건된 인민군대의 무장장비를 개선하고 나라의 방위력을 더욱 강화할것을 절실하게 요구하고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국방력은 현대적무장을 갖춘 적들의 침략을 단매에 물리칠수 있도록 준비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인민군대의 매 병사들이 총을 쥐였다고는 하지만 기관단총과 자동무기들을 비롯한 일련의 군수기재들이 모자랐다. 더우기 문제로 되는것은 우리에게 비행기와 함선, 땅크와 포를 비롯한 중무기들이 갖추어지지 못한것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다른 나라들에 손을 내밀며 무장을 달라고 할수도 없었고 어데 가서 당장 무기를 사올만 한 돈도 부족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 일부 사람들은 쏘련과 같은 큰 나라들에서 무장을 빌려오자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모자라는 현금을 인민들의 세금을 올려서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되지 않겠는가고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은 우리의 정책이 아니며 인민을 등지는것으로 된다, 우리 인민은 애국심이 높고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무비의 헌신성을 발휘해온 용감한 인민이다,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놈들이 대군으로 우리 나라에 침입하여왔을 때에도 우리 인민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 일어나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웠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도 각계각층 우리 인민은 항일유격대를 물심량면으로 적극 지지성원하고 여러가지 형태의 반일투쟁을 과감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애국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인민의 힘과 지혜를 발동하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군대의 무장장비를 해결하는 문제를 전체 인민을 발동하는 방법으로 해결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발기에 의하여 주체38(1949)년 7월 15일 조국보위사업을 전인민적으로 후원할 목적밑에 대중적인 조국보위후원단체인 조국보위후원회가 조직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보위기금을 헌납할것을 전체 인민들에게 호소하신 그 다음날 저녁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늦어서야 댁으로 들어서신 어버이수령님께 진지상을 올리시고나서 낮에 작성한 댁의 조국보위기금희사명세를 말씀드리시였다.
그 명세에는 쓰띠꼬브대사가 댁에 기증한 2개의 은초대, 치스챠꼬브부인이 료양기념으로 선물한 합금으로 장식한 화장품통 그리고 지방에 파견하였던 한 항일혁명투사가 보내온 귀중한 보약들도 들어있었다.
또한 명세에는 가정의 식사량을 조절하여 모두 기금헌납에 쓴다는것까지 포함되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기금명세를 보아주시면서 《잘했소. 조국보위기금희사야 수상네 집이 응당 앞장서야지.》라고 하시며 매우 만족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오늘 집으로 들어오면서 빈 배낭 두개를 놓고 첫 살림을 시작한 우리 집에 조국보위기금으로 희사할것이 무엇이겠는가고 생각했는데 정숙동무가 내 마음을 알고 좋은 안을 만들어왔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고 이 헌금과 귀금속들을 지체말고 조국보위후원회에 헌납하라고 하시였다.
그리하여 조국보위후원회 중앙본부에는 어버이수령님의 댁에서 마련한 기금이 제일 선참으로 헌납되게 되였다.
그 다음날부터 가정의 진지상우에는 김정숙녀사께서 작성하신대로 잡곡이 전에보다 더 많이 섞인 조밥과 가지수가 줄어든 식찬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때 댁에 와계시던 리보익할머님은 이 광경을 차마 볼수 없어 자신께 차례진 흰쌀밥을 어린 증손녀에게 덜어주시며 《산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하던 장군네 집이 광복이 되였어도 여전히 조밥이로구나. 이제 너희 아버지가 나라를 통일시킨 다음에 이런 일을 옛말로 하자.》라고 하시였다.
이무렵 만경대일가분들도 조국보위기금희사에 앞장섰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정과 만경대일가분들속에서 높이 발휘된 애국충정의 마음은 온 나라 인민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조국보위기금희사사업이 시작된지 한달도 못되는 사이에 헌납된 기금액수는 수천만원에 달하였다.
