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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자들속에서 박성철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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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726회 작성일 19-08-23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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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자들속에서

박성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난날 유격대를 조직하던 초기에 있어서나 그후 유격대를 확대강화함에 있어서 항상 로동계급을 선차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것을 가르쳐주시였고 로동계급성분을 장성시키기 위하여 각지에 있는 광산과 목재소 등에 비밀지하단체들을 광범히 조직하고 로동계급을 정치사상적으로 교양함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1930년대초에 공청원이였던 내가 나의 상부 공청조직원이였던 허학림동무와 련계를 맺고 연길현 8도구 금광으로 가게 된것도 바로 이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것이였다.

8도구 금광로동자로 취직한 나는 처음에 질통을 졌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로동에 익숙하지 못한 내가 좁고 깊은 굴속에서 하루 12시간씩이나 계속 흙과 돌을 져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임무를 수행함에 필요한것이였으므로 나는 이를 악물고 견디여냈으며 조직에서 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서는 보다 더한 곤난이라도 능히 극복해내야 한다는 결의를 더욱 굳게 다졌다. 그러면서 8도구 금광지구내의 실정과 로동자들의 형편을 파악하기에 노력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개인자본으로 경영하는 금광도 있고 《관방》이라고 불리는 국가경영의 금광도 있었다. 그중 《관방》은 두개뿐이였고 기타는 전부 개인기업이였다.

어느 광주를 물론하고 모두다 악착한 착취자들이며 일확천금에 눈이 뒤집혀날뛰는 투기업자들인데다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헤매는 로동자들이 많은 때였으므로 임금은 극도로 줄어들고 로동조건은 나날이 가혹해갔다.

경영주들은 최저임금조차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일을 시키려는 악착한 착취방법까지 꾸며냈다. 《모작금점》이라는 구실하에 일한것을 장부에 치부해두었다가 금맥이 발견되면 마지못해 임금을 지불하고 금맥이 나타나지 않으면 임금을 주지 않는것이 상례였다.

게다가 로동조건은 나쁘고 또한 위험하였다. 악착한 착취자들과 투기업자들은 사람이야 어찌되든 금이나 캐고보자는것이였다.

좁고 캄캄한 머리우의 돌짬에서는 물이 쏟아져내리고 굴바닥은 논판처럼 물이 고이고 발이 빠졌다. 이런속에서 로동자들은 물과 흙을 퍼냈으며 통기구멍이 없는 외통굴속에서 남포를 터뜨리기때문에 연기가 뽑히지 않아서 숨이 막혀 졸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매일 12시간이상씩 혹사를 당하면서 먹을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로동자들은 굿병(일제때 광산유해로동자들에게서 발생하는 빈혈증과 호흡기질환)이 생기군 하였다.

또한 금맥이 발견되기전에는 대개 동발을 받치지 않았으므로 락반이 지거나 굴이 무너져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빈번히 나군 했다.

때문에 그때 로동자들은 굴속으로 일하러 들어가는것을 《사지구뎅이》로 간다고 했으며 새벽에 일어나 죽을 마실 때는 《사자밥》을 먹는다고까지 했다.

로동자들이 사고로 인하여 병신이 되여도 퇴직금 한푼 못받고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사고로 인하여 죽어도 그 유가족들은 어디다 송사할곳조차 없었다.

이러한 형편은 로동자들로 하여금 착취자들에 대한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유리하였고 우리들이 그들속으로 깊이 침투돼야 하겠다는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였다.

나는 질통을 지는 일에도 아직 익숙치 못하였으나 직접부문 로동자들이 많은 막장일을 하기로 하였다. 힘도 더 들고 위험도 더 심하였다. 그러나 광산로동에서 가장 오래 시달렸고 자기 처지에서 해방될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고있는 그들과 직접 로동을 통하여 친숙해지면서 그들을 조직에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을 차차 본격적으로 진행하자는것이였다.

