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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5-9. "중동의 이슬람국가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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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517회 작성일 23-09-2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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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이슬람국가 이란

 

 


류태영 박사.jpg

 

저자: 고 류태영 박사 

 

이란은 원유매장량이 세계2위일뿐아니라 천연가스매장량도 로씨야 다음가는 지하자원부국으로서 인구는 7 419만명정도이고 국토는 우리 조선반도의 약 7. 4배가량 되는 중동의 이슬람국가이다.

이란은 이슬람혁명으로 54년동안 이란을 통치해온 파흐라비왕정을 무너뜨리고 숱한 외세의 회오리바람을 물리치며 나가고있다.

이란이 이러한 정치행로를 걷게 된데는 이란이슬람혁명의 지도자 코메이니의 역할이 컸다. 그는 1979년에 외세에 기울어진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했는데 이때로부터 이란은 중동지역에서 무시할수 없는 강력한 국가로 일떠서게 되였다.

하지만 이란내부는 다소 복잡한 면도 없지 않다.

그것은 외세를 배격하면서 자주를 지향하는 세력과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세력간에 갈등이 존재하고있는것이다.

이란은 이슬람혁명이후부터 줄곧 자주로선을 지향하는 세력과 사대주의로선을 추구하는 친미친서방개혁파사이의 치렬한 투쟁속에서 발전해오고있다.

 

간추린 이란의 고대력사

 

이란의 력사를 크게 시대별로 구분하면 첫째, 고대페르샤시대, 둘째, 이슬람의 페르샤정복과 그 이후의 이슬람시대, 셋째, 근대이란시대로 구분할수 있다.

첫째, 고대페르샤시대(B.C. 2800-A.D. 650년)는 (1) 아리아족의 이주와 메디아왕국, (2) 파르티아제국, (3) 고대페르샤제국시대로 이어지고 둘째, 이슬람의 페르샤정복이후시대(650-1794년)는 (1) 헬레니즘시대, (2) 셀쥬크제국시대, (3) 몽골제국점령시대, (4) 사하비왕조시대, (5) 이슬람시아파왕조시대, (6) 아흐샤르왕조와 카쟈르왕조의 출현과 더불어 이 이슬람시대는 모두다 끝난다.

 

카쟈르왕조 등장과 근대적이란시대전개

 

근대이란력사의 시작은 1796년 카쟈르왕조시기부터라고 말할수 있다. 카쟈르왕은 이란의 수도를 지금의 테헤란으로 옮겼으며 근대화의 문호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카쟈르왕은 극악무도한 성격과 사치로 인하여 자기 부하에게 살해당하고만다.

그후 1848년에 집권을 시작한 낫세르샤왕은 짜리로씨야와 싸워서 두번이나 패하여 국토의 일부를 빼앗겼으며 영국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칸아미르재상이 쓰러져가는 이란을 살리기 위하여 강경책을 들고나와 부국강병을 이루어보려 하였으나 이것도 낫세르샤왕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고 해임당한 뒤 곧 죽고말았다.

이란은 1800년대를 마감하고 1900년대에 들어선 시기에 또다시 외세의 침략행위로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1907년 영국과 짜리로씨야의 이란량분정책에 의해 이들의 수탈대상이 되였다.

이들 영국과 짜리는 제1차 세계대전후에 가서야 이란의 독립을 승인했지만 그것은 말뿐이고 여전히 이란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럴 때 영국은 짜리가 1917년에 일어난 혁명으로 내정에 몰두하고있는 틈을 타서 1919년 이란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비밀협정을 강요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분노한 이란민중은 영국의 식민지화를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를 오히려 좋은 기회로 삼아 민중봉기를 진압한다고 하면서 영국을 등에 업고 등장한 세력이 바로 레쟈 샤 파흐라비왕조세력이였다.

