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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산에서  (박 영 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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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953회 작성일 19-09-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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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산에서

 

박 영 순

 

내도산부락은 안도현 명월구에서 370리, 구안도에서는 130리 떨어진 백두산가까운 깊은 산간에 있다.

1935년 가을 이곳에 새로운 유격근거지가 창설되였다.

당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요영구회의방침에 따라 협소한 지역을 벗어나 북만과 남만일대의 광활한 지역에 진출하여 활동하고있었으며 국내에까지 진공할 원대한 계획이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처창즈유격근거지를 해산하고 국내에 더욱 가까운 내도산에 근거지를 옮기게 된것이다. 당시 병기수리소를 책임지고 사업한 나는 동지들과 함께 처창즈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여 왔다.

내도산은 일만군경들의 경비기관 배치지점에서 멀리 떨어져있었으며 그곳과 남만 무송방면과의 사이를 울창한 수림이 가로막고있었다. 그러나 내도산앞에는 그전부터 조선과 안도방면으로 통하는 한 갈래의 통로가 있었으며 내도산부락은 200리 무인지경을 지나는 로정에 있는 유일한 주민지대였다. 마을 서북쪽에는 마치 수해속의 섬과 같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내도산으로서 부락의 외곽을 이루고있고 동북으로는 내도하가 흐르고있다. 높은 지대에 있으나 무연한 구릉속의 아늑한 분지인 내도산부락은 물도 좋고 땅이 비옥하여 이곳 주민들은 《모든것이 불편해 사람살곳은 못되나 왜놈들의 미운 꼴을 보지 않고 농사가 잘되는 맛으로 산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도산근거지는 우리 유격대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의미에서보다도 조선땅과 가깝다는 거기에 더 큰 정치적의의가 있었다.

부락의 주민은 전부 조선사람들이였는데 그들은 모두 일제식민지략탈정책의 희생자로서 멀리 살길을 찾아 험산준령을 넘어왔던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일제를 증오하는 사상이 강했다. 늙은이들중에는 독립군이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도산사람들은 항일유격대와 련계를 맺으며 부락에 유격근거지를 두는것을 기뻐하였다.

우리들이 여기에 도착했을 때 마을사람들은 성의를 다하여 맞아주었다.

우리가 온후 내도산동포들의 생활에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유격대는 《구장》제도를 페지하고 마을사람자체의 손으로 농민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농민위원회는 정권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부녀회 등 군중단체도 조직하였다.

이러한 조직들은 유격대를 각방으로 도왔다.

유격대원들은 다양한 해설선전사업과 문화오락사업을 조직하여 내도산동포들을 조국의 광복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교양하였다. 마을에는 야외무대가 꾸려지고 적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연극이 상연되였다. 연극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 어떤 산중에 농가 한채가 있었는데 하루는 이리떼같은 《토벌대》놈들이 밀려왔다. 적장교놈은 이 집을 발칵 뒤지라고 불호령을 내린다. 그러자 저마다 허리에다 닭을 두세마리씩 달아맨 졸병들이 집안에 들어가 살림살이를 들부시며 미쳐날뛴다. 장교놈은 녀인의 머리채를 틀어잡고 《남편이 간곳을 대라!》고 고함을 지른다. 녀인은 끝까지 모른다고 내뻗친다. 그러자 놈들은 그 집에다 불을 질러놓고 녀인의 품에서 어린아이를 빼앗아 활활 타오르는 불길속에 던져넣는다. 어린아이는 가슴을 쥐여짜는 소리를 내다가 그만 죽고만다. 마을사람들은 격분하여 원쑤놈들에게 항거하여나선다.…

연극을 보는 군중들은 일제놈들에 대한 치솟는 증오와 적개심으로하여 두주먹을 부르쥐였다. 경신년(1920년) 《간도토벌》시에 놈들의 만행을 직접 겪은 로인들은 그때의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되살아올라 분노의 치를 떨었다. 녀인들은 흐느껴울었고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서 유격대와 함께 싸울것을 맹세하였다.

이러한 모임이 거듭되고 날이 감에따라 내도산인민들의 각성은 더욱 높아갔다. 유격대는 인민을 돕고 인민들은 유격대를 도우며 서로 혼연일체가 되였다.

새 생활이 시작된 내도산마을은 행복과 희망으로 들끓었다.

내도산근거지의 창설과 유격대의 광활한 지역에로의 진출, 농민위원회의 조직과 유격대에 대한 인민들의 적극적인 방조는 적들의 불안을 크게 했다. 그리하여 원쑤들은 1936년 1월 유격대에 대한 《동기토벌》작전의 《중요한》목표를 내도산근거지《소탕》에 두었다. 이때 동원된 적부대는 소위 《동변도 토벌대장》리도선이 지휘하는 부대와 안도현성에 있던 일본군 박격포부대 일부와 경찰, 위만군 등 800여명이였다. 놈들은 내도하의 얼음을 리용하여 이도백하에서 수많은 인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무기와 군량을 나르며 대대적인 전투계획을 꾸미였다.