그러던 9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그날 저녁 댁으로 들어서신 위대한 수령님께 김정숙녀사께서는 또다시 장만하신 조국보위기금정형을 보고드리시였다.
거기에는 몇달전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받으신 생활비도 들어있었다.
그 생활비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산에서 고생만 시킨 정숙동무에게 내 아직 변변한 옷 한벌 해주지 못했다고 하시며 이번에 내가 준 돈은 어디에 절대 쓰지 말고 모아 두었다가 좋은 옷 한벌 해입으라고 간곡히 당부하신것이였다.
조국과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시는 김정숙녀사의 숭고한 애국지성을 두고 한동안 말이 없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각깊은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동무는 언제 가야 변변한 옷 한벌 입어보겠소.》
《장군님, 저를 두고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라가 있고서야 저도 있는것이 아닙니까. 저는 나라가 통일된 다음에 제일 좋은 천으로 제일 좋은 옷을 해입겠습니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조국방위를 위하여 가정의 모든것을 다 바치시는 김정숙녀사의 소행을 높이 평가하여주시면서 가정의 기금희사명세를 기꺼이 찬성하여주시였다.
하여 그 다음날 김정숙녀사께서는 몸소 마련하신 조국보위기금을 또다시 조국보위후원회에 바치시였다.
그날은 조국의 부강번영과 완전통일독립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시던 김정숙녀사께서 서거하기 며칠전이였다.
선군으로 빛나는 내 조국의 첫 기슭에서 나라의 방위력을 철벽으로 다지시려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나날까지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불태워오신 위대한 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의 뜨거운 애국적헌신에 떠받들려 나라의 방위력은 나날이 굳건히 다져졌다.
그처럼 위대한분이시였기에, 그처럼 위대한 애국자이시였기에 철벽으로 다져진 선군조선, 불패로 위용떨치는 혁명무력과 강력한 국방공업의 오늘을 보면서 우리 군대와 인민은 그 나날에 기울이신 김정숙녀사의 불멸의 그 업적을 조선혁명의 선군로정과 더불어 잊지 못하는것이다.
전사들을 사랑의 한품에 안으시고
세상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전설도 많다.
그러나 김정숙녀사처럼 인민군전사들의 친어머니가 되시여 그처럼 따사롭게, 그처럼 세심하게 보살펴주신 위대한 어머니를 찾아볼수 없다.
진정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혁명전사들을 먼저 생각하시고 위하시는 김정숙어머님의 은정깊은 사랑은 한량이 없으시였다.
주체37(1948)년 9월 19일 김정숙녀사께서는 제1기졸업식을 진행하는 내무성 중앙보안간부학교를 찾으시였다.
녀사께서 한 책임일군의 안내를 받으시며 먼저 학교식당에 들어서시였다.
때마침 식당에서는 많은 인원들이 특식을 차리느라고 분주히 일손을 다그치고있었다.
방바닥에는 물이 질퍽하고 김이 뽀얗게 서리여 앞사람도 가려보기 힘들었다.
취사장안에 들어서신 녀사께서는 물묻은 취사원들의 손을 허물없이 잡아주시고 일군들에게 고기는 정상적으로 공급받는가, 김치는 매일 학생들에게 공급하는가를 알아보시였다.
《학생들에게 김치를 떨구지 말고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녀사께서는 지금 나오는 배추로 김치를 담그면 맛이 좋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지난날 산에서 싸울 때 항일유격대원들은 이런 배추를 가지고 김치를 담그어 먹지 못했다고 말씀하시였다.
녀사께서는 그때 정 김치가 먹고싶으면 산나물을 뜯어다가 깨끗이 다듬은 후 거기다가 소금을 적당히 뿌리고 그것을 밥이 거의 잦아갈 때 밥가마에 넣었다 꺼내 먹군 하였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면 제법 김치맛이 들군 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항일유격대의 작식대원들은 어떻게 하면 대원들에게 한가지라도 더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 공급하겠는가 하는것을 늘 생각하면서 식사보장에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고 하시였다.
