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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불멸의 력사' 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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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813회 작성일 19-10-2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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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4.jpg

(제 1 회)

제 1 장

1

 

옛날에는 개선장군이 도읍에 입성하면 문무백관이 떨쳐나와 마중하고 백성들은 길 좌우 연도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고 한다. 왕궁에서는 며칠을 두고 주연을 베풀어 노래소리 춤가락에 맞추는 북장단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것이다. 하건만 20성상 강도 일제와 싸워이기고 돌아오신 개선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소문도 없이 조용히 고구려의 옛도성 평양에 입성하시였다, 그것도 《김일성부대 정치위원 김영환》이라는 가직가명을 가지고.

1945년 9월 24일 새벽 3시경이였다.

멀리 수풍발전소에서 간신히 흘러오는 빈약한 전기가 평양중구의 몇개 지역을 연하게 비치다가 끝내 꺼져버렸다.

한점의 전기불도 없는 평양시가에는 푸른 달빛만이 고요히 흐르고있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편수책상을 마주하고 글을 쓰시던 서기산(해방산)기슭의 수수한 벽돌집 2층방의 전등도 꺼져버리고 창문으로 달빛이 흘러들었다.

그이께서는 책상 웃빼람을 열고 성냥통과 양초 한가락을 꺼내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초불을 켜고 다시금 글을 쓰시였다.

사각사각 무엇을 일깨우듯, 속삭이듯 펜소리가 고요히 이어지는데 따라 흰 종이장우에서 푸른 글자가 물결쳐나갔다.

《해방된 조선은 어느 길로 나가야 할것입니까? 조선이 나아갈 길을 규정함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푸른 글자는 정의와 진리의 목소리를 울리며 파도쳐나갔다.

초물은 녹아흘러 밑굽에 쌓여 굳어지고 초대는 점점 낮아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가. 한껏 낮아진 초불이 하얀 밀랍의 《산정》우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르다가 마침내 꺼져버렸다.

그이께서는 펜을 멈추고 잠시 어둑시근한 방안을 둘러보신 다음 천천히 창문가로 걸어가시였다.

달빛이 바래여지는 희붐한 새벽하늘밑에서 평양시가의 여러 건물들이 어렴풋이 륜곽을 드러내고있었다.

정적속에 깊이 가라앉아있던 고요한 거리에서 차츰 두런거리는 인적기가 나더니 어디선가 어물장사녀인의 싸구려가락이 소슬한 새벽바람에 실려왔다.

《건뎅이, 백하젓 사시라요. 조반상에 곁들일 반찬감이요- 새우, 꽃게젓, 조기, 어리굴젓이요-》

그이께서는 문득 본정통 전차길쪽에 눈길을 돌리시였다. 20년만에 들어보시는 서도지방 젓갈장사녀인의 싸구려소리였다.

너스레가 섞인 장돌뱅이들의 소란스러운 싸구려소리와는 달리 은근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어딘가 애조를 띠고있는 젓갈장사녀인의 싸구려소리는 그이께 이름할수 없는 쩌릿한 회포를 자아냈다.

20년만에 평양에 입성하여 이제 이틀낮, 이틀밤을 보내신 그이께서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것이 감회로우시였다.

아버님께서 다니시던 숭실중학교가 저기 멀지 않은 남산재와 장대재사이 큰 길가에 있었다. 한때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그다음에는 일본관헌들이 주인노릇을 하던 그 건물이 지금은 평안남도 공산당위원회청사로 되였다.

철창속에 계시는 아버님을 면회하러 어머님의 손목을 잡고 따라가보셨던 평양감옥, 조선의 수많은 애국자들과 혁명가들의 뼈를 부스고 살을 저며내고 그들의 어머니와 안해들의 가슴에 피눈물이 고이게 하던 그 저주스러운 폭압의 건물도 이제는 왜놈들의것이 아니였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던가.

항일의 전장에서 목숨바친 사랑하는 전사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혁명의 가시덤불길에서 숨지신 그리운 부모님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삼촌은 서울서대문형무소의 캄캄한 먹방에서 눈을 감으시고 동생은 항일혁명의 길에 애젊은 목숨을 짚오래기처럼 내던져 유골조차 남기지 못했다.

새벽거리에 울리는 젓갈장사녀인의 평화로운 소리가락은 마치도 준엄한 항일전장과 피비린 감방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저세상으로 간 수많은 렬사들의 념원을 풀어주는 소리처럼 울려와 그이의 가슴을 곡진하게 파고들었다.

너무도 비싼 대가를 치른 해방이여서 개선의 기쁨이 클수록 밀려오는 슬픔을 막을수 없으신 그이이시다.

《건뎅이, 백하젓 사시라요.…》

서기산 앞거리로 가까와오는듯싶던 녀인의 목소리가 교구동쪽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그 소리에 이끌리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탁상우의 글종이들을 간종그려놓고 아래층 복도로 내려가시였다.

경위대장 강상호가 호박넝쿨이 덮여있는 벽돌담장앞에서 거리를 내다보고있었다. 풀잎과 모래를 밟으시는 그이의 발자국소리에 흠칫 놀라며 돌아선 강상호는 얼른 군복자락을 여미고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올렸다.

