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557] 깡통 조약 맹신하는 우매한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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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깡통조약 맹신하는 우매한 정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왜 깡통 조약을 만들어 놓았을까?
2. 1953년 패전 위험에 빠진 미 제국
3. 깡통 조약은 미 제국의 유인책
4. 최후통첩이 장애물 치웠다
5. 깡통 조약 제3조는 패전으로 직행하는 길
1. 왜 깡통 조약을 만들어 놓았을까?
2023년 10월 1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70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미 제국 국무부 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와 한국 외무부 장관 변영태(1892~1969)가 조약문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고, 그로써 한미동맹 관계가 성립되었다.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 변영태 장관과 덜레스 장관의 조약 체결 장면. |
한미상호방위조약 제2조에는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 침공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 인정할 때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라고 명기되었다. 이 조항은 어느 일방이 무력 침공을 받는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서로 협의하는 것을 의무화한 조항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어느 일방이 무력 침공을 받는 경우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이 없다. 그 조약에는 상호협의를 의무화한 조항만 있고, 마땅히 있어야 할,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은 없는 것이다.
1949년 4월 4일 워싱턴에서 조인된 북대서양조약(North Atlantic Treaty)에는 상호협의를 의무화한 조항과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이 모두 들어있다. 1960년 1월 19일 워싱턴에서 조인된 미일안보조약에도 상호협의를 의무화한 조항과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이 모두 들어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경우, 미 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제2조에 의거하여 전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한국과 협의하는 의무만 이행하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시에 미 제국이 한국에 군대를 파병할 의무도 없고, 공동의 군사행동으로 전쟁에 대처할 의무도 없는 것이다.
명색은 ‘상호방위조약’인데도, 전시에 군대를 파병할 의무와 공동의 군사행동으로 전쟁에 대처할 의무가 모두 빠져있는 것을 보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이야말로 알맹이 없는 깡통 조약에 불과하다.
의문이 생긴다. 미 제국은 왜 알맹이 없는 깡통 조약을 만들어 놓았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70년 전 깡통 조약을 체결하기 전후의 복잡한 상황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1953년 5월 30일 당시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은 미 제국 대통령 드와잇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에게 보낸 서한에서 적국이 한국을 침공하는 경우 미 제국이 즉각 군사원조와 비상 지원을 한국에 제공해 준다는 내용을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에 명기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미 제국은 이승만의 간곡한 요청을 외면했다. 1953년 7월 7일 이승만은 미 제국 국무부 차관보 월터 로벗슨(Walter S. Robertson, 1893~1970)에게 보낸 서한에서 어느 일방이 침공을 받는 경우 다른 일방이 군사 지원을 제공하는 조항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에 명기되지 않아서 매우 실망했다고 썼다.
위에 서술한 사정을 보면, 미 제국이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의무화한 조항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고의적으로 넣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미 제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해도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 1953년 패전 위험에 빠진 미 제국
1953년 4월 3일에 작성된 미 제국 국가정보보고서(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s)가 기밀 해제되어 공개되었다. 국가정보보고서는 미 제국의 여러 국가정보기관들이 수집, 분석한 정보를 최종적으로 종합한 기밀문서다. 1953년 4월 3일 국가정보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정보가 담겼다.
“1951년 중순 정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한반도에서 공산 측 군사력이 꾸준히 증강되어 왔다. (여기서 말하는 ‘공산 측 군사력’은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군사력을 의미한다 - 옮긴이) 그들의 군사력은 두 배 이상 증가되었고, 병참도 충분히 증가되었다. 전투기는 세 배 이상 증가되었다. 만주 지역에서 전폭기 100대가 생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폭 향상된 공산 측 군대의 전투력은 양호한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판단된다. 잘 조직되고 충분히 통합된 그들의 방어지대는 교전지대에서 후방으로 15~20마일(24~32km - 옮긴이) 정도 더 넓어졌다. 방어지대에 요새가 많이 건설되었고, 현재 더욱 증가되고 확장되는 중이다.”