그리고 식당을 위생문화적으로 관리하며 화식기재들도 철저히 소독하고 식중독을 비롯한 각종 질병이 발생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밥가마뚜껑을 여시여 밥주걱으로 밥을 저어보시고 밥이 잘되였다고 하시며 웃음을 지으시던 녀사께서는 가마치는 다 어떻게 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야간근무성원들에게 간식으로 준다는 한 일군의 대답을 들으신 녀사께서는 그것을 콩기름에 튀겨서 포도당을 조금 치면 영양가높은 간식으로 된다고 하시며 료리방법까지 가르쳐주신 다음 취사장을 떠나시였다.
이어 남새를 손질하는 곳에 이르신 녀사께서는 식당일을 도우러 온 군관가족들과 허물없이 자리를 같이하시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녀사께서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이제는 우리 녀성들도 나라의 주인으로 되였으니 앞으로 그저 집안일이나 하면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나라살림살이를 맡아보는 주인된 립장에서 일을 찾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계속하시여 집에서 아이나 보고 남편시중이나 들면서 헛되게 시간을 보내지 말고 학습도 하고 가정과 마을도 알뜰하게 꾸리고 돼지도 기르고 닭도 쳐서 군인들의 식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하며 군관가족답게 모범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녀사께서는 가정들에서 고추장을 담그는가, 땔나무가 보장되는가고 물어보시면서 교직원들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식당에서 오랜 시간 일손을 도우시던 녀사께서는 학교의 한 일군과 함께 학교주변을 돌아보시였다.
녀사께서는 식당곁에 있는 피복창고쪽으로 향하시면서 목욕탕운영정형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였다.
그무렵 학교에서는 목욕탕관리운영사업을 제정된 질서대로 하지 못하여 군인들의 위생사업에 적지 않은 불편을 주고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아시게 된 녀사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집단생활에서는 위생사업에 각별한 주의를 돌려야 합니다. 군인들이 위생사업을 잘하지 않으면 질병을 미리 막아낼수 없습니다.》
그러시면서 학생들이 생활준칙의 요구대로 목욕도 자주 하고 속옷도 제때에 빨아 갈아입도록 하며 자기 전에는 반드시 발을 씻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학생들의 후방생활을 책임적으로 조직해주지 못한데 대해 깊이 뉘우쳤다.
녀사께서는 계속하여 학생들의 의복수리를 피복수리소에서 해줄데 대하여서와 물자보관사업을 잘할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다시 걸음을 옮기신 녀사께서는 피복창고도 돌아보시면서 일군들에게 군인들의 생활을 친부모된 립장에서 따뜻이 보살펴줄데 대하여 간곡히 당부하시였다.
이날 성대한 졸업식이 있은 다음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졸업생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연회가 있었다.
녀사께서는 졸업생들속에 자리를 잡으시고 손수 그들앞에 음식그릇도 날라다놓으시고 손에 수저도 쥐여주시면서 졸업하고 부대에 배치되면 이러한 모임이 없을텐데 어서 어려워말고 많이 들며 즐겁게 보내라고 말씀하시였다.
녀사께서는 돌아가실 때에도 친히 졸업생 한사람한사람의 잔등을 자애로운 손길로 어루만져주시며 새로운 초소에 가서 건강한 몸으로 일할것을 바란다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날 학교의 모든 교직원, 학생들은 몸소 졸업식장을 찾아주시고 사업과 생활을 세심히 보살펴주시며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 녀사에 대한 다함없는 경모의 정을 안고 앞으로 반드시 위대한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한 군인들로 자라날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인민군전사들에 대한 녀사의 사랑은 언제나 마를줄 모르는 샘처럼 그끝을 몰랐으며 비오는 날이나 눈보라세찬 날이나 언제나 따사롭게 흘러넘치였다.
주체38(1949)년 2월초 어느날 밤이였다.
녀사께서는 기승을 부리며 휘몰아치는 눈보라속을 헤치시고 친히 전사들의 병실을 찾으시였다.
