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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조 도 언)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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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768회 작성일 19-09-20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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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조 도 언

 

1935년 2월 18일에 안도현 대전자전투에서 어깨에 중상을 입은 나는 그후 몇해동안 내내 후방병원생활을 하였다.

1940년 2월(음력) 내가 화전현 진거우밀영에서 5명의 환자들과 함께 치료를 받고있을 때에 있은 일이였다. 하루는 우리한테 통신원이 왔다. 그는 나에게 진거우밀영에 있는 환자들과 함께 부대를 찾아오라는 명령을 전해주었다. 나는 지체없이 환자들을 데리고 이동중에 있는 부대를 찾아 길을 떠났다.

환자들중에는 마진우, 김완석동무들도 있었는데 마진우동무는 가렬한 전투에서 왼쪽팔을 잃었고 오른쪽 팔마저 부상당하여 쓰지 못했다. 그리고 김완석동무는 오른쪽 무릎을 부상당하여 동무들의 부축이 없이는 길을 걸을수 없었다. 이밖에 김정희, 김용춘 등 녀대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몸이 극도로 쇠약했다.

진거우후방밀영을 떠나 부대를 찾을 때까지 우리가 겪은 이야기들을 다 말할수는 없다.

우리는 반년이나 산속에서 지냈으며 《토벌대》놈들의 추격을 받으며 밤낮없이 걷지 못하는 전우들을 부축하고 행군해야 했던것이다. 또한 우리는 오래동안 낟알을 먹지 못하고 지냈다. 전우들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수림속에 자주 넘어지군 했다.

1940년 5월경이였다. 우리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다푸르허의 수림속을 걸어가고있었다. 수림속은 어둑컴컴하였다. 몇해를 묵었는지 모를 나무잎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벌써 여러날째 먹지 못한 우리의 행군은 굼떴으며 전우들은 겨우 발걸음을 떼여놓는 형편이였다. 우리는 묵묵히 걷기만 하였다.

그런데 얼마후 맨뒤에서 걸어오던 마진우동무가 그만 쓰러졌다. 쓰러진 그는 전우들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일어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것이였다.

《아니야, 나무그루터기에 걸렸어.》 그러면서 그는 전우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웃어보이려고 애썼다.

우리는 좀 편안한 자리를 골라서 마진우동무를 눕힌다음 그 두리에 모여앉았다. 전우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볼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피로에 지쳤던것이였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전우들에게 기운을 북돋아주고싶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쓰라린 가슴쥐고 헤매이는자

모두다 모두다 무산 빈농민

잊지 말자 우리 싸움길

어서 빨리 목적지에 도달들 하자

 

내가 노래를 부르자 전우들도 하나둘 따라불렀다. 이렇게 해서 얼마간 용기를 북돋았으나 노래를 오래 부를수는 없었다. 전우들은 다시 땅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때 내눈앞에는 1940년 설날에 있었던 일이 선히 떠올랐다.

나는 이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설날을 보내였다. 그이를 모시고 보낸 이날의 감명을 나는 잊을수 없다.

그이께서는 나에게 우리들의 두어깨에는 무거운 짐이 놓여있소, 하루속히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광복할 숭고한 혁명임무가 우리들에게 맡겨져있는것이요, 이 혁명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그 어떤 난관앞에서도 주저앉을 권리가 없는것이요, 난관을 뚫고나갈 때만이 승리가 있다는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목소리가 방금 옆에서 울리는것 같았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한달전에 내가 왜놈경찰복으로 가장하고 명월구지방의 한 자위단놈에게서 《민회소》를 로획한 때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민회》란 일제놈들의 주구단체였다.)

나는 배낭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사실 일본경찰고관복을 꺼내려고 하였는데 내가 배낭을 뒤지는것을 보자 누워있던 전우들이 하나둘 나의 배낭을 지켜보았다. 혹여나 먹을것이 나오지나 않을가 해서 그러는 모양이였으나 배낭속에 먹을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되자 하는수없이 솔직히 말했다.

《내 배낭속엔 일본경찰고관복밖에 없네.》하고 빙긋이 웃어보이고는 입었던 군복을 벗고 일본경찰고관복으로 갈아입었다. 목이 긴 까만 장화를 신고 채양에 금줄을 두른 경찰고관모자까지 쓴 나는 전우들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게.》하고 말했다.

그제야 기미를 알아차린 전우들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를 붙들었다.

《위험한데 그만두십시오. 어떻게 이대로 견디여냅시다.》

그러나 참고 견디여낸다는것도 한도가 있는것이 아닌가. 전우들의 심정만은 리해할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결심을 거둘수는 없었다.

《내 걱정은 말고 몸을 쉬면서 기다려주게.》나는 이 말을 남기고 결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김정희, 김용춘녀대원들이 나의 앞에 다가와서 자기들도 함께 가겠다고 졸랐다. 나는 그들에게 조용히 타일러주었다.

《동무들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저 동무들을 간호해야 하오.》

나는 그들을 수림속에 남겨두고 다푸르허근방의 산간집단부락을 향해 발걸음을 다그쳤다. 울창한 수림속을 빠져 산아래로 거의 내려갔을 때에 어떤 사람 하나가 마주 올라오고있었다. 그 사람은 손에 낫을 들고있었다. 나는 다래넝쿨뒤에 숨어서 그사람의 동정을 살폈다. 그 사람은 내가 숨어있는 다래넝쿨 있는데까지 왔다. 나는 그를 놀래우지 않기 위하여 기침을 하면서 넝쿨속에서 나왔다. 모자에 금줄을 두른 《일본경찰고관》이 넝쿨속에서 나타나는것을 보게 된 그사람은 아연실색하였다.