위에 인용한 미 제국 국가정보보고서는 1953년 초에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전쟁수행력이 대폭 증강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면 같은 시기에 미 제국군의 전쟁수행력은 어떠했을까?
1953년 3월 5일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1892~1992)가 미 제국 연방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했다는 보도기사가 1953년 3월 6일부 동아일보에 실렸다. 미 제국 8군 사령관 겸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육군 대장 밴 플리트는 미 제국이 유엔기 아래 긁어모아 전선에 동원한 미 제국군, 한국군, 그 밖의 추종국가 군대들을 1951년 4월부터 1953년 2월까지 지휘했다. 그런 밴 플리트가 1953년 3월 5일 청문회에서 중요한 정보를 공개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1953년 초에 미 제국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군사지휘관을 50%밖에 확보하지 못했고, 전차부대 하사관은 30%밖에 확보하지 못했으며, 전투원도 80%만 확보했다는 것이다. 100%를 확보해도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군사지휘관과 전투원이 그처럼 턱없이 부족했으니 미 제국의 패색이 짙어진 것은 당연하였다. 당시 미 제국이 군사지휘관과 전투원을 충원하지 못한 이유는 전쟁을 2년 이상 계속해 오면서 사상자가 너무 많아져 충원 증가추세가 사상자 증가추세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정보는 미 제국이 1953년 당시 전쟁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패전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미 제국의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정전협정을 하루빨리 체결하는 것이었다.
3. 깡통 조약은 미 제국의 유인책
패전 위험에 빠져 위급해진 미 제국이 정전협상을 서두르고 있는 판에 뜻밖의 장애물이 나타났다. 그 장애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정전을 완강히 반대했다. 왜 그랬을까? 정전이 실현되면, 미 제국군이 대폭 감축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상황에서 미 제국군이 대폭 감축되면, 전쟁이 재발하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었다. 미 제국군이 대폭 감축된 상태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이승만 종미우익정권과 한국군은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압도적인 공격을 받고 전멸할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가 이승만의 심경을 심하게 자극했다. 극도로 불안해진 이승만은 ‘정전반대 국민대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전협상을 반대하는 관제 시위로 군중들을 내몰았다.
1975년 8월 4일 뉴욕타임스는 기밀 해제된 극비문서들을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다. 폭로기사에 의하면, 1953년 5월 29일 미 제국 국무부 고위 관리들과 국방부 고위 관리들이 국방부 청사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6.25전쟁 시기 전선을 지킨 미 제국 육군 참모총장 로튼 콜린스(J. Lawton Collins, 1896~1987)가 회의에서 전시 상황을 보고했다. 회의에서는 세 가지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것은 생떼를 부리면서 정전협상을 가로막은, 골치 아픈 장애물 이승만을 처리하기 위한 방안들이었다.
제1방안은 이승만에게 안보조약을 유인책으로 제공해 그가 정전협상을 반대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고, 제2방안은 미 제국의 뜻을 거역하는 이승만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을 체포, 구금하는 것이고, 제3방안은 미 제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미 제국에 협력한다는 약속을 이승만에게서 받아내는 것이다.
회의에서 국무부 부장관 프리먼 매튜스(H. Freeman Matthews, 1988~1986)와 국무부 차관보 월터 로벗슨은 미 제국의 뜻을 거역하는 이승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육군 참모총장 로튼 콜린스는 이승만을 체포해야 한다고 했다. 미 제국 해군 참모차장 도널드 던컨(Donald B. Duncun, 1896~1975)은 이승만에게 유인책으로 안보조약을 제공하자고 주장했으나, 콜린스는 이승만을 체포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맞섰다. 오랜 시간 설왕설래한 끝에 이승만이 정전협상을 반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 제국이 이승만과 안보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논의한 세 가지 방도를 비망록에 담아 아이젠하워에게 상신했다. 아이젠하워는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승만이 정전협상을 반대하지 않게 만드는 유인책으로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1953년 5월 30일 미 제국 합참본부는 전선에 파견된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에게 1급 비밀전문을 보냈다. 비밀전문에는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당시 주한 미 제국 대사 엘리스 브릭스(Ellis O. Briggs, 1899~1976)가 미 제국이 안보조약 체결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승만에게 통보해 주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구조건을 이승만에게 제시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세 가지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정부는 정전협상을 반대하지 않고, 정전협상을 반대하는 선동에 군중을 동원하지 않는다.
