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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린 투쟁속에서 (박영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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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632회 작성일 19-08-28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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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린 투쟁속에서

박영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항일유격대가 조직되던 초시기의 일을 회상할 때마다 나의 눈앞에는 적의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용감히 싸운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적수공권으로 시작한 무기획득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였다.

우리는 처음에 호미와 낫과 창으로써 혹은 《고추폭탄》과 빨래망방이로 적의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 과정의 곤난을 어찌 다 일일이 말할수 있으랴!

총 한자루를 빼앗기 위해 목숨을 바쳐싸운 동지들이 많다.

우리는 실로 모든 무기를 피로써 빼앗았고 목숨과 바꾸었다. 우리가 가진 어느 총 한자루, 어느 칼 한자루에 우리 동지들의 고귀한 피가 스며있지 않은것이 없었다.

나는 처음에 화룡현 유격대에서 투쟁하였는데 당시 여기서도 수많은 동지들이 무기를 빼앗기 위해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것은 그 많은 사실들중의 몇가지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1932년 음력 5월에 있은 일이다.

리동일동지를 비롯한 20명의 유격대 및 적위대, 소년선봉대원들은 대낮에 두만강연안 선구에 나가 그곳 《공안국》을 습격하여 적의 무기를 탈취할것을 계획하였다.

그들에게는 보병총 4정과 권총 4정밖에 없었으므로 무기를 가지지 못한 동지들은 흩어져서 망을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보병총을 가진 동지들은 그들의 퇴각로인 《노루골어귀》에 매복하고 권총대만 적《공안국》에 들어가기로 계획하였다.

도중에 그들은 천장(묘를 옮기는것)하러 가는 사람들로 가장하였다.

베두루마기에 베감투를 쓴 리동일동지며 상주로 가장한 동지들이 앞장에 서고 그뒤에 천장하는 백골을 든것으로 가장하여 보병총 네자루를 가마니에 싸서 맞든 동지들이 따라서고 그 뒤를 삽이며 곡괭이를 메고 농민차림을 한 동지들이 따랐다.

《노루골어귀》에서 보병총을 가진 4명과 갈라진 권총대 4명은 곧장 《공안국》으로 향하였다.

마침 노리고간 점심시간이 된지라 흩어졌던 경찰놈들이 저마다 무기를 가지고 《공안국》으로 모여들었다.

한 동지는 밖에서 보초를 서고 두 동지는 베감투를 쓰고 베두루마기를 입은 리동일동지를 앞장에 세우고 《공안국》안으로 들어갔다.

적들은 아직 점심전이였는데 캉(중국식온돌방)우에서 투전놀음을 하고있었다.

경관 한놈이 리동일동지를 보자 왜 왔느냐고 소래기를 쳤다.

리동일동지는 얼른 《청목동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제사를 지내기 위해 소를 잡겠는데 허가를 해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러자 경관놈은 《소를 잡다니? 그건 안돼, 돼지나 잡아.》하고 건방진 말투로 지껄이였다.

리동일동지는 일부러 난처한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돼지를 가지고는 곤난합니다. 우리 집은 부자집이고 해서 손님이 많을것인데 아무래도 소를 잡아야 합니다.》

이러면서 리동일동지는 《공안국》내부를 다 살핀 다음 불의에 권총을 내들었다. 그러자 다른 두 동지도 권총을 빼여들었다. 일부 적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지고 한놈 쏘아눕히기도 했지만 원래 무장탈취가 기본목적인지라 리동일동지는 적들을 향해 웨쳤다.

《우리는 무기가 필요하지 너희들의 목숨은 필요없다.》

그러자 적들은 항복해나섰다.

이리하여 그들은 이날 보병총 8정, 권총 1정, 탄알 400여발, 군복 20여벌에 군도, 군모까지 로획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로부터 리동일동지는 《베감투》라는 별호로 불리우게 되였다.

그후 이해 8월에는 리동일동지를 비롯한 3명의 동지들이 달구지군으로 가장하고 회경시내에 들어가 중국인지주의 보병총 1정과 권총 1정을 빼앗았으며 그곳 자위단을 습격하여 보병총 5정을 로획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그해여름 석마동의 악질지주 최창익을 처단하고 권총 2정과 보병총 3정을 탈취하였다.

