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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것이라면 (손 종 준)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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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571회 작성일 19-10-0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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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것이라면

 

손 종 준

 

1941년 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방침에 따라 소부대활동을 벌리던 때의 일이다.

김일동지가 지휘하는 우리 소부대성원은 모두 12명이였는데 3월중순부터 약 50여일간을 얼마안되는 수수쌀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루 한사람앞에 두숟가락의 수수쌀이 차례졌을뿐이였다.

일제군경놈들은 항일무장투쟁의 초시기부터 감옥이나 다름없는 집단부락을 만들고 주변에 산재한 부락의 농민들을 여기에 몰아넣음으로써 우리 유격대와 인민들과의 련계를 끊어버리려 하였다.

일제강점의 말기에 이르러서 일제의 이러한 책동은 더욱더 악랄성을 띠게 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보니 우리는 식량을 얻기가 매우 곤난하였다.

당시 우리 소부대의 기본임무는 적의 통치구역안에서 지하공작을 수행하는것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식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내놓고 적들을 습격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우리는 일정한 기간 이 지역을 근거지로하여 공작하여야 했다.

우리들이 아껴먹던 수수쌀마저 다 떨어져버렸다. 어느날 몇명의 대원들은 김일동지의 지시에 의하여 식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근거지를 떠났다. 그날은 음력 5월 4일 아침이였다. 좁은 골짜기를 밑에 두고 산릉선을 타고내려가던 우리는 골짜기에서 가늘게 피여오르는 연기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나무가지들을 헤치며 연기나는쪽을 내려다보았다. 골짜기에는 7채의 집이 산재해있었다. 웃골짜기에 4채, 아래골짜기에 3채가 들어앉은 이 집들은 전부터 비여있는 집들이였는데 산아래턱에 바싹 붙어있는 한채의 집에서만은 연기가 피여오르고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바라보며 이런 말을 했다.

《저 집에는 사람이 살고있으니 저 집사람들을 통해서 식량을 얻을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될수록 주간행동을 피하던 때였으므로 밤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해가 떨어지자 우리는 산을 내려 연기가 피여오르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일가? 이 집 역시 텅 비여있었다.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건 물론이고 방에는 아무런 가장집물도 없었고 부엌에 역시 그릇하나 없었다. 마당도 반반하였다. 역시 오래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빈 집이였다. 그러나 부엌아궁이에는 불을 땐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가까이 있을것만 같았다. 이 집주인은 자기 집이 그리워 집단부락에서 빠져나왔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집주변에 여기저기 흩어져앉았다. 그동안 풀잎따위로 요기를 해온 때여서 우리는 몹시 시장기를 느꼈다. 우리는 집주인을 좀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나는 주변을 더 살펴볼 생각으로 골짜기내가로 나갔다. 내가를 오르내리며 인적을 살피던 나는 주춤서서 개울건너편에 눈초리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는데 밑둥에서 한길쯤 올라가서는 세갈래로 가지를 뻗고있었다. 초생달빛은 그 갈라진 세 가지짬을 어렴풋이 비쳐주고있었다. 바로 거기에 둥그런 무엇이 얹혀있었다.

나는 곧 개울을 건너가서 나무우를 쳐다보았다. 세가닥 나무가지짬에 얹힌것은 석유통이였다. 석유통우에는 삿갓이 덮여있었다. 나는 나무앞으로 다가서서 삿갓을 들고 통속을 들여다보았다. 그속에는 흰쌀이 가득 들어있었다. 나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나는 곧 김일동지에게로 달려가서 사실을 보고한후 두 동무를 데리고가서 그 쌀통을 날라왔다.

우리는 무척 배가 고팠다. 그렇지만 주인을 만나지 못한 때이므로 그 쌀에 손을 대지 않았다.

우리는 골짜기와 산등성이로 다니며 주인의 자취를 찾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끝끝내 주인을 찾을수 없게 된 우리는 심중하게 토의를 했다. 주인을 찾아낼수 없는 쌀을 그냥 처분할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더 기다릴것인가를 론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공작을 위해서 우선 그 쌀로 밥을 지어먹기로 했다. 이날저녁에 우리는 오래간만에 흰쌀밥을 먹었다. 그리고 근거지에 남은 동무들에게도 쌀을 보내였다.

그 이튿날 대원들이 공작을 나간뒤 우리 몇몇은 이곳에 남아서 주민들을 만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을 찾아서 여기저기로 돌아다니였으나 종시 련계를 가질수 없었고 뜻하지 않게 감자움 하나를 발견하였다. 상당히 큰 감자움이였다. 우리는 이 감자움에서 많은 감자를 파내여 근거지로 운반하였는데 그것은 우리 소부대의 식량해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 소부대는 이미 3개월나마 곰의골근거지에 묵고있는터이였다. 얼마후 이곳에서 우리들의 공작임무는 끝났다. 우리가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되였다.

그런데 이때 우리에게는 인민들의 쌀과 감자값을 어떻게 갚겠는가 하는것이 문제로 되였다.

여러가지로 토의하던 끝에 김일동지가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때고 주인들은 집으로 올것이요. 그러니까 부락골짜기에 내려가있다가 그들을 만나게 되면 전후사정을 말하고 쌀과 감자값을 갚는것이 좋겠소.》

그래서 나와 몇동무들이 골짜기로 내려갔다. 꼬박 나흘을 기다렸으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김일동지에게로 가서 쌀과 감자값을 그것들이 있던 그 장소에 넣어두고 떠나가자는 의견을 제기했다.

김일동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며칠만 더 기다려봅시다. 내 생각에는 이 골짜기주민들이 집단부락에 강제로 끌려간것이 틀림없소. 그러니까 이곳 주민들은 자기들이 살던 이 골짜기를 그리워할것이요. 그들은 놈들의 눈을 피해서 이곳으로 찾아와서는 몰래 밭을 가꾸는것 같소. 수리날도 지났으니까 그들은 곧 올거요.》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자기 위치로 흩어져서 골짜기를 굽어보며 이제나저제나 하고 다시 사흘을 기다렸다. 그러나 주민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김일동지에게로 가서 의견을 제기했다.

《이레를 기다려도 주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쌀이나 감자가 있던곳에 그 값을 넣어두고 가는것이 어떻습니까? 돈만 있으면 그들은 어떻게서든지 쌀을 살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일동지는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아쉬운 어조로 말하였다.

《그렇게 합시다.》

우리는 쌀값과 감자값을 석유통과 감자움에 잘 넣어두고 골짜기를 떠났다.

김일동지는 그곳을 떠나면서 직접 주민들을 만나지 못한것을 그후에도 두고두고 말하였다.

이렇듯 어떠한 간고한 환경에서도 우리는 인민의 생명재산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가르치심대로 행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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