2) 한국은 정전협정 이행에 협력한다.
3) 한국군은 미 제국과 한국의 상호방위조약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 유엔군 총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상황을 오판한 이승만은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전협상을 계속 반대했다.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기해 미 제국을 격분하게 만든 매우 위험한 망동을 저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이다. 이승만의 비밀지령을 받은 한국군은 1953년 6월 18일부터 닷새 동안 여러 수용소들에 갇혀있던 전쟁포로들 중에서 26,900여 명을 탈출시키는 대탈주극을 감행했다. 수용소 경비부대는 탈출하는 포로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61명을 현장에서 사살했고, 116명에 부상을 입혔으며, 8,200여 명의 탈출을 저지했다.
이 사건은 미 제국에 격앙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으로 미 제국이 “우방을 잃고 적을 얻었다”라고 격분했고,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은 “미국의 등에 칼을 꽂는 짓”이라고 맹비난했으며,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으로 “지옥문이 열렸다”라고 개탄했다.
이승만이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을 감행한 1953년 6월 18일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 제150차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감행한 전쟁포로 집단탈출 사건으로 정전협상이 파탄될 위험이 조성되었다고 탄식하면서 “그 위험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신속한 방도는 군사정변”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가 언급한 “유일하고 신속한 방도”는 국무부 고위 관리들과 국방부 고위 관리들이 1953년 5월 29일 회의에서 논의한 세 가지 방안들 중에서 제2방안, 즉 미 제국군이 이승만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을 체포, 구금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최후통첩이 장애물 치웠다
1953년 6월 초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아이젠하워는 최후통첩에서 “당신이 미 제국에 협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조치를 실행할 것”이라면서 “유엔군 총사령관은 당신의 결정에 상응하는 어떤 조치를 실행할 승인을 이미 받아놓았다”라고 노골적인 협박을 들이댔다.
아이젠하워가 최후통첩에서 언급한 조치는 1952년 7월 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미 제국 합참본부에 보낸 비밀보고서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었다.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유엔사령부는 미 제국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 이승만과 그 일파를 제거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는 실로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그런 비밀보고서를 작성한 이유는 이승만의 폭압 만행으로 전선 후방에서 대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1952년 이승만이 저지른 폭압 만행은 다음과 같다.
서울을 빼앗기고 임시수도 부산에 내려가 피난살이를 하던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느닷없이 전시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 50여 명을 북과 내통한다는 혐의로 체포, 연행했으며, 7월 4일에는 군대와 경찰을 내몰아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자신이 대통령에 재선되기 위한 이른바 ‘발췌 개헌안’이라는 것을 협박 분위기 속에서 통과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 제국은 근심에 빠졌다. 폭압 만행을 당한 야당과 지지자들이 반이승만 투쟁을 각지에서 일으키면 이승만은 전시계엄령에 따라 유혈진압을 감행할 것이고, 그런 유혈사태가 일어나면 전선 후방이 대혼란에 빠져 가뜩이나 불리한 전세가 더 불리해질 것으로 우려했다. 그래서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계획(Operation Plan Everready)’을 수립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임시수도 부산에 있는 이승만을 다른 곳으로 유인한다.
2) 미 제국군 전투부대를 임시수도 부산에 출동시켜 이승만을 추종하는 한국군 고위지휘관 5~10명을 체포하고, 유엔군 시설들과 한국군 시설들을 경비하고, 한국군의 전시 계엄통제권을 장악한다.
