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31회
페이지 정보
본문
제 7 장
1
인왕산마루로 해가 지고있을 때 색날은 회색양복에 전이 구겨진 중절모를 쓴 50대의 사나이가 명동거리쪽으로 비척비척 지팽이를 짚으며 걸어갔다. 부석부석한 얼굴이 누렇게 떠서 얼핏 보아도 병색이 알리는 사람이였다.
예로부터 서울 장거리로 유명한 명동거리가 장을 파하는 해질무렵이여서인지 조용하였다.
지난해 10월 항쟁의 피비린 돌풍이 지나간 다음부터 이 거리에 급작스레 땅거미같이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게 되였다.
드문드문 점포들이 앉아있는 거리에 음식파는 녀인들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떡 사세요, 녹두지짐 맛보세요 하고 애원하고있다. 녀인들의 두리에서는 얼굴에 쥐광이를 그린 소매치기 아이들이 돌아쳤다. 그 아이들이 까마귀같은 손으로 벼락같이 떡이며 지짐점들을 덮쳐쥐고 달아날 때면 녀인들의 새된 비명이 아츠럽게 귀청을 긁어대군 하였다.
젊은 녀인들은 대체로 배우처럼 늙은이로 분장하고 앉아있었다. 그것은 대낮에도 곱살한 젊은 녀자들을 보면 미친 색마처럼 달려는 미군병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것이였다. 어느 정도 체면을 보는 장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흉악한짓을 하지만 병졸들은 사흘 굶은 범 고을원님을 알아보지 못하듯 대낮에 큰거리에서도 강간과 강탈을 삼가하지 않았다.
서울장마당의 젊은 녀인들이 늙은이로 분장하고있는것이 북조선의 장마당과 다른점들중의 하나였다.
명동거리 장마당에 들어선 례의 50대 사나이는 늙은이로 분장한 떡장사녀인들의 옆을 지나 어물함지를 끼고 앉아있는 뚱뚱한 중년녀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저 신문지에 싼게 잉어가 아니요?》
서울말씨에 함경도억양이 섞인 말투였다. 그는 신문지에 싸서 노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물건을 가리키고있었다.
보기 흉하도록 뚱뚱한 몸에 막잡아 빚은 메주덩이처럼 얼굴이 못생긴 녀인은 사나이의 행색을 잠시 유심히 훑어보고나서 《예, 잉어예요. 5월에 잡은게 15마리, 6월에 잡은건 10마리예요. 그저께 잡은 물이 생생한것도 있어요. 사겠어요?》 하고 물었다. 생김새와는 달리 목소리는 가느다란 비린청이였다.
여기 장마당에서는 매매자간에 은어가 사용되는것이 또한 북의 장마당과 다른것이였다. 이들이 말하는 잉어란 북에서 찍은 신문을 의미하며 6월에 잡았다고 하는것은 6월 신문이라는 뜻이였다. 물고기마리수는 신문매수였다.
중년녀인은 하도 못생긴 추녀인덕에 미군병졸들의 단련을 받지 않고 편안히 장사를 하던 나머지 신문밀매까지 하여 폭리를 얻고있었다. 그것은 밀매중에서도 가장 모험적인 밀매였다. 그대신 앉은 자리에서 숱한 돈을 벌어들일수 있는 장사였다.
신문 한장이 한근짜리 잉어 한마리값으로 팔리고있으니 대단한것이였다.
《신문에 싼 잉어를 다 주시오. 25마리어치를 물면 되지요?》
사나이는 지페를 여러장 꺼내여 녀인에게 내밀었다.
뚱뚱보녀인은 잉어눈같이 툭 삐여진 눈을 디룩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고나서 《동아일보》 두장을 겹쳐싸서 새까만 노끈으로 꽁꽁 동여맨 물건을 넘겨주었다.
서울에는 야매장사군이 생기다 못해 38도선을 넘나들며 신문장사를 하는 사람들까지 생긴것이다. 그들중에는 간첩들도 있었다. 사상이나 어떤 정견이 아니라 순전히 돈을 보고 간첩질을 하는자들은 상전의 눈을 속여가며 북조선의 민주정치를 《선전》하는것으로 폭리를 보고있었다.
