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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군의 어머니 김정숙녀장군 48. 항일혁명투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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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4,549회 작성일 18-01-14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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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혁명투사들과 함께

 

변함없이 수령님께 충직하도록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 서는 해방후 새 민주조선건설과 조국통일의 력사적위업을 완성하기 위한 장엄한 투쟁의 전초선에 일제와의 결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항일혁명투사들을 내세워주시였다.

언제나 위대한 수령님의 사업을 최상의 수준에서 보좌해드리는것을 첫째가는 의무로 여기시는 김정숙녀사께서는 그때마다 새 혁명초소로 파견되여가는 혁명전우들을 만나주시였다.녀사께서는 그들에게 어제까지는 조국해방을 위하여 싸워왔지만 이제는 새 조선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간고한 투쟁을 함께 해나가자고 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빛나게 실현하도록 따뜻이 이끌어주시였다.

주체35(1946) 7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업하고있던 항일혁명투사 강건을 조국으로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은 강건은 몹시 기뻤다조국이 해방되였어도 다른 임무가 맡겨져 그처럼 오고싶어도 오지 못하던 조국에 와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일할수 있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하늘을 날것 같은 기분이 솟구쳐올랐다.

평양에 도착한 그는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기 위하여 그이의 저택으로 갔다.

그때 수령님께서는 아직 댁으로 들어오시지 않았고 김정숙녀사께서 그를 맞아주시였다.

녀사께서는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먼길을 오기에 얼마나 수고하였는가고이렇게 다시 만나니 정말 기쁘다고 하시면서 장군님께서 곧 돌아오실테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를 방으로 안내하시였다.

강건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장 충직한 친위전사이신 김정숙녀사께서 항일의 나날 대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시며 그들을 위훈에로 불러주시던 만가지 일들이 일시에 떠올라 녀사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가득히 차올랐다.

더우기 나라가 해방된 오늘에도 평범한 옷차림을 하시고 검소하게 생활하시는 녀사의 인민적풍모앞에서 그는 더없이 숙연해지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였다.

녀사께서는 그와 그간의 회포를 나누시고나서 친히 그에게 음식상을 차려주시였다.

강건은 고마움이 넘쳐나고 하많은 추억을 불러일으켜주는 그 좌석에서 선뜻 수저를 들지 못하였다그는 장군님께서 돌아오신 다음에 들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녀사께서는 시장하겠는데 사양말고 어서 들라고 거듭 권하시였다.

그가 식사를 끝냈을 때였다.

녀사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 지난날에도 어려운 일을 많이 하였는데 앞으로도 어려운 일을 더 많이 하여야 할것 같습니다.

지금 조국의 정세는 매우 복잡합니다.

미제침략자들이 남조선을 강점하고 우리 나라를 북남으로 갈라놓은 형편에서 우리 혁명은 더욱 간고하고 장기적인 투쟁으로 될것 같습니다그런것만큼 우리는 앞으로 더욱 커다란 난관과 시련을 뚫고나갈 각오를 가져야 할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통일의 길이 간고하여도 우리는 민족의 숙원을 꼭 이룩하고야말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손에 무장을 잡을 때 언제면 조국을 해방할것인가고 생각했지만 장군님을 모시고 그 소원을 오늘 이렇게 풀지 않았습니까그런것과 같이 나라의 통일독립도 반드시 실현될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새 조국건설로선과 조국통일사상과 로선을 철저히 관철하여 부강번영하는 인민의 락원을 건설하시려는 열렬한 념원과 혁명적의지가 맥박치는 녀사의 그 절절한 음성은 강건의 가슴속에 뜨거운 열정을 안겨주었다.

고향이 경상북도 상주인 그는 사실 위대한 수령님의 저택으로 달려오면서도 미제침략자들에게 짓밟힌 남조선동포들에 대하여고향땅에 대하여 생각하며 원쑤에 대한 저주와 분노로 가슴 불태우기도 하였지만 녀사께서 말씀하시는것처럼 그렇듯 숭고한 높이에서 조국과 민족앞에 지닌 자기의 사명감으로 느끼지 못했던것이다.

그는 녀사께 정중히 말씀드렸다.

