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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조선의 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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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566회 작성일 19-12-10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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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넝마처럼 찢겨진 구름장들이 서둘러 흩어져가자 넘실거리는 락동강의 수면우에 눈부신 해빛이 부채살같이 퍼져내렸다. 어데선가 물러가는 태풍의 마지막 여운인양 먼 우뢰소리가 나직이 울려왔다. 비에 씻기운 하늘은 유리알같이 맑고 푸르렀다. 그러나 태풍이 휩쓸어간 뒤끝의 그리도 투명하고 맑고 고요히 숨쉬던 대기는 또다시 부르르 떨고 흐느끼고 부서져나가기 시작했다. 돌연 요란한 발동기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온것이였다.

《항공! 항공!-》

배떼다리 저쪽에서 감시병이 목터지게 웨치고있었다.

중대장 류현수는 머리를 잔뜩 뒤로 젖히고있다가 아직도 기슭에서 꾸물거리고있는 병사들을 향해 힘껏 팔을 내저었다.

《모두 대피호로!-》

물안개 자욱한 기슭에서 떼를 뭇던 병사들이 폭풍에 날린듯 했다. 현수도 가까운 웅뎅이속에 뛰여들었다. 그 순간 적기들의 첫 편대가 머리우를 날아갔다. 그 오만한 적비행기들이 어찌나 낮추 날았던지 배밑의 땅이 드르르 떨었다.

현수는 자기의 무릎이 와들와들 떨리는것을 느꼈다. 애써 그것을 멈추고싶었으나 점점 더해갔다. 결김에 손으로 무릎을 꽉 감아쥐려 했다. 신음소리가 났다. 현수는 줄곧 하늘로 향하고있던 눈길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로소 그는 자기와 무릎을 맞대고있는 3소대장 김수찬을 보았고 자기의 무릎이 왜 그처럼 세차게 떨렸는지 짐작할수 있었다.

김수찬은 두눈을 꽉 감고있는데 얼굴은 꺼멓게 죽어있었다. 이마우의 땀방울마저 얼어붙은것 같았다. 며칠전에 새 군복차림으로 보충병들을 인솔해가지고 와서 《중대장동무!》하고 청을 돋구어 시작했으나 종시 보고를 끝맺지 못했던 사람이다.

《3소대장!》하고 현수는 그의 덜미를 잡아당겼다. 《눈을 뜨오. 넨장! 그게 무슨 꼴이요?!》

김수찬은 힘겹게 눈을 떴다. 턱밑엔 서리불린듯 솜털들이 까시시 일어서있었다.

《중대장동무, 배떼다리가… 무-무사할가요?》

《그걸 제 눈으로 보오!》

머리우에서는 련속 앙칼진 폭음이 파도쳐갔다. 눈앞의 풀대들이 가까스로 허리를 폈다가는 또 일시에 나가눕군 했다. 그 순간 현수는 신음소리처럼 내질렀다.

《저런!… 저 미친 사람들이?!》

맞은편 대안에서 화물자동차 한대가 달려오고있었다. 차체에 온통 흙매질을 하고 위장까지 한 차였다. 그뒤엔 모터찌클까지 따라섰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안개가 자욱하다 해서 마음놓고 달려오는 모양이나 그들때문에 배떼다리가 로출될수 있다. 그렇게만 되면 아직 철수하지 못한 구분대들이 적의 포위속에 들수 있다.

《제-길!》

현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동차가 배떼다리를 건너오고있다. 마치 안개속을 헤여가듯 소리없이 둥둥 흘러온다. 그 순간 누군가 그를 세차게 떠밀쳤다. 3소대장 김수찬이였다.

《중대장동무!-》

적기들이 기수를 숙이고 곧추 내리꽂히고있었다. 아츠러운 쇠소리와 둔탁하고 메마른 기관포소리, 이어 로케트탄이 쏟아져내렸다. 매캐한 화약내가 코로 쓸어들었다. 섬광이 번쩍이고 이어 눈앞에서 회오리치던 뜨거운 열풍이 얼굴을 후려갈겼다. 폭탄이 터진 모양으로 배밑의 땅이 또 들썩하고 진동하며 내장을 뒤집어놓았다.

