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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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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613회 작성일 19-10-29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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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2

 

왕수복은 책상 한개와 의자 두대가 놓여있는 휴계실같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독고칠성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의자를 권하였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왔습니까?》

왕수복은 의자에 앉으면서 불안스럽게 물었다.

《우의 간부동지들이 아주머니한테 알아보라는게 있어 왔습니다.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됩니다.》

그는 납작한 사무용가방안에서 푸른 뚜껑을 씌운 공책 한권을 꺼내서 펼치고는 언제 어디서 출생했는가고 물었다.

《평안남도 강동군 남경리에서 1917년 4월 23일 아버지 왕두령, 어머니 신상호의 2녀로 출생했어요.》

《아버지는 남경리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요?》

독고칠성은 왕수복의 말을 받아쓰면서 물었다.

《소작살이를 했어요.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제가 두살때 페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때 어린 3남매를 데리고 외할머니가 계시는 평양성안으로 이사하여 삯빨래, 삯바느질 같은 막벌이로동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닌 어떻게 일본에까지 가서 공부하게 됐나요? 일제시기 아주머닌 돈이 많고 잘살았다고 합니다.… 예, 첫째로 그걸 말하고… 일본류학을 가게 된거 말입니다. 둘째로 김광진선생과 맨 처음 어디서 어떻게 사귀게 됐는가? 그걸 말하십시오.》

왕수복은 마치 피고석에 앉아 재판장의 질문을 받는것 같은 치욕감으로 얼굴을 찌프리였다. 무엇때문에 보안서원앞에서 이런 심문을 받아야 하는지 알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일제시기 그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랑설이 많이 떠돌았다. 지금까지도 친일기녀였다는 추문이 돌고있다. 그는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보안서원의 두가지 물음에 자상히 대답하여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일찌기 아버지를 잃은 왕수복은 집안이 하도 가난하여 유년시절부터 교회당 부속유치원에 다니는 부자집딸의 몸종노릇을 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그 유치원의 교원과 평양보통학교 음악교원이 어린 왕수복의 뛰여난 음악적소질을 발견하고 자기들의 돈으로 유치원과 명륜보통학교를 졸업시키고 사립평양가무학교에서 음악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 가무학교는 《권번제도》(기생을 료리집에 소개해주고 돈을 받아먹는 중간착취영업)를 반대하는 량심적인 유지들이 가무인들을 양성하기 위해 돈을 모아 세운 민족가무양성기관이였다.

열세살에 가무학교를 졸업한 왕수복은 2년동안 가무학교 조교원을 하면서 민요창법을 익혔고 열다섯살부터는 평양제1관(영화관)에 초대되여 막간마다 노래를 부르군 하였다.

제1관은 조선인이 경영한 영화관으로 왕수복은 《학도가》와 같은 계몽가요와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되는 《반달》같은 노래를 기막히게 불러 평양에서 《막간아가씨》로 이름이 나게 되였다. 레코드회사에서까지 10대의 소녀가수를 끌어당기게 되였다.

왕수복의 인기가 최절정에 이른것은 1933년 도이췰란드 레코드회사 포리돌에서 취입한 노래 《칠석날》이 나온 때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열일곱살이였다.

해방직후 곡산공장에도 《칠석날》의 소리판이 돌아간것처럼 한때 그 소리판은 조선땅은 물론이고 만주와 연해주에까지 널리 퍼지였다.

포리돌은 왕수복과 계약할 때 《칠석날》의 소리판이 잘 팔리면 집 한채를 사주고 일본류학을 할수 있는 돈을 대주겠다고 하였다.

당시 100만장이나 팔린 《칠석날》레코드는 한판에 100원, 200원까지 올라 포리돌회사 사장은 일약 100만장자가 되였다. 그러나 왕수복에게는 고작해서 2천원짜리 집 한채와 일본에 류학을 갈수 있는 얼마간의 돈이 차례졌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하도 가난하게 살아온 열일곱살의 천진한 처녀가수는 노래 한곡을 불러 그렇게 《많은 돈》이 생겨난데 대해 감지덕지해 했고 지어는 불시에 묵돈이 손에 쥐여져 불안스러워했다.

《칠석날》의 소리판이 나가자 왕수복을 조선의 제일인기가수라고 하며 예술계와 사회계가 크게 떠들었다.