《이제 하신 말씀을 듣고보니 정말 장군님을 모시고 항일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디던 그때와 같은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백두산에서 시작된 행군길을 제주도 한나산까지 이어가려면 정말 녀사께서 말씀하신것처럼 지난날보다 더욱 간고한 투쟁을 해야 할것 같습니다이제는 알만 합니다모든것이 명백합니다장군님께서 왜 저를 부르셨는지 리해됩니다.

강건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고는 마음의 흥분을 진정할수 없어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항일의 나날에는 빛나는 모범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한 수령님의 령도에 충실하도록 대원들을 이끌어주시고 해방된 오늘은 새 조국건설과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변함없이 앞장에 서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는 녀사의 뜨거운 사랑에 목이 메였다.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댁으로 들어오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강건동무가 왔는가고 하시면서 두팔을 벌리시고 다가가시였다.

강건은 수령님의 넓은 품에 와락 안기여 한동안 기쁨과 행복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였다.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시고 오늘은 잠시의 휴식도 없이 새 조국건설투쟁의 진두에서 우리 인민을 이끄시는 수령님을 우러를수록 그는 형언할수 없는 경모의 정이 뜨겁게 솟구쳐올랐다.

그날 그는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조성된 내외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나서 새 조국건설과 전조선의 완전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반드시 수행해야 할 중요한 혁명임무를 받았다.

그는 항일대전의 혈로를 헤치며 조국해방의 날을 가져온것처럼 김정숙녀사의 빛나는 모범을 따라배워 수령님께서 주신 혁명과업을 반드시 훌륭히 수행할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김정숙녀사의 따뜻한 보살피심이 있어 그는 새 조국건설과 나라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에 언제나 헌신하였으며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성스러운 격전장에서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주체혁명위업에 충실하였다.

김정숙녀사의 이렇듯 크나큰 은정은 항일의 전우들을 위대한 수령님의 새 조국건설로선관철의 진두에서 헌신하게 한 힘있는 추동력이였다.

주체38(1949) 4 29일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을 받아안은 항일혁명투사 류경수부부는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신 어머님께서는 나는 동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며칠전에 류경수동무가 많은 땅크병들을 훌륭히 키워냈기때문에 땅크부대를 더 늘일수 있게 되였다고 기뻐하시였습니다그러시고는 이제는 땅크려단을 조직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땅크려단장사업을 류경수동무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그래서 내가 장군님의 높은 신임에 의하여 땅크려단장으로 된 류경수동무의 군복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시고나서 어머님께서는 손수 지으신 군복을 류경수에게 입혀주시였다.

류경수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금치 못하면서 군복을 영원히 벗지 않고 장군님의 전사로 싸우겠다고 어머님앞에 맹세다지였다.

그의 결의를 들으시고 못내 만족해하시던 어머님께서는 지금 남조선을 강점하고있는 미제국주의자들은 리승만괴뢰도당을 부추겨 38°선일대에서 매일같이 전쟁도발책동을 감행하고있습니다인민군대에서는 우리 나라에 조성되고있는 긴장한 정세에 대처하여 부대의 전투준비를 더욱 강화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류경수동무와 순희동무가 장군님을 받드는 길에서 언제나 변심이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비단 그들뿐이 아닌 모든 항일혁명전우들에 대한 어머님의 믿음이였고 사랑이였다선군으로 빛날 조국의 미래를 위한 투쟁에서 항일혁명투사들이 변함없이 위대한 수령님께 충직할것을 바라는 녀사의 간절한 당부였다.

어머님의 그처럼 크나큰 믿음과 은정에 떠받들려 항일의 투사들은 정규적혁명무력당과 국가의 창건과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전렬에 서있었으며 그들의 힘찬 투쟁속에 선군조선의 부강번영을 위한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가 확고히 보장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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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히 찾으신 묘소

 

동지애로 조선혁명을 시작하시고 동지애로 새 조국 건설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혁명적의리를 가장 숭고한 높이에서 체현하신 김정숙녀사께서는 동지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시고 가셔주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하시였고 애석하게 희생되였을 때에는 어느 한순간도 먼저 간 혁명전우들을 잊으신적이 없으시였다.

세월의 눈비속에 강산은 변해도 더 뜨거워지는 전사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어버이사랑을 그들과 그 자녀들에게 더 잘 미치게 하시려는 녀사의 마음은 남달리 크시였다.

주체36(1947) 11월 어느날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심하게 앓고있는 항일혁명투사 안길을 찾아 입원실로 오시였다.

