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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5-10. 반제반미의 기치를 든 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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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235회 작성일 23-10-1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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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반미의 기치를 든 수리아

 

류태영 박사.jpg

 저자: 고 류태영 박사  

 

어떤 사람들은 수리아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작정 히즈볼라흐와 하마스를 지원해주고있는 이른바 《테로정권의 나라 수리아》로 인식하고있다.

1946년 4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수리아는 1971년 아싸드대통령의 30년간의 통치를 이어 지금은 그의 아들 바샤르가 2000년부터 수리아를 굳세게 통치하고있다.

수리아의 아싸드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사회주의적로선을 지켜왔다.

수리아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티나침략에 대항하여 강력히 투쟁하였으며 팔레스티나에서 쏟아져들어오는 수백만명의 피난민들을 품어주었다. 뿐만아니라 수리아는 미국에 의한 경제적봉쇄를 수십년동안 당하고있는 속에서도 민중들을 보호하고있다.

2000년 6월에 사망한 하페즈 알 아싸드대통령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둘째아들인 바샤르 알 아싸드는 유명한 안과의사로도 일한적이 있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이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리아문제를 포함한 중동에 대한 인식에서 매우 극단적인 편견에 사로잡혀있다.

그 리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수 있다.

첫째, 8. 15해방이후 조선반도의 남쪽은 불행한 운명으로 미국에 예속되였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중동에 속하는 여러 이슬람교나라들을 옳바로 리해하는데 원천봉쇄를 당하게 되였고 오직 미국의 눈으로만 중동의 여러 이슬람교나라들을 보아야 했다. 때문에 미국의 리익에 반대되는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하는 편견적인식만이 쌓이게 되였다.

둘째, 미국이 《자유세계》의 언론과 주요통신을 완전히 지배하고있기때문에 《한국》의 신문과 방송들은 중동과 이슬람교국가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듣는 중동과 이슬람교나라들에 대한 소식은 항상 테로와 분쟁을 일으키는 악순환의 반복뿐이였고 그들의 삶에 대한 소식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셋째, 《한국》에는 그동안 중동과 이슬람교국가들에 대한 학문적연구가 극히 부족했다. 우리가 알고있는것은 오직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이 철천지원쑤처럼 서로 싸운다는 소식뿐이였다.

 

수리아의 간추린 고대력사

 

수리아의 력사는 B.C. 4000년무렵 셈족계통의 아모리인과 가나안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하여 알파베트를 발명했고 지중해를 무대로 국제무역에도 종사했다.

수리아의 위치는 북쪽 뛰르끼예고원과 남쪽 아라비아반도와 만나는 지대이고 지중해와 접해있어 동서지역을 련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서아시아와 련결되여있다.

수리아는 B.C. 16세기에 에짚트와 히타이트에 의해 점령당했고 B.C. 14세기이후 에짚트인들을 몰아내고 얼마동안 독립적인 노예소유자국가들로 전성기를 누려오다가 B.C. 8세기에 아씨리아, 신바빌로니아왕국, 페르샤 등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하여 수리아는 이 지역을 둘러싼 패권의 중심지가 되였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후 B.C. 312년경에 셀레우코스장군이 수리아를 정복하여 안티오끼아를 도읍으로 정하고 셀레우코스왕조로 시작된 수리아왕국을 세웠다.

 

로마 및 비잔틴의 흥망성쇠와 이슬람시대의 수리아

 

력사를 보면 고대로마는 B.C. 754년부터 왕정이 실시되였고 B.C. 510년경에는 공화정치를 실시하였으며 B.C. 27년부터 수백년동안 군주정치를 실시하였다.

수리아는 로마제국에 예속된 속주로서 로마제국의 군사기지의 역할을 하는 운명에 처해있었다.

로마제국은 한때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쳐 광대한 령토를 다스리는 강대국이였다. 하지만 게르만족의 대약진으로 인하여 A.D. 395년에 로마제국은 차츰 황페화되면서 서로마제국과 동로마 비잔틴제국으로 갈라졌다.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완전히 멸망하였지만 동로마제국인 비잔틴제국은 오스만제국에 의하여 멸망한 1453년까지 존속했다.