이와 같이 리동일동지는 초기의 무장획득투쟁시기에 헌신적으로 활동한 훌륭한 투사였다.

또한 장금진동지는 몇명의 적위대원을 데리고 칼과 창으로써 일본헌병의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는 원래 룡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동에서 살다가 대립자에 왔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장금진동지는 한때 룡정에서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그런데 그것이 폭로되여 체포령이 내렸다. 학교를 그만둔 그는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바쁜 고비를 넘긴후 자기 집이 있는 장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적들의 수색이 너무도 심하여 그는 집에 붙어있을수 없었다.

그래 산에서 찬이슬을 맞으며 밤을 새우군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정든 고향땅을 떠나던 일이며 적들이 조선농민들을 억울하게 학살하던 일, 혁명조직에 참가하여 사업하던 일, 룡정에서 밤중에 맨발로 피하여오던 일 등 지난날의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였다. 이런 일을 생각하니 원쑤에 대한 치솟는 분노를 참을수 없었다.

그는 곧 부락청년들과 비밀리에 련계를 맺었다. 그리고 산에서 자면서 혁명사업을 계속하였다.

그가 하루아침 병석에 있는 어머니를 보기 위하여 집에 내려왔을 때였다. 갑자기 문밖에서 군견이 짖어대는 소리와 소란스러운 발자국소리가 났다.

적들이 그를 체포하러 온것이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상이 위험함을 알자 병석에서 일어나 부뚜막의 가마를 들고 그밑에 아들을 숨게 하였다.

어머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만약의 경우를 결심하고 가마목에 식칼을 감춰두고는 아침을 짓는척 가마를 부시였다.

집안에 뛰여든 경찰놈들은 방안을 샅샅이 뒤지며 수라장으로 만들었으나 끝내 그를 찾지 못했다. 경찰놈들은 결국 허탕을 치고 돌아가버렸다.

적들의 발악이 심할수록 장금진동지의 적개심과 투지는 더욱 굳어져갔다.

자기가 나아갈 길이 어떤 길이라는것을 더욱 똑똑히 인식한 그는 마침내 장동을 떠나게 되였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얘 금진아! 내 걱정일랑 말고 나라를 찾기 위해 싸워라. 한번 내디딘 걸음은 중간에서 멈추지 말고 끝까지 걸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머니의 말은 아들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장금진동지는 그후 대립자지구의 당조직에서 적위대대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때는 1932년초였다. 칼과 창을 준비한 그는 어느날 5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대립자에서 금곡으로 넘어가는 솔바장령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전날 반일회원들로부터 대립자에 있는 일본헌병 3놈이 이날 오후 금곡지방으로 간다는 정보를 받았던것이다.

경찰놈들때문에 큰길로는 갈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산을 타고갔다.

때마침 봄철이라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무들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오고있었다.

그들은 들먹이는 가슴으로 산길을 걸었다.

장금진동지는 솔바장령 마루턱에 다달으자 전우들을 둘러보며 《어떻소? 이 고개마루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전우들은 《거 대낮에 범잡을데로구만.》 《한바탕 해볼만한곳인데…》하고 저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장금진동지는 고개마루 길옆 나무숲속에 대원들을 매복시켰다.

그는 이미 이 부근에 남몰래 와서 자리를 봐두었던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적이 오기를 하루종일 기다렸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졌다. 그들은 몹시 안타까왔다.

초조한 시간을 보내는데 마침 령길에 3놈의 일본헌병이 나타났다.

그놈들은 모두 권총과 군도를 차고있었다.

장금진동지는 전우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모두 몹시 긴장되여있었다.

적들은 점점 가까이 왔다.

드디여 헌병놈들은 적위대원들이 매복한 지점에 이르렀다. 이때 장금진동지는 《이놈들, 움쭉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선참 길로 뛰여내려갔다. 그러자 모두 《와!》함성을 지르며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숲속에서 불의에 6명의 장정이 칼과 창을 들고 달려드는 바람에 넋을 잃은 적들은 처음에는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그러나 원래 교활한 놈들이라 적들은 인차 적위대원들이 총을 가지고있지 못한것을 눈치차리자 두놈은 들고뛰기 시작하였다. 이틈에 나머지 한놈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순간 적위대원들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 헌병놈을 찔러눕히고 권총 1정과 군도를 빼앗아냈다.

