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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구어머니 (백학림)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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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659회 작성일 19-10-0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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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구어머니

 

백학림

 

1940년 3월말경이였다. 나는 임무수행중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여 할수없이 안도현과 화전현 경계지점에 있었던 련락소를 찾아가게 되였다. 같이 공작하던 박장춘동무가 나를 부축하고갔다. 나는 장춘동무가 이끄는대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의식이 몽롱해진 나의 눈에는 지는 해가 새빨간 큰 불덩이로 보였다. 그리고 련락소인듯한 조그만 초막이 저쪽에서 어른거렸다.

련락소앞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말았다.

나는 얼마후에 실신상태에서 깨여났는데 곁에 앉아있는 철구어머니와 통신원 두 동무 그리고 박장춘동무를 겨우 알아볼수 있었다.

철구어머니는 걱정어린 얼굴로 불에 덴 나의 두다리의 상처를 만지며 《에구, 끔찍해라.》하고 혼자 말하고있었다.

나는 일어나앉으려고 했으나 몸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동무들이 나의 가슴을 누르며 그냥 누워있으라고 했다.

나는 누운채 다시 눈을 감고 생각하였다.

(이게 무슨 꼴인가. 이 어려운 때에 부대와 동지들에게 페를 끼치게 되였으니.)

화상으로 누워있는것이 생각할수록 분하였다. 이때 부대는 수십만으로 증강되는 적들의 최후발악적인 《토벌》과 경제봉쇄로 말미암아 하루의 휴식도 얻지못하고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한알의 식량을 얻기 위해서도 격전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는 상처의 아픔보다 마음의 불안이 더 컸다.

《장춘동무, 빨리 돌아가오.》하고 나는 눈을 감은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응대는 없고 《끔찍해라.》하는 철구어머머니의 한숨섞인 말소리만이 들려왔다.

내가 심한 고통을 겪고있다는것을 알게된 지휘부에서는 군의 김희선동지를 나에게로 파견해주었다. 그는 10여일간 나의 병을 치료했으나 별로 이렇다할 효력이 없었다. 워낙 상처가 험했고 게다가 화독이 몸안에 침입하였으므로 병은 좀처럼 쉽게 낫지 않으리라는것이였다.

하루는 잠에서 깨여나니 군의동지와 철구어머니가 나의 머리맡에서 조용조용히 이야기하고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관계된 이야기였기때문에 나는 잠자코 귀를 기울여들었다. 군의동지는 나의 병세가 위중하지만 부대의 사정으로 더 지체할수 없으니 돌아가야 하겠다는것과 모든 뒤일을 철구어머니에게 부탁한다는것이였다.

철구어머니는 종시 아무 응대없이 군의동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군의의 계속되는 말은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부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관계로 당분간 이 련락소도 철수하고 나의 병이 웬만하면 철구어머니도 같이 오라는 지휘부의 지시였으나 환자가 걸을수도 없는 형편이니 자기만이라도 먼저 돌아가서 모든 사정을 보고하겠다는것이였다.

(어떻게 할가? 부대를 따라가자니 몸은 이렇고, 설사 따라간다해도 이 몸으로써는 페만 끼칠 처지이니.…)

부대에서 떨어지게 되는 고독감이란 무엇으로도 표현할수 없는 아픈 심정이였다.

나때문에 남게 되는 철구어머니를 생각하니 더욱 괴로왔다. 나는 눈을 감고있었으나 철구어머니의 기막혀하는 얼굴이 보이는것 같았다.

(그렇다. 나때문에 그를 붙잡아둘수는 없다. 혼자 남자. 그렇다고 이러한 경우에 혼자 남겠다는것은 죽겠다는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아닌가.)

이때 《학림이 숨이 찬가?》하고 철구어머니는 나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슴이 이렇게 뛰고야…》

나는 눈을 떴다.

철구어머니의 과묵한 얼굴이 나를 지켜보고있었다.

군의동지와 두 통신원은 떠나갔다. 장춘동무도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철구어머니와 나만이 남게 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철구어머니와 함께 천리수해의 밀림속에 고독히 서있는 목피막에서 간고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였다.

철구어머니는 일찌기 혁명대오에 참가한분이였다.

