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꾸바녀성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전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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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꾸바녀성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전설(1)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 수십년전에 알게 된 꾸바의 한 녀성법률가를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잊지 않으시고 다심한 은정을 베풀어주신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 인민과 인류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수령님은 그이께서 지니신 천재적인 사상리론과 특출한 령도력으로 하여, 한없이 너그럽고 자애에 넘친 인품과 높은 덕망으로 하여 인류력사가 일찌기 알지 못했던 존경과 흠모를 낳은 위인중의 위인이시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모든것이 희미해진다고 하지만 전화의 나날에 어버이수령님과 깐델라리아사이에 맺어진 혈연적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주체82(1993)년 8월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깐델라리아를 우리 나라에 초청하도록 조치를 취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직접적인 조선방문초청을 받은 깐델라리아의 가슴은 씨에라 마에스뜨라산줄기의 밀림처럼 설레이였다. 수십년세월이 흘렀어도 자기를 잊지 않으시고 몸소 불러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고결한 의리심에 격정을 금치 못하며 깐델라리아는 그이께 올릴 선물을 정성껏 마련하였다. 하나하나의 선물마다에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다함없는 흠모의 마음이 깃들었다. 몸은 대양건너 멀리 있어도 항상 위대한 수령님께로 달리는 마음을 담아 그는 품을 들여 선물들을 준비하였다.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그를 친히 만나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40여년전의 모습을 잊지 않으시고 아, 깐델라리아, 23살의 처녀가 이렇게 됐구만, 이렇게 됐어라고 하시며 손을 다정히 잡아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처음 만나시였을 때의 일을 하나하나 추억하시며 그동안의 생활에 대하여 친어버이심정으로 세심히 물어주시였다.
그가 소박한 선물로 조각품 《싼따 마리아》호와 책 《내가 본 조선》, 《우리는 고발한다》를 드렸을 때에는 그의 진정을 헤아리시고 《싼따 마리아》호는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할 때 타고온 3척의 배들중의 하나라고 일군들에게 설명도 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제는 년로보장이라니 아무때나 조선에 와서 쉬고가라고, 평양을 제 집처럼 여기고 자주 오라고 친어버이사랑을 거듭 부어주시였다.
인생말년에 보통외국인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크나큰 영광과 사랑을 받아안은 깐델라리아의 심정은 마치도 친어버이를 만난것만 같았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우리 나라에 체류하는 기간 날씨가 추워지는것을 념려하시여 자신의 명의로 모세타와 털신발을 선물로 보내주시였다. 또한 우리 나라와 꾸바와의 친선관계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친선훈장 제1급을 수여하도록 해주시였다.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안으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깐델라리아는 수령님께서 또다시 부르신다는 가슴벅찬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전달에도 만나주셨는데 또다시 나를 부르시다니…)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사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만나신 후 일군들에게 오늘까지 우리를 위하여 아주 훌륭한 일을 한 인사라고 거듭 평가하시면서 그가 혼자몸이니 꾸바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을것이라고, 그러니 설도 함께 쇠고 다음해 1월에 우리 나라 비행기를 타고 떠나가게 하도록 이르시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나라 체류기일을 더 연장하고 평양시안의 대기념비적건축물들과 묘향산, 개성, 신의주 등 우리 나라의 명승지들을 돌아보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 나날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따뜻한 사랑과 은정이 어린 생활필수품과 남방과일까지 받아안았으니 실로 아바나의 건축물들과 빨마나무가로수들도 감복할 전무후무한 사랑의 전설이 아닐수 없었다. (계속)
평범한 꾸바녀성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전설(2)
주체82(1993)년 12월 21일 깐델라리아가 감격에 겨워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깐델라리아와 인사를 나누신 후 따뜻한 분위기속에서 담화를 하시고 성대한 오찬회도 마련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찬회에서 전승혁명사적관에 있는 조국해방전쟁시기 국제민주녀성련맹조사단의 활동정형을 찍은 사진에 깐델라리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데 사실인가고 물으시였다. 얼마전 사적관을 돌아보던 그가 해당 일군에게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나가는 말을 한적이 있었다.
당시 그 사적관에는 조사단의 활동과 관련한 사진이 있었는데 그의 얼굴이 가리워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연을 일군들로부터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해당 기관들에 깐델라리아의 얼굴이 잘 보이는 사진이 있을수 있으므로 그 사진을 바꾸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깐델라리아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우리 인민의 정의의 위업을 진심으로 도와준 혁명전우이라고, 그의 사업을 잘 도와주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당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깐델라리아를 위하여 베풀어주신 사랑은 끝이 없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새해를 맞으며 그에게 신년장도 몸소 보내주시였으며 평양체육관에서 진행된 1994년 새해설맞이모임에도 참석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깐델라리아는 혁명전우라는 고귀한 칭호를 안겨주신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대해같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한생을조선의 딸, 수령님의 전우로 살리라 굳게 맹세다졌다.
그가 어버이수령님을 얼마나 흠모하고 따랐는가 하는것은 조선방문을 마치면서 자기의 가슴에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이모셔진 초상휘장을 모시고 수령님과 장군님의 불후의 고전적로작들을 우리 일군들에게 부탁한것만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온 후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 방문기 《40년만에 다시 본 조선》을 집필하였다.
그는 《하늘에서 받은 생일상》, 《떠날수 없는 마음》, 《지구는 깨뜨릴수 있어도》, 《조선속에 전세계가 있다》, 《권총을 들이대면 포를 내댈것이다》, 《높은 칭호, 고귀한 이름》 등 여러 제목의 글에서 조선방문기간 자기가 받아안은 사랑과 은정에 대하여, 절세위인들의 특출한 위인상에 대하여 격조높이 구가하였다.
그가 쓴 도서는 조선어, 영어, 프랑스어, 중어, 로어, 일본어 등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출판되여 세계인민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는 여러 계기들에 좌담회와 회견을 가지고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인덕정치, 광폭정치에 대하여, 사회주의를 고수해나가는 우리 인민의 자랑찬 투쟁에 대하여 널리 해설선전하였다.
이 과정에 깐델라리아의 가슴속에는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절절한 흠모심이 더욱 가득차게 되였으며 그 품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수 없을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혔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마음을 속속들이 헤아려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몇달전에 깐델라리아와 한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그가 우리 나라에 다시 와서 백두산지구를 비롯한 혁명전적지와 사적지들, 금강산을 비롯한 명승지들을 돌아보면서 휴식하도록 할데 대한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깐델라리아는 1994년 5월말 우리 나라를 다시 방문하게 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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