녀사께서는 반가와 어쩔줄 모르는 안길의 아들딸들의 어깨를 다정히 어루만져주시면서 어머니가 없으니 어린 너희들이 마음고생을 더 한다고 하시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따뜻이 위로해주시였다.

녀사께서는 그들을 앉혀주시고나서 안길에게 《안길동무기운을 내세요장군님께서는 오늘 아침에 동무를 치료할 박사선생을 데려오도록 비행기를 띄우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손수 싸가지고 오신 그릇보자기를 푸시였다.

거기에는 더운 김이 오르는 찰수수떡이 먹음직스럽게 담겨져있었다.

안길은 목이 메여올라 뜨거운것을 삼킬뿐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였다.

《어제 밤 장군님께서 안길동무가 찰수수떡을 좋아했다는 말씀이 계셨기에 이렇게 만들어왔는데 한개라도 들어보세요.

녀사의 말씀을 듣는 순간 세 남매의 눈앞에는 전날 저녁 병원을 찾으시여 자기 아버지가 식사를 못한다고 그처럼 걱정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그들 세 남매는 자기 아버지가 찰수수떡을 좋아한다는것을 전혀 모르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안길의 식성에 대하여 들으신 녀사께서는 밤을 새워 몸소 절구질을 하시고 떡을 빚으시였다.

녀사께서 친히 들려주신 찰수수떡을 손에 받아든 안길은 이 크나큰 사랑앞에서 감격을 금치 못해하였다자기와 가족들에게 베푸신 사랑은 실로 끝이 없으시였다.

녀사께서는 해방직후 함경북도사업을 현지에서 이끌어주시던 나날 그의 집을 몸소 찾아주시고 따뜻한 손길로 보살펴주시였으며 자신께서 평양으로 오실 때에는 그의 가족도 함께 데리고오시였다.

평양에 오시여서도 남산기슭에 자리잡고있는 그의 집을 찾아주시고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보살펴주시였다.

녀사께서는 그의 중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시였다병치료에 특효가 있는 보약재며 구미에 맞는 음식을 손수 마련해가지고 매일같이 병문안을 하시며 어떻게 하나 혁명전우를 구원하시려고 있는 힘을 다하시였다.

손수 약초를 달여 그의 가슴에 붙여주시였고 찹쌀미음을 입에 떠넣어주기도 하시며 극진하게 보살펴주시였다.

항일의 그날로부터 혁명동지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녀사의 숭고한 풍모는 언제나 전우들의 가슴을 울리였다.

그의 병세가 더 악화되여가던 어느날 김정숙녀사께서는 그를 문안하러 가시였다녀사께서는 과일물도 손수 만드시고 그가 들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음식들을 조금씩 해가지고 그의 집으로 가시였다.

그때 안길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아무래도 가망이 없다는것을 알고는 죽어도 장군님곁에 있다가 죽겠다고 하며 끝내 수령님저택옆에 있는 집으로 나왔던것이다.

녀사께서 문안을 하시자 의식이 몽롱하였던 안길은 번쩍 눈을 뜨고는 손으로 오시지 말아달라고바쁘신데 왜 자꾸 오시는가 하며 빨리 가시라는 동작을 하였다.

녀사께서는 그에게 기운을 내라고백두산에서 그렇게 잘 싸웠는데 병마와 싸워 이기지 못하겠는가고 하시며 그에게 고무를 주시였다.

안길은 그 말씀에 미소를 짓더니 눈가에 한가득 눈물을 머금었다.

그리고는 또 의식을 잃었다.

녀사께서는 그의 손을 꼭 잡으시고 물을 뿜은듯 내돋은 땀방울도 손수건으로 닦아주시며 비통한 심정을 어쩌지 못해하시였다.

녀사께서는 슬피우는 안길의 가족들을 위로하시고 다시금 그를 찬찬히 보살펴주시고나서 그 집을 나서시였다.

그집 문앞을 나서시며 자욱을 떼시던 녀사께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시고 그가 들어있는 방쪽을 다시금 돌아보시더니 눈을 꼭 감으시였다.

그러시고는 손수건을 꺼내시여 얼굴을 묻으신채 한동안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시였다.

