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군로인들 (김 명 숙)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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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군로인들
김 명 숙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의하여 조직령도된 항일무장투쟁의 간고한 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로야령에서 있은 일을 어제일과도 같이 회상하게 된다.
1940년 봄 련락이 끊어진 부대를 찾기 위하여 우리는 액목현밀영을 떠났다. 우리 일행은 환자들과 무기수리소 성원들 그리고 재봉대원인 나, 이렇게 모두 8명이였으며 리봉수동무가 대오를 책임지고있었다. 이 가운데는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팔을 자른 리국진동무와 대사하전투에서 부상당한 김룡권동무, 왕청유격대시기부터 무기수리소에서 일해온 박두경로인들이 있었다. 이런 성원들로 구성된 우리 대오가 적의 감시망을 뚫고 부대를 찾아낸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더구나 1940년도라고 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수십만의 대병력을 풀어가지고 만주일대에서 항일무장력량을 《완전소멸》한다고 날뛰던 때였다.
행군길에 오른 우리 일행의 앞길에는 헤아릴수 없는 난관들이 날과 달을 더할수록 중첩되여갔다. 그러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우리의 집이며 대오인 부대를 찾아내야만 하였다.
우리가 녕안현과 왕청현 경계선인 로야령에 들어선것은 그해 7월경이였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선 수림속에서 우리는 휴식을 하였다. 우리는 모두 기진맥진하여 풀우에 드러누웠다. 벌써 근 4개월간이나 우리는 쉬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고있었다. 그러나 부대의 행방과 거처지는 아직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이 4개월동안 풀잎과 산천어 그리고 개구리들로써 간신히 끼니를 이어온 우리들은 서로 몰라보리만큼 수척해졌다. 수염속에 가리운 전우들의 홀쪽해진 얼굴을 바라보는 나의 가슴은 미여질듯 아팠다. 이제라도 만약 쌀만 생긴다면 손을 걷고 달려들어 그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드릴수 있으련만… 기진맥진해 누워있으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손가락하나 까닥할 생각을 못하고 누워있는 자신을 생각할 때 서글프기도 했다. 눕기만 하면 곧 잠속으로 끌려들어갔고 잠들기만 하면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다.
그러므로 땅에 눕기보다 일어나서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아니 그보다도 혁명을 위해선 살아야 했고 살자면 풀이라도 뜯어먹고 기운을 돋구어 행군을 계속하며 부상자들을 구원해야겠다는 충격에서 나는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풀을 뜯군 했다.
이렇게 며칠을 지냈다.
식량공작을 떠난 동무들은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말을 주고받을 기운조차 없는 우리가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나무그루에 기대앉아있던 봉수동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참, 그 로인이 지금도 이 산속에 있는지. 있기만 한다면…》하고 무슨 말을 더하려다 그만두었다.
이때 국진동무가 몸을 일으키며 《원장동무, 나도 지금 그 로인을 생각하고있던중입니다.》하고는 지난날 이 로야령산속에서 여러차례 만난 일이 있던 중국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이였다.
이때 나도 그들의 이야기에 차차 귀를 기울이게 되였다.
중국로인에 대한 이야기의 사연인즉 다음과 같은것이였다.
1937년 봄에 봉수동무는 5사 직속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이 로야령산속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있었다.
그때 로야령산속에는 중국로인 1명이 살고있었는데 그는 오래전부터 유격대에 대한 적극적인 원호자였고 지방인민들과의 긴밀한 련계밑에 우리 부상자들에게 많은 원호물자들도 가져다주군 하였다.
1939년 4월에 부상당한 팔을 치료하고있던 리국진동무도 그 로인에게서 극진한 간호를 받은 일이 있었다.
우리는 잠시후에 그 로인을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진대나무가 가로세로 자빠지고 해묵은 나무잎사귀들이 첩첩히 쌓인 깊은 밀림속 가시덤불길을 뚫고 부상자들을 부축해간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상당히 오랜 시간을 천신만고한 끝에 우리들은 중국로인의 귀틀집이 있었다는 산밑에 이르렀다.
그런데 봉수동무가 앞장을 서서 산마루를 향해 한참이나 올라갔지만 귀틀집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다닌 흔적도 없었다.