《뭘 그렇게 내다보고있소?》

《건뎅이 한단지 사자구 기다렸는데 젓갈장사군이 딴데로 갔습니다.》

강상호는 아쉬운듯 다시 교구동쪽으로 눈길을 보내였다.

《젓갈장사가 다른데로 가버렸단 말이지?》

김일성장군님께서 담장앞으로 다가서시며 앞거리를 내다보시였다.

어둑시근하던 거리가 희벗해져서 대동강 철다리며 그 웃쪽에 촘촘히 박혀있는 게딱지같은 강변의 단층집들이 거밋거밋하게 보이였다.

《원래 평양지방엔 젓갈장사, 밤장사, 엿장사가 유명했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20여년전의 추억을 떠올리시였다. 《밤에도 엿장사들이 잘칵잘칵 가위질을 하면서 들깨, 참깨고물에 밤엿이요. 하고 외우며 거리와 마을을 돌아다녔소. 가난한탓에 엿 한가락도 사먹을수 없는 애들은 엿장사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다가 심술이 나서 들깨, 참깨 코물에 방구엿이요. 하고 놀려대고 달아나군 했지… 듣자니 창씨개명과 황국신민서사를 강요하던 때로부터는 장사군들이 제나라말로 싸구려소리조차 마음대로 외울수 없었다고 하오.》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는 일제가 장사물품들은 물론이고 놋수저, 놋종발까지 모조리 수탈해갔으므로 서해와 대동강의 어물과 밤, 엿, 담배따위의 토산물에 명줄을 걸고 살아가던 평양장사군들의 처지는 더욱 처참해졌다는것이다. 그때 태맞은 후유증때문인지 해방된 오늘에도 대동강선창은 흥성거리지 못하고 한적하다할만치 조용하였다. 그이께선 이틀동안 평양에 계시면서 아직 엿장사의 가위질소리를 들어보지 못하시였다. 젓갈장사녀인이 새벽거리를 돌아다니며 싸구려를 외우는것은 오늘 아침이 처음인것 같았다.

장군님께서는 대동강건너편을 시름겹게 바라보시였다. 그쪽 동평양에선 이틀째 전등불빛을 볼수 없었다. 밤이면 캄캄한 어둠속에서 반디불같은 가냘픈 불빛들이 가물거리였다. 그것은 등잔불들이였다.

왜놈들은 저들이 패망하게 되자 동평양화력발전소와 변전소, 배전소 설비들을 죄다 마사버린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마당으로 돌아서시며 강상호에게 말씀하시였다.

《동무도 보고있는것처럼 해방은 됐으나 인민생활은 최악의 조건에 직면했소. 아이들이 배를 곯고있고 시장의 물건값은 부르는게 값이며 거리엔 류랑민들이 널려있소. 그러니 해방이 됐다고 호강할 생각은 말고 산에서 싸울 때처럼 한알의 쌀도 아끼면서 검박하게 살아야겠소.

저녁에는 강낭죽을 쑤어먹는게 좋을것 같소. 통강냉이에 당콩같은것을 넣어서 죽을 쑤면 구수한게 맛도 좋지.》

강상호는 시무룩이 고개를 수그리면서 저도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였다. 조국땅에 개선하여서도 장군님께 흰쌀밥 한그릇도 마음껏 대접해드리지 못하는것이 가슴아프고 안타까웠다. 장군님께서는 소문도 없이 불쑥 평양에 입성하시다보니 누구도 미처 그이의 거처지조차 마련해드릴 사이가 없었다. 하여 그이께서는 여기 서기산기슭의 벽돌집을 숙소 겸 집무실로 쓰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잠시도 쉬시지 못하였다.

북조선주둔 쏘련군사령부 지휘관들과의 면담, 평남도 공산당위원회 책임일군들을 비롯한 각계층 일군들과의 담화, 문건료해와 집필, 참으로 숨돌리실 사이도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이틀밤을 꼬박 새우시였다. 그런데도 그이께서는 전기와 먹는 문제로 해서 이제 아침진지를 드시고는 곧 서선전기회사와 곡산공장에 나가 로동자, 기술자, 사무원들을 만나보도록 이미 하루일과를 짜놓으시였다.

새 민주조선건국의 운명과 관련되는 긴급하고 중대한 문제들이 련이어 제기되고있으니 그이께 쉬시라는 권고조차 드릴수 없었다.

어저께만 하여도 그이의 앞으로 이름, 주소, 직명을 밝히지 않은 정체모를 사람의 무기명신소편지가 들어왔었다. 그것은 《공산당정책》에 대한 일종의 항의문과도 같은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그 무기명신소편지를 강상호에게도 보여주시였다.

김일성부대 정치위원귀하!