녀사께서는 부축을 받으시며 저택으로 돌아오시면서 한 일군에게 아마 내 심정을 다는 모를것이라고나에게는 부모형제가 없다고그래서 나에게는 전우들이 다 내 혈육이라고산에서 모진 고생을 다 겪으면서도 이제 나라를 광복하고 좋은 세상을 만나면 잘 살아보자고 하던 안길이 그 소원을 성취한 오늘 저렇게 누워있으니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고 하시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그 무엇으로도 가실수 없으시여 가슴을 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가 이전에 훈춘의 지하조직에서도 일을 잘하고 유격대에 입대한 후에도 그 어떤 일도 막힘없이 잘하는 훌륭한 지휘관이였다고 하시였다.

녀사께서는 그토록 용감무쌍하고 림기응변의 지략을 가지고 잘 싸웠던 그가 조국이 광복된 후 오래동안 헤여져 고생하던 처를 만났으나 얼마전에 사망하여 비통해하였는데 이제는 또 자신이 생명을 지탱할수 없어 저렇게 누워있으니 어제 저녁에 장군님께서도 너무 가슴아프시여 저녁상도 받지 않으시고 밤에도 쉬지 못하시였다고 말씀하시였다.

녀사께서는 장군님께서 그토록 아끼시고 믿으시는 그가 끝내 우리곁을 떠나게 되였으니 장군님의 아픈 심정을 어떻게 위로해드렸으면 좋겠는지 도무지 종잡을수 없어 자신께서도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김정숙녀사의 그처럼 크나큰 사랑이 베풀어졌건만 안길은 애석하게도 눈을 감았다.

그러나 먼저 떠나간 혁명전사들에 대한 수령님과 녀사의 사랑과 은정은 변함이 없었으며 세월이 갈수록 더하여만졌다.

녀사께서는 10살난 그의 딸을 극진히 돌봐주시며 그가 아버지의 뒤를 잇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시였다.

주체37(1948) 4월 어느날이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몇명의 항일투사들을 아침일찍 저택으로 부르시였다.

그들이 저택에 이르자 녀사께서는 오늘 아침에 모란봉에 좀 다녀오자고 하시였다.

그들은 봄날씨도 따뜻하고 바야흐로 꽃계절이 다가오니 모란봉에 소풍하러 가시는게라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녀사를 따라나섰다.

녀사를 모신 승용차는 시내를 지나 모란봉의 오솔길에 들어섰다한껏 봄물이 오른 모란봉의 수려한 자연풍치를 바라보는 투사들의 마음은 즐겁기만 하였다.

그런데 녀사께서만은 깊은 사색에 잠겨 조용히 앉아계시였다.

승용차가 을밀대를 가까이하고있을 때였다.

아무 말씀이 없으시던 녀사께서는 안길동무의 묘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이르시였다.

그제서야 투사들은 녀사께서 모란봉에 소풍을 오시는것이 아니라 혁명전우의 묘지를 찾으신다는것을 깨닫고 모두 정색해졌다.

그날이 바로 청명날이라는것도 뒤늦게야 알게 되였다.

승용차가 안길의 묘지쪽으로 꺾어들자 녀사께서는 투사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오늘 아침 진지상을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수저를 드시다말고 안길동지에 대하여 말씀하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부터 잘 싸운 능숙한 지휘관이였던 안길동무는 해방후에도 나무랄데 없는 책임일군으로 사업하였는데 그만 먼저 우리곁을 떠났다고 몹시 가슴아파하시였습니다그러시면서 그의 묘지를 지금 어떻게 관리하고있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길동지의 묘에 좀 다녀오자는것입니다.

순간 투사들의 마음은 파도처럼 설레였다.

항일전의 그날 침식을 같이하며 기쁨도 함께 나누고 슬픔도 함께 나누던 자기들도 해방의 기쁨과 새 조국건설의 들끓는 환경속에서 그만 그를 찾을 생각을 잊고있었는데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늘 아침 수저를 드시다가 그를 잊지 못해 추억하시였다니 뜨거워지는 생각과 함께 자책의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숭엄한 생각에 잠겨 눈길을 떨구었다.

승용차는 어느덧 그의 묘가 자리잡고있는 곳에 멎었다묘지는 평양시내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모란봉의 양지바른 둔덕에 위치하고있었다.

투사들은 옷깃을 여미며 녀사를 모시고 묘지로 올라갔다.

녀사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한동안 묘지를 생각깊이 바라보시다가 그앞에 다가서시여 잠시 묵상하시였다.

투사들도 비통함을 금치 못하며 녀사를 따라 고인을 추모하였다.

