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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의 선택, 리비아의 몰락 (류경완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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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908회 작성일 19-05-2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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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의 선택, 리비아의 몰락

류경완 연구위원

이 글은 류경완 연구위원이 지난 5월22일 국제분과 세미나에서 ‘리비아 정세와 전망’을 주제로 발제한 내용입니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리비아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대로 싣습니다.

1969년 27살에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 반미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범 아프리카합중국을 꿈꾸며 중동과 북아프리카 최고 부국을 이뤘지만, 2003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핵개발을 포기하고 2011년 서구의 전격 침공으로 살해된다.

42년 카다피의 온실을 벗어난 인구 640만의 리비아는 7개 정부를 거치며 1,700여 무장그룹이 난립하는 만인대 만인의 싸움터가 되었다.

최근 하프타르의 트리폴리 진격으로 점화된 새로운 내전, 리비아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 리비아 역사

- 고대 : 베르베르인, 기원전 카르타고, 이후 로마 영토, 7세기 후 아랍화

- 중세 및 근대 : 15세기부터 오스만 제국, 1911년 이탈리아 차지, 2차대전 후 영프 분할통치

- 독립 : 1951년 12월 24일 리비아연합왕국, 1959년 석유 발견(9위), 1963년 10개주 분할

- 1969년 9월 1일 카다피 대위 쿠데타, 1972년 이집트·시리아와 아랍공화국연방 창립, 1977년 탈퇴

- 반미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사회주의, 서구민주주의 부정, 전 인민이 출석하는 인민회의

바탕으로 한 직접민주제, 전인민회의(1천명 내외)

* Green Book(1975) : 총 3장(민주주의가 가지는 문제 해결: 인민의 권위,

경제 문제의 해결책: 사회주의, 세계 제3이론)

- 1986년 미국 공습, 서방 제재

- 핵개발 시작 : 파키스탄 칸 박사로부터 설계도와 원심분리기 구입

- 2003년 핵시설 폐기 및 미국 반출, IAEA 사찰 허용, 테러지원국 해제, 2006년 대미 수교

* 아랍어, 이슬람교 97%, 인구 6.4백만, 면적 한반도 8배, 2012년 GDP $12,000

□ 기초자료와 영상

1. 리비아 블로그

https://twitter.com/Libya_En

2. 카다피 혁명의 첫 아침, 1969.09.01.

https://twitter.com/i/status/1035947962642382850

3. 카다피 첫 혁명 연설, 1969.09.01.

https://twitter.com/i/status/1035907021361618946

자비롭고 인정 많은 알라의 이름으로

오, 위대한 리비아 인민

여러분의 자유의지의 실현으로

행동과 구상을 촉구하고 변화를 요구하고 혁명을 고무하는

여러분의 소중한 열망과 반복된 부름에 대한 정직한 응답으로

여러분의 군대는 낡고 부패한 반동체제를 무너뜨렸습니다.

이제 리비아는 자유롭고 독립된 리비아아랍공화국입니다.

알라의 도움으로 떠올라

자유와 단합과 사회정의의 길로 갈 것입니다.

시민의 평등권을 보장하고 그들 앞에 정직한 노동의 문을 열 것입니다.

불이익을 받거나 억압당하지 않고

주인도 노예도 아닌, 알라의 뜻대로

평등과 번영의 깃발 펄럭이는 사회의 자유로운 형제들로

원한을 잊고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우리의 성소를 불태우고 명예를 산산이 부순

아랍의 적, 이슬람의 적, 인도주의의 적에 맞서 단결해

영광을 이루고 전통을 회복하며

상처 입은 존엄과 강탈 당한 권리에 복수합시다.

오, 바디아 인민이여, 사막의 인민이여, 오랜 도시의 인민이여

우리 아름답고 사랑스런 마을의 인민이여

행동할 시작종이 울렸습니다.

전진합시다.