내곁에서 걷고있던 룡권동무는 그만 무거운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그 로인은 이 산속에서 떠나버린게 분명해. 이제 우린 다 죽었어.》
그렇게 락천적인 룡권동무마저 이렇게 실망하는걸 보게된 나는 맥이 탁 풀렸다. 단 몇걸음도 더 내디딜수 없이 그 자리에 쓰러질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에서는 저도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혁명의 승리를 못보고 이 산속에서 쓰러지다니…》
그러자 룡권동무가 갑자기 입을 손으로 가리우며 킥킥 웃어댔다.
그제야 나는 룡권동무가 거짓한숨을 지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아, 저 동무의 롱에 또 걸려들었었구나.》
나는 전우들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속은것이 분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느때나 락천적이고 롱담을 즐기는 룡권동무를 다시 보니 나의 마음도 즐거워지고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지는것 같았다.
이때 우리앞에서 걸어가던 봉수동무가 뒤에다 대고 손짓을 하며 나무그루뒤에 숨는것이였다. 우리도 재빨리 몸을 감추었다. 나는 정신을 바싹 가다듬고 앞을 자세히 내다보았다. 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사이에 귀틀집 한채가 보였다. 나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귀틀집을 주시했다. 귀틀집 바깥벽에는 렵총 3자루가 걸려있고 그 밑에선 우리쪽으로 등을 돌려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무엇인가 손질하고있었다.
봉수동무는 권총을 빼들고 서서 잠시 귀틀집 동정을 살피더니 숲속에서 살금살금 걸어나갔다. 귀틀집과 봉수동무의 거리가 한 10m가량으로 좁혀졌을 때였다. 귀틀집마당에 앉아있던 한사람이 갑자기 얼굴을 뒤로 돌리더니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벽에 걸린 렵총을 벗기려고 서둘렀다. 수염이 텁수룩한 그 사람은 60살이 훨씬 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로인이였다.
로인이 일어나는 바람에 함께 있던 두사람도 일어나며 몸을 돌렸다. 그들역시 수염투성이의 로인들이였다.
먼저 일어선 로인의 손이 렵총에 닿을가 말가 할 때였다. 봉수동무가 소리쳤다.
《로인님, 놀라지 마시우. 3년전에 로인님한테 신세를 지고갔던 원장입니다.》하고 봉수동무는 권총을 도로 집어넣으면서 로인의 앞으로 달려갔다. 로인은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봉수동무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아니 이게 누구요!》하고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웨치면서 팔을 벌리고 봉수동무에게로 마주 달려와서 그를 덥석 그러안았다.
숲속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있던 나는 그만 목이 콱 메였다. 그리고 어떻게 달려나갔는지 모르게 진대나무를 넘어뛰면서 귀틀집마당에 서있는 다른 한 로인을 부둥켜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물론 그 로인을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한길에 한뜻으로 맺어진 조선인민의 아들딸들인 우리와 중국인민인 그 로인들과는 이미 혈육의 정이 통하고있었다.
더우기 그 깊은 산속에서 만난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할수 있으랴.
나는 참으로 나의 집, 나의 아버지품에 안긴듯하여 흐르는 눈물로 로인의 가슴을 적시였다.
그 로인도 나의 등을 쓸어주면서 목이 멘 소리로 말을 했다.
《수고들했수다. 왜놈들때문에 모두 이렇게 고생들이지.…》
《아닙니다. 우리는 젊은 사람들이니 일없습니다. 아버지들이 고생하시지요.》
《자, 어서 여기들 앉아서 몸을 쉬며 이야기합시다.》하고 로인은 나를 귀틀막앞으로 부축해주었다. 이때 로인들은 한참 노루가죽을 벗기고있던중에 우리가 나타났던것이였다.
귀틀집에는 로인셋이 있었을뿐이였다. 여기저기에 짐승들의 가죽이 걸려있는것을 둘러보면서 나는 마치 자기 집으로 돌아온것 같은 포근한 느낌을 가질수 있었다.
귀틀집마당에 둘러앉은 우리들은 오래간만에 강낭떡이나마 음식다운 음식을 먹게 되였다.
로인들이 권하는 강낭떡그릇을 바라본 나는 그 푸근한 냄새를 맡기만 해도 벌써 정신이 드는것 같았다.