동시에 허학림동무가 알려주던대로 상급조직과 련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지정된 련락장소는 광산갱들이 있는 뒤산등 동발막이였다.(이 동발막은 개인광주들에게 동발나무를 파는 목재상인의 집이였다.) 그 동발막 산등을 넘어서면 북으로는 유격근거지인 부암동, 장재촌이 있고 동남으로는 석인구가 있었다. 동발나무는 바로 유격근거지인 부암동, 장재촌 등지에서 베여오는것이였고 조직원은 바로 이 동발막을 련락장소로 삼으면서 유격근거지내의 조직과 련계를 취하고있었다.

나는 허학림동무에게서 암호를 받아가지고 동발막을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동발파는 사람과 암호를 통하여 리천걸이라는 동무를 만나게 되였다. 그후부터 나는 리천걸동무와 련계를 맺게 되였는데 그에게서 처음 받은 지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것이였다.

…현계단에 있어서 로동자들과의 사업이 매우 중요하다. 진실한 로동청년들을 유격대나 적위대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그들의 성분과 환경을 깊이 료해하고 조직에 흡수하여 교양을 주며 비밀을 엄수하도록 해야 하겠다. 적들도 이곳에 우리 조직체들이 있는것을 알아차리고 자기들의 주구를 박아넣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건달군을 조직에 받지 말며 고착된 진실한 로동자들을 조직에 흡수해야 하겠다.…

나는 리천걸동무가 전해준 이 과업을 실천하기에 심중한 연구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막장일도 열성적으로 하여 광주에게 신망을 얻어서 공작수행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기에 힘썼다.

그런데 3~4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막장일은 이미 나의 사업에 적합하지 않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것은 조직이 강화되고 로동자들이 각성되여감에 따라서 한 막장안에서만 머무를수 없게 되였기때문이다. 그리고 12시간이상씩 로동을 하고 나와서 다음날 작업할 정을 벼리고나면 우선 나자신부터 곤해 잠자리에 드러눕지 않을수 없었으므로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한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노릇이였다. 나는 리천걸동무를 만나서 이 문제를 의논하고 직업을 바꾸기로 하였다.

당시 환경에서 제일 유리한것은 취사원자리였다.

나는 리천걸동무와 토의한 뒤에 여러 굴막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리가놈이 경영하는 갱에서 취사원노릇을 하게 되였다.

그 식당에서 밥먹는 사람은 30~40명정도였다.

광주는 식당서기를 따로 두지 않고 서기일까지 밀어맡겼다.

이렇게 되고보니 취사원의 일도 쉬운 노릇은 아니였다. 30~40명이 먹고 마셔야할 음료수는 깊은 굴안에 들어가 길어와야 했고 나무는 매일 고개너머에 가서 해와야 했다. 게다가 서기노릇까지 겸하고보니 그야말로 눈코뜰새가 없었다.

힘들고 피곤한것보다도 공작임무를 수행할 짬이 없는것이 큰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생활곤난을 더 참기로 하고 내 품삯에서 3원을 떼여냈다. 그것으로 나는 다른 로력을 쓰기로 했다. 나무해오는 사람에게 1원을 주고 물길어오는 사람에게 2원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겨우 시간적여유를 얻게 되였고 서기노릇만 하면서 사람들을 료해하는데 정력을 기울일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나는 더 많은 로동자들과 친근해지기 위해 각종 방법을 다했다.

그 당시 환경에서 그중 쉽고 좋은 방법의 하나는 그들과 결의형제를 맺는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것은 원칙적립장에서 볼 때는 좋은 방법이 아니였으나 그 당시 정치적으로 각성되지 못한 그들에게는 잠정적으로 필요한 사업방법이였다.) 이때 나는 19살이였으므로 결의형제를 맺은 결과 막내동생으로 정해졌다. 이렇게 되니 나의 형벌되는 로동자들은 많았고 그들은 나를 막내동생이라고 귀여워하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도와주었다. 어떤 사람은 장작을 패주기도 하고 불도 때주었으며 어떤 사람은 쌀도 날라주고 그릇도 씻어주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나와 그들사이에는 차차 허물없이 되여갔다. 나는 이러한 처지를 리용하여 로동자들의 가정형편과 출신성분 등을 료해할수 있었고 주위환경들도 세세히 알게 되였다. 나는 장부를 만드는척 하면서 매개 로동자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리고 그들의 성격까지도 일일이 료해할수 있었다.