3) 이승만에게 위와 같은 조치가 이미 시행되었음을 통보하고, 그가 전시계엄령을 해제하게 하고, 국회에서 행동의 자유를 허용하게 하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게 한다.
4) 만일 이승만이 미 제국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를 독방에 감금하고 국무총리 장택상이 전시계엄령을 해제하게 한다.
5) 만일 국무총리 장택상마저 미 제국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으면, 유엔사령부가 이승만 정부를 해산하고 과도정부를 세운다.
6) 유엔군에 참여한 나라들의 요청에 따라 유엔사령부는 자기 임무를 거스르는 불법행위를 감행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군사행동을 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직후인 1953년 6월 초 국무부 차관보 월터 로벗슨을 특사로 서울에 파견해 미 제국의 지시에 복종할 것을 이승만에게 요구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 제국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을 것으로 직감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마침내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로부터 며칠 뒤 아이젠하워는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를 서울에 급파해 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미 제국의 시각에서 보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전협상을 반대하며 거역 소동을 일으킨 이승만을 복종시키기 위한 유인책에 불과했으므로, 그 조약은 알맹이 없는 깡통 조약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미 제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깡통 조약으로 만들어 놓았는데도, 윤석열 정권은 “한미동맹 70주년 만세!”를 목청껏 외쳐대면서 맹신의 길을 가고 있다.
5. 깡통 조약 제3조는 패전으로 직행하는 길
2023년 9월 28일 미 제국 국방부가 「대량파괴무기에 대응하는 전략 2023(Strategy for Countering Weapons of Mass Destruction 2023)」이라는 제목의 군사전략문서를 발표했다. 미 제국 국방부는 그 문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 본토와 역내 동맹국들 및 우호국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단거리, 중거리, 대륙간 사거리의 이동식 핵능력을 개발, 배치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핵)능력 개발은 갈등의 어느 단계에서도(at any stage of conflict)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선택권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한다”라고 기술하였다.
▲ 「대량파괴무기에 대응하는 전략 2023」표지. © 미 국방부 |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인민군이 임의의 시각에 미 제국 본토에 치명적인 핵타격을 가할 수 있을 만큼 핵전투 능력을 고도화했다는 사실을 미 제국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선인민군 전략핵 타격부대가 기습적으로 발사한 화성-18형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미 제국 본토를 강타할 것이고, 그로써 미 제국은 파멸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비교적 솔직하게 공인한 것이다.
미 제국 국방부가 미 제국 본토를 강타당하고 파멸의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공인한 것은 무슨 뜻인가? 거기에는 미 제국이 자국 본토에 화성-18형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떨어지는 파멸 위험을 감수하면서 한국을 방어해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미 제국 본토를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조선의 핵공격 능력 앞에서 미 제국은 한미동맹을 포기할 것이라는 뜻이다. 백악관은 서울을 방어해 주기 위해 워싱턴을 핵피격 파멸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우매한 집단이 아니다.