추모가 끝나자 녀사께서는 비감에 잠겨있는 그들에게 갈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아까운 일군을 잃었습니다안길동지는 생전에 장군님께 무한히 충직했고 조국의 광복과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용감히 싸웠습니다.

오랜 기간 풍상고초를 겪으며 일제놈들을 물리치고 살아서 조국땅에 돌아온 안길동지가 해방의 기쁨을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것이 가슴아픕니다그가 살아있으면 지금도 장군님의 사업을 잘 받들어올리겠는데 너무도 일찌기 우리곁을 떠났습니다.

투사들은 녀사의 말씀을 받아안고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오죽 가슴이 아프셨으면 그렇듯 심려어린 말씀을 하시겠는가고 생각하니 더더욱 격정이 흉벽을 쳤다.

먼저 간 전우를 생각하며 비감에 잠겨계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항일투사들이 눈시울을 적시는데 그들을 바라보시던 녀사께서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닦으시며 안길동지의 묘를 잘 관리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지금 우리가 비감에 잠겨 눈물이나 흘릴 때가 아닙니다먼저 간 전우들이 그토록 념원하던 살기 좋은 인민의 락원을 이 땅우에 건설하기 위해 일을 더 많이 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 무한히 충직했던 혁명전사의 령전에 뜨겁게 울리는 녀사의 말씀이시였다.

녀사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항일투사들은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시여 먼저 간 혁명전우들의 절절한 념원을 한시바삐 풀어주시려는 그이의 한없이 고결한 의리와 사랑에 감동을 금치 못하였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혁명전우들의 뜻을 이어 부강한 조국을 세우고야말 맹세를 전우의 령전에 남기였다.

시간이 퍼그나 흘렀다하지만 녀사께서는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시고 묘앞에 서계시였다녀사께서는 묘를 떠나 언덕을 내리시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시며 그가 저기서 우릴 보는것 같다고앞으로 자주 와봐야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후에도 녀사께서는 그의 묘를 찾아 뜨거운 마음으로 추모하시였다.

그것은 혁명전사들에 대한 다함없는 의리로 수놓아진 숭고한 화폭이였다.

이 숭고한 혁명적의리에 떠받들려 오늘 온 나라의 곳곳에 투사들의 동상이 세워지고 수많은 단위들이 항일혁명선렬들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며 혁명렬사들의 투쟁업적을 전해주고 그들의 혁명정신으로 살며 투쟁해나가도록 군대와 인민들을 고무해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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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의 옛 전우들의 집도 몸소 찾아주시며

 

항일혁명투사들은 시작도 끝도 모르는 김정숙녀사의 무한대한 사랑과 믿음속에 순간의 헛눈질도 없이한걸음의 헛디딤도 없이 성스러운 혁명의 길을 억척같이 걸어나가는 긍지높은 조선의 행운아들이였다.

그 행운아들속에는 해방후 위대한 수령님의 저택가까이에 집을 두고 백두산3대장군의 사랑과 은정을 받아온 불굴의 투사 박달도 있다.

해방되기까지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하며 일제의 야수적인 교형리들에 의해 육신을 파괴당한 박달의 집이 저택가까이에 자리잡기까지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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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김일성장군님께서 혁명가의 신념과 절개를 지켜 굴함없이 투쟁한 그의 병치료상태를 자주 보고 잘 돌봐주기 위해 취하신 조치였다.

자신의 저택곁에 박달의 집을 정해주신 수령님께서는 명약이란 명약은 다 구해다주시고 명의란 명의는 다 데려다가 그의 치료를 전담하게 하시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집무실에 오갈 때면 문병을 하군 하시였다. 언제인가는 남포 우산장에 젖소가 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그 젖소를 가져다가 우유를 짜서 그에게 공급하도록 하시였다. 박달에게 베푸신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정녕 끝이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전사들에 대한 뜨거운 동지적사랑을 안으시고 녀사께서는 자주 박달의 집을 찾으시여 그가 수령님의 사랑을 심장에 새기고 항일의 혁명정신으로 병치료를 하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어느날 자제분을 앞세우시고 녀사께서는 박달의 집을 찾으시였다.

반나절나마 그의 이야기를 들으신 녀사께서는 자제분을 향해 이렇게 당부하시였다.

《이 세상에 항일유격대의 혁명정신처럼 귀중한것은 없다.

