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꾸바녀성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전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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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꾸바녀성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전설 (3)
1994년 6월 3일은 깐델라리아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깐델라리아를 만나주시기 위하여 넓은 홀에까지 친히 나오시여 그의 우리 나라 방문을 환영한다고 말씀하시며 따뜻이 맞아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을 다시금 듣는 순간 깐델라리아는 헤여졌던 친부모를 다시 만나는듯 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피델 까스뜨로동지를 비롯한 꾸바의 령도자들이 모두 건강하여 일을 하고있다는 그의 말을 들으시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혁명가는 일감이 생길것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일을 찾아서 하여야 한다고, 꾸바에 신발을 신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있는 좋은 말이라고 긍정해주시였다.
깐델라리아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는 도중에 불편한 점은 없었는가 알아보시고 그동안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료해하시였다. 깐델라리아가 꾸바의 청년섬에 가서 공부하고있는 우리 나라의 류학생모두를 자기의 손자로 여기고있다는것을 아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에게 160여명의 손자가 있는셈이라고, 좋은 일이라고 과분한 치하를 하시였다.
그는 어버이수령님께 이처럼 극진하게 환대해주어 정말 고맙다고 자기의 심정을 아뢰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친구들끼리 돌봐주는것은 환대가 아니라 응당한 일이라고, 환대라는 말은 손님들과 외교를 할 때나 쓰지 전우들사이에는 쓰지 않는다고 이르시였다.
전우, 이 말은 생사를 같이하며 같이 싸운 동지들사이에 부르는 말이다.
전우로 불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다정한 말씀에 그는 참으로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계속하여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지난해 우리 나라에 왔다가서 쓴 글을 보았는데 사실을 그대로 실감있게 잘 썼다고, 그 글은 문학가라고도 할수 있고 법률가라고도 할수 있는 사람이 쓴것과 같이 잘 썼다고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깐델라리아는 너무도 황송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책에서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조선에서 일어나고있는 사변적인 일들을 진실하게 서술하였을뿐이였다. 사실 도서의 분량이나 담고있는 사상주제적내용으로 볼 때 자기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데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토록 분에 넘친 치하를 하여주시는것이였다.
깐델라리아는 어려움도 잊고 어버이수령님께 이제 돌아가면 위대한 김정일동지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말씀드리였다.
그의 말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면서 열렬히 환영한다고 지지해주시였다.
이어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생활적인 문제에로 화제를 돌리시며 지난해에는 겨울에 왔댔기때문에 지방에 많이 가보지 못하였을것이라고, 이번에는 마음놓고 휴식하면서 그때 보지 못한것들을 다 보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번 기회에 백두산에가보려고 한다는 깐델라리아의 말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지금은 좀 이르다고, 백두산에는아직 눈이 적지 않게 있고 춥다고 하시면서 그의 건강을 념려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앞으로 해마다 여름철에는 우리 나라에 와서 휴식하고 겨울철에는 꾸바에서 휴식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하시였다.
깐델라리아를 위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다심한 사랑은 그가 한생을 살면서 이 세상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뜨겁고 진실한것이였다. (계속)
평범한 꾸바녀성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전설 (4)
진보적인류가 그처럼 흠모하고 따르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 평범한 녀성법률가에 지나지 않는 자기를 그처럼 세심히 보살펴주시니 그 친어버이사랑은 진정 돌우에도 꽃을 피우는 뜨거운 동지애였다.
일생에 거의나 눈물을 흘려본적이 없는 깐델라리아는 어버이수령님의 육친적사랑에 목메여 감격의 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참으로 깐델라리아를 위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진정은 끝이 없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깐델라리아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시였으며 자신의 존함이 새겨진 금시계를 그의 손목에 친히 채워주시며 이것은 자신께서 로혁명가들에게 주는것이라는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날 점심식사도 마련해주시고 전우들끼리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좋은가고, 당신을 위하여 점심식사를 차렸는데 음식을 많이 들어야 하겠다고 은정넘친 말씀도 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손수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앞에 놓아주기도 하시고 축배잔도 찧어주시였다.
국제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명철한 해답을 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기 집에 온것처럼 생각하고 휴양도 하고 구경도 하면서 잘 지내라고, 생활하는데 제기되는것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간곡히 이르시였다.
그가 어버이수령님의 건강을 축원하여 준비한 선물을 드리였을 때에는 오히려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며 나는 건강하니 10년은 더 일할수 있다고, 우리 더 건강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자고 고무해주시였다.
그로부터 한달후 평양의 한 숙소에서 도서집필에 전념하던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뜻밖에 서거하시였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에 접하게 되였다. 믿을래야 믿을수 없는 사실앞에서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저를 만나주신지 불과 3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서거하시다니…)
그것이 정말인가고 열번, 스무번 곱씹어 물어본 그는 절통함을 금치 못하며 어버이수령님의 령전을 찾아 화환을 진정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장군님께 조의편지를 삼가 올리였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또 닦는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제 더는 수령님의 친어버이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게 되였다는 비통함과 함께 그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더해만 갔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깐델라리아에게 돌려주시던 사랑과 은정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에 의하여 그대로 이어졌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뜻밖에 수령님을 잃은 크나큰 상실의 아픔속에서도 그를 잊지 않으시고 조국해방기념일에는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사랑의 선물을 보내주시였다. 또한 그로부터 며칠후에는 깐델라리아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사랑의 보약들도 가슴한가득 안겨주시였다.
정녕 깐델라리아에게 있어서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은 생의 활력을 부어주신 자애로운 친어버이이시였다. 하기에 그는 귀국하면서 위대한 장군님께 자기의 심정을 담은 감사편지를 삼가 올리였다.
그후 깐델라리아는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절절한 흠모심을 안고 자기 집에 모신 수령님의 초상화앞에 매일 장미꽃 한송이를 삼가 드리군 하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서거 3돐이 되는 1997년 7월 8일에도 깐델라리아는 자기뿐만아니라 이 세상 모든 진보적녀성들의 마음을 담아 붉은 장미와 순결의 상징인 백합꽃을 수령님의 초상화앞에 삼가 드리였다.
《주석님!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던 그 통곡의 7월 8일, 악몽과도 같던 그날이 정말로 꿈이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도 저에게는 주석님의 자애로운 모습과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그대로 심장속에 간직되여있습니다. 주석님은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주석님은 영원히 인류의 심장속에 영생하십니다.》
외국의 한 평범한 늙은이에 불과한 자기에게 최상의 행복과 영광을 주신 절세위인에 대한 열렬한 흠모심을 변함없이 간직해온 깐델라리아.
그후 그는 어버이수령님앞에서 한 맹세를 지켜 위대한 장군님을 칭송하는 책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집필하였다.
그는 책에서 위대한 장군님께서 어버이수령님께서 지니시였던 인간사랑과 숭고한 덕망을 그대로 체현하시고 인민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펼쳐오신데 대하여 감동깊게 서술하였다.
깐델라리아는 한생에 그 누구도 받아안을수 없는 최상의 영광과 행복을 받아안았다.
하기에 그는 로환으로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어버이수령님의 따뜻한 사랑속에 보내던 나날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그이는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위인중의 위인, 성인중의 대성인이시였다고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대양건너 평범한 한 녀성에게 베풀어주신 절세위인들의 뜨거운 은정은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순결한 혁명적의리에 대한 사랑의 전설로 길이 전해지고있다.
본사기자 조선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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