그러나 떡을 집어들던 나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손에 쥔 떡을 무릎우에 떨어뜨렸다.
우리와 함께 행군을 하다가 희생된 나어린 허근동무의 모습이 확 떠올랐기때문이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말이 자꾸만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나를 건너다보던 그 락천적인 룡권동무까지도 벌써 내 심정을 짐작해서 그런지 그 어글어글한 눈망울에는 어느덧 맑은것이 어렸다.
4개월전에 있은 일이였다. 액목현을 떠날 때에 우리 일행중에는 허근이라는 나어린 동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행군도중 녕안현에서 적비행기습격을 당하여 왼쪽다리에 관통상을 입었었다. 우리는 출혈이 심한 그에게 응급처치를 한다음 서로 번갈아업어가며 행군을 계속하였다. 한곳에 안착시키고 치료를 하지 못한데다가 식량이 없어 영양보충을 시키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상처는 점점 악화되여갔다.
그를 업고걷는 동무나 그를 부축하여주고 간호하는 동무나 모두 자기들의 고통은 생각할사이도 없이 어떻게 하면 허근동무를 무사히 데려갈것인가 하는 일념에만 골똘했다.
그런데 한편 허근동무는 자기 상처에서 오는 고통보다도 전우들에게 끼치는 괴로움을 더 근심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간청하다싶이 우리에게 말하는것이였다.
《아무래도 난 더 견딜것 같지 않소. 나를 그만 끌고가우. 이이상 더는 괴롭히지 마우. 부탁이요.》 그러나 우리는 혁명동지인 그를 도중에 두고올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에게 타일렀다. 그리고 업히려고 하지 않는것을 억지로 둘쳐업고 또다시 걸음을 다그쳤다. 한 산골짜기에 이르자 우리는 산천어를 잡아서 그에게 끓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입에 떠넣은 물고기국물조차 모조리 토해버렸다. 그리고 차츰 정신을 잃었다.
그를 껴안고 손발을 주물러주며 안타깝게 타드는 입술을 추겨주는 우리의 가슴은 메여지는듯 하였다.
우리는 끝내 그를 구원하지 못하고 이름모를 산기슭에 묻고 돌아섰던것이다. 나뿐만아니라 허근동무를 생각하게 된 전우들은 더는 떡을 집지 못하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인들은 왜 모두들 그러는가고 걱정을 하였다.
귀틀집에 도착한지 사흘만에야 식량공작을 나갔던 두 동무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그들이 돌아오게 될 지점에 사람을 파견하고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갖은 방법을 다하여 집단부락안의 인민들과 련계를 취하려고하였으나 적들의 감시가 어찌도 심하였던지 끝내 적들에게 발각당하게 된 그들은 식량공작을 단념하고 돌아왔던것이다.
우리의 처지는 딱하게 되였다. 벌써 사흘동안이나 중국로인들의 식량만 먹어왔는데 크게 믿었던 그 식량공작마저 인젠 희망이 없게 되였으니 그동안 우리가 먹은것은 무엇으로 갚아주며 또 앞으로 무엇을 가지고 행군을 계속하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이 사흘동안 우리는 중국로인들에게 신세를 지고있는것을 더없이 미안하게 생각하고있던차였다.
중국로인들은 거의 침식을 잊고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이 사흘동안에만도 보통때는 잡기 힘들다는 사슴을 2마리나 잡아들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슴고기를 넣은 밀가루뜨더국을 배부르게 먹을수 있었다. 사슴고기뜨더국, 이런 음식을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우리는 로인들의 지성어린 원호에 그저 감격할뿐이였다.
로인들은 우리가 일손을 도와주려고 하면 굳이 만류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로인들이 사냥을 나간후면 물도 길어오고 땔나무도 마련해놓군 하였다. 아무리 말려도 우리가 듣지 않으니까 로인들은 나중엔 성까지 내는것이였다.