신문꾸레미를 받아가지고 돌아선 사나이는 갑자기 등뒤에서 《거, 윤일중사장이 아닌가요?》 하는 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며 한자리에 딱 굳어지고말았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돌처럼 서있었다.
(재미나는 곳에 범이 생긴다더니 꼬리를 잡힌게 아닌가?)
방금 《잉어》를 산 이 사람이 바로 해방전에 허천강발전소 소장을 한 《죄》로 오기섭의 체포령을 받고 남조선으로 도주해온 윤일중이였다. 그는 지금 서울전업회사 사장직에 있으나 작년가을부터 간경변증이 생겨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있었다.
《사장님, 왜 그리 놀라셔요?》
그제야 윤일중은 목소리의 임자를 알아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윤일중을 부른 사람은 그의 밑에서 일하고있는 서울전업회사 부사장 김은식이였다. 윤일중이 병약해진 때부터 서울전업회사의 실권을 서른여섯살의 한창나이인 김은식이 쥐고있었다. 보통키에 얼굴이 둥글사하고 두눈이 녀인의 눈처럼 맑고 예쁜 미남형의 사나이였다.
《사장님! 소식 들었습니까? 전력대가부채문제로 평양에서 회담을 하게 됩니다.》
김은식은 윤일중의 손에 들려있는 《잉어》꾸레미를 힐끗 스쳐보고 입을 벙글서하였다.
윤일중은 금시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기는 한주일에 사나흘은 집에 누워있는 그였으니 모르고있는것이 너무도 많았다.
《마침내 회담을 하게 되누만.》
윤일중은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전반생을 북에서 살아왔고 고향도 함경남도인 그에게 있어서 북조선은 그리운 땅이였다.
《6월 16일에 평양에서 회담을 합니다. 제가 리문도와 마주앉게 될것 같습니다. 미군정에서는 후레 드리크소장이 따라갑니다. 앓지 않으면 사장님이 가셔야 할것인데…》
부석부석한 윤일중의 누런 얼굴살이 가볍게 푸들거리였다.
《자네가 리문도와 마주앉는단 말이지? 친구간이 적대자가 되여 담판을 하게 되니 일막의 비극이야.》
윤일중은 한숨처럼 중얼거리였다. 김은식이와 리문도로 말하면 서울배재고보동창생으로서 류달리 절친한 사이였었다. 윤일중이 역시 현재 서울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있는 의학박사인 리문도의 맏형과 막역한 친구로서 리문도를 친동생처럼 사랑하던 사람이였다. 그는 1945년 9월 중순 가족들을 데리고 남조선으로 도망쳐갈 때 리문도에게 들려 부모형제와 친자식들이 있는 서울로 같이 가자고 부추겼으나 응하지 않았었다. 그때만 하여도 38도선은 그어져있었으나 경비초소가 몇십리에 하나씩 성글게 배치되여있었으므로 남북을 마음대로 건너다니였다.
북위 38도선은 황해도 배천군, 연백군, 연안군, 청단군을 가로질러갔는데 어떤 곳에서는 초가집지붕우로 지나가고 어떤 곳에서는 학교마당으로 또 어떤 곳에서는 시내물의 돌다리우로 지나가서 한발자국 남으로 내디디면 미군치하의 남조선사람으로 되고 한발자국 북으로 내디디면 북조선사람이 되는 희비극적인 이야기가 벌어지던것이 그때의 일이였다. 남에서 사느냐 북에서 사느냐 하는 운명의 선택권은 매사람자체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윤일중이도 어렵지 않게 온 가족을 데리고 남조선으로 넘어왔다. 그는 구암, 례의저수지들이 있는 연백땅을 거쳐 서울로 들어갔다. 그때 연백벌농민들의 생명수라고 할수 있는 구암저수지와 례의저수지는 38도선 북쪽 5리밖에 놓여있어 남연백지구 사람들은 저수지의 물을 받지 못하고있었다.