적의 수자에 비하면 아군의 병력은 너무나 적었다. 이때 우리 유격대의 1련대는 돈화, 화전현방면에 나가 활동하고있었으며 3련대와 4련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휘밑에 북만에서 활동중이였고 2련대는 한양구부근에 진출했던것이다.

근거지에는 제2군 지휘부와 재봉대, 병기수리소, 병원 등 후방기관들과 약 20여명의 아동단원들, 부상병들, 녀대원 몇명이 있었고 중대로는 2련대 7중대성원 40여명밖에 없었다. 적들은 이러한 정형을 탐지해가지고 대병력으로 근거지를 일시에 《소탕》하려고 하였다.

근거지부근일대는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수림지대였으나 내도산만은 서쪽 경사면에 큰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있는 정도여서 감시와 화력조직에 지장이 없었다.

이 산에는 유격대가 주야교대로 서는 망원초와 전호가 있었다. 그러므로 적들은 근거지를 점령할 목적으로 우선 이 근거지의 관문이며 전술적으로 결정적의의를 가지는 내도산을 장악하려고 했다.

근거지일대는 흰눈이 깊이 쌓여있었다. 적들은 흰색 위장복을 입고 북쪽으로하여 내도산에 기여올라왔다. 그런데 고지에는 망원초를 선 동무와 금방 근무를 교대하고난 네댓명의 대원들밖에 없었다. 적을 발견한 그들은 이미 준비된 전호를 리용하여 적을 요격할 태세를 신속히 갖추는 한편 지휘부에 정황을 보고하였다. 놈들은 포사격을 퍼부으면서 우리 용사들이 있는 고지에 기여올랐다. 침략자들의 포소리는 내도산의 평화스러운 정적을 깨뜨렸다.

싸움이 시작되자 근거지에 남아있던 유격대원들은 즉시 산으로 올라왔다. 적아간에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적들은 제일먼저 내도산마루의 후면 첫고지에 달려들었다. 유격대원들은 가증스러운 원쑤들에게 맹렬한 집중사격을 가했다. 탄알이 비발처럼 쏟아져내려가며 작탄이 연거퍼 터졌다.

《원쑤를 한놈도 남기지 말라!》

《마지막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자!》

그들의 눈동자는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불이 일듯 하였고 고지는 활화산같이 노호했다. 수많은 시체를 남긴 원쑤들은 부득불 퇴각했다.

그러나 놈들은 우리가 소수인것을 알고 기를 쓰며 또 달려들었다.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졌다. 적들은 이번에는 두번째 봉우리를 향해 기여올라왔다.

아군은 신속히 그 고지에 이동하여 적들의 접근을 대기하고있었다. 탄알을 아껴야만 했다. 적들은 악착스럽게 한걸음한걸음 기여올라왔다.

우리는 한알의 탄알이라도 랑비하지 않기 위하여 놈들을 가까이 접근시켜놓고 일시에 강력한 화력으로 타격을 주었다. 적들은 산릉선이 너저분하게 무리로 나가쓰러졌다.

그러자 놈들은 뒤로 밀려갔다.

가렬한 싸움이 계속되자 아군진지에서도 한사람두사람 희생자가 나기 시작했다. 탄알도 이제는 얼마남지 않았다. 고지에는 나어린 아동단원들과 재봉대원들, 작식대원들, 부상병들 할것없이 다 올라와 한덩어리가 되여 싸웠다. 마을사람들도 유격대원들과 힘을 합하여 탄약과 식사를 날랐다. 뒤로 밀려갔던 적들은 얼마안있어 또 세번째 봉우리쪽으로 산개해 기여올라왔다. 이번에는 더 많은 병력이였다. 그러나 적들은 그 고지에서도 여러명이 거꾸러지고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했다. 적들은 첫날 세번이나 돌격을 반복했으나 결국 50여명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다.

어느덧 산우에는 어둠이 짙어가고 살을 에이는듯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고지에서는 밤을 모르고 새날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하여 돌같이 언 땅을 파내며 화점을 만들고있었다. 땅을 파는 사람, 돌을 나르는 사람, 나무를 메나르는 사람… 작업은 령하 40℃의 혹한속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였다. 한편 내도산 남쪽릉선의 곳곳에는 무수한 우등불을 피워놓았다. 때문에 적들은 그곳에 우리 부대가 많은줄 알고 익측으로부터의 침입을 시도하지 못했다. 또한 유격대원들은 야간습격조를 조직하여 적의 집결장소를 기습하여 놈들이 잠을 못자게 했다.

그래 놈들은 그 추운 밤에 우등불도 못피우고 꼬박 새우며 떨게 되였다. 놈들은 밭가운데 있는 짚무지에 머리를 틀어박고 서로 짚단을 뒤집어쓰겠다고 밀고당기고하여 짚단을 온통 가루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다가는 기습을 당해죽고 얼어죽고하였다. 이러한 기습이 매일밤 조직되였다.

마을사람들은 밤을 새워가며 산가까이에 있는 집들에다 불을 때고 물을 끓였다.