소인은 흉중에 쌓인 울화와 고충을 어디에 하소할 곳이 없어 그지간 탄식으로 날을 보내던 차에 만고의 애국명장 김일성장군님의 막하 정치위원이 평양에 입성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문갑을 찾아 붓을 들었나이다.》

이렇게 시작된 편지는 현재 평양주민들의 식량고가 한계점을 넘어서고있다는것, 보통벌 토성랑과 평천벌 적굴동을 비롯한 빈민마을들에서는 장티브스, 콜레라 같은 무서운 전염병이 퍼지여 위험지경에 이르렀다는것, 왜놈들이 패망하면서 일체 산업시설을 파괴하여 공장은 멎어버리고 광산, 탄광은 침수되고 렬차운행과 전기공급은 마비되였으나 도공산당도 도인민정치위원회도 해결대책을 세우지 않고있다는것, 이해 여름의 대홍수의 피해를 입은 리재민들과 해방의 소식을 듣고 해외에서 밀려들어온 귀국민들이 평양역기다림칸과 역전광장에서 거적때기를 깔고 동냥주머니밥을 먹고있다는것 등 평양주민들이 겪고있는 생활고에 대해 낱낱이 밝히였다.

신소자는 계속하여 해방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평양주민들이 저저마다 모란봉에 뛰여올라 왜놈들의 신사를 불사르면서 이제는 나라를 찾아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였다고 소리높이 만세를 웨쳤다고 했다. 평양시가는 매일과 같이 춤과 노래로 들끓었으며 무시로 열리는 집회, 간담회, 로천대회에서는 연사들이 조선이 나아갈 길을 웨쳤다면서 격한 론조로 이렇게 편지를 이었다.

《소인은 연사들의 일언일설도 흘릴세라 귀를 강구어 경청하였사온데 개중에는 공농쏘베트수립이요 자산계급청산이요 하는 서슬푸른 웅변으로 가슴을 서늘케 하는이들도 있었사옵니다. 그러다가 짜장 어느날인가는 시보안서 감찰과장이라는 사람이 정미업과 메리야스업을 하던 송대관씨의 팔목에 오라를 지어 끌고가는것을 소인의 육안으로 직접 보고는 대경실색하게 되였나이다.

시보안서 감찰과장 변대걸인즉은 해방전에 평양세무서에서 일본인 세무서장의 발바닥이나 핥던 천하의 협잡군이며 방탕아였는데 그 털보세무관이 어떻게 일조에 공산당의 보안서 감찰과장이 되였는지 알수 없나이다. 그는 송대관씨에게 집에 감추어놓은 금과 자산명부를 가져다 바치라고 하면서 공산당은 지주, 자본가, 친일파들은 물론 개인기업가들까지 숙청하여 모든것을 네것내것없이 공유하는 신사회를 건설한다고 을러메더랍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가택수색을 받고 많은 재물을 빼앗긴 송대관씨는 공산당과 보안서를 저주하며 남조선으로 가버렸나이다.

소인이 증언하건데 송대관씨는 근검절약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외다.

보안서에 끌려가 초달을 받은 송대관씨의 억울한 정상을 보게 된 다음부터 소인의 가슴에서 끓던 해방의 기쁨이 점점 식어지고 마음은 어두워지고있나이다.

백성들이 굶고 병들어도 돌봐주는데가 없고 개인업을 한다고 하여 가산을 빼앗아가는 세상, 과연 이런 나라와 이런 해방을 위해서 애국투사들이 수십성상 빙천설지의 간고를 이겨내며 항일전을 벌렸나이까.

소인도 송대관씨를 따라 남조선으로 밀행하고저 하였으나 듣건데 거기 형세는 더 험악하다 하옵니다.

숱한 애국자들이 감옥에 갇히우고 신성한 교사는 미군병실이 되고 젊은 녀인들은 미군색마들에게 겁탈당하고있다 하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송대관씨는 서울에 들어가 얼마안있어 북조선공산당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미군정청으로부터 체포령이 내려 친구네집 다락방에서 숨어산다하옵니다.

아, 북에서도 남에서도 살수 없으니 이 어찌 하나이까. 구한국시대에도 왜놈때에도 남조선에 미군이 하는짓과 같은 일은 없었나이다.

옛 성인이 이르기를 나쁜 정치는 범보다 더 무섭다고 했으니 김일성장군님께서 어디에 계시온지 귀하께서 급히 그분께 찾아가 부디 백성을 위한 선정을 배풀도록 아뢰여줍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신소편지는 이렇게 심각하였다. 문투를 보면 신소자는 분명 쉰살이상의 늙은이로서 송대관이와 같은 개인기업가인듯싶었다.

불시에 남산재어방에서 우왕-하고 가을 황소의 우렁찬 영각같은 고동소리가 울리였다.

중구보안서에서 아침 7시를 알리는 고동이였다. 뒤이어 장대재례배당에서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울리였다. 그 장대재례배당에서도 언제부터인가 일요일 례배날에 관계없이 매일 아침저녁 7시때마다 꼭꼭 종을 울리군 한다고 한다. 그것은 《해방의 기쁨을 가져다준 하느님》의 복음에 감사의 례배를 드리도록 신자들을 설교하는 종소리였다.

《7시로군! 얼른 식사를 하고 서선전기회사로 가봅시다.》

장군님께서 복도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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