나는 리천걸동무를 만나서 내가 수행한 사업정형을 보고했고 로동자들중에서 우수한 사람들을 리천걸동무와 직접 련계를 맺어주었다.

이러한 로동자들속에서 정치사상적으로 무장되고 검열된 몇사람은 그 당시에 벌써 유격대로 들어가게 되였다.

내가 금광에서 이렇게 사업하는 사이에 부암동, 장재촌 등지의 유격근거지가 점차로 형성강화되였고 내가 있는 광산내에도 여러개의 비밀지하단체들이 조직되였고 수많은 공작원들이 침투되였으며 조직체들과 각성된 혁명군중들의 력량이 점점 확장강화되여갔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광산안에 어떠한 조직들이 있는지, 누구누구가 조직에서 파견되여왔으며 얼마만한 군중이 조직에 참가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나에게 지시를 전해주는 동무와 내가 담당한 일부 로동자들을 알고있을뿐이였다.

유격근거지들과 광산내부에서 차츰 조직이 확장되여감에 따라 삐라와 표어 등도 자주 나붙기시작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떤 조직원들에 의하여 진행되는것인지를 알수 없었다. 다만 그 대담한 행동과 삐라와 표어의 내용으로 보아서 내가 수행하고있는 임무내용과 일치한것이였으므로 그 일이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도밑에 조직전개된다는것만은 확신할수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 력량이 나날이 확장되여감에 따라 적들의 경계도 차차 더 심하여갔다. 《관방》에는 무장보위대가 늘어갔고 경찰들과 헌병들이 더 자주 드나들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인 1933년 6월 어느날이였다.

나는 향춘발동무의 추도식에 참가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 나는 지정된 시간인 저녁에 지정된 장소인 금광 뒤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은밀히 행동을 하였다. 그런데 산우에 올라가보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곳에 모인 조직군중은 무려 300여명이나 되였던것이다.

나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조직의 정확한 지도와 로동계급의 무궁무진한 힘을 느꼈다. 불과 얼마 안되는 사이에 광산내에서만 이렇게 많은 로동자들이 조직에 망라된줄은 미처 몰랐기때문이다.

광산내의 조직군중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것도 이날이 처음이였다. 그리고 누구누구가 조직원인지 잘 모르고지내던 나는 이날 비로소 얼굴들을 알게 되였다.

그 이튿날 적들은 뭇매맞은 개들처럼 몰려다녔다. 조직원들과 혁명군중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된것이였다.

그러나 조직의 지시에 의하여 공작원들과 혁명군중들은 비밀을 고수하고 몸을 피하면서 지하투쟁을 계속했다.

나는 이때 조직의 지시에 의하여 다른 막으로 취사원공작을 옮겼다. 그 당시 거기에는 놈들이 손이 뻗치지 않았으므로 한동안 무사히 견딜수 있었다.

한달이 지난 7월 어느날 밤 나는 동발막으로 사업보고를 하러 갔다. 리천걸동무는 이때 나의 사업보고를 다 듣고나서 쌀독안에 감춰두었던 작탄을 꺼내보였다. 이것을 본 나는 새로운 용기가 부쩍 솟았다.

리천걸동무는 또한 유격근거지내에 병기창이 있다는것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날밤 리천걸동무와 함께 자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싶었다. 그러나 리천걸동무는 적들이 주목하고있으니까 어서 떠나가라고 엄격히 말하였다.

그날밤 늦게 집에 돌아와 자는 나를 한 동무가 깨웠다. 그리고 10여명의 동지들이 체포되여갔다는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의 가슴은 얼어드는것 같았고 주먹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나 무모한짓을 하지 말라는 조직의 엄격한 지시가 있는 때인데다가 빈주먹뿐인 나는 어찌할바를 몰랐다. 리천걸동무가 보여주던 작탄이 생겨났고 그리로 달려갈 생각도 간절했으나 그것 역시 이미 주의를 받은 뒤라 나는 할수없이 그날밤을 막간에 들어와서 뜬눈으로 새울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후에 안일이지만 적들은 체포한 우리 동지들을 데리고가다가 도중에서 고문하였으나 한마디 비밀도 알아내지 못하게 되니 학살하였던것이다. 이것을 시초로 하여 광산안에서는 적들의 만행이 계속되였다.