유격대원들은 여기서 2시간씩 교대로 몸을 녹이며 싸웠다. 며칠밤사이에 온 겨울 땔나무를 다 땠으나 인민들은 그런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때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는 작식대원이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김명화동무와 함께 캄캄한 야밤에 눈이 허리를 치는 길아닌 길을 더듬으며 고지에 더운 물을 운반하시였다. 두팔에 물통을 낀 그들은 뼈속까지 얼어드는듯한 추위를 참으며 고지를 향하여 한걸음한걸음 톺아올라갔다.

그러다가 도중에 김정숙동지께서 발자국을 잘못 옮겨 깊은 벼랑밑에 떨어지셨다.

바람은 사나운 짐승같이 윙윙거리며 눈을 휘몰아쳤다.

눈가루는 얼굴을 바늘로 찌르는듯 했다.

《정숙동무! 정숙동무!》

명화동무는 목이 터지게 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바람에 삼켜 크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허둥지둥 눈을 허비며 벼랑아래로 돌아서 기여내려갔다. 한참이나 눈속을 헤맨후에야 겨우 깊은 눈속에 파묻힌 동지를 발견했다.

《정숙동무! 정신차려!》명화동무는 그이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자기 생명이 위험한 그 순간에도 팔에 끼였던 물통을 가슴에 품고 두팔로 옷섶을 여민채 눈을 감고계셨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동무의 부축에 의하여 가까스로 일어나셨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모아 다시 산으로 올라가셨다. 이날밤 그들은 날밝을 때까지 산으로 몇번이고 오르내렸다.

밤사이에 내도산마루에는 견고한 토목화점이 생겼다. 우리는 이 근거지를 목숨으로 지킬 각오였다. 하루종일 싸웠고 또 온밤을 새웠으나 동지들의 기세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첫날공격에서 실패한 적들은 그 이튿날은 약 200여명의 병력으로 3개의 봉우리에 일시에 달려들었다. 이때에 아군은 과감한 반돌격으로써 적의 약한 고리를 격파하여 놈들을 물리쳤다.

이날도 전투는 하루종일 계속되고 적들은 70여명의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전투가 끝난것은 아니였다.

이리하여 천고의 밀림속의 평화스러운 마을 내도산은 싸움으로 날이 밝고 싸움으로 날이 저물었다. 이틀동안에 걸친 여러차례의 돌격에서 심대한 손실을 본 적들은 사흘만에는 수백명의 병력을 더 보충하여 최후발악을 하며 달려들었다. 적은 점점 고지가까이에 다달았다. 분초를 다투는 이 위급한 순간에 우리 기관총이 갑자기 고장났다.

우리에게는 변변한 수리도구도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관총을 빨리 수리해놓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나는 심혈을 기울여 고장난 기관총을 제때에 수리함으로써 밀려오는 적을 쓸어눕힐수 있게 하였다.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고지에 60살이 넘어보이는 로인이 탄알을 지고 올라왔다. 그런데 로인은 전호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유격대원들은 로인에게 위험하니 부락으로 내려가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산으로 기여오르는 적들을 노려보며 《여보게 젊은이, 좀 쏴볼수 없겠나. 나도 젊었을 때 좀 쏴봤네.》하였다. 우리는 로인에게 총을 한자루 빌려주었다. 대원들속에 끼운 로인은 한쪽손으로 성에가 허옇게 붙은 수염을 쓱 문지르더니 별로 겨누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기였다. 그러자 아래서 올라오던 적 한놈이(600m 거리는 푼히 되였다.) 그 자리에 푹 거꾸러졌다. 로인은 연거퍼 방아쇠를 당기였다. 한방에 한놈씩 꼭꼭 쓰러졌다. 《우리도 그전에 탄알을 둬섬씩은 쏴봤네.》 로인은 지난날의 독립군이였던것이다. 그는 비록 몸은 늙었으나 우리 유격대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격분에 찬 어조로 일제침략자를 증오하는 한편 이제야 백두산장수가 나타났다고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깊은 경모의 정을 표시하였다.

적들은 이날 수차에 걸쳐 발악적인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2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또다시 퇴각하고말았다. 이렇게 되자 놈들은 할수없이 안도방면에 응원부대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적들도 도중에 그 방면에서 활동하던 우리 유격대의 습격을 받아 거의 전멸되고말았다.

응원을 요청한 적들은 지원병이 올것만 기다리고 7일간이나 있었으나 병력만 소모될뿐 한걸음도 전진할수 없게되자 퇴각하고말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박격포와 중기, 경기관총의 엄호하에 달려드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에게 계속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300여명의 적을 살상하고 수많은 무기와 전투기재를 로획하였다.

내도산인민들에게 혁명의 승리에 대한 신심을 더욱 고무한 이 전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싸운 항일혁명투사들의 백절불굴의 투지와 대중적영웅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간고한 전투의 하나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내도산전투후 무송, 림강, 몽강, 장백 등 남만일대에서 적극적인 유격활동을 계속 전개하면서 그후 국내에까지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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