4. 카다피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 인터뷰, 2010.

https://twitter.com/i/status/1091073036990775302

5. 리비아의 카다피 지지 집회, 2011.02

https://twitter.com/i/status/1097189710852698118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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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6. 카다피 사망 수 시간 전 가족에 남긴 인사, 2011.10.20

https://twitter.com/i/status/1053662031340015616




7. 나토 전쟁 전의 리비아

https://twitter.com/i/status/1064193688216190976




8. 파괴된 벵가지, 2018.09.08.

https://twitter.com/i/status/1038443504995852290




9. 하프타르 군과 통합정부 민병대의 전투, 2019.04.17. 트리폴리

https://twitter.com/i/status/1118597120272011269




10. 카다피에 관해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10가지, 2018.11.30. <Global Research>

https://www.globalresearch.ca/libya-ten-things-about-gaddafi-they-dont-want-you-to-know/5414289




11. 카다피 시절이 살기 좋았던 10가지 이유, 2019.05.11. <The African Wxponent>

https://www.africanexponent.com/post/ten-reasons-libya-under-gaddafi-was-a-great-place-to-live-2746




12. 카다피의 위대한 인공 강 : 거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2016.05.31. <ANONHQ.COM>

https://anonhq.com/investigative-great-man-made-river-gaddafi-happened/?fbclid=IwAR2P1o0I9mbABAxQ2TmTRoANV_ba2BppdKw_XkkPU0n-YOuhoG25RgKRl-E




- 1953년 리비아 남부 사막에서 화석 대수층 발견 : 4,500~20,000입방km

- 1974년 예비타당성보고서 작성, 1983년 5단계 프로젝트 시작, 2011년 3단계 완료

* 1단계 : 1991년 시작, 시르테~벵가지 1,000km, 100만입방미터/일 공급

* 2단계 : 트리폴리와 해안 벨트에 100만입방미터/일 공급

* 3단계 : 토브룩 및 기타 도시

* 4~5단계 : 100,000헥타르 이상 지역 관개

- 콘크리트 파이프 직경 4m, 총 3,500km, 우물 천여 개

- 프로젝트 국제사회 인정, UNESCO 국제수자원상 수상, 이민노동자 고용 유발

- 2011년 7월 나토 : 수계, 파이프라인, 파이프 생산 공장 폭파, 국토 50% 이상 건조화

- 마지막 두 단계 20년 내 완료 예정, 나토 폭격으로 불투명

- 현재 지구 인구의 39% 물 부족, 세계은행 물 민영화 추진




13. 원유 통제를 위한 예멘에서의 인종청소, 2018.11.20. <New Eastern Outlook>

https://journal-neo.org/2018/11/20/yemen-genocide-about-oil-control/




2003년 이라크 침공은 원유에 관한 것이었다. 폴 울포위츠 등 당시 미국의 여러 관리들이 동의했다. 세계 최대 원유기업 핼리버튼의 CEO였던 체니는 1998년 텍사스 원유그룹 회의에서 “원유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정치적인 불안정성은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부시 주니어 하의 부통령 체니는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5년 이내 7개국(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이란) 탈취”라는 군사 캠페인을 설계했고, 장성 웨슬리 클락은 몇 년 뒤 이를 공표했다. 이들 7개국은 거대한 중동 원유의 중국, EU 및 세계 경제로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한 전략지역이다.




14. 힐러리 이메일, 카다피 살해 이유는 금본위 통화(골드 디나르) 창설 막으려

2018.11.04 <Global Research>

https://www.globalresearch.ca/hillary-emails-reveal-nato-killed-gaddafi-to-stop-libyan-creation-of-gold-backed-currency/5594742




미 국무부가 공개한 3천여 통의 힐러리 이메일은 나토의 카다피 전복 음모가 골드 디나르에 기반한 아프리카 통화를 깨트리고, 리비아 원유 자원을 확보하는 데 있다는 증거를 폭로했다.