《왜놈들을 쳐부시는 임자네들이 우리를 찾아온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떻게 일까지 해주길 바라겠소. 어서 마음놓고 푹 쉬우다. 원기를 돋구어야 또 싸움터로 나가지 않겠수.》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괴로왔다. 우리는 그들몰래 행군계획을 토의하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로인들에게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로인들은 《임자네들이 떠나는건 군대일이니 우리가 어찌 막겠소. 그러나 하루만 더 있어주우다. 임자네들을 어찌 빈손으로야 떠나보내겠수.》하고 간청하다싶이 말했다. 우리는 선뜻 대답을 할수가 없었다. 그러자 로인들은 《무얼 감추겠소. 털어놓고말해서 우리에겐 식량이 떨어졌수다. 임자네들이 이 산속에서 나가면 또 식량이 어렵게 될것이니 여기서 마련해가지구 떠나야 하지 않겠소. 하니 좀 기다려주우다. 허마허즈쪽에 내려가 식량을 구해오리다.》하고 재차 말하는것이였다. 그러나 허마허즈부락까지는 멀기도 하였거니와 그곳으로 간다는것은 퍽 위험한 일이였다. 그것은 적들이 풀어놓은 개(특무)들이 무시로 싸다니고있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로인들이 부락으로 내려가는것을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참, 임자네들이 왜 이러우. 아무리 위험해도 식량이야 구해와야 하지 않겠소. 집이나 지켜주우다. 우리는 갔다오리다.》
우리는 끝끝내 로인들의 주장에 지고야말았다. 세 로인은 곧 허마허즈를 향해 산을 내려갔다.
우리는 로인들을 떠나보낸후 잠시도 마음을 놓을수가 없었다. 우리의 종적을 뒤따르던 적들이 산기슭 어디엔가 꼭 숨어있는것만 같았다. 생명의 은인들인 로인들에게 불상사가 생겨서는 안되였다. 우리는 귀틀집주변경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런데 로인들이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귀틀집밖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동무가 수림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는것을 알려왔다. 오랜 유격투쟁경험에 의하여 보초는 수림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른 나무가지들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라는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냈던것이다.
봉수동무와 룡권동무가 권총과 단도를 가지고 귀틀집후면으로 돌아서 수림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발자국소리가 나는 수림후면으로 돌 계획이였다. 귀틀집에 남은 우리들은 무장을 갖추고 바깥동정을 살피고있었다.
얼마안되여 귀틀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림속에서 한방의 총소리가 났다. 나는 막 뛰여가보고 싶었으나 서뿔리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자 꾹 참고 견디였다. 반시간도 못돼서 봉수동무와 룡권동무가 돌아왔다. 그들은 특무 두놈을 처단해버렸다고 말했다.
우리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사냥군으로 가장한 특무놈들은 그날 이 귀틀집부근에 이르러 마침내 우리를 발견하게 되자 내부동정을 더 살피려고 수림속에서 어물거리고있었던것이다. 귀틀집을 살피는데 정신이 팔린 놈들은 후면으로부터 달려든 봉수동무의 단도에 맞아 한놈이 쓰러졌다. 그러자 나머지놈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원래 총소리를 내지 않고 해치우려던 봉수동무와 룡권동무는 사태가 이렇게 되자 도망치는 놈을 총으로 쏴눕혔던것이다.
《우리도 우리거니와 중국로인들이 더 혼날번 했소.》
우리는 특무들을 없애버린것을 모두 기뻐하였다.
다음날 새벽녘이였다. 수수쌀을 한짐씩 짊어진 로인들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귀틀집으로 돌아왔다.
《늦어져서 안됐수다. 그놈들의 감시가 어찌도 심한지… 할수없이 밤길을 내내 걸었수다.》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소박하고 지성어린 로인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는 다만 머리가 수그러질뿐이였다.
우리는 곧 길을 떠날 차비를 하였다.
로인들은 그 수수쌀을 전부 우리에게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절반만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당신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참으로 기운이 나고 젊어지는것 같은게 꼭 좋은 세상을 보리라는 확신이 더 생기오.》
우리가 거듭 인사를 드리니 그 로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들의 손을 차마 놓기 서운해하는것이였다. 올 때와는 달리 우리는 원기왕성한 걸음으로 산을 내렸다. 로인들은 우리가 수림속에 가리워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귀틀집마당에 서있었다. 그들의 소박하고도 미더운 얼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후 우리는 얼마되지 않아서 마침내 동녕현 이도하에서 우리 부대를 만나게 되였던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중국인민들의 뜨거운 원호, 이는 항일무장투쟁의 전행정을 통하여 시종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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