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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은정 (박성철)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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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822회 작성일 19-09-0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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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은정

박성철               

 

15성상에 걸치는 장구한 기간 항일유격대가 도처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을 격파분쇄하고 승리를 거둔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인민과의 련계가 깊었기때문이다. 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것과 같이 항일유격대는 인민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가르치심대로 우리는 싸웠으며 인민들도 또한 항일유격대를 자기들의 진정한 군대로 지극히 사랑했었다.

중국인민들도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항일유격대를 사랑하고 돌봐주었다.

다음이야기도 역시 중국인민이 우리들에게 돌려준 뜨거운 지성의 한 실례이다.

 

*             *

 

1936년 봄에 있은 일이다. 그 당시 우리 부대는 돈화부근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전해 겨울부터 부대내에 장질부사가 돌기 시작했다. 당시 예방수단과 의료시설이 불충분한 형편에서 우리들은 이 장질부사때문에 매우 곤난했다. 우리 부대에서도 앓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봄까지도 무사하였으므로 걸리지 않을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는 행군도중에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좀 의심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처음에는 감기려니 생각하였다.

그러나 날이 지나감에따라 열이 점점 더 높아져가고 행군대렬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3~4일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대렬을 따라갔다. 그러나 열이 40℃에 달하게되자 더는 따라갈수 없게 되였다. 거기에는 후방밀영도 없었으며 어느곳으로 후송할 곳도 없었으므로 매우 곤난하게 되였다. 동지들은 나를 번갈아업고 어떤 부락에 도착하였다. 그 부락은 고타구라는곳이였는데 나는 그곳이 어느 지대에 속해있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나는 그 부락에 도착했을 때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때 부대의 전투임무는 급하고 후방밀영은 멀다나니 동지들은 나를 붙잡고 오래동안 지체할수 없게 되였다.

지휘관들이 토론한 결과 이 지방의 인심이 후하고 경향성이 좋은것을 참작하여 나를 십가장의 집에 맡기며 돈 5원을 내여놓고 부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치료해달라고 부탁했던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후에 안 일이고 그 당시에는 의식을 잃고있었으므로 알지 못했다.

그후 며칠이 되였는지 알수 없으나 나는 의식을 회복했다. 내 눈에 처음으로 떠오른것은 앉으면 머리에 닿을듯한 낮은 천정이였다. 사방은 몸을 움직이기 힘들만큼 좁고 발편쪽으로 밖이 내다보였다. 내 눈에는 하늘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하늘은 내가 늘쌍 보아오던 하늘이 아니라 노란 하늘이였다. 그것은 나에게 아직도 열이 있기때문에 그렇게 보였던것이다. 주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만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날뿐이였다. 나는 일어나서 밖을 내다보려고 했으나 상반신을 일으키자마자 그 자리에 도로 쓰러지고말았다. 나는 누워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고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나는 내가 열이 나서 부대를 따라가기가 몹시 힘들던 일이 생각났고 내가 누워있는곳이 작은 움막안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도대체 어떤곳이며 누가 여기다 눕혀놓았는지도 알수 없었다. 적이 나타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불쑥 머리에 떠오르자 나는 무기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무기는 아무데도 없었다. 나는 가슴이 서늘했다. 다시 찾아보았으나 역시 무기는 없었다.

우리 동무들이 주위에 있을가 싶어서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움막 앞켠에는 파란 보리밭이 내다보였다. 그때 나는 여기가 깊은 산속이 아니라 마을부근이라는것을 알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십가장은 내가 부락에 있으면 발각될가봐 여기다 움막을 짓고 나를 감추어두었던것이다.