이렇게 원쑤들에게서 탈취한 무장을 기초로 하여 화룡현에서는 30여명의 대원들로 유격대가 조직되였다.

그러나 이것은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들중에는 총이 없어 칼만 찼거나 그것도 없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무장을 위한 투쟁은 계속 전개되였다.

무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는 유격대원들뿐만아니라 당의 영향하에 있는 지방인민들도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장은 날로 강화되였다.

두만강변의 개산툰 사미구판에서 건만골로 가는 길에는 강이 하나 있다.

이 강가는 건만골마을녀성들의 빨래터였다. 하루는 이 강기슭에서 20살안팎의 두 녀성이 빨래를 하고있었다. 그들은 부녀회원 박수환동지와 김수복동지였다.

그런데 이날 그들이 여기로 나온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두 녀성은 자기들의 지혜와 힘을 합쳐 적의 무기를 빼앗을 계획이였다.

보통때는 그리 깊지 않던 물도 이때는 여름철이여서 퍽 불어났다.

강에는 널판지다리가 있었는데 며칠 전날밤 그들은 일부러 그것을 무너뜨려놓았다.

그들이 한창 빨래를 하고있을 때였다. 그들의 맞은켠 강건너에 사미구판경찰서 순사 한놈이 나타났다. 경찰놈은 총을 메고 건만골로 오는 길이였다.

두 녀성은 슬금슬금 그놈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그놈은 강에 다리가 없는것을 보자 무어라고 투덜거리더니 빨래하는 두 녀성에게 《어이! 이리 좀 와!》하고 거만한 태도로 손짓을 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못들은척 하였다.

경찰놈은 재차 소리쳤다.

《못들었는가? 빨리빨리 건너와!》

두 녀성은 막상 맞다들고보니 가슴이 다듬이질을 했다.

그러나 경찰놈이 하는 꼴을 보아서는 그자리에 그냥 있을수 없을뿐더러 이미 결심한바가 있으므로 강을 건너 그놈의 앞으로 가까이갔다. 손에 빨래방망이와 헌옷가지를 쥔 채…

경찰놈은 그들을 번갈아보며 히죽이 이발을 드러내놓더니 키가 큰 수환동지에게 《나 좀 업어!》하고 말하였다.

당시 경찰이나 자위단놈들은 도랑물도 뛰여넘기 힘들면 그 부근에 있는 사람을 붙잡아 업어넘게 했다.

수환동지는 잠시 주저하였다. 경찰놈은 빨리 업으라고 독촉하였다.

수환동지는 그놈을 업고 강에 들어섰다. 수복동지는 옆에서 부축하였다.

강한복판에 들어섰을 때 수환동지는 팔의 힘을 탁 풀었다. 경찰놈은 발이 물에 젖는다고 호통질을 쳤다. 수환동지는 다시 그놈을 춰올렸으나 한두걸음 나가다가 또 팔을 늦췄다.

그래도 경찰놈은 아무 눈치도 못차리고 발을 물에 적시지 않으려고만 했다.

(몇발자국 더 나가면 물이 얕아진다. 더 주저하면 기회를 놓치고 만다.)

비상한 결심을 한 수환동지는 갑자기 경찰놈을 물한가운데에 빠뜨려놓았다. 두 녀성은 있는 힘을 다하여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놈을 빨래방망이로 때리고 총을 빼앗아냈다. 이것은 1932년 7월에 있은 일이다.

경찰놈의 총을 빼앗은 그들은 적들의 추격을 받아 몇끼를 굶으며 유격대를 찾아왔다.

유격대의 무장이 강화됨에 따라 그 투쟁규모는 더욱 커지였다.

그리하여 1933년 2월에는 30여명의 유격대원들이 일본군으로 가장하고 화룡현 합신촌의 지주 장보림의 자위단을 습격하여 보병총 19정과 권총 3정, 목갑총(모젤) 2정을 로획하였으며 또 악질토비의 무기 30여정을 로획하였다.

이처럼 피로써 쟁취한 한자루한자루의 무기는 더 많은 무기를 쟁취할수 있게 하였으며 그것은 우리 유격대를 더욱 강화발전시킬수 있는 무장적기초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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