“프랑스의 고객과 카다피의 금”

- 카다피, 143톤의 금과 비슷한 양의 은화(70억 달러 상당)으로 범아프리카 통화 창설 계획, 아프리카 주 통화로 유통되는 프랑 위협

- 사르코지의 리비아 공격 : 리비아 원유 확보, 역내 프랑스 영향력 보전, 사르코지의 국내 정치상황 개선, 프랑스 군사력 과시, 카다피 영향력 제거




15. 파키스탄과 리비아를 거쳐 미국에 간 조선의 핵탄두 설계도, 한호석 <자주시보>

http://www.jajusibo.com/45576




- 2013년 10월 리비아향 선박 이탈리아에서 나포, 카다피가 주문한 원심분리기 등 발각

* 원심분리기, 우라늄농축공장 설계도, 핵탄두 설계도 등은 파키스탄에서 수입

- 미, 리비아 핵포기 압박, 카다피 수용, 2004년 미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반출

- CIA, 국제 핵거래망에 스파이 부자 활용, 4년 간 1천만불 지급

- 파키스탄 가우리, 이란 샤하브-3 : 북에서 화성-7 설계기술과 완제품 수입

- 중국 : 1958년 소련 지원으로 핵개발 시작, 1964년 성공

1982년 파키스탄에 핵무기 설계도 제공

- 북 : 1999년 방북한 칸에 핵탄두 3발 관찰학습(직경 60cm)

* 북 : 거의 모든 종류의 지하자원을 골고루, 풍부히 가진 유일한 나라

고품질 천연우라늄 매장량 400만톤(세계 473만톤)

레이저분리기를 사용하는 우라늄 농축기술 보유, 연 2,000톤 생산(미국 1,850톤)

1950년대 말, 소련 핵폭탄 설계도와 무기급 플루토늄 200kg 입수, 핵폭탄 제조

* 칸 : 1994년 방북시 북은 파키스탄 핵기술보다 “훨씬 더 발전되고 훌륭한 핵기술” 보유,

“매우 정교한” (핵탄두) 설계도 보유

* 1998년 5월 30일 파키스탄 차가이사막에서 비공식 핵시험, 플루토늄탄 12킬로톤 위력

준비한 우라늄탄 한 발은 미시험





□ 카다피 사후(2011~2019년) 정세


- 2008년 8월 반카다피 세력 폭동

- 2011년 2월 벵가지 시위, 무장반란 시작

- 2011년 3월 19일 나토 공습 시작

- 2011년 9월 유엔총회, 리비아과도국가위원회(NTC) 회원국 지위 인정

- 2011년 10월 20일 시르테에서 카다피 살해(힐러리 클린턴 "We came, we saw, he died.")

- 2014년까지 민병대 난립, 정규군과 경찰 구성 실패, 두 개의 정부

- 2014년 5월 하프타르 쿠데타 실패, 토브룩 정착, 두 개 의회, 7월 내전상태 돌입

- 정파, 부족, 동서부 지역대립, 투아레그 등 분리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IS 테러 등 난립

- 2016년 1월 통합정부 구성 발표, 내분·평화협상 지속

- 2017년 1월 식민 지배국 이탈리아와 학살 사과, 피해 보상과 지중해 난민 단속 협력 합의

- 2018년 3월 카다피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45), 대통령 선거 출마 발표

- 2019년 4월 하프타르, 트리폴리 진격... 트럼프, 하프타르와 통화 후 사실상 지지

* 서부 트리폴리 기반 리비아통합정부(GNA) : 국제적인 인정, 터키, 카타르 등

친무슬림형제단과 일부 서방 지지

* 동부 도시 토브룩, 하프타르 주도 리비아국민군(LNA) : 이집트, 사우디, UAE,

러시아, 프랑스, 남아공 등 지지




- 매일경제(5/22)

수도 트리폴리를 두고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리비아 통합정부와 동부 군벌의 내전이 많은 희생을 동반한 장기전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가산 살라메 유엔 리비아 특사는 21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해 트리폴리를 두고 벌이는 리비아 내전이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기나긴 전쟁의 시작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번 분쟁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all-against-all)으로 부를 만한 총체적 혼돈 상태로 비화할 수 있으며, 이는 리비아를 분열시키는 것은 물론 이웃 국가, 나아가 지중해 지역의 안보까지 해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살라메 특사는 내전에 따른 치안 공백 속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와 알카에다 추종세력이 다시 준동할 수 있다는 우려도 더했다.