이러한 때에 서울에 있는 ×언니(당시 녀자끼리 통하던 가장 친근한 동무의 별명)가 김광진의 편지를 가지고 왕수복을 찾아왔다.

《김광진선생은 우리 주인과 가까운분이야. 돈에 대한 책을 쓴 돈박사선생이다. 네가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하면서 축하편지를 전해달라고 하였다.》

인기녀가수 왕수복은 그때까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었다. 사랑을 고백하는 련애편지를 받은것만 하여도 수십통이나 되였으므로 김광진의 편지봉투를 심상히 뜯었는데 그 내용이 예상외로 충격적이였다.

 

왕수복씨, 성공을 축하합니다.

돈을 독약처럼 조심히 다루시오. 돈속에 독이 들어있다는것을 잊지 마시오.


고향사람 김광진 


이것이 김광진의 축하편지전문이였다. 축하편지라기보다는 기분이 떠있는 어린 녀가수에게 울려주는 경종이라고 하는것이 옳을것이였다.

이 시기는 김광진이 역시 뛰여난 저서 《리조말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화페문제》를 발표하여 경제학계에 우뚝 솟아올랐을 때였다. 이것이 김광진이와의 첫 사귐이였다.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녀가수는 경제학자가 보낸 편지의 의미를 다 알수 없었다. 다만 돈속에 독이 들어있다고 하니 겁이 날뿐이였다.

허나 알마 안있어 왕수복은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였다.

그무렵 깨끗하고 순진한 처녀가수의 몸으로 독 묻은 흉칙스러운 검은 손이 뻗어오고있었다.

어느날 일본의 대상업자본가의 서기가 찾아와서 포리돌회사와 이미 계약되여있었다고 하면서 왕수복이더러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자기네 주인님에게 봉사하여야 된다는것이였다. 그러면 일본류학뿐아니라 유럽의 유명한 음악의 나라들에도 갈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한 왕수복은 포리돌회사에 달려가 울면서 항의하였다. 그러자 사장이 입가에 조소를 지으면서 《철없는 아가씨, 굴러오는 복을 웃으며 받지 못하고 왜 울면서 차던지나?

가난꾸러기던 네가 노래 한곡을 불러 집을 사고 류학까지 가게 된건 다 그분의 덕이다. 그 나리님께선 너를 위해 레코드 한판당 200원씩 주고 수천장이나 사주었다. 무엇때문에? 그는 너의 미모, 너의 고운 목소리까지 샀다. 그 사람한테 가면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리겠는데 무슨 행악질이야. 만약 그것이 싫다면 우린 90만원을 도로 내놓아야 한다. 물론 우리 회사가 토해놓을 돈은 네가 내놓아야 한다. 그렇게만 해주면 앞으로 너의 희망대로 일본류학도 보내줄수 있다.》하고 으르렁거리였다. 돈앞에선 승냥이, 철면피가 되는것이 자본가들이였다.

왕수복은 돈속에 독이 들어있다는 말을 그제야 정확히 알게 되였다. 결국 상업자본가는 왕수복을 자기 노리개로 만들기 위해 포리돌을 도와주었고 포리돌은 폭리를 억기 위해 왕수복을 리용했었다.

왕수복은 자기앞에 뻗어있는 운명의 두 길중에서 비록 빚을 지고 고생할지라도 포리돌회사에서 3년동안 봉사하는 길을 택하였다.

하여 그때부터 포리돌에 매여 노래부르는 3년동안에 그는 《노들강변》, 《뻐꾹새》, 《청춘을 찾아서》, 《봄맞이아리랑》등 많은 신민요들을 소리판에 취입하여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허나 그것은 가수로서의 명성이 아니라 대자본가에게 노래를 팔아 섬기는 《노래아가씨》로서의 이름이였다. 심지어 어느 얄궂은 문필가는 《삼천리》잡지에까지 그를 《기생》으로 소개하였다. 그의 음악은 이렇게 천시당하였다. 그랬으나 왕수복에게 있어서 버릴수 없는것이 음악이여서 그렇듯 인격적모욕을 당하면서도 다난한 경로를 거쳐 가까스로 일본류학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나는 이렇게 되여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게 됐어요. 그리고 애아버지(김광진)와의 첫 사귐은 그 편지 한통이예요.》

이야기를 마치면서 분연히 내던진 왕수복의 말이였다.

