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 유태영박사, 한호석박사 만나 시사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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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유태영박사, 한호석박사 만나 시사질문
[뉴저지 포트 리=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정리] <유엔의 제프리 펠트먼 사무차장의 평양방문의 배경과 의미>에 대하여 쓴 분석글을 읽은 유태영 박사는 12월13일 이글의 필자인 한호석 뉴욕통일학연구소 소장을 만나 오찬을 함께 나눈뒤 시사대담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유태영박사는 몇가지 질문을 하고 그의 진단을 청취했다. 그 내용을 여기에 축약하여 게재한다.
[질문]펠트만 유엔사무차장의 평양방문 의미에 대한 분석글을 민족통신과 자주시보를 통해 잘읽었다. 그 이후 변화와 움직임에 대해서 듣고 싶다.
(답변)그 이후 두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북에서 제7차군수공업대회가 있었는데 태정호 대장이 연설을 통해 고난의 행군시절에 핵무력을 준비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20여년이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강의 핵강국으로 지향해서 나간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래서 2018년 신년사에 핵강국으로 선언하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할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오늘 13일 보도에 따르면 틸러슨 미국무장관이 <무조건 첫대화> 제의발언이 나온 파격적인 일이 있었다. 이것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는 대환영이었고, 미국 언론들도 대체로 미국의 대북정책이 바뀌었다(Shifted)고 반응하였다. 펠트만 유엔사무차장이 돌아와 안또니오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에게 방북보고를 한 이후 이러한 내용들이 미국 백악관측에 전달된 것으로 본다. 틸려슨의 발언도 그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말해 유엔이 조미핵대결을 종식시키기 위해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를 서겠다고 나선 것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펠트먼의 조선방문을 계기로 조선과 유엔사무국은 각이한 급에서 내왕하면서 의사소통을 정례화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구떼헤스가 이끄는 유엔사무국이 핵대결을 벌이는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과연 중재를 제대로 설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엔사무국의 중재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 힘들다고 말할 수 있다. 틸러슨 미국무장관의 <무조건 첫대화>제의발언이나 미언론들의 대조선정책 변화촉구의 움직임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한다.내가 일본 강연에서 금년내 조미관계에 획기적인 전환이 있을것으로 예견하였는데 이제 그 날자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보름정도 남았는데 일단 두고보자고 여운을 남긴다.)
[질문]해내외 진보세력내부에는 촛불민심으로 정권의 중심에 오른 문재인새정부의 남북관계 입장과 자세에 대하여 일부는 좀더 기다려보자며 비판을 유보하고 있는 동포들도 있는가하면 시작부터 이해할 수 없다면서 아예 기대를 접고 있는 동포들도 있는데 이에대하여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답변)내가 보기에는 문재인정부가 정세를 보는데 아주 둔감한것 같다. 이들은 정세를 읽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하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신통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질문]요즈음 들어 이른바 <태극기부대>가 한국이나 해외동포사회에서 기승을 부리며 폭력행위까지도 나오고 있는데 이것의 현상은 어떻게 보는가.
(답변) 그같은 현상은 극우보수세력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로 보인다. 초조와 불안의 표현으로 보면 좋겠다.
[질문]6.15선언과 10.4평화번영선언이 이명박정권과 박근혜정권에 들어와 고수이행되지 못하고 중지된 상태이고 이에 따라서 6.15민족공동위원회 활동과 그 지역위원회 활동도 침체된 상태인데 이런 운동이 활성화 되는 전망에 대해 듣고 싶다.
(답변)이 운동은 당국간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의 정세를 보면 조미,북미간의 협상 가능성은 보이는데 오히려 남북간의 협상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문재인정부가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데 그 원인도 있다고 본다.