그는 처음에 연길현의 어느 유격근거지에서 부녀사업을 하다가 1935년에 유격근거지ㅡ해방지구가 해산되면서 조선인민혁명군 제4사에 입대하여 작식대원으로 있었다. 그후 억울하게도 《민생단》감투를 썼던 그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크나큰 믿음속에 사령부작식대원으로 조동되여 공작하였다. 당시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전령병으로 있으면서 그를 잘 알게 되였다. 그후 그는 1939년 가을에 이곳에 련락소가 생기면서 통신원들과 함께 여기서 공작하고있었던것이다.

철구어머니는 매일같이 이른새벽에 일어나서는 나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나 새살이 살아나오지 않는것을 안타까와하였다. 본시 말이 없는 녀성이니 그저 묵묵히 상처를 만지고있었으나 나는 그의 표정에서 그의 심정을 알수 있었다.

그는 아침전에 나무를 해오고 강냉이를 갈았다. 식사때에는 내가 맛있게 잘 먹으면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내가 입맛을 잃고 먹지 못하는 때에는 그의 얼굴이 금시 흐려지군 하였다. 그리고는 《된장이라도 있었으면 입맛이 날텐데…》하고 혼자말로 걱정하였다. 우리에게 있다는것은 강냉이와 소금뿐이였다. 그는 나의 입맛을 돋구어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 나는 그를 끼니때와 밤에 잘 때밖에는 볼수 없었다. 그는 온종일 눈이 녹은 양지밭을 찾아다니며 해묵은 산채잎을 따다가 물에 우려서 그것을 소금에 메워주기도 했다.

어느덧 한달이 지나 5월이 되였다. 산과 들에는 새싹들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는 산나물을 뜯어다가 국도 끓이고 밥에 섞어주기도 하였다. 새풀이 돋아나면서 우리의 식생활은 훨씬 좋아졌다. 그런데도 나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철구어머니는 나를 자주 밖에 업고나가 따뜻한 해볕을 쪼여주고 꽃을 꺾어다가 향기를 맡게 해주기도 했다.

봄도 지나갔다. 여름이 되니 상처에서는 구데기가 끓기 시작하였다. 철구어머니에게는 한가지 일이 더 불었다. 그것은 나의 상처에서 구데기를 주어내는 일이였다. 나의 눈앞에는 지금도 뾰족하게 깎은 2개의 나무가지를 손에 쥐고 내가 아파할가봐 손을 조심스럽게 놀리며 나의 상처에서 구데기를 파내던 철구어머니의 얼굴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의 눈가장자리에 가느다랗게 잡혔던 주름살까지 셀듯 하다.

나는 그때 무한한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져 입속으로 열번이고 《어머니!》하고 불렀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하루이틀도 아닌 긴긴 날을 두고 그는 한번도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없이 나의 대소변도 받아내여왔으니 그 정성에 대한 나의 감사를 무엇으로써 표현하겠는가. 우리는 그를 철구어머니라고 불러왔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14~15살 우이여서 당시 40살 가까왔다. 철구는 그의 이름이였는데 동년배의 남자대원들도 철구동무라고 불러오다가 자연히 철구어머니로 호칭이 통일되였다. 새 공작으로 조동되여 낯선 동무들과 섞이게 되여도 시간이 흐르면 철구라는 그의 이름뒤에는 어느 사이엔가 어머니라는 존칭이 붙군 했다.

나는 그 까닭을 심장으로 깨닫게 되였다. 이때까지는 나도 그가 나이도 지긋하고 부지런하며 언제나 말이 없고 친절하며 듬직하고 믿음직하여 다른 동무들과 같이 서슴없이 그를 철구어머니로 불러왔건만 이제는 그의 얼굴모습그대로 나를 낳아길러준 어머니처럼 뜨겁게 안겨왔다.

나는 저도모르는 사이에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였다. 자기 어머니에게 《감사합니다》하고 수다스럽게 인사를 드리는 아들이 없는것처럼 그에 대한 나의 심정도 바로 그러했다. 그에게 고생을 시키는 미안한 마음도 거의 없어져갔다.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그가 친자식처럼 나를 대하는 그 극진한 심정에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상처는 나을줄을 몰랐다.