밤이 깊도록 바쁘신 일로 잠 못드시였던 녀사께서 사나운 바람소리를 들으시고 전사들이 념려되시여 오신것이다.
그이께서 병실현관에 들어서시였을 때는 자정이 훨씬 넘은 깊은 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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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깊은 밤에 뜻밖에도 자기들의 병실을 찾아주신 김정숙녀사를 만나뵙게 된 한 군관은 너무 반갑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여 변변히 인사도 올리지 못하였다. 그러는 그를 정겹게 바라보시던 녀사께서는 병실이 춥지 않은가고 조용히 물으시였다.
춥지 않다는 군관의 대답을 확인이라도 하시려는듯 녀사께서는 옆에 서있는 직일병에게 정말 춥지 않는가고 다시 물으시였다.
직일병도 춥지 않다고 했을 때에야 녀사께서는 안심되시는듯 미소를 지으시며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병실에 들어서시였다.
병실의 온도를 가늠해보시려는듯 잠시 서계시다가 함께 온 부대장에게 병실이 이만하면 춥지 않겠다고 하시며 지금 병실에 무엇을 때는가고 물으시였다.
석탄을 땐다는 부대장의 대답을 들으신 녀사께서는 군인 한사람한사람이 귀중한 보배들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언제나 춥지 않게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부대장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해방전같으면 긴긴 겨울밤 헌 누데기 한장으로 온 집안식구들이 쪽잠을 자야 했고 살이 드러나는 베잠뱅이에 짚신을 신고 떨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들이였다. 그러나 군인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속에 철따라 새 군복을 공급받고 폭신한 모직모포에 백포까지 받쳐 덮으면서 세상에 부럼없이 지내는데도 녀사께서는 이처럼 군인들의 생활에서 사소한 불편이라도 있을세라 친부모의 정으로 세심히 보살펴주시는것이였다.
병실을 다 돌아보신 녀사께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시려다말고 되돌아서시였다. 그러시고는 깊이 잠든 군인들을 자애에 넘치신 눈길로 바라보시며 복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였다.
한 전사앞에 이르신 녀사께서는 그가 차버린 모포를 손수 덮어주시며 덥다고 덮지 않고 자면 이 추운 날씨에 감기에 걸릴수 있다고 하시면서 지휘관들이 군인들의 생활을 잘 돌봐줄데 대하여 간곡하게 당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지휘관들은 자책감에 얼굴이 뜨거워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녀사께서는 군인들의 생활을 책임진 지휘관들도 미처 생각지 못한 그 사소한 문제까지도 제때에 바로잡아주시는것이였다.
군인생활을 위하여 기울이신 녀사의 따뜻한 사랑은 그 끝을 몰랐으며 그 길에서 녀사께서 걸으신 로정은 몇천몇만리인지 헤아릴수 없다.
녀사께서는 인민군대의 어느 한 부업농장을 여러차례 찾으시여 남새농사와 돼지기르기에서 시범을 창조하시고 모든 군부대 부업농장들에 일반화하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빵공장을 찾으시여서는 군인들의 식생활을 다양하게 할수 있도록 질좋은 빵을 생산공급할뿐아니라 훈련을 할 때나 유사시에 간편하게 식사를 할수 있는 건빵을 많이 생산하도록 하시였다.
군인상점, 군인식당, 군대병원 그 어디에나 녀사의 손길이 뜨겁게 미치고있었다.
참으로 김정숙녀사는 인민군군인들모두를 한집안식솔로 거느리시고 그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불편이 없게 돌보아주시는데서 기쁨을 찾으시며 온갖 정성과 심혈을 다 바치시는 인민군군인들의 어머님이시였다.
인민군전사모두를 한품에 안으시고 더울세라 추울세라 보살펴주시는 김정숙어머님의 다함없는 사랑과 은정속에 혁명무력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혁명위업을 목숨으로 보위하는 주체의 강군으로 급속히 강화발전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