나라가 두 동강이 났으니 물길도 끊어졌던것이다. 이제는 영원히 저수지의 물을 받지 못하게 될것이라고 하며 남연백지구 농민들이 전전긍긍하고있는것을 보고 서울로 들어갔는데 서울거리도 북조선에서 송전되여오던 전기가 끊어져서 아우성이였다.
수풍발전소가 마사져서 전기가 못 온다는 말도 있고 북조선에서 이제는 적진구역으로 된 남조선을 골탕먹이기 위해 일부러 송전선을 끊어버렸다는 소리도 있었다.
윤일중은 남연백지구가 구암, 례의저수지의 물을 받지 못하는것으로 보아 북조선의 수력발전소의 덕을 영원히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김일성장군님의 지시로 구암, 례의저수지의 물을 남연백지구에 보내게 되고 북조선의 수력발전소들이 복구되는 차제로 남조선에 전기를 보내게 된다는것이였다.
미군정과 남조선의 반동들은 믿지 말라고 하였으나 실지 그후 구암, 례의저수지의 물이 남연백지구의 넓은 벌을 적셔주었고 수풍발전소의 전기가 어둡던 서울거리를 밝게 비쳐주었다.
윤일중은 이때부터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경모의 정이 싹트게 되였고 북조선공산당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였다. 정치적감각이 있는 지성인인 그는 오기섭이라는 한 인간이 결코 북조선의 공산당정치나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우기 리문도가 북조선 전기총국의 최고기술책임자가 되여 김일성장군님의 특별한 사랑과 믿음을 받고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가 돌이킬수 없는 인생의 실책을 범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남조선에서 벌어지고있는 가지가지의 악정은 윤일중을 더욱더 헤여나올수 없는 고민의 나락으로 깊이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던 가위에 작년봄 뜻밖에 스라스트베아링을 인수하러 온 리문도를 만나보고 또 한차례의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 미군정의 사촉을 받은 김은식은 동창생인 리문도를 남조선에 붙잡아두려고 온갖 감언리설로 회유하였다.
그는 리문도를 남조선에 영주시키기 위해 서울 한복판에 집까지 마련해놓고 부모, 자식들과의 극적인 상봉을 하도록 현란한 각본을 짜놓았으나 그의 마음을 움직일수 없었다. 부모형제, 자식이 있는 서울로 가자고 손목을 잡아끄는 김은식에게 리문도는 나라고 왜 아버지와 자식들을 만나고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금 그보다도 이 스라스트베이링을 북에 가져가는 일이 더 급하다고 뿌리치며 수리하지 못한 스라스트베아링을 기차에 실어가지고 북으로 떠나갔었다.
윤일중은 그 무슨 거대한 인력이 리문도를 북으로 이끌고가는지 알수 없었다.
그가 또 놀라게 된것은 일본고급기능공이 아니고는 수리할수 없다는 스라스트베아링을 흥남기계공장 로동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김일성장군님의 훈시를 받고 12개나 되는 그 까다로운 부속을 완전무결하게 수리하여 수풍발전소에 보냈다는 사실이였다. 그무렵 윤일중은 북조선의 어느 한 신문에서 흥남에 찾아오신 김일성장군님을 모신 무슨 모임에서 읊은 리찬의 즉흥시를 읽고 생각이 깊어졌다.
…
장군은 바쁘다 바빠야 한다
기억하자, 장군은 우리만의 장군이 아니요
장군은 남조선도 비칠, 남조선도 비쳐야 할
아아, 삼천리 전강토의 위대한 태양
…
윤일중은 즉흥시의 이 구절만은 웬일인지 석문처럼 뇌리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리찬은 윤일중이와도 안면이 있는 함경도지방 출신의 시인이였다. 그후 이 리찬이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지은 사실도 《로동신문》을 통해 알게 되였다.
윤일중은 너무도 경솔하고 조급하게 남조선으로 넘어온데 대한 후회가 막심하였으나 이제는 싫든좋든 미국사람들을 상전으로 섬기고 살아야 할 인간으로 되였다.