그 정신만 있으면 우리는 못해낼 일이 없고 무서울것이 없다.》

자제분께서는 숭엄한 안색으로 잘 알겠다고 대답을 올리시였다.

녀사의 이 말씀은 일제를 쳐부시고 조국의 해방을 안아오려 항일의 혁명투사들이 발휘하였던 그 정신, 그 기풍으로 병치료에 전념할것을 바라시여 박달에게 하신 말씀이시기도 하였다.

박달은 녀사님의 말씀은 참으로 귀중한 가르치심이라고,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에 새기겠다고 말씀드리였다.

김정숙녀사께서 더욱 억척같이 심어주신 백두의 혁명정신과 동지적사랑과 은정이 그의 체내에 깊이 간직되였기에 박달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위대한 수령님께 충직할수 있었다.

일제교형리들에게 날개를 잃은 불구의 몸이였지만 박달은 당정책관철정형에 대하여 침상에서도 걱정하며 그 대책을 위해 피타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후대들에게 백두의 혁명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글을 썼다.

심장의 피를 찌워 한자한자 쪼아박은듯이 쓴 그의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와 항일혁명투쟁시기 갑산지방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반영한 자서전적장편소설 《서광》을 비롯한 그의 글들은 백두의 혁명정신으로 삶을 빛내이도록 이끌어주신 김정숙녀사의 뜨거운 사랑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위대한 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의 한없이 뜨거운 동지적사랑과 혁명적의리는 가물거리는 목숨을 겨우 지탱하며 들것에 들리워 서대문감옥을 나왔던 박달을 재생의 환희로 끓게 하였고 마침내는 그때로부터 근 20년 가까이 더 살수 있게 하였다.

김정숙녀사의 그 사랑과 믿음은 불치의 병도 이겨내게 한 불사약이였고 한생을 꿋꿋이 빛내일수 있게 한 원동력이였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변함없이 혁명전우들이 항일의 그 정신, 그 기풍으로 살며 투쟁하도록 이끌어주신 녀사께서는 때로는 다심하신 어머니, 친정어머니가 되시여 새살림을 편 그들의 생활도 따뜻이 보살피시여 새 조국건설투쟁의 앞장에 서도록 해주시였다.

해방후 혜산에 파견되여 사업하다 평양에 소환된 항일혁명투사 김충렬, 전순희부부가 새살림을 편지 얼마 안되던 어느날 김정숙녀사께서는 그들의 집을 찾으시였다.

주부의 손을 다정히 잡으시고 판자로 시렁을 매고 밥사발 몇개를 얹어놓은 휑뎅그렁한 부엌에 내려서신 녀사께서는 가마뚜껑부터 여시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먹는가를 알아보는 친정어머니의 다심한 마음그대로 점심밥을 담아둔 밥사발뚜껑까지 열어보시며 식량은 어떻게 공급받으며 모자라지 않는가고 물으시였다.

흰쌀밥이 담긴 남편의 밥사발을 열어보신 후 넙적사발에 솔치와 함께 담은 강냉이가 반나마 섞인 주부의 밥그릇을 일별하신 녀사께서는 역시 주부다운데가 있다고 하시며 우리 녀성들은 혁명사업에 몸바쳐 일하는 남편들을 혁명동지로, 일생을 같이할 벗으로 언제나 존경하고 건강에 지장이 없도록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어 녀사께서는 나라형편이 아직 넉넉치 못하여 공급하는것이 부족하다고, 그럴수록 밥주걱을 든 녀성들이 한알의 쌀이라도 아껴 집안살림을 알뜰히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이윽하여 방안에 들어서신 녀사께서는 널판자를 밀어 만든 궤통우에 얹혀있는 이불과 포단을 만져보시며 여름에는 일없겠는데 겨울을 나자면 솜이 좀 얇다고 근심에 젖어 말씀하시였다.

함실의 문을 열어보신 녀사께서는 타온 그대로 놓여있는 쌀자루를 보시며 식량을 넣을 작은 독이나 항아리 같은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없으면 함통을 짜서 칸막이를 하여 흰쌀과 잡곡을 갈라 두면 쓰기도 편리하고 쥐의 피해도 막을수 있을것이라고 하시였다.

녀사께서는 이렇게 살림살이형편을 알아보신 후에야 구들우에 앉으시였다.