그는 걷잡을수 없이 기침소리를 터쳤다. 급강하한 적기들의 기울사한 동체가 곧추 눈앞으로 날아들더니 또 한차례 화약가스와 불연기가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눈앞의 풀대들이 어느 한 순간 면도칼로 밀어던진듯 싹 잘리워나갔다. 또다시 폭음, 진동… 가슴이 쓰려났다. 강가에 내려앉았던 물안개대신 검붉은 연기타래가 꾸역꾸역 밀려가는것이 보였다. 류현수는 으드득소리가 날 지경으로 이발을 악물었다. 이렇게 녹아나다니, 누가 그 사람들에게 그따위 모험을 하게 했단말인가!…

마침 몇대인지 알수 없는 적기들이 급강하했다가 다시 날아오르는것을 현수는 그 쇄된 음향으로 알아차렸다. 그것들의 흰 배때기에 일제사격을 퍼붓고싶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자신을 로출시켜서는 안된다. 언제든 끄떡없이 적의 타격을 견디여내는것이 바로 공병들이다. 무너지면 세우고 끊어지면 다시 잇고… 총창을 비껴들고 복수할 기회도 거의 없다. 떠들썩한 이야기판에서조차 아무런 자랑거리도 꺼낼수 없어 점적하니 돌아앉는것이, 그 어느 병사들보다도 색이 바랜 군복을 입고 면모가 없다는 추궁을 잔등의 배낭처럼 지고다니는것이, 무거운 장구류들로 하여 늘 어깨가 짓눌려있으면서도 말없이 전선길, 강기슭, 철길우에서 하나하나의 징검돌을 놓아가는것이 바로 그들 공병들이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연기속에서 웬 군관이 술취한것처럼 비틀걸음을 하며 오고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대구경기총탄이 그의 발치에 먼지타래를 피워올렸다 군관은 두손을 벌리고 허우적거리다가 비탈면으로 굴러내렸다. 현수는 그에게 달려갔다.

《동무가… 도하장 지휘관이요?》 경사면에서 허리를 잔뜩 꼬부리고 앉았던 군관이 물었다. 《난 련락군관인데… 그만… 이 꼴이 됐소.》

현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온통 피칠갑이 되여있었고 휘둥그래진 두눈은 참을길 없는 아픔때문에 뿌옇게 흐려져있었다.

모터찌클을 타고 배떼다리를 건너온 군관이다. 그럼 나머지사람들은?… 화물자동차에 탔던 사람들은 어데 있는가?…

《가만 있소. 우선 처치를 해야겠소.》

현수의 말에 련락군관은 으드득소리가 날 지경으로 어금이를 깨물고나서 입을 열었다.

《난 철수하는 독립포련대를… 새 방어계선까지 안내할… 임무를…》

그는 허리를 펴려고 안깐힘을 썼으나 도로 주저앉고말았다. 시꺼멓게 된 손가락으로 군복상의의 단추를 마구 잡아뜯기까지 했다. 현수는 그에게서 죽은 사람들의 얼굴에 흔히 굳어져있는 그 일그러진 고통의 흔적을 보았다. 현수가 말했다.

《내가 도울 일은 뭐 없겠소?》

《음- 여기… 내 가방… 그안에 지도가 있소. 독립포련대가 도착하면… 알려주오. 지도에 표시된 방어진지로… 가야 하오.》

《알겠소. 그런데 동무에 대해선 어데 보고해야 하오? 이름이 뭐요? 내 이제 전화로 보고하고 동물 후송하겠소.》

《군집참모부… 련락군관 한병수요… <내금강> 50번을 찾으면 되오.》

현수는 비탈면에 파놓은 통신병참호에 대고 소리질렀다.

《전화수-<내금강> 50번!… 빨리 찾소!》

그쪽에서 전화수가 알았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끄떡이고나서 곧 무릎우에 올려놓은 전화기의 발전자돌리개를 세차게 돌리는것이 보였다. 현수는 위생지도원을 소리쳐 불렀다. 위생지도원이 허리도 굽히지 않고 달려왔다. 그제서야 현수는 급강하하던 적기들이 해빛에 동체를 번쩍이며 사라져가는것을 보았다. 적기들은 강건너의 아군방어계선을 폭격하고있었다. 그쪽에서 고사포들이 꽈당거렸다.

현수는 위생지도원에게 련락군관을 맡기고 통신병참호로 달려갔다. 전화수가 시꺼멓게 죽은 입술로 무어라고 웨치고있었다.

《나왔소?… 이리 주오!》

송수화기를 들고 《내금강》 50번인가를 소리쳐 물었다. 그쪽에서 《여보, 귀청 떨어지겠소!》하고 웨쳐서야 자기가 엄청나게 큰소리로 막 고함치고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목소리를 낮추려고 무진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련락군관이 중상당했다는것, 지도좌표를 넘겨받기로 했다는것을 보고했다. 그러자 묵직한 목소리가 공명판을 찌렁찌렁 울렸다.

《좋소. 포련대가 철수하는 즉시 배떼다리를 폭파하오!… 결과는 나한데 직접 보고하오. 여기 지휘소로- 50번!… 나 무정이요!》

현수가 규정대로 복창하고 났을 때 전화는 이미 끊어져있었다. 그는 잠시 송수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고막을 쩡쩡 울리던 그 묵직한 목소리들은 수화구의 구멍속으로 가뭇없이 잦아들어버렸다.