레쟈 샤 파흐라비왕은 이슬람학자들이 서방식근대적국민의식을 이란국민들에게 주입시키도록 강요하는 한편 이슬람교의 격을 떨어뜨리고 서방식개혁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민중의 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세의 강요와 파흐라비왕권의 유지를 위해 일방적으로 진행되였으므로 파흐라비왕은 이슬람교와 민중들의 규탄대상이 되고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 들어서 레쟈 샤 파흐라비왕이 죽고 그의 아들 모하마드 파흐라비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앉는 변이가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 도이췰란드편에 섰던 레쟈 샤 파흐라비왕은 영국에 의하여 체포되였고 결국 방랑객이 되여 중동에서 전전하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한네스부르그에서 객사하고말았다.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모하마드 파흐라비왕은 친서방로선을 추구했지만 이란민중들의 거센 반미, 반영국감정에 부딪쳐 난처한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결국 그는 대세에 밀려 1951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반미, 반영운동권의 조직체인 민족전선의 지도자 모사데크를 수상으로 임명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수상으로 취임한 모사데크는 취임과 동시에 우선 영국이 가지고있던 석유리권을 되찾아 국유화했다. 이러한 조치는 이란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불러일으켰으며 이것은 자연히 소수 기득권지배층과의 충돌을 야기시켰다. 수상과 왕권사이의 갈등은 날로 심화되였으며 나중에 모하마드 파흐라비왕은 해외로 망명하게 되였다.

모사데크수상의 정치로선이 강력해지고 이란의 사회주의적인 세력과의 협력관계가 점점 깊어지게 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은 이란정부를 뒤집어엎기 위한 공세에로 나왔다.

여기서 주되는 역할을 논것은 미국이였다.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아이젠하워는 미중앙정보국이 비밀공작을 벌려 이란군부가 친미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했다.

그리하여 1953년에 이란에서는 미국의 음모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모사데크수상은 체포되여 3년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후 감옥에서 나온 모사데크는 가택연금상태에 있다가 1967년에 비참하게 사망하였다.

이란에서 쿠데타가 있은 후 해외에 망명해있던 모하마드 파흐라비왕은 다시 테헤란으로 돌아와 왕권을 회복했으며 미국의 보호밑에서 26년동안 집권하였다.

그동안 모하마드 파흐라비왕정은 이란의 석유권을 미국에 40%나 넘겨주는 굴욕적인 행동을 하였으며 친미, 친영로선을 로골적으로 추구하면서 이슬람민족주의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 시기 미국은 이전 쏘련의 중동진출을 막고 이 지역에 대한 저들의 패권을 위해 1955년 중앙조약기구(CENTO)를 조작하고 중동지역에서 반공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런가 하면 모하마드 파흐라비왕은 이에 발맞추어 1959년 미군이 이란에 주둔하는것을 법적으로 허용했다.

파흐라비왕정의 이러한 친미친서방적이며 반민족적인 행동은 광범한 이란민중의 분노를 자아냈으며 이것은 곧 파흐라비왕정세력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져 전국 각지에서 거세찬 반정부투쟁이 일어났다. 모사데크의 자주, 자립로선이 다시 되살아나고있었던것이다.

이와 같은 반미반외세를 지향하는 민중운동의 중심에 바로 코메이니가 있었다. 《모사데크국민친서》, 《이란자유운동》, 《테다인민병대》, 《무쟈헤딘이슬람전사》, 《코메이니의 운동》 등 모든 애국단체들이 코메이니혁명운동의 원동력이 되여 파흐라비왕정타도운동을 전개하였다.

 

코메이니 이슬람혁명과 이란마지막왕조의 붕괴

 

1963년 코메이니는 파흐라비왕정의 백색혁명을 심도있게 비판하여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파흐라비왕의 행위는 이슬람전통과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악행이라고 규정하고 맹렬히 비판하는 한편 파흐라비왕정종식운동을 전개했다.

그러자 파흐라비왕은 코메이니를 체포하여 8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했다. 그러나 1964년에 감옥에서 나온 코메이니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파흐라비왕은 이번에는 그를 외국으로 추방했다.