녀사께서는 구들을 짚어보시며 방은 더운가, 남편이 집안일을 거들어주는가, 땔감은 어떻게 보장받는가를 일일이 알아보시고나서 동무들은 다 부모친척이 없는 혈혈단신들이다나니 어디서 도움을 받을데도 없는데 우리가 도와주지 못해 안됐다고 하시며 어떻게 하든지 살림을 깐지게 하여 필요한것을 하나둘 마련하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가정살림을 맡은 주부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 녀자가 쌀을 꾸러 쌀되박을 들고 이웃집에 다니거나 할일없이 모여앉아 말씨름을 하여서는 안된다, 같은 조건에서는 녀자의 손부리에 따라 집안에 기름기가 들수도 있고 꺼칠해질수도 있다, 콩 한알이라도 쪼개여 먹고 한푼의 돈이라도 아끼여 집안살림을 잘해야 한다고 이르시였다.

딸의 집을 찾아와 하나하나 살림살이법도를 가르쳐주는 친정어머니의 다심한 사랑이 가슴가득 안겨와 주부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올렸다.

녀사께서는 눈물이 그렁한 주부의 손을 꼭 잡아주시고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하시며 동무들부부야 항일대전의 그 간고한 시절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동무들이 아닌가, 그리고 동무들은 다 당원들이다, 가정은 사회의 세포이다, 나는 동무가 항일의 나날에 그러했던것처럼 김일성장군님의 새 민주조국건설로선을 받들고 근로인민들의 선봉에 서서 일하기 바란다, 가정주부라고 사회활동을 못한다는 법은 없다, 봉건적질곡을 반대하여 싸운 우리 녀성들이 아닌가, 그러니 동무는 새 민주조국건설에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녀성들이 떨쳐나서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를 밀고나가도록 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을 듣고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주부를 대견하신듯 미더웁게 바라보시며 녀사께서는 예로부터 새집들이를 한 집에 올 때에는 성냥 한곽이라도 들고 온다는데 빈손으로 와서 미안하다고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주부는 녀사의 손을 부여잡고 반찬은 없어도 인차 밥을 지어드릴테니 식사나 한끼 하고 가시라고 간절히 말씀올렸다.

녀사께서는 다음에 와서 들겠다고 하시며 기어이 집을 나서시였다.

며칠후 녀사께서는 주부를 댁으로 부르시였다.

그가 저택에 오시자 녀사께서는 반갑게 맞아주시고 종이에 싼것을 내놓으시며 이런 사연을 전해주시였다.

그들의 집을 다녀오신 날 저녁 녀사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 그 정형을 상세히 보고드리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부모가 있었으면 하다못해 단지 하나라도 장만해주었을것인데 그렇게 못했다고 하시면서 다문 얼마간의 돈이라도 주어 생활에 보태여 쓰게 해야겠다고 하시며 빨리 보내주자고 이르시였다는것이였다.

그는 일없다고, 아직은 아이도 없이 단 둘인데 우리야 아무러면 제 살림을 못 꾸리겠는가고, 큰 살림을 돌보시는 녀사께서 쓰셔야 한다고 말씀올렸다.

그러자 녀사께서는 적어서 그러는가, 부모의 심정으로, 친형제의 마음으로 마련한것이니 받아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위대한 수령님께서 도리여 섭섭해하실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손에 기어이 쥐여주시였다.

녀사께서는 저택에서 손수 가꾸신 배추와 부루, 쑥갓 그리고 자그마한 단지에 가득 담은 향미로운 고추장까지 보자기에 싸서 그에게 주시면서 어서 가라고, 충렬동무가 기다릴수 있으니 어서 가서 부루쌈을 좋아하는 그에게 자신이 담근 이 고추장으로 쌈을 싸먹도록 하라고 이르시였다.

항일전의 나날에는 그들이 생활하는 병실과 군의소를 자주 찾아오시여 힘을 주시고 사랑을 부어주시더니 해방된 오늘에는 새집들이 한 집을 찾으시여 살뜰하게 보살펴주시니 한생을 그이의 손길밑에서 만복을 누린다는 무한한 행복감에 그는 목이 메였다.

나에게도 어머님이 계신다. 다심하고 자애로운 친어머니가 계신다.

솟구치는 격정속에 이렇게 되뇌이며 그는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정녕 김정숙녀사는 항일혁명투사들이 혁명의 길을 영원히 드팀없이 걸어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고 그들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돌보아주신 친어머니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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