실제로 리비아 남부에서는 이미 IS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출현했으며 내전 발발 이래 IS의 네 차례 공격으로 17명이 숨지고 1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그는 강조했다.

여기에 유엔 제재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인물과 국제형사재판소로부터 수배된 범법자들까지 리비아 내전의 어느 한쪽 편에 가담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면서 갈수록 혼란해지는 현지 실태를 소개했다.





□ 칼리파 하프타르




* 1943년생, 알 파르 자니 부족, 1969년 카다피 쿠데타 때 군 간부로 가담

* 1987년 차드와의 전쟁에 포로, 석방 뒤 1988년 반정부 군사조직 리비아국민군 결성

* 1990년 미국 망명, 버지니아 랭글리 CIA 본부 근처 장기간 체류, 카다피 전복 지지

* 2011년 카다피 반군 지상군 사령관(중장)으로 귀국, 카다피 축출 후 도미

* 2014년 재등장, 2016년 러시아 방문, 2017년 제2의 도시 벵가지 장악






트럼프와 푸틴은 리비아에 눈을 맞출 것인가?

2017년 2월 14일, <Lobe Log>




시리아 위기에 대한 러시아의 결정적인 군사 개입의 결과로, 크렘린은 이제 아랍 세계 전역에서 점점 더 영향력 있는 역할을 추구하고 있다. 이제는 리비아에 주목하고 있다. 비록 러시아가 시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사력과 정치 자본을 많이 투자하지는 않을지라도, 리비아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모스크바의 지정학적, 안보 및 에너지 이해 때문에 올해 러시아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는 리비아에 대한 군사 개입의 법적 토대를 형성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73호에 대해 거부권과 기권을 사용하지 않은 실수를 시리아에서는 반복하지 않았다. "급진적인 이슬람 테러리즘"을 물리치기 위한 트럼프의 탐색을 감안할 때, 그는 리비아 내전이 혼돈을 악화시키는 이슬람 국가와 다른 허무주의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협력해야 할 영역으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




카다피 이후 리비아에 퍼진 혼란은 러시아의 이익을 훼손시켰다. 2011년 혁명 이전에 모스크바는 석유 및 가스산업에 최대 100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리비아 내전이 2014년 시작된 이래로 러시아는 신중하고 미묘한 전략을 추구해 왔다. 한편 모스크바는 리비아국민 군(LNA)을 지휘하는 하프타르 장군이 이끄는 리비아의 세속적인 토브룩 기반 의회를 지지했다.




5월 이래로, 러시아는 토브룩 행정부를 위해 수십억 리비아 디나르를 인쇄했으며, 하프타르는 모스크바에 두 차례 여행하여 러시아 최고관리를 만났다. 러시아는 부상당한 LNA 병사들을 치료했고, 지난 달 러시아의 유일한 항공모함, 쿠즈네초프호가 리비아에 정박해 하프타르를 초대했다. 또한 모스크바와 토브룩 정부는 리비아 동부에 2개의 새로운 러시아 군사 기지 건설을 허용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한편 러시아는 리비아의 국제적으로 인정된 통합정부 (GNA)의 관료들과도 공조해왔다. 트리폴리에 본부를 둔 GNA와 열린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러시아는 리비아 반대세력 간의 대립에서 레버리지를 강화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허약한 GNA가 올해에 내파하고 하프타르 세력이 리비아에서 전략 요충지의 통제권을 계속 침탈한다면 러시아는 GNA에 충성스러운 세력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LNA를 후원할 수 있다. 또한 LNA가 이집트와 UAE에서 군사 지원을 받아 최근 몇 달 동안 더 많은 석유 시설과 지역을 확보한 상황에서 모스크바는 유엔과 서방이 지원하는 약한 정부가 아닌 하프타르를 카다피 이후 극단주의에 대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보루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기타>