북조선을 배반하고 솔가도주한 자기가 이제 또 남조선을 배반하고 북으로 넘어간다면 사람들은 자기를 배반과 변절의 천성적기질을 타고난 인간이라고 침을 뱉을것이였다.
《사장님!》
윤일중은 김은식의 부름을 받고 고개를 돌리였다.
《리문도한테 뭐 전할 말이 없습니까?》
《자네 언제 북으로 가게 되나?》
윤일중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반문하였다.
《모레 떠나게 될것 같습니다.》
심드렁히 대답하는 김은식의 얼굴은 사뭇 쓸쓸한 표정이였다.
《나도 잘 있고 문도군의 춘부장과 형님, 두 자식들도 별고없이 지낸다고 전해주게나. 나는 그저 회담이 인도주의적으로 잘 되기를 바라네.》
《허허허, 인도주의적으로요?》
김은식은 어이없는듯 허거픈 웃음을 짓고는 《저는 그저 조종줄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리문도 역시 저의 신세와 별반 다를게 없다고 봅니다. 전기회담은 김은식이와 리문도의 회담이 아니라 미국의 후레 드리크소장과 쏘련의 체르넨꼬브소장의 회담입니다.》 하고는 북쪽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미국이 쏘미공동위원회를 재개하고 또 전기회담에 응하는걸 보면 뉘우치는바가 있는것 같네.》
《뉘우친다구요? 사장님은 정치라는 미궁의 세계에 대하여 너무도 단순하고 천진하게 생각합니다. 털어놓고 말하면 남조선에 대해서도 그렇고 북조선에 대해서도 믿을게 못됩니다. 신문에 씌여있는걸 보구 환상을 가지지 마세요.》
(저 사람이 내가 북조선신문을 보고있는걸 다 알고있는 모양이군.)
신문꾸레미를 든 윤일중의 손이 가볍게 떨리였다.
《리문도도 웃으며 지낼 날이 얼마 되지 않을것 같아요. 드리크소장이 나더러 이제 리문도가 어떻게 무덤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보게 될 때가 오게 된다며 회심의 웃음을 지었습니다.》
윤일중은 무덤이라는 말에 가슴이 섬찍하였다. 김은식의 얼굴에도 어두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주의 아들이 지주를 불상용적인 적대계급으로 보고있는 북조선에 정을 붙이고있는것자체가 정신착란적인 행동이지요. 상식적으로도 생각해보십시오. 북조선에서 정말로 그를 믿을것 같습니까? 드리크소장이 나한테 내놓고 하는 말이 무덤으로 가는 리문도의 길을 단축시키기 위해 자기가 평양으로 간답니다. 회담의 인도주의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윤일중은 김은식의 말에 부정할수 없는 하나의 옳은 리치가 있다고 생각되였다.
미국의 공과대학출신의 장성인 후레 드리크는 《나는 철면피의 악보다는 차라리 평화를 위한 위선에 찬성한다》는 쳐칠식생활관을 지지한다고 내놓고 말하는 로회한 위선적정치가이고 기술자였다.
위선은 실질면에서는 어디까지나 악덕하기를 원하면서도 정신면에서는 미덕과 절연하고싶지 않는 인간들에게 가장 위안이 되고 또 가장 보편적으로 리행될수 있는 사상이라는것이다.
《드리크소장은 전기가 아니라 무슨 다른 볼장이 있어서 평양으로 갑니다. 그가 무슨 장을 보러 가는지는 우리같은게 어찌 다 알수 있겠습니까? 그가 볼장들중 하나가 염라대왕국으로 가는 리문도의 걸음을 촉진시키는거겠지요.》
《으음…》
윤일중은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씹으며 건너편에 서있는 인왕산을 바라보았다. 침울한 황혼이 벌써 산허리와 봉우리를 뒤덮고있었다.
- 이전글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32회 19.11.04
- 다음글세상에 없는 《물고기산원》 19.11.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