비잔틴제국은 제도상으로는 로마를 따랐으나 언어와 문화, 정치는 완전히 그리스적이였다. 그리스동방정교를 국교로 삼았고 그리스고전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은 인문주의적사상의 영향을 전세계에 끼쳤다.

수리아는 비잔틴제국이 망할 때까지 1517년동안 동로마제국의 령토가 되여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의 통치하에서 비잔틴문화와 동방교회의 영향하에서 살아갈수밖에 없었다.

수리아의 운명은 또다시 이슬람시대를 맞이했다. 비잔틴제국의 쇠퇴를 틈타 오스만제국이 1453년에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수도명칭을 이스딴불로 개칭했다.

오스만제국은 셀림1세시대와 슐레이만1세시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수리아는 물론이고 이란과 아라비아반도모두를 정복했고 한때는 아시아, 아프리카와 유럽 3개 대륙에까지 오스만제국의 군대가 주둔하고있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은 로씨야와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쇠퇴기에 들어섰다. 그동안 식민지통치하의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나뽈레옹의 에짚트점령후부터 19세기에 이르러 로씨야-오스만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이슬람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제1차 세계대전후 오스만제국의 완전한 패망으로 인하여 한때 번창했던 뛰르끼예의 운명은 초라한 공화국의 모습으로 남아있으면서 끝을 맺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수리아의 근대사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에 시작되여 1918년까지 계속되였다. 사실상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 대 도이췰란드-오스트리아와의 싸움이였다.

하지만 둘러리로 로씨야가 참전했다가 뒤로 물러섰고 이딸리아는 영국편에 참전했으며 오스만제국은 도이췰란드편으로 참전했다. 이런 나라들은 자국의 리해타산과 강대국의 유혹과 강요에 의하여 참전하였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중에 비밀협정을 3번이나 맺으면서 강대국의 욕심을 가지고 불법적인 행위를 감행하고있었다. 영국이 프랑스와 3번 맺은 비밀협정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16년에 영국-프랑스는 싸이크스-삐꼬협정을 비밀리에 맺었다. 이 비밀협정은 오스만제국이 망한 후에 프랑스와 영국이 수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지중해연안국들과 그리고 짜리로씨야와 린접한 지역을 분할하여 통치하며 팔레스티나지역은 이른바 국제관리지대로 만든다는 협정이였다.

2) 1915년에 만들어낸 맥마혼선언이다. 이 선언은 10여차례에 걸쳐 전시외교정책으로 발송된 선언이다. 그 내용은 아랍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편에 서서 참전을 하면 그 대가로 아랍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한다라는 약속이였다. 아랍국가들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술책이였다.

3) 1917년에 발표한 영국외무장관의 벨푸어선언이 또 있다. 이 비밀선언은 앞으로 팔레스티나땅을 강점하여 그곳에 이스라엘국가를 세운다는 약속의 비밀선언이다.

제1차 세계대전결과 도이췰란드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오스만제국은 패망하였다. 결과 오스만제국의 중동지역에 대한 수백년간의 지배도 종지부를 찍게 되였다.

그러면 아랍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기여한 공헌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제공한것은 무엇인가?

영국은 벨푸어선언을 그대로 실행하여 팔레스티나땅에 4차에 걸쳐 유럽에서 살던 100만명이상의 유태인들을 이주시키는 대신 팔레스티나사람들을 갑자기 고향땅에서 추방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땅에 신생이스라엘국가를 세우기 위해 열중하였다.

프랑스 역시 영국과 비밀리에 맺은 약속대로 수리아를 저들의 식민지로 전환시키는데 적극적이였다. 프랑스점령군이 수리아에 강제로 주둔하였으며 본격적인 식민지통치가 시작되였다.

이것이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인들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시킨 대가로 그들에게 제공한 보답의 전부였다.