파흐라비왕정의 이러한 탄압행위는 국제사회의 항의를 불러일으켰으며 지어 미국내에서까지도 파흐라비왕정의 인권탄압과 코메이니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1970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이란의 국내외에서는 파흐라비왕을 규탄하는 한편 코메이니추방을 반대하는 국민적항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지기 시작하여 1978년에 항쟁은 절정에 달하게 되였다. 이 과정에 400여명의 사람들이 경찰들의 손에 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란민중들의 항쟁은 거세만져갔다.

파흐라비왕은 결국 민중항쟁에 무릎을 꿇고 1979년 1월 16일 미국으로 피신하였다. 이렇게 1925년에 등장하여 서방세력을 등에 업고 기득권을 누려오던 파흐라비왕정의 운명은 끝이 나고말았다.

1979년 2월 1일 15년간의 외국망명생활을 끝내고 이란으로 돌아온 코메이니는 2월 11일에 림시정부를 수립하고 총리로 바자르간을 임명하였으며 3월말에 16살이상의 모든 이란국민이 참가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던 1979년 11월 4일 이란에서는 미국대사관인질사건이 일어났다. 이란의 대학생들이 미국대사관을 습격하여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은 뒤 미국이 보호하고있는 파흐라비왕을 부정부패재판을 위해 넘겨달라고 요구하였던것이다.

학생들은 미국대사관을 외국에서 활동하고있는 스파이소굴이라고 락인하고 비밀문건 50권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이란혁명위원회는 1979년 12월 이슬람공화국을 표방한 이란헌법을 채택하고 1980년 2월 4일 헌법에 의한 대통령으로 바니 사드르를 선출하였으며 종신제로서 코메이니를 이란의 정치 및 정신적최고지도자인 이슬람교지도자로 추대하였다. 이란혁명을 이끈 코메이니는 1989년에 사망하였다.

 

미국의 대리전 이란-이라크전쟁

 

코메이니 이슬람혁명의 승리로 인하여 반민족적이며 사대주의적인 파흐라비왕정은 붕괴되고말았다.

이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불안을 느낀것은 미국이였다.

왜냐하면 파흐라비왕정은 중동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인 친미정권으로서 미국이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정책의 거점으로 리용해왔었기때문이다.

파흐라비왕정의 붕괴는 곧 미국의 영향력이 중동지역에서 약화된 반면에 중동에서 이란의 정치적영향력과 이슬람원리주의가 확장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중동정책실현에 큰 문제점을 빚어낼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출로를 이란과 이라크사이를 갈등구조로 만드는데서 찾았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조장하에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진행된 이란-이라크전쟁이였다.

사실 1980년 2월 4일에 비로소 처음 헌법을 채택하고 새 대통령을 선출해놓은 상태에 있었던 이란으로서는 전쟁을 시작한다는것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였다. 또한 미국대사관인질사건으로 인하여 미국과 첨예하게 대치하고있으면서 석유수출의 중단은 물론 모든 수입이 봉쇄를 당하고있던 이란으로서는 이 시기가 매우 긴박한 시기였다.

한편 시아파강국인 이란과 순니파의 본거지인 이라크사이에는 오래동안 서로 갈등이 존재해왔고 국경문제 등 중동의 주도권을 놓고 팽팽히 맞서고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점들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이라크로 하여금 이란을 선제공격하도록 함으로써 전쟁의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라크에 접근해서는 대량의 무기를 판매하였다.

전쟁기간 두 나라에서는 모두 100만명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무려 수천억US$의 비용이 든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를 직접 침략하기도 했지만 나라들사이에 쐐기를 박고 불협화음을 조장하여 싸움을 붙여놓고는 그사이에서 저들의 리익을 챙기는 행위들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한때는 이라크를 부추겨 저들의 대리전쟁을 하도록 했던 미국은 1991년에는 만전쟁을 일으켜 43일동안이나 이라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2003년 3월에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하고있다느니, 인권과 민주주의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이라크를 침공하고는 허수아비정권을 세우고 남의 나라 대통령을 처형하는 행위를 자행했다.