우리들의 비밀은 굳건히 지켜졌고 혁명군중들의 단결이 강화됨에 따라 적들은 닥치는대로 로동자들을 붙잡아갔다.

《100명을 죽이면 그속에 한명의 공산주의자라도 있을것이다.》이렇게 고아대면서 놈들은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감행하였다.

놈들은 혁명조직성원들에 의하여 각성되고 장성하는 로동계급의 위력을 두려워하였으며 이 힘을 눌러보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던것이다.

수많은 로동자들을 놈들이 닥치는대로 검거학살했으나 로동자들의 기세는 불길처럼 거세게 일어났고 원쑤를 저주하며 복수를 맹세해나섰다. 그리고 학살당한 로동자들의 유가족들의 원성은 더욱더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나는 이렇게 격동된 로동자들의 적개심과 혁명기세를 리용하여 그들을 적극적으로 조직에 망라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상부조직과의 련계도 잠시 끊어지고 리천걸동무를 만날수 없게 된 나는 처음에 암호를 교환하던 동발막의 동무를 찾아갔다. 그는 작탄제조에 필요한 화약심지(도화선), 깡(뢰관)등을 구해서 유격근거지에 보내야 한다는 조직의 지시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이 과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로동자들을 추동하여 이 사업을 보장했다. 이렇게 우리의 투쟁은 계속되였다.

1933년 여름부터는 유격대동무들이 광산에 나타나서 선전사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로동자들의 임금이 낮다는것, 로동시간이 길다는것, 로동보호가 전혀 없이 로동자들을 혹사하고 잔인하게 착취하며 나아가서는 고문학살하는 자들을 타도하고 우리의 주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오직 유격대를 강화해야 한다는것 등을 선전했다.

이러한 선전에 고무된 로동자들가운데는 유격대에 입대할것을 탄원해나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이들을 조직에 망라시켰으며 유격대원으로 양성했다.

한편 계급적으로 각성한 로동자들은 로동조건개선을 위한 투쟁에로 조직동원하였다.

박광주라는 자가 경영하는 갱은 가장 큰 금점구뎅이의 하나였는데 전체 로동자들이 일시에 맞교대(12시간로동)작업을 반대하여나서자 광주는 몹시 당황했다. 그 구뎅이에서 일하는 로동자들은 금광에서 오래동안 숙련된 로동자들이였으므로 광주의 타격을 컸다. 어느 한두명의 숙련로동자라거나 또는 신입로동자들이라면 경영주는 혹 딴전을 부릴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문제가 쉽지 않았고 로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할수 없게 되였다.

이것이 전례가 되여 다른 갱들에서도 3교대(8시간)작업을 실시하거나 또는 8시간작업을 초과한데 대한 로동임금까지 지불하게 되였다. 이로써 혁명조직들에 대한 로동자들의 신망은 더욱더 두터워졌고 유격대에 입대를 탄원하는 로동자들은 더 많아졌다.

나 역시 적들의 대검거가 있은후이라 적들의 감시와 탄압이 심한 조건하에서 직접 무장을 들고 놈들과 싸워야 되겠다는 결심이 더욱 새로와졌다. 그렇다고 무작정 조직사업을 중지하고 유격대로 들어갈수는 없어서 당분간 사업을 계속하면서 상급의 지시를 받기로 하였다.

1934년 봄이였다.

유격대원들이 광산으로 왔다. 그들은 유격대에 입대할 동무들을 데리러왔던것이다. 또한 그 유격대원들가운데는 내가 조직해서 들여보낸 동무들도 있었다.

나는 그 동무에게 내가 처한 실정을 이야기하고 나도 유격대에 들어가야겠다는것을 토론하였다. 결과에 나는 이 동무의 안내로 유격대책임자를 만나게 되였고 입대할것을 쾌히 승낙받았다.

이렇게 하여 나도 로동자들속에서 훈련된 한사람으로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대오에 들어가게 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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