1925년에 프랑스는 식민지통치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하여 수리아를 4개 지역으로 분리시켜 통치했다. 이때 프랑스는 레바논과 수리아를 분리시켜놓았다.

뿐만아니라 프랑스는 수리아의 령토인 알렉산드레타주를 뛰르끼예에 넘겨주었다.

프랑스는 통치기간 말로는 수리아의 자치정권을 허용한다고 몇번이고 약속을 했지만 그것은 빈말에 지나지 않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 4월까지 식민지통치는 계속되였다.

 

수리아의 독립과 아싸드대통령의 사회주의국가건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됨으로써 프랑스는 수리아를 떠나갔고 1946년 4월 17일에 수리아는 독립을 성취했다.

1955년 2월에 중동국가들간에는 바그다드조약이 맺어졌는데 이 조약은 쏘련의 중동진출을 막으려는 미국과 영국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이루어진 조약이였다.

이 조약이 체결된 이후 1958년 에짚트와 수리아의 두 진보적진영은 아랍련합공화국을 창건하여 단일국가를 형성했다.

하지만 두 나라가 통합한 아랍련합공화국은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1961년에 수리아가 련합에서 리탈함으로써 수리아와 에짚트는 또다시 각각 독립국가로 돌아갔다.

그후 1963년에 수리아에는 사회주의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이스라엘을 적으로 여길뿐아니라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을 증오하는 반미적정권이 들어서게 되였다.

1970년에 수리아의 정권을 잡은 하페즈 알 아싸드는 아랍민족주의를 내걸고 정권을 강화했다. 그는 1955년에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사회주의바트당에 가입하여 정치활동을 했으며 공군사령관과 국방상을 력임했다.

1971년 3월에 실시한 총선에서 99. 2%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싸드는 《인민, 민주, 사회주의국가》를 표방하는 157조의 새 헌법을 채택하여 집권초기에 정권의 안정을 이루었다.

아싸드대통령은 아랍민족주의를 내걸고 이스라엘-아랍간의 적대구도를 이끌어온 중심인물로서 항상 아랍세계의 단결을 웨치면서 반미와 동시에 반이스라엘에 대한 강경정책을 일평생 변함없이 고수해왔다.

그의 정치적체제는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국가》였으며 그는 사회주의경제에 의한 국가건설을 지향하고있었다.

아싸드대통령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때 이스라엘에 빼앗긴 골란고원을 되찾기 위하여 반환협상을 줄곧 벌려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0년 6월에 사망했다.

수리아를 30년동안 이끌어온 하페즈 알 아싸드 전 대통령은 장남인 바실을 후임으로 지목했지만 그가 1994년에 교통사고로 숨짐으로써 차남인 바샤르가 대신하게 되였다.

바샤르는 2000년 6월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35살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2007년 5월에 재선에 성공하여 현재 제2기 집권을 하고있다.

바샤르대통령은 이스라엘을 편들면서 자기 나라를 테로지원국으로 지목하는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하고있으며 또한 레바논문제로 인하여 서방과도 정면대립하고있다.

 

이스라엘-수리아-팔레스티나의 분쟁 그리고 미국과 영국

 

《만일 당신의 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의 집 절반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였다라고 통고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말은 1947년에 유엔이 팔레스티나사람들에게 몇백년동안 살던 집의 51%를 내놓으라고 명령한것을 뜻한다.

미국과 영국이 앞세운 유엔이 갑자기 팔레스티나민중 400만명의 땅과 집을 빼앗고 피난민이 되게 했다.

누구든지 이런 명령은 받아들일수 없을것이다. 하지만 힘없는 팔레스티나인들은 미국과 영국의 이 강도적론리와 힘에 꼼짝 못하고 빼앗기고말았다.

그후에 팔레스티나인들은 남은 집 절반마저 모두다 빼앗기는 신세가 되였다. 하여 팔레스티나문제는 오늘 세계적분쟁의 불씨가 되고있으며 중동분쟁은 세계의 화약고가 되고있다.