《어머니, 나는 암만해두…》하고 나는 어느날 구데기나는 상처를 다스리고있는 그를 보고 병이 낫지 않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말을 더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약한 소리를 하면 병도 사람을 업신여기고 떠나지 않는다네》하고 그는 기색이 좋지 않아서 나를 흘기고는 상처의 손질을 계속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말았다.

상처를 다 처치하고난 그는 《이제 장군님을 만나뵈오면 학림이가 보기와는 달라 우는 소리를 잘하더라구 말씀드려야겠네.》하고 싱긋이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날은 흘러갔다. 하루는 잠에서 깨니 그가 문밖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비껴있었다. 《왜 저러실가?》하고 나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나는 그러한 그의 표정을 처음 보았기때문이다. 그의 남편은 혁명투쟁에서 희생되고 자식들은 모두 원쑤들의 손에 학살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그의 기구한 운명과 가슴깊이 못박힌 상처가 그의 얼굴에 나타난것을 아직 본적이 없었다.

그는 갖은 풍랑을 조용하고 과묵한 표정속에 감출줄을 아는 속깊은 녀성이였다.

다음날 나는 막밖에서 가만히 맨풀로 죽을 쑤어먹는 그를 눈여겨 보고서야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량식이 떨어져가는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나의 식량때문에 걱정하는것이였다.

이윽고 그는 막안으로 들어왔다.

《강냉이가 얼마나 남았어요?》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많이 있다고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다음끼니때였다. 그는 자기는 먼저 먹었다고 하면서 나의 밥상을 차려주었다. 나에게만 강냉이를 주고 자기는 또 풀로 때를 에우려는것이 분명했다.

나는 강냉이죽그릇을 밀어내놓고 이젠 강냉이냄새가 싫으니 풀죽을 먹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아무 응대없이 나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많은 말을 하고있었으며 나의 심장을 찌르는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말았다. 그는 다시 그 죽그릇을 내앞에 밀어내놓았다.

결국 나는 그 죽을 먹게 되였다.

그 죽한그릇이 병에 전환을 가져왔다.

나는 병을 의사와 약이 고친다는 상식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커다란 충동으로 사람이 숭고한 감정에 싸이게 될 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범위에 머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혁명동지를 위하여 기울이는 혁명가인 철구어머니의 무한한 동지애는 나에게 소생의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나는 목이 메여 넘어가지 않는 죽을 한숟가락 또 한숟가락 먹으며 마음을 굳게 다지였다.

빨리 일어나자. 혁명가들을 위하여, 원쑤를 치고 조국을 광복시킬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괴로움과 주림과 아픔을 참으며 싸우는 조선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하루속히 전투대오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나의 고상한 의무이며 전투적인 과업이다.

그이후 나의 마음은 상쾌해지고 병도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나마 우울과 실망에 잠기군 하던 자기를 원망하게 되였으며 인간의 의지가 병세를 좌우한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게 되였다. 7월이 지나고 8월달에 들어서면서 나의 상처는 날이 다르게 아물어갔다. 철구어머니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나던 나는 차츰 혼자 일어설수 있게 되였다. 그때 철구어머니가 어찌도 기뻐하던지 나를 부둥켜 안고 어쩔줄을 몰라하던 그를 또한 잊을수 없다.

나는 발자국을 떼는 련습을 시작하였다. 그는 내앞에 팔을 벌리고서서 마치도 걸음발을 타기 시작하는 어린아이의 자국떼기를 시키듯이 《걸음마! 걸음마!》하고 뒤걸음을 쳐가며 웃었다. 나는 그를 따라가다가는 주저앉아 쉬고 또 일어나서는 그를 따라갔다. 걸음련습이 매일 진행되였다. 《학림이, 어서 일어나게. 장군님께로 가야지.》하고 그는 언제나 나를 고무하며 재촉하였다.

이렇게 나의 걸음은 매일매일 늘어갔으며 건강도 회복되여갔다. 그런데 이와 함께 식량난이 다가들었다. 이제 철구어머니도 더는 나에게 절박한 사정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강냉이는 다 먹고 밀 서너되밖에 남지 않았다. 철구어머니는 그 밀로 가루를 내였다. 그것으로써 우리는 한주일을 살았다. 이제 먹을것이라고는 강냉이겨밖에 남지 않았으며 소금도 떨어진지 오랬다. 소금이 없이 여러끼를 지내는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였다.