로동신문(5/20) 논설, ‘조선노동당의 자주노선은 위대한 승리와 번영의 기치이다’

"세계사회주의 진영이 존재하던 시기에는 자주 문제가 주로 사대와 교조, 대국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노선상 문제였다면, 오늘에 와서 자주는 적대세력들의 2중, 3중의 압박 속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운명적인 문제, 강국건설 위업을 중도반단하는가, 끝까지 완성하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라크와 리비아를 비롯한 일부 나라들의 교훈은 대국들의 비위를 아무리 잘 맞춰준다고 해도 결국에는 유혈적인 동란과 민족적 참화를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역설했다.




북 외무성(5/16)

“진정한 국제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자주성에 기초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세워야 한다”, “지배와 예속의 관계, 불평등한 관계를 청산하고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완전한 자주권과 평등권이 보장되는 정의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서는 국제사회를 민주화하여야 하며 이를 위하여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민주화를 실현하여야 한다”




“국제적 정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반제자주적 나라들의 힘이 강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우리 공화국이 자주, 자립, 자위의 기치를 높이 들고 다져온 당과 인민 대중의 일심단결과 튼튼한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 강력한 국가방위력은 진정한 국제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믿음직한 담보”







□ 카다피에 관해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10가지, 2018.11.30. <Global Research>

https://www.globalresearch.ca/libya-ten-things-about-gaddafi-they-dont-want-you-to-know/5414289




오늘날 국가로서의 리비아는 US-NATO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카다피라는 이름을 들을 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폭군? 독재자? 테러리스트? 음, 리비아 국민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2011년 10월 사망하기까지 42년 동안, 무아마르 카다피는 자신의 나라를 위해 진정 놀라운 일들을 수행했고 아프리카 전역을 단결시키고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라디오나 미디어, TV에서 들었던 것과는 달리, 카다피는 서구 언론에 의해 묘사된 “지독한 독재자”의 특징이 아닌 엄청난 일들을 했습니다.




카다피가 리비아를 위해 했던 당신이 모르는 10가지 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리비아에서는 주택이 천부인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카다피의 ‘그린북’은 말합니다. “집은 개인과 가족 모두의 기본적인 수요이므로 타인에 의해 소유되어서는 안 된다”고. 카다피의 그린북은 지도자의 정식 정치철학을 담은 바이블로, 국가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모든 리비아인이 읽도록 1975년에 처음 출판되었습니다.




2. 교육과 의료는 모두 무료였습니다.

카다피 하의 리비아는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리비아 시민이 원하는 교육 과정에 접근할 수 없거나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경우 해외 출국을 위한 비용을 지급했습니다.




3. 세계 최대 규모의 관개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전국에서 모든 리비아인들이 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위대한 인공하천으로 알려진 세계 최대의 관개 시스템이 설계되었습니다. 그것은 카다피 정부에 의해 투자되었고 카다피 자신이 "세계의 8번째 불가사의"라고 불렀습니다.




4. 농업 비즈니스를 자유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리비아인이 농장을 시작하기를 원하면 그들에게 집과 농장 토지, 생계 물품, 종자가 무료로 지급되었습니다.




5. 출산한 어머니에게 장려금이 지급되었습니다.

리비아 여성이 출생했을 때 그녀는 5,000달러를 받았습니다.




6. 전기는 무료였습니다.

리비아에서 전기는 완전히 무료였습니다.




7. 저렴한 기름값

카다피 통치 기간 중 리비아 석유 가격은 14센트/리터로 낮았습니다.




8. 카다피는 교육 수준을 올렸습니다.