2010년 8월 31일 이라크에서 미군의 전투임무가 완료되였다고 발표한 미국은 곧 미군을 모두 철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계의 선량한 량심은 《그 누가 미국이 이라크에서 손을 뗄것이라고 믿겠는가.》라고 묻고있다.

 

오늘의 이란정치상황

 

2010년 8월 31일에 있은 미국의 발표가 마치 중동에서 미국의 군사적개입이 줄어드는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은 중동지역에서의 저들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것처럼 이란에 대하여서도 전쟁의 방아쇠를 당길것으로 여겨진다.

지금 미국은 중동에서 미국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이란을 봉쇄하고 뛰르끼예와 사우디 아라비아를 끌어들이려고 하고있다. 세계군사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부쉬가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을 일으킨것처럼 오바마도 이란에 대하여 《오바마전쟁》을 일으킬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 이란의 아흐마디네자드대통령이 2009년 6월 12일에 재선에 승리하여 이슬람혁명이후 력대 대통령중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대통령으로 떠올랐다.

이란의 독특한 정치구조로 대통령의 권한은 제한되여있고 성직자전문위원회가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결정권을 가지고있지만 아흐마디네자드대통령은 핵문제를 통해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고있으며 국내의 복잡한 문제들을 유능하게 해결하고있는 능력을 과시해왔다.

핵문제로 미국과 대치하고있는 위기정국에서 아흐마디네자드대통령은 국민화합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고있다.

하지만 지금 이란에서 복잡한 문제로 론의되는것은 보수주의와 개혁주의의 대립문제가 아니라 외세를 반대하는 보수주의내부에서 벌어지고있는 분쟁문제라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같은 로선을 지향하는 정치세력내부의 분파문제라는 점이다.

아흐마디네자드대통령은 이 분쟁에서 단연 보수파로 등장한 강경한 대통령후보자였다. 물론 코메이니 이슬람혁명이 승리한 뒤 30년세월이 흐른 오늘 이슬람혁명근본주의세력안에는 보수파와 개혁파가 존재하고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분파들이 외세의존적친미세력인 개혁주의자들과는 달리 다같이 반제반미자주로선을 지향하는 세력들이라는 점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아흐마디네자드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에 개혁파로 여겨지는 대학총장들과 교수들이 일부 경질되고 이란에 한때 개혁파의 바람이 불어닥친적도 있지만 이러한것들이 결코 강경로선을 내세우는 이란정권을 흔들수는 없는것이다.

아흐마디네자드대통령은 현재 중국, 로씨야 등의 나라들과 긴밀한 련계를 유지하면서 평화적핵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있다.

그는 이란의 핵개발을 미래의 석유부족에 대한 대비책이라는 당당한 리유로 미국의 위협공갈을 단호히 배격하고있다. 그런가 하면 이란민중들은 누구나 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안보위협으로부터 이란을 지키려면 이란의 핵개발은 당연하다.》고 숨김없이 말한다.

또한 이란의 두뇌집단은 《이란의 핵개발은 평화적목적으로 핵에네르기개발을 위함이다. 아무리 석유가 많이 있어도 21세기끝에 가서 석유가 바닥나면 어찌할것인가? 이란이 핵을 평화적으로 리용하는 주권을 행사하고있는데 왜 미국이 야단인가.》라고 대꾸한다.

이제 이란은 석유자원을 소유하고있으면서도 미싸일을 포함하여 첨단과학을 리용한 군사력을 개발하여놓았기때문에 이스라엘도 그리고 미국도 마음대로 할수 없는 중동의 강국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저력은 이란국민들이 지난 시기 강대국들에게 시달려오면서 얻은 교훈들이 큰 힘으로 반영되였다고 진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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