이렇게 내가 보리밭을 내다보며 이 생각, 저 생각하고있을 때 그 보리밭 저켠으로부터 젊은 처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처녀는 옷입은것으로 보아 중국처녀였다. 그는 내가 있는 움막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정신을 차린것을 보고 처녀는 눈에 기쁨을 가득담고 무엇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처녀가 입을 놀리는것만 보일뿐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열병을 앓고난 환자가 다 그렇듯이 나도 귀가 메였던것이다. 설사 나의 귀가 들린다고 하더라도 당시 중국말을 알지 못한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수 없었을것이다. 아마도 내가 살아난것이 무척 기쁘다는 의미같았다. 그리고 내가 알아듣지 못하니 손시늉으로 자기가 업어왔다는것을 이야기했다. 처녀는 자기가 가지고온 바구니에서 미음과 고추장과 파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내가 일어나지 못하니 나를 일으켜 앉혀놓고 미음을 먹여주었다. 그는 내 주위를 깨끗하게 거두어놓고 또 오겠다는 손시늉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그가 돌아간후 그가 어떤 처녀인지 또 어떻게 되여 나를 그렇게 돌보게 되였는지 알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내가 전염병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극진히 간호해주는 이 은인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찼었다.

그후 처녀는 매일 세끼씩 미음을 가져왔으며 나를 극진하게 돌보아주었다. 나의 이마를 짚고 열이 차츰 내려가는것을 보고는 무척 기뻐했다. 그의 이 극진한 간호는 나의 고통을 덜어주었으며 병은 매일매일 나아갔다. 나의 귀도 차츰 들리게 되였다. 그러나 딱한것은 내가 중국말을 알지 못하는것이며 그가 조선말을 알지 못하니 나의 가슴에 가득차있는 감사의 뜻을 전할수 없는것이였다.

이러는 사이에 날은 하루하루 지나갔다. 그동안 그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번도 빠짐없이 끼니를 날라왔다. 차츰 나는 혼자서 일어나 앉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움막 귀틀나무를 짚고 일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다리가 떨려서 오래 서있을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도 억지로 일어서보군했다. 이렇게 걸음련습을 하고있을 때 처녀가 나타났다. 내가 걷는것을 보고 그는 무척 기뻐했다. 그때 내가 기운없이 쓰러지게 되자 그는 재빨리 달려와서 나의 겨드랑이에 자기 어깨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는 나더러 발자국을 떼게 했다. 나는 처녀가 시키는대로 마치 어린 아이가 걸음발을 떼듯이 한걸음한걸음 걸어나갔다. 그러나 나는 전염병환자인 나의 몸이 그에게 닿으면 전염이 될가싶어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괜찮다고 하면서 나를 붙잡고 걷는 련습을 시켜주었다. 나는 나에 대하여 극진히 돌봐주는 그가 마치 나의 친누이동생처럼 느껴졌다.

이리하여 나는 그의 도움을 받으면서 걸음련습을 하게 되였고 그것이 나의 새로운 일과로 되였다.

나는 이 고마운 마음을 위하여서라도 하루바삐 나아서 조중 두 나라 인민의 원쑤인 일제와 싸우겠다는 그 생각밖에 없었으므로 하루에도 수차례씩 걸음련습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는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거의 없어져가던 열이 갑자기 다시오르기 시작한것이였다. 아마도 걸음련습을 무리하게 한것이 탈이 되여 병이 재발한 모양이였다. 그날 저녁 얼굴에 수심이 가득찬 처녀는 밤이 깊도록 가지 않고 나의 머리를 짚어주며 걱정만 하는것이였다.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수일후에는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기뻐하고 극진하게 간호했으나 다만 전보다는 더욱 신중하게 돌봐주는것이였다.

나는 또다시 걸음련습을 시작하게 되였다.