카다피 이전에는 리비아인의 25%만이 글을 읽었습니다. 이 수치는 87%까지 올랐고, 25%는 대학 수준에 달했습니다.




9. 리비아는 국영은행을 보유했습니다.

리비아 국영은행은 법률에 의해 0% 이자율로 시민들에게 대출을 제공하고, 대외 부채가 없었습니다.




10. 골드 디나르

트리폴리의 몰락과 그의 때 이른 사망 이전에, 카다피는 금에 연동된 아프리카 단일통화를 도입하려 했습니다. ‘아프리카합중국’ 개념을 창안했던 위대한 선구자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의 발걸음을 따른 것입니다. 그는 이 단일통화를 도입해 금 디나르만으로 거래하기를 원했습니다. 세계 경제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시도였습니다.




디나르는 사회의 광범한 ‘엘리트층’이 반대했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겠지요. 아프리카 국가들은 최종적으로 부채와 빈곤에서 벗어나 이 귀중한 재화만으로 교역할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외부의 착취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고, 귀중한 자원에 적합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을 청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금 디나르가 용감하게 솔직했던 지도자를 축출하기 위해 나토가 반란을 일으킨 진정한 이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아마르 카다피는 테러리스트였습니까?




공정하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누군가 할 수 있다면, 그의 통치하에 살았던 리비아 시민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그의 이름을 둘러싼 불명예스런 악명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나라에 긍정적인 일을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 판단할 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카다피 시절이 살기 좋았던 10가지 이유, 2019.05.11. <The African Exponent>

https://www.africanexponent.com/post/ten-reasons-libya-under-gaddafi-was-a-great-place-to-live-2746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는 세상이 믿게끔 강요한 ‘완전한 지옥’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투표하는 사치는 누리지 못했지만, 축소된 자유의 보상으로 높은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을까는 논쟁할 문제이지만 사실은 남아 있다. 카다피 하의 리비아는 (권력을 빼앗으려는 시도만 않는다면) 살기 좋은 곳이었다.




1) 전액 무상교육, 무상의료




2) 신혼부부의 첫 아파트 구입에 50,000달러 지원




3) 사막지역에 세계 최대의 인조 강 관개 프로젝트




4) 외채 0, 외환보유 1,500억 달러(미국 부채 18조 달러)




5) 기름값 14센트/리터(약 160원), 세계 3번째로 저렴




6) 주택 소유는 인권 간주(카다피, 모든 국민이 집 가지기 전에는 자신의 부모를 위한 집 확보하지 않겠다고 약속)




7) 실질적인 성평등 실현(초급교육에 대한 보편적 접근 단기간에 실현, 여성 노동과 복장은 가족 통제 하에 자유 허용) : 아랍 공동체의 민감한 성 역할 고려할 때 커다란 업적




8) 인간개발지수(HDI : 의료, 교육, 소득 통합척도) 세계 163개국 중 53위, 아랍국 최고 수준(아랍 0.641, 리비아 0.760), 2009년에 2015년 밀레니엄개발목표 조기 달성




9) 충분한 식품, 일일 칼로리 섭취량 3,144Cal, 영양부족율 5% 이하(FAO), 관개 프로젝트로 더 밝은 농업 미래 제시




10) 전 국민에 원유자원 민영화 프로그램 2011년 2월 발표, 2011년 최초 1인당 21,000달러(총 320억불 재원) 지급 계획 : 의료/교육부처 해체, 부패와 외국기업의 원유 탈취 제거, 권력 분산 목적




카다피는 독재자였나요? 예. 그는 일부 시민의 인권을 침해했습니까? 예.

하지만 그는 또한 자신의 나라를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는 매번 그 부분을 편리하게 건너뜁니다. 동일 인물이 어떻게 그토록 역설적인 모습으로 될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 “우리는 카다피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곤경에 처한 리비아인들이 울부짖는다. 2016.10.02 <The African Exponent>

https://www.africanexponent.com/post/8016-we-miss-you-colonel-gaddafi-cry-the-troubled-libyans




리비아는 카다피와 함께 죽어버렸다. 리비아인들은 더 이상 나빴던 적이 없다.