《참 소설의 한대목을 읽는것 같군요.… 아주머니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베르뜨라메리 요시꼬라는 유럽남자와 결혼을 한 일본녀자한테서 음악지도를 받았다는게 사실인가요?》

《예, 그 녀자한테 음악지도를 받았지만 나는 평양가무학교의 전통을 살려 민족음악을 공부했어요.》

《그때 아주머니가 사람들속에 쏘련에 대하여 이러저러하게 좋지 못한 선전을 했다는 자료가 우리에게 있는데…》

왕수복은 전률하면서 보안서원의 얼음같이 찬 얼굴을 흡떠보았다.

당시 정치에 어두었던 그는 동무들속에서 돌아가는 그런 말을 김광진에게 물어본적이 있었다. 왕수복은 자신의 기억속에서조차 희미하게 사라지고있는 과거의 구체적인 생활세부까지도 알아가지고 온 보안서원이 사뭇 놀라왔다. 왕수복은 그제야 어떤 흉악한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들 부부의 잔등을 노려보고있다는것을 직감하며 몸서리를 쳤다.

《나는 선전하지 않았어요. 쏘련에 대하여 돌아가는 좋지 못한 말을 듣고 우리 주인한테 그게 사실인가고 물어본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우리가 남남이였어요. 그때 그는 보성전문학교 교장 김성수가 친일화되여 스스로 교수직을 사퇴하고 일본에 와있었어요.》

《광진선생이 그때 어떻게 대답합디까?》

《뭐라고 대답했는가구요?》

왕수복은 저도 모르게 분개한 어조로 반문하였다.

《그이는 철저한 맑스주의신봉자였어요. 그것이 일본놈들의 악선전이라고 하면서 나더러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했어요. 사실 나는 정치에 대해선 문맹자였어요.》

《정치문맹자였다고 하는데 아주머니는 일본에 있을 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애독하였다고 합니다. 결코 정치에 무관심했던것 같지 않아요.》

왕수복은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동무들이 《나의 투쟁》을 돌려가며 읽기에 그도 호기심을 가지고 몇장 읽어보다 그만두었다. 그때에도 김광진이 그따위책은 무엇때문에 보는가, 히틀러는 천하에 나쁜 놈이라고 하였다.

《내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애독했다구요? 나는 고작 두페지를 읽고 내버렸어요. 도대체 누가 그따위 자료를 넘겨주었어요? 내가 무엇때문에 보안서원동무한테서 이런 취조를 받아야 하는지 리해가 되지 않아요. 자료를 넘겨준 사람을 데려오세요. 이렇게 일방적인 취조를 받을게 아니라 그 사람과 맞대면을 하겠어요.》

그가 성을 내며 흥분하자 독고칠성은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때가 되면 맞대면도 시킬수 있소. 그러나 아직은 이릅니다. 묻는 말에 사실그대로 대답하면 그만이 아닌가? 무엇때문에 성을 내는가?》

《무엇때문에 성을 내는가구요? 당신은 보안서원으로 취조만 하다보니 억울한 루명을 쓰는 사람의 아픈 마음을 전혀 리해하지 못하는군요. 그 고통이 어떤것인지 모른단 말이예요. 나는 녀맹원들을 데리고 철도공장을 지원하러 왔어요. 왜 이렇게 괴롭혀요? 왜 사람을 잡자고 해요? 그건 죄악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이 아주머니가 점점 하는 말이…》

보안서원은 눈을 사무럽게 치뜨며 어성을 높이였다.

《아주머니네 집에 사상경향이 나쁜자들이 찾아들어 국가간부들을 비난하고있다는 말도 있는데 이제 보니 사실이로구만. 리력료해를 온 보안서원더러 죄악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국가간부들을 헐뜯는데 이골이 났단 말이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예요? 나쁜 사람들이 찾아다닌다는건…》

《우리는 다 알고있소. 정준택, 리문도 같은 반쏘분자들이 당신의 남편을 찾아다닌다는걸. 최근 오천행이란 청년도 아주머니네 집에 왔댔지요? 동평양에 불이 붙는 날 밤 말이요. 그리고 며칠후 밤에 또 찾아와서 책을 한보따리 가지고 나갔소. 그건 무슨 책이요?》

왕수복은 기가 막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있었다.

