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신 20주년을 앞둔 나의 감회-손세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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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영 편집위원은 <민족통신>과 더불어 그 뿌리인 <한민족연구회> 두조직에서 출범할 때부터 함께했다. 그는 지난 30여년을 회고하면서 <한민족연구회>12년과 <민족통신> 20년을 돌아보면서 그 동안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떠올리면서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는 이 글 마지막에서도 "나는 <한민족연구회> 12년과 <민족통신> 20년을 돌이켜 보면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지금까지 이 조직을 위해 도와준 여러분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이 베푼 사랑에 언제 이 엄청난 빚을 갚을수 있을지…다시 머리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거듭 감사한 말을 잊지않고 있다.[민족통신 편집실] |
민족통신 20주년을 앞둔 나의 감회
*글: 손세영(민족통신 편집위원) 사진은 필자
<민족통신>과 그 뿌리인 <한민족연구회>와 인연을 맺은지 32년이 되었다. <한민족연구회>에서 12년, 그리고 <민족통신>에서 20년이 되었다.
우리말판과 영문판을 병행하여 왔으나 인력부족으로 영문판은 제대로 일간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 운영진의 안타까운 심정들이었다.
특히 우리 운영위원들과 편집위원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로 일해왔다. 일하면서도 <민족통신> 제작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매월 월정헌금을 내고 일해 왔다. 그래도 경비가 모자라 취재활동을 위하여 미국의 로스엔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의 동포들 120여명의 후원자들 성금으로 충당하며 운영해 왔다. 돌이켜 보면, 20여년간 운영되어 왔다는 것이 기적이다. 이러한 고난과 시련, 기적의 역사가 ‘조국통일’위업에 한줌의 흙이라도 되길 기원해 왔다.
<민족통신> 편집진은 특히 남과 북, 해외동포사회들을 대상으로 한 취재활동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래서 서울과 평양 일본과 중국, 유럽등지에 특파원들을 보내 생생한 현지 취재를 끊임없이 진행해 왔다.
<민족통신>편집진은 특히 남북화해와 협력을 추동시키는 각종보도로 해내외 동포사회로부터 커다란 반향을 불러오기도 했다. 특히 남녁동포들과 해외동포들이 갖고있는 북조국에 대한 편견이나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 이해시키기 위하여 ‘북부조국 바로 알리기운동’ 을 전개해 왔다.
<민족통신>은 그동안 무려 75차례 이상 방북취재를 하면서 북부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의료, 예술, 체육, 교육, 종교 등 취재와 재미동포 경제인 방북단(2005.9)을 구성 북경제인들과 상호경제교류 상담 , 북조선태권도 미국방문단(2007.10) 5개 도시 순방일정에 동행 취재 하여 해내외동포들과 미주류사회에 소개하여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 북부조국 바로알기 방문단(2012.10)을 조직하여 통일토론회를 북부조국 ‘평양’에서 개최하여 -6.15선언 10.4선언의 정당성과 생활력- 이란 주제를 갖고 북녘동포들과 해외동포들이 함께 토론하고 의견들을 주고 받은 역사적인 행사는 우리 통일운동사에 남을 만한 행사였다. 그리고 중국의 동북삼성 ‘항일투쟁 조선유격대’ 전적지를 3차에 걸쳐 (2017.9/2018.9 포함) 탐방 취재 보도한 것 등은 모두 ‘북 조선 바로알기 운동’ 의 일환이었다.
<민족통신>이 1999년 5월에 탄생된 것은 시기적으로 볼때 해내외민족민주진영 인터넷 언론의 효시라 볼수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통신>은 해내외 애국세력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고 출범하여 활동할 수 있었다.
독자들은 민족민주운동에 관한 각종 소식들을 신속히 접하게 되었고 특히 남녁 동포들은 <민족통신>을 통하여 북취재 소식들과 해외동포 민족민주운동 소식들을 한순간에 접할 수있어 창간 5주년이 되는 2004년에는 지구촌 1백여 나라들에 산재한 해외동포들과 남녁 동포들의 구독 독자수는 1백만여 명을 훨씬 넘어서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한의 ‘한나라당’의원들 중심으로 한 사대매국세력은 민주운동, 통일운동에 기여해 온 해외 인터넷 언론들을 봉쇄하는 공작이 시작되어 2004년 11월 <민족통신>을 포함 34개 인터넷 웹사이트들이 완전히 차단시키는 폭거를 자행했다. 소위 남한의 자유민주주의가 말하는 언론출판의 자유는 사망선고를받고 사각지대로 빠지고 말았다.
33명으로 구성된 조직이었지만 7~8명의 실행위원들은 매주모여 국내외 정세분석과 작은일 부터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부터 시작했다. 1987년 출범할 때 초대회장은 노길남님, 초대이사장에는 유상준님을 선임하고 16명의 이사진 회원 33명으로 <한민족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첫 사업으로 <민족상>과 <민족장학상>을 제정하여 민족자주평화통일운동에 기여해온 인물이나 단체들을 선정하여 격려 하는데 목적을 두고 활동했다. 민족장학상은 민족의 얼을 잊지않고 통일운동 선봉에선 젊은 청년학생들을 격려하기위해 <민족장학금>을 매년 수여 해왔다. 이런활동은 <한민족연구회>가 통일운동진영의 후원단체의 성격으로 자리매김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선우학원 박사님이 베풀어 준 사랑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나는 <한민족연구회> 12년과 <민족통신> 20년을 돌이켜 보면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지금까지 이 조직을 위해 도와준 여러분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이 베푼 사랑에 언제 이 엄청난 빚을 갚을수 있을지…다시 머리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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