[질문]지금 조미관계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데 남북관계는 얼어붙은 상황이다. 우리가 보기는 미국이 오히려 북미관계 정상화를 서두르고 있어 보이는데,이에 비해 한국이 북미관계가 정상화되면 주한미군이 철군될것이 자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이 당할 그 경제금융 체계가 파탄날 우려가 큰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답변)오늘날 한국의 경제금융체계는 아주 취약하다. 대만의 경우와도 다르다. 내수를 견딜 힘이 없다. 자급자족율이 20% 안팎인데 미국이 손을 떼면 한국은 간단히 말해 경제금융체계는 파탄될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국가재정이 바닥나 있는 상황이다. 이미1997년 IMF(국제금융기구)사태가 발생되어 난리를 겪은바 있었다. 김영삼정부때 실시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여 거둔 돈들이 탕진해 버렸기 때문에 국고자금이 없다는 뜻이다. 둘째로 가계부채가 기하급수로 늘어나 한국 국민들의 부채가 엄청나게 불어난 상황이어서 빚을 갚을 길이 없는 것이고, 셋째로 비정상적 자본투기라고 볼 수 있는 <Kripto Currency>라고 하여 비트 코인 같은 것들이 2천개나 되는데 여기에 돈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하여 운영되는 제도이다. 그런데 여기다 자본을 투입해 보았자 이 자금이 생산현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 돈이 밖으로 유출할 수 있어 여차하면 한국의 자본을 밖으러 빼돌리는데 이용되기 쉬운 부조리한 제도로 지적받고 있다, 이것은 국제은행이 아니고 국제사회에 있는 개인이 만든 금융제도로<가상화폐> 혹은 크립토 커렌시라고 말한다. 이 가상화폐를 가장 많이 구입한 나라 사람들이 한국사람들로 나타났다. 주한미군철수하면 이런 돈들은 몽땅 외부로 빠져나간다. 중국같은 나라는 이런 제도를 철저하게 금지시키고 있다. 다시말하면 한국의 금융경제 체제가 이렇게 아주 취약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질문]그렇다면 한국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변)한국경제구조가 그렇기 때문에 그때가서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그럼으로 나중에 후에 하지 말고 지금부터 <우리민족끼리>를 생각해야 한다. 주한미군 철군문제는 조만간에 거론될 것으로 전망한다. 그때가서 당황하지 말고 한국정부는 지금부터 금강산관광을 재개하고, 개성공단을 다시 열것을 구상하여 자체적으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 즉 <우리민족끼리>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끝)
한호석 박사(뉴욕 통일학연구소 소장) 발자취: [뉴욕=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한호석박사는 1955년 3대독자로서울에서 태어나 배재고등학교를 나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1981년 유학생으로 도미했다. 그는 뉴욕 맨하탄에소재한 유니온 신학대학에 입학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신학자 제임스 콘 교수의 지도로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맑스철학등 진보신학에 열중했다.
한호석 박사는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던초기에 과목과제로 학기말 숙제로논문(Term Paper)을 제출하였는데 그 주제가<민중신학>에 관한 고찰이었다. 세계적인 해방신학자인 제임스 콘 교수가 이 논문을접하고 한국에서의 <민중신학>을 알게되었다. 그는 <민중신학>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지영어로 소개된 자료들이없어 궁금하던 중 한호석 학생의 논문을접하고 이 내용이아주 훌륭하여 한호석 학생을콘 교수의 관심있는학생으로 꼽게 되었다.