그사람은 이곳 집단부락에서 사는 농민이였다. 나는 그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주고 집단부락의 정형에 대해서 물었다.

농민의 말에 의하면 집단부락에는 자위단놈들이 한 50명 된다는것이다. 그리고 농민은 부락안의 동태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면서 인민들에 대한 자위단놈들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농민과 헤여진 나는 집단부락에 있는 자위단놈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엄페지를 리용하면서 집단부락 성문근처에 이르렀다. 만약 《일본경찰고관》이 혼자 산에서 내려오는것을 놈들이 발견한다면 나를 의심할것이기때문이다. 열려진 성문안쪽에 보초놈이 서있었다. 나는 일본경찰고관놈들이 흔히 하는것처럼 거만한 몸가짐에 눈을 부라리면서 보초놈앞에 불쑥 나타났다. 나를 본 보초놈은 한동안 당황망조하여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선 자리에 말뚝처럼 굳어져버렸다. 그놈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놈의 더러운 낯짝에 증오의 된주먹을 먹이면서 꽥 소리를 질렀다.

《이 개자식아, 고관도 몰라봐!》내 주먹이 어찌나 드셌던지 보초놈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지체없이 네활개를 치며 자위단실쪽을 향해 걸었다. 얼마간 걸어가는데 자위단실의 마당앞에서 누런 옷을 입은 자위단 몇놈이 나를 힐끔힐끔 보더니만 자위단실이 있는쪽으로 달려가는것이였다. 단장놈에게 《나으리》가 온다는것을 급히 알리려고 뛰여가는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생각하였다.

(혁명이 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담하고 침착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나의 눈앞에는 수림속에 두고온 전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던것이다. 이와 동시에 나의 머리에는 이놈들을 족칠 묘한 생각이 피뜩 스쳐지났다. 나는 태연하게 머리를 끄떡거리며 될수록 천천히 마당 있는데로 걸었다. 마침내 자위단실이 있는데서 돼지멱따는듯한 소리가 길게 들려오자 와르르 자위단놈들이 방안에서 뛰여나와 마당에 정렬하고있었다. 정렬한 놈들은 한 40명가량 되였다. 대렬의 맨 우측에 선놈이 이윽고 《기오쯔껫! 가시라 미깃!(차렷, 우로봣)》하고 호령쳤다. 나는 바른손을 모자채양에 대고 대렬 한복판에 가서 굵은 소리로 호령쳤다.

《야스메(쉬엿).》나는 이런 정도의 일본말은 알고있었던것이다. 놈들의 시선은 나에게 집중되였다. 나는 다리를 약간 벌리고 뒤짐을 지고 서서 말을 시작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긴 말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네놈들의 장교인줄 아느냐?

나는 김일성장군 유격대의 한 대원이다. 이곳 수림속에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거느린 조선인민혁명군 600여명이 쉬고있다. 아군은 지금 모두 여기를 내려다보고있다.》여기까지 말하자 자위단놈들은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조를 낮추어 우리 인민혁명군은 자위단원들의 목숨을 함부로 해하지 않으니 떨 필요는 없다는것과 앞으로는 일본침략자들의 총마개로 될것이 아니라 우리 혁명군과 손을 맞잡고 원쑤 일제를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는것을 알기쉽게 해설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혁명군 600명의 한끼분 군량을 곧 마련해서 저 산우에까지 운반해놓으라고 말하였다. 나의 말이 떨어지자 놈들은 부랴부랴 식량을 마련하느라고 돌아쳤다. 나는 마당에 뻗치고선채 들락날락하는 놈들을 살피였다.

식량을 진 자위단 몇명을 앞세우고 떠나면서 나는 자위단 단장놈에게 일러두었다. 만약 불손한짓을 하게 된다면 불벼락을 맞을것이니 그리 알라고.

이렇게 식량을 구해가지고 수림속에 돌아오니 전우들이 없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것 같았다. 그래 막 수림속을 들추었다. 얼마만에야 나는 그 눈물겹도록 반가운 유격대전우들의 《뻐꾹!》하는 소리가 저편 산중턱에서 울려옴을 들었다.

나는 거기로 달음질치며 《동무들ㅡ》하고 몇번이고 불렀다.

산중턱에서 나의 거동을 살피고있던 전우들중 두 동무가 그제야 나있는데로 맞받아내려오며 환성을 올리는것이였다. 전우들은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자리를 옮기고 내가 돌아오기를 고대하는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너무도 반가운김에 서로 그러안고 돌아갔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낟알을 끓여먹었다. 그리고 다시금 행군을 계속하였다. 실로 중첩되는 그 어떠한 난관도 우리가 가는 길을 막지 못하였다.

혁명가들은 난관앞에 주저앉을 권리가 없으며 그 난관을 뚫고나갈 때만이 승리가 있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는 모진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항상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었고 새힘이 용솟음치게 하여주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거우후방밀영을 떠난지 반년만에 그리운 혁명대오를 찾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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