어느날 그가 나타났는데 미음대신 고기국물을 가져왔다. 몸을 보신하라고 가져온것인데 고기를 먹으면 체할가봐 국물만 가져왔다는것을 나는 알았다. 그것을 먹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것 같았다. 그후 며칠이 지나서 나는 걸을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있는곳이 어딘지 몰라서 몹시 궁금했으며 몸이 나아가자 빨리 부대를 따라가고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어느날 나는 부락위치와 지형을 알아보기 위해 뒤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있는 움막은 산중턱 홈채기에 있었고 산꼭대기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던것이다. 산우에 올라가보았으나 우리 부대가 어디로 갔는지 알길이 없었다. 나는 오래동안 산우에 앉아서 지형을 살피고있었다. 낮에 내려가서는 사람들에게 들킬 위험성이 있었으므로 어두워진다음 내려가려고 그냥 산우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어두워진다음에 산을 내려가다가 나는 길을 헛들고말았다. 산꼭대기로부터 골짜기가 여러갈래로 뻗어내려갔는데 어느 골짜기에 나의 움막이 있는지 알수 없었다. 한 골짜기를 더듬어내려가서 헤매다가도 거기에 움막이 없으면 도로올라가서 딴골짜기를 더듬었다. 그러는 사이에 밤은 먹칠을 한듯 어두워졌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풀섶에 쓰러진채 더 움직일수 없게 되였다.

나의 머리속에는 여러가지 절박한 생각이 떠돌았다. 《이러다가 병이 재발되지나 않겠는가?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이 이름모를 산속에서 동지들도 모르게 죽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한 나는 가슴이 미여지는듯 하였다. 나는 소스라쳐 몸을 일으켰다. 《아니다, 그럴수는 없다. 혁명동지들을 만나보지 못한채 어떻게 여기서 죽을수 있단 말인가. 살아야 한다. 어떻게하나 살아서 다시 부대로 돌아가야 한다.》나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웨치며 온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움막을 찾기 위하여 쓰러지며 기며 온밤을 헤맸던것이다.

이튿날 아침에야 나는 움막을 찾을수 있었다.

움막에 돌아가자 나는 그만 맥을 잃고 쓰러졌다.

한참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거기에는 어제 저녁에 가져다둔듯한 밥그릇이 있었다. 나는 배가 고프던차라 그것을 먹으려고 했다. 그때 처녀가 또 바구니에다 먹을것을 들고왔다. 그는 나를 보고 무척 반가와하면서 무어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입고있는 바지가랭이가 젖은채 아직도 마르지 않은것으로 보아 그가 어제 저녁에 나를 무척 찾아다녔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나는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식사를 다한 다음에 그는 나에게 부락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나는 부락에 적들의 주구놈이 있지 않을가 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이렇게 극진하게 돌봐주는 처녀가 그것을 미리 생각지 않았을리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의 뒤를 따라내려갔다.

처녀는 나를 데리고 자기집 뒤방으로 들어갔는데 방안을 살펴보니 벽에는 거울이며 처녀의 옷이 걸려있었다. 틀림없이 그 방은 처녀의 방이였다. 나는 중국사람들의 풍속에 처녀의 방에는 그의 약혼자외에 들여보내지 않는다는것을 알고있었으므로 다른 방에 옮겨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처녀는 굳이 자기 방에 있으라고 권고했다. 그는 내가 자기 방에 있는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참후에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처녀의 아버지가 들어와서 무엇이라고 나에게 말을 하는데 아마도 안심하고 푹 쉬라는 말같았다. 처녀가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아까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때 새까맣게 때가 앉은 얼굴과 길대로 긴 머리를 보았으므로 얼굴부터 씻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발부터 씻으라고 알려주었다. 후에 안일이지만 그것은 열병환자를 간호하는 그들의 관습이였던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처녀의 방에 있게 되였다. 처녀는 나를 자리에 눕힌 다음 이불을 덮어주고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며칠이 지나서 처녀는 다시 물을 떠들고 들어와서 얼굴을 씻는 형용을 했다. 그리하여 나는 얼굴을 씻게 되였다. 나는 점점 더 회복되여갔다. 그러나 밖으로 나갈수 없는것이 무척 답답했다. 처녀는 경찰놈들이 오는 시늉을 하고는 그럴때면 이불을 쓰고 드러누워 벙어리로 가장하라고 대주었다. 놈들에게 들키는 경우에 내가 조선사람이라는것이 드러나면 놈들은 무작정 나를 유격대로 몰리라는것을 알기때문이였다.