그러면 중동문제의 하나인 이스라엘-수리아문제는 어떤 문제인가?

1967년 6월에 제3차 중동전쟁이 발생했는데 그때 이스라엘이 수리아의 골란고원을 강탈하였다.

골란고원을 빼앗긴 수리아는 그것을 되찾으려고 대이스라엘공세를 줄곧 강화하였다.

한편 이스라엘은 빼앗은 골란고원에다 1981년에 유태인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993년까지 모두 33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절대로 수리아에게 되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고있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를 등에 업고 골란고원을 영원히 타고앉으려고 하고있는데 그 리유는 건설한 33개 정착촌을 보존하기 위함보다 더 큰 욕심이 있기때문이다.

그 욕심은 이스라엘이 생명수, 물을 공급해주는 골란고원의 물자원을 영원히 차지하려는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절대로 골란고원만은 반환할수 없다고 뻗치고있는 실정이고 수리아로서는 어떻게 하든 빼앗긴 령토를 되찾아야 한다고 하고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수리아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서 미국이 수리아를 약자로 만들기 위하여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권을 사용하고있다고 생각한다.

그럴만한 리유가 충분히 있다.

시종일관 이스라엘만을 비호두둔해온 미국의 정책은 오늘의 오바마정권에 이르기까지 오직 《네오콘의 공포전략》뿐이였다.

새로 들어선 오바마정권은 수리아가 미국에 대하여 나긋나긋하게 행동해주기만을 바라고있다.

많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이라크 다음으로 수리아를 공격할것이라고 생각하고있는듯 하다. 또 미국은 지금까지 수리아에게 너무 터무니없는것을 강요하고있다.

 

… 수리아는 팔레스티나해방조직(PLO)을 도와주지 말고 손을 떼라.

… 수리아는 수리아에 체류하고있는 팔레스티나항쟁조직인 하마스와의 련계를 단절하라.

… 수리아는 알 카에다와의 련계를 끊으라.

… 수리아는 레바논에서 활동하는 반이스라엘 히즈볼라흐를 지원하지 말라.

… 수리아는 레바논내전에 개입하여 이슬람을 도와주지 말라.

… 수리아는 이라크에 류입되는 외국무장세력을 적극 대처하여 막으라.

… 수리아는 이란과 비밀관계를 끊으라.

… 수리아는 핵무기에 대하여 꿈도 꾸지 말며 화학무기생산확대를 중단하라.

… 수리아는 핵활동과 미싸일기지건설을 중지하라.

… 수리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핵무기의혹을 청산하고 련계를 끊으라.

 

그런데 놀라우면서도 한편 의문은 오바마정권이 들어서서 미국과 수리아사이에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가?》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왜냐면 힐러리 클린톤국무장관이 취임후 진행한 첫 중동방문길에서 특사를 수리아에 파견했고 그후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장 케리가 수리아를 방문하여 바샤르 아싸드대통령을 만나 미국과 수리아의 관계개선문제를 토의했다는 보도가 나왔기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수리아사이에 정말로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는가?

바샤르 아싸드대통령의 반응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들을수 있다고 본다.

바샤르대통령의 반응은 《미국과 조건없는 대화희망》이다. 바샤르대통령은 반드시 어떤 전제조건이 없어야만 대등한 립장에서 대화를 할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은 미국과 수리아사이에 봄바람이 불수 있는 조건이 오바마행정부가 과거의 정권이 취한것과 같은 대수리아압력 같은것을 완전히 깨끗이 제거했다는 징후를 보여주어야만 한다는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바샤르대통령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수 없을것이 분명하다.

지금 이 시각도 수리아민중들은 반제반미의 기치를 들고 중단없는 투쟁을 벌리고있다.

이렇게 놓고볼 때 조국통일을 위하여 외세와 싸우는 우리 민족의 처지와 수리아의 평화와 빼앗긴 골란고원을 되찾으려고 외세와 싸우는 수리아민중들이 우리와 멀고도 가까운 형제들이라고 가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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