31세의 모하메드 “나는 혁명의 첫날부터 참여해 싸웠다. 2011년 전에는 누구보다 카다피를 증오했다. 그러나 지금, 삶은 훨씬 더 힘들고, 나는 그의 가장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밝혔다.




식품 가격은 5배 뛰었고, 임금은 몇 달씩 체불되고, IS 테러의 부상과 악화되는 정전 사태... 카다피 이후 나아진 것은 없다. 혁명의 쓴 과일에 대한 실망감에 덧붙여 마흐무드는 "2011 이

후 7개의 정부를 보았지만 무엇을 얻었는가? 유일한 성취는 초기 정부가 트리폴리에 설치한 커다란 쓰레기통뿐이다"라고 말했다.




원유노동자 하룬은 카다피 제거가 “명백히 실수였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준비가 안 됐고 국제사회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고 밝혔다. 서방은 열심히 폭격했지만 그 여파로 남은 폐허에 대한 재건과 구조조정은 중단했다. 리비아는 40년 이상 가지지 못한 민주주의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지만, 군사적 수단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수많은 그룹들이 남았다.




정치활동가 파디엘은 “지금이 카다피 시절보다 나아야 하지만, 남은 것은 혼돈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난장판”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리비아인은 “리비아는 카다피와 함께 죽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라 단지 종족과 마을, 도시 간 전쟁그룹들로 되었다. 전에는 하나의 카다피가 있었지만 이젠 6백만의 작은 카다피가 있다"고 대담하게 말했다.




타협하지 않으려는 두 개의 정부에 더해, 유엔을 통해 서방이 하나의 정부를 추가했다. 전직 리비아 외교관은 “나라는 이미 분열되었다. 우리는 두 개의 정부와 두 개의 의회, 두 개의 중앙은행과 두 국영 원유회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슬람 국가가 시르테 시를 확고히 장악해, 지하드 극단주의 전사들을 양성하는 테러공장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방은 IS가 장악한 지역을 회복하려는 싸움에 뛰어들었다.




전직 외교관 압두살렘은 “이른바 혁명은 모두 거짓이었다. 리비아인들은 그 말의 의미조차 몰랐다. 우리는 42년 간 카다피의 보호 아래 있었다. 그것은 리비아의 혁명이 아니라 카다피 제거를 위한 나토의 혁명이었다”고 말했다. 나토는 명분을 탈취해 그 자신의 목적을 추진했고, 리비아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바마는 정당한 이유에 따른 개입이 아니라 사르코지와 카메론이 ‘개판을 친 것’이라고 인정했다.

(오바마, 자신의 대통령직의 최악의 실수는 “카다피 전복의 여파에 대한 계획이 부족했던 것” 유감 표명, 개입은 “옳은 일” 강변... 미국은 유엔의 임무 수행에 노력, 리비아가 미국의 핵심 이익은 아니라 장기 군사 개입은 피하려 했다고 주장)




영국 의회보고서는 리비아의 혼돈에 카메론이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고 규정했다. 나토는 민간인 보호를 위해 개입했다고 주장하지만, 26세의 트리폴리 의대생은 “42년의 카다피 지배와 혁명기를 합친 것보다 2011년 이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카다피 하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혁명’의 결과 생겨난 무장그룹은 1,700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리비아에서 정치는 투표권이 아니라 총과 폭탄에 의해 결정된다. 리비아인들은 이보다 더 나빴던 적이 없다. 희망했던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고, 상처 위에 모욕이 쌓인다. 평화는 없고, 대규모 테러조직들이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려 한다. 한 시민의 말대로 “리비아는 카다피와 함께 죽어버렸다”.
[출처] 리비아 정세와 전망|작성자 427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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