콘 교수는평소때에도 그 당시에한국의 지도자는 함석헌선생이고 그리고 학생으로서는 한호석을 미래의지도자로 꼽고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어느날 갑자기 한호석학생이 학교를 그만두고어디론가 사라졌기에 한동안그를 무척 찾았다고한다. 유니온 신학교의유명한 <해방신학> 학자로서제임스 콘 박사는한국에서도 그 이름이알려진 신학자였다. 그가 1979년에 이화여대에서 강연할때 한호석 학생도그의 신학이론에 매혹되어그 강연회에도 참석한적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는과정에서 광주항쟁으로 투쟁하다가 밀선을 타고 미국으로 망명온 윤한봉씨와 인연이 되어 유니온 신학교 공부를그만두고 자주, 민주, 통일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계기가된 것은 한호석학생이 뉴욕 코리아타운이 있는 플러싱에서 청년운동을 하였는데 그 학생운동내부에서 공개운동과 비공개운동이라는 쟁점들이 내부의뜨거운감자로 부상될때 그것이 양측의의견조정으로 정리되지 못하고그만 그 청년조직이 더 이상 활동하지 않고 있을 무렵에 해외한민보 서정균 발행인의아들 서혁교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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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서혁교씨(콜롬비아대학을 졸업한 1.5세)가 중간 다리를 놓아 윤한봉씨와 한호석학생이 서로 의기투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1984년)부터 한호석학생의 인생은재미동포사회 청년운동가로 변신하는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달라스 SMU 신학대학을 다니던 정기열학생도 재미한청년, 한겨레연합 등에 가담하면서 이른바 윤한봉씨가 조직한 <민족학교> 조직은 미국내 대도시에는 청년운동 조직들이건설되었고, 이것이 확대되어카나다에 2개조직, 그리고호주에도 같은 계열의청년조직이 건설되어 확산된바있었다.
이러한 조직들의확산에 기여한 인물들은윤한봉, 한호석, 정기열3인방으로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3인은 인생을 운동에걸었던 열렬한 애국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3인중에한호석박사는 이 조직에서나오게 되었고, 그 이후에 정기열박사도 나오게되어 윤한봉 민족학교조직은 사양길에 접어 들기 시작하였다. 그렇게되지 민족학교 계열단체들은 통일운동을 접게 되었고, 통일운동에 관심가졌던 청년학생들과 회원들, 지원자들은 저마다 뿔뿔이흩어지게 되었다.
한때 재미동포청년운동의 기수였던 윤한봉씨는 1947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2007년 암투병하다가 향년60세로 사망했다. 1980년 5월 지역 학생운동세력의 주모자로 지목돼수배생활을 했다. 그는 1981년 4월 화물선레오파드호에 숨어 35일을 연명해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는 미국에 가 민족학교와 재미한국청년연합 등을 결성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오다 1993년 5.18 수배자 가운데 마지막으로 수배가 해제되자귀국했다. 수년후에 미국을방문한 그는 자신이설립한 단체의 구성원들의 주도권 다툼에개입해 그의 오랜 활동에 오점을 남겼다. 그는 귀국 이후 5.18기념재단 설립에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민족미래연구소장과 들불야학기념사업회장 도맡았지만 정작 본인의 피해 보상을거부했다. 그의 사후 (사) 합수 윤한봉기념사업회가 결성돼 살아남은자의 죄의식을 버리지못하고 평생을 치열하게살아온 그를 기리고있다.
한편 한호석박사와 정기열박사는 윤한봉 조직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자주연합>, 통일학교, 통일학연구소 및 전민특위, 제4언론, 21세기 홈페지경영 등 자주, 민주, 통일운동 조직에서 쉬지 않고 활동해 왔다. 특히 한호석박사는 문필활동을 통하여 북부조국 바로알리는 글들을 쉬지않고 집필해 왔다. 그는 명실공히 북조선 전문가로 이름을 떨쳐왔다. 지금은 그의 글이 한국의 자주시보와 미국의 민족통신에 게재되어 왔다. 그는 또한 2004년 민족통신이 제정한 제2회 민족언론상을 수상한바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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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2회 민족언론상 시상식서 한호석 박사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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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2회 민족언론상 시상식서 한호석 박사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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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2회 민족언론상 시상식서 한호석 박사와 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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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2회 민족언론상 시상식서 한호석 박사 수상
*제2회민족언론상 수상관련 보도자료
http://m.jajusibo.com/a.html?uid=20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