(그러니 여태 보안서에서 우리 집을 감시했단 말인가?)

드디여 왕수복의 가슴속에 고여있던 감정이 밖으로 터져나왔다. 《잡으라는 간첩은 못 잡구 도대체 누굴 감시합니까? 오천행동문 우리 주인한테 대학용 경제학교과서를 빌리러 왔댔어요. 그런데 동평양에 불 나구 자기 입당보증인이 반동놈과 싸우다 희생돼서 장례를 치른지 이틀후에 우리 집에 다시 와서 빌려두었던 책을 가지고갔어요.》

왕수복은 격분으로 하여 숨이 가빠졌다.

《당신도 오천행동무가 어떤 청년인지 알겠지요? 해방직후 처음으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온 접견자의 한사람으로서 보통강개수공사때 신문에 크게 나고 장군님의 표창장까지 받은 성실한 당원이예요. 리문도기사장과 함께 남조선에 나가 스라스트베아링을 가져온 청년도 그 젊은이예요. 변대걸이 야료를 부려 구타사건으로 책벌, 철직을 받은 일이 있지만 누구나가 인정하는 좋은 동무예요. 장군님의 믿음을 받고있는 동무이기때문에 지금도 전기총국산하 청년작업대를 책임지고 양덕에 나가 발전소건설을 하고있어요.》

남편 김광진은 또 어떤 사람인가? 해방후 첫날부터 장군님께서 친히 손잡아 한걸음한걸음 이끌어주시여 오늘 김일성장군님의 존함을 모신 종합대학의 한개 학부를 책임진 새 조선의 교육자로 자라난 로동당원이였다.

장군님께서 1945년 9월 24일 서선전기회사와 평양곡산공장을 현지지도하신후 처음으로 만나주신 지식인이 김광진이였다.

9월 하순 평양유지들이 장군님을 모시고 간담회를 조직하였을 때 장군님께서는 경제문제를 론하시면서 그 많은 지식인들중에서 김광진에서 첫 발언을 시키시였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10월 14일 장군님의 조국개선을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 주석단을 꾸리는 일에 주동적으로 나선 사람들중의 하나가 김광진이였고 더우기는 장군님을 모신 그 영광의 주석단에 올라앉은 사람들중의 하나도 김광진이였다. 물론 그것은 김광진으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천만뜻밖의 분에 넘치는 신임이였다.

장군님께서 종합대학창설을 구상하실 때에 맨 처음으로 만나주신 교육자들중의 하나도 김광진이였다.

장군님께서는 그후 김광진을 김일성종합대학창립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해주셨고 강반석녀사의 서거 14돐이 되는 7월 31일 김광진을 친히 부르시여 남조선으로 나가 진보적인 교원, 학자들을 데려올데 대한 최상의 믿음을 주시였다. 그보다 앞서 1946년 1월 1일엔 공산당기관지 《정로》에 장군님의 경제건설사상을 해설하는 론설 《조선경제의 건설을 위하여》를 발표하게 해주시였다.

(우리 남편은 오직 김일성장군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남편을 철석같이 믿으신다. 그러기에 인민경제계획을 토론하실 때마다 가까이 불러주시였다. 그런데 뭐 불평분자라고?)

여기까지 생각한 왕수복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요. 나는 동녀맹위원장으로서 녀맹원들을 데리고 1. 4분기계획수행에 떨쳐나선 철도공장을 도우러왔으니만큼 일을 해야겠어요. 실례합니다.》

왕수복은 고개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보안서원이 무어라고 소리치는것 같았으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작업장에 돌아오니 녀맹원들은 벌써 일들을 하고있었다.

웃고 떠들며 유쾌히 일손을 벌리고있던 녀맹원들은 왕수복이 들어서자 조용해졌다. 보안서원이 왜 찾아왔느냐고 누구인가 물었으나 왕수복은 아무일도 아니라고 머리를 젓고 태연히 일차비를 하였다. 그러나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는것 같았다.

일제시기 왜놈경찰들의 감시를 노상 받아온 남편이 해방된 이 좋은 세월에 보안서원의 감시를 받고있다는것이 원통하기도 하고 전혀 리해할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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