이러는사이에 나는 그 처녀의 아버지(후에 안 일이지만 그가 십가장이였던것이다.)와 그의 어머니와도 친근하게 되였고 손시늉으로 그들과 의사를 통하게 되였다. 그들은 나에게 일제놈들이 닭이며 돼지를 잡아가고 반반한 처녀들을 끌어간다는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를 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내가 좋은 사람인것이 아니라 항일유격대가 좋은 군대라는 뜻임을 알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해야 조중인민들이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나의 말을 얼마나 알아들었는지 일제놈들을 때려부셔야 한다고 말하는것이였다.

어느날 밖에서 개들이 요란스레 짖어댔다. 처녀는 황급히 뛰여들어와서 나를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씌워준다음 자기 입을 가리키며 말을 하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한참후에 요란스런 발걸음소리와 함께 벅적 떠드는 소리가 밀려들어왔다. 놈들은 내가 누워있는 방곁에까지 와서 고아댔다.

나는 극도로 긴장해졌다.

만약 경우에 피값이라도 할 생각으로 이미 준비해두었던 《치도》를 이불밑에서 든든히 틀어쥐였다.

처녀는 곁방에서 경찰놈들을 얼려추며 분주히 돌아가는 모양이였다. 경찰놈들이 집안을 살피는듯 뚜벅뚜벅 발자국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껄껄대는 웃음소리와 그릇소리가 났다. 무엇을 처먹는듯 쩝쩝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한참후에 한놈이 내가 있는 방문을 여는 모양이였는데 처녀는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는것 같았다. 나는 이불속에서 신경을 도사리고 숨을 죽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때 처녀는 내가 자기네 친척인데 벙어리라는것과 정신없이 앓고있다는것을 설명해주어 겨우 경찰놈들을 속여넘겼다는것이다.

처녀의 꾀에 속은 경찰놈들은 한동안 곁방에서 벅적 떠들어대더니만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처녀에게 무엇이라고 인사해야 할지 말을 찾을수가 없었다. 다만 이 은혜를 갚는 일, 그것은 나의 원쑤이자 곧 그들의 원쑤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하루바삐 부대를 따라가고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내가 빨리 떠나가고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처녀는 자기 손을 꼽아보이며 아직 열흘만 더 있다가 가라고말했다. 이튿날 십가장은 장보러가더니 닭과 소고기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우리 동무들이 두고간 돈을 쓰지 않고 두었다가 고기를 사서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주려고 한것이다. 수일후 우리 부대가 나를 찾기 위해 그곳에 들렸다. 우리는 십가장부부와 그의 딸에게 심심히 감사를 드리고 그곳을 떠났다.

 

*                        *

 

나는 그후 원쑤들과의 가렬한 투쟁속에서도 그들의 고귀한 은정을 잊을수 없었다.

그것은 당시 십가장령감과 그의 딸이 낯설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를 실로 혈육과 같은 사랑으로 구원해주었기때문이다. 그때 만일 유격대원을 감춰두고있다는것이 적들에게 발각된다면 그들 일가는 놈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것이다. 또한 그들은 처녀들이 낯선 남자와는 말도 안하며 친척끼리도 처녀의 방에는 드나들지 않는 완고한 관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처녀의 방에다 두고 치료하였다.

이렇듯 그들이 준엄한 위험을 무릅쓰고 또한 완고한 풍속에도 구애됨이 없이 나를 구원해준 심정을 무엇으로 설명할수 있겠는가.

그들은 다만 나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인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항일유격대원이라는 그 한가지 리유에서 그처럼 극진하게 돌봐주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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