철구어머니는 강냉이겨를 매돌에 부드럽게 갈아 풀을 섞어서 겨떡 열두개를 만들었다. 이것으로 련락이 올 때까지 며칠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몇달을 더 살아야 하는것이다. 또 여러날이 지났다. 남은 겨떡은 네개뿐이였다. 철구어머니는 거의 굶다싶이 하면서 그 겨떡을 나만 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일어나다니게 된 내가 혼자만 먹을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를 위해 내놓은 겨떡 한개가 그냥 하루종일 묵어서 지냈다. 다음날 어머니는 나를 먹이기 위하여 할수없이 한개를 잡수셨다. 남은 두개의 떡은 비상용으로 시렁우에 얹어놓고 우리는 산채로 끼니를 이어가며 사령부에서 련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사령부가 어느곳에 있는지 알길이 없었다.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나의 몸으로 험한 길을 헤치고 찾아가기에는 아직도 안될 일이였다.

참으로 딱한 형편이였다. 인가를 찾아가서 주림을 면하자니 수백리 갈길이 막연하였다.

어떻게 할것인가? 아사의 위협은 두사람을 휩쌌다. 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겨떡 두개를 가지고 식량을 찾아가는곳까지 가야 하는가? 그러나 사령부의 련락은 이곳으로 올것이 아닌가.

필시 사령부는 어느곳에서 적과의 악전고투를 겪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부대는 우리를 잊어버리고있을리 만무하다. 꼭 우리를 찾아올것이다. 그렇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을 떠나서는 안된다. 굶어죽는것보다도 부대와 영영 떨어지게 되는것은 더 무서운 일이다.

나는 산채를 뜯으러간 철구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서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퍼그나 먼데로 간것 같다. 부근에서는 뜯어먹을것은 다 뜯어먹은것이다. 나는 막을 떠나서 어정어정 그를 마중나갔다.

아직도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고 상처는 아팠다. 한참후에 산우에서 내려오고있는 그의 모습이 황혼속에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그는 큼직한 산채보따리를 등에 업고 비틀걸음을 치며 나무아지들을 잡고 가쁜 숨을 돌리면서 겨우 걸어왔다.

그는 마중나간 나를 보지못하고 오고있었다.

그런데 비틀거리며 오고있던 그가 앞으로 푹 엎어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어머니!》하고 나는 급한 소리를 치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내 다리로 어떻게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40~50m 를 평상시와 같이 달렸던것이다.

이때 철구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막 달려와서는 나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나의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다리의 상처를 살펴보는것이였다.

나의 상처에서는 아문 자리가 다시 터져 피가 흐르고있었다.

그는 혀를 쯧쯧 차며 가볍게 나의 잔등을 때리면서 중얼거렸다.

《어린애처럼 말썽을 부리는군.》

그러나 나는 별로 아프지 않았으며 이제는 능히 달릴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게 되였다.

그와 나는 어두워가는 산속에서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끝까지 이곳에서 사령부의 련락을 기다려보자는 나의 결심을 이야기하였을 때 그는 아무 말없이 그 과묵하고 조용한 얼굴을 끄덕이면서 나를 돌아보고 웃음만 지었다.

나는 그의 눈길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 구태여 말할 필요있는가?》하는 의미를 알아볼수 있었다.

그날로부터 열흘이 좀더 지나서 우리의 비상미인 겨떡이 반개만 남았을 때에 사령부의 통신원이 식량을 메고 우리를 데리러왔다.

통신원은 우리를 부둥켜안고 《살았군! 살았군!》하며 좋아서 막 뛰였다. 그날에 있은 우리 두사람의 감격과 기쁨을 다 말할수는 없다. 철구어머니도 그날은 눈물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흐느끼고있는것을 나는 보았다.

우리들이 사령부에 당도한것은 8월말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그리운 전투대오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후 그의 한량없는 혁명적동지애로하여 건강해진 나는 원쑤격멸을 위하여 전진하는 전투들에서 한번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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