미 제국은 자국 본토를 방어하고, 역외 영토인 하와이, 알래스카, 괌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에 외곽 군사기지를 설치했고, 일본 주위에 2개의 부속 방어망을 구축했다. 그것이 바로 한국과 대만이다. 그런데 최근 중미대결이 격화되면서 대만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한국의 군사전략적 가치보다 훨씬 더 커졌다. 이것은 미 제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어도 대만은 포기할 수 없는 특이한 상황 속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미 제국은 자국 본토와 영외 영토가 조선의 핵타격 위협을 받을 경우, 한국과의 군사동맹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과의 군사동맹과 대만 방어에 군사력을 집중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놀라운 사실은, 미 제국이 미 제국 본토와 역외 영토가 조선의 핵타격 위험에 직면하는 경우 한미동맹을 포기할 ‘함정조항’을 깡통 조약에 들여놓았다는 점이다. 깡통 조약 제3조가 바로 그 함정조항이다. 깡통 조약 제3조에는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 헌법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라고 명기되었다. 이 조항을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라고 명기한 미일상호안보조약 제5조와 대조하면 격차가 커 보인다. 각자 헌법 절차에 따라 군사행동을 하는 것과 그런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시 군사행동을 하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깡통 조약 제3조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경우 미 제국은 자국의 헌법 절차에 따라 그 전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 제국 연방헌법에 명기된, 전쟁을 결정하는 절차가 번거롭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미 제국 연방헌법 제1조 8항에는 연방의회가 선전포고권을 행사한다고 명기되었다. 이 조항에 대한 법리 해석에 의하면, 전쟁을 선포하는 권한(선전포고권)은 미 제국 연방의회가 행사하고, 전쟁을 시작하는 권한(개전권)은 미 제국 총사령관인 대통령이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방의회에서 선전포고를 의결해야, 다시 말해서 연방의회가 전쟁을 승인해야 미 제국 대통령이 전쟁을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 제국 연방의회는 서로 다른 적대국들을 상대로 여섯 차례의 선전포고를 각각 의결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전통이 미 제국 제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의 독단과 전횡에 의해 깨졌다. 그는 연방의회가 선전포고를 의결하지 않았는데도 1950년 코리아 전쟁을 결정했다. 미 제국 제36대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도 연방의회가 선전포고를 의결하지 않았는데도 1964년 윁남[베트남] 전쟁을 결정했다.
트루먼과 존슨의 독단과 전횡에 의해 깨진 전통은 1990년대에 복구되었다. 미 제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부쉬(George H. W. Bush, 1924~2018)는 1991년 연방의회의 승인을 받고 걸프 전쟁을 일으켰다. 미 제국 제43대 대통령 조지 부쉬(George W. Bush, 1946 출생, 2023년 현재 생존)도 연방의회의 승인을 받고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위에 서술한 내용을 보면,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경우 미 제국은 깡통 조약 제3조에 의거해 연방의회에서 전쟁 승인을 받으려 할 것이 분명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1991년 걸프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연방의회에서 전쟁 승인을 받은 절차를 보면, 하원에서 찬성 250표, 반대 183표로 전쟁을 승인했고, 상원에서 찬성 52표, 반대 47표를 전쟁을 승인했음을 알 수 있다.
2)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연방의회에서 전쟁 승인을 받았을 때는, 미 제국 전체가 9.11 사태의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시기였으므로 하원에서 찬성 420표, 반대 1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전쟁을 승인했고, 상원에서 찬성 98표, 반대 0표라는 만장일치로 전쟁을 승인했다.
3)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연방의회에서 전쟁 승인을 받았을 때는 하원에서 찬성 296표, 반대 133표로 전쟁을 승인했고, 상원에서 찬성 77표, 반대 23표로 전쟁을 승인했다.
위에 열거한 표결 상황은 연방의회에 존재하는 전쟁 반대 세력이 만만치 않은 표결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미 제국은 연방의회의 승인을 받고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 각각 패했다. 이 두 차례의 패전은 연방의회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뒤에 무력 개입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로써 젤린스끼 종미우익정권에 미국산 무기를 지원하지 못하게 가로막으려는 분위기가 연방의회에 조성되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경우 미 제국 연방의회는 군사력을 사용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으로 갈려 격론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주목되는 것은, 분초를 다투는 현대전에서 군사력을 사용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면 패전으로 직행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미 제국 연방의회의 전쟁 승인 절차를 명기한 깡통 조약 제3조는 한미연합군이 패전으로 직행하는 길을 예시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미 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깡통 조약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그 조약 제3조에 패전으로 직행하는 길을 예시했는데도, 이번에 윤석열 정권은 “한미동맹 70주년 만세!”를 열심히 외쳐댔다. 우매한 정권이 깡통 조약을 맹신하면, 전쟁에서 패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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