(배떼다리를 폭파한다!?… 이런것이 후퇴인가? 후퇴를 하면 이렇게 해야 하는가?)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은 명령이다. 그것도 다름아닌 군집단을 지휘하는 무정장령의 엄한 명령이다.

현수는 며칠전 이곳에 나왔던 무정을 처음 가까이에서 볼수 있었다. 앙바틈하고 다부지고 꽉 부르쥔 주먹처럼 딴딴히 몽친 사람이였다. 돈잎만 한 코밑수염 또한 인상적이였다. 목소리는 묵직하고 엄엄했다. 그때 무정은 대대장에게 도하장의 위치를 정해주고 총공격이 끝날 때까지 목숨으로 지켜내라고 명령했었다. 그 임무를 받았던 대대장은 희생되고 오늘은 2중대장인 류현수가 그것을 폭파할 명령을 받았다…

어쩐지 마음이 언짢았다. 그때 등뒤에서 난데없는 녀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웬 처녀군관이 그를 부르고있었다.

《중대장동무! 저기서 련락군관동무가 찾아요.》

현수의 기상이 험악했던지 처녀군관이 《어마!-》하고 바람새는듯 한 소리를 냈다. 현수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쭈그러든 견장에 박은 소성 한알이 눈에 띄였다. 팽팽하게 조여입은 군복앞가슴우엔 흙먼지가 올라있고… 그는 한순간 《동문 누구요?》하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묻지 못했다. 별안간 자기의 머리속을 스쳐간 하나의 기억에 몸을 흠칫했다. 검푸른 눈동자, 꼭 다문 작은 입,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 어데서 봤을가?…

처녀군관이 재촉했다.

《빨리 가요. 그 련락군관동문 위급해요!》

《아- 알겠소.》

현수는 그 녀자를 뒤에 떨구고 달렸다. 서둘러야 했다. 누가 말했던가. 아니면 어느 책에서 읽었던가?!… 전쟁은 서두른다. 전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전쟁은 모든것을 재촉한다. 운명도 사랑도!…

담가에 실린 련락군관을 여러 사람들이 둘러싸고있었다. 난데없는 사람들, 전쟁영화의 화면에서 뛰여나온것 같은 간호원도 있다. 경사진 모래무지 한쪽에 흙매질한 자동차가 서있는것을 보고서야 현수는 좀전에 배떼다리를 건너온 사람들이라는것을 알았다. 그가 다가서자 우두커니 서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내주며 비켜섰다.

《보고했소?》 련락군관이 헉헉 단숨을 내뿜었다. 《그럼 됐구만… 그런데 난… 더이상… 못견딜것 같은게…》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의 겨드랑이밑에서 무엇이 끓어오르는것 같은 소리가 났다. 처녀군관이 잰말씨로 그를 위안했다.

《괜찮아요, 군관동무! 이제 병원에 가면 다 무사히 될거예요. 거게선 다들 솜씨있게 한답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요!》

그 녀자는 류현수에게 머리를 돌렸다. 뭘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는가 하는 눈빛이였다. 그리하여 현수는 전화내용을 말해주고 지도를 넘겨달라고 했다. 련락군관은 손에 쥐고있던 지도에서 독립포련대가 철수하여 전개할 방어계선을 가리켜보였다.

《그럼… 중대장동무, 부탁하오.》

담가병들이 허리를 짓수굿하고 담가를 들었다. 련락군관은 류현수에게 흐릿해진 눈을 돌렸다. 마지막고별의 눈빛이였다. 현수는 찌르는듯 한 아픔때문에 응당 해야 할 고무적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담가가 떠나고… 무거운 발자국소리들이 멀어져가고있을 때 어느 하사관이 소란스러운 한숨끝에 중얼거렸다.

《도중에 죽을거야.》

그 순간 멀어져가는 담가쪽을 보고있던 처녀군관이 피뜩 머리를 돌렸다. 샘물처럼 끓어번지던 밝은 두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지고 그속에서 싸늘한 적의의 빛이 튀여나왔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동무!》

하사관은 턱을 쑥 내밀더니 면구해진 얼굴을 중대장쪽으로 돌렸다. 자기의 상관에게서 그 무슨 두둔이라도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중대장 류현수는 숨을 죽이고 그 녀자를 지켜보고있었다. 검붉은 두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 녀자다. 리숙이다!… 더부룩한 검은 눈섭을 미간으로 잔뜩 조프리며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리숙!… 먼 북방의 강기슭에 별안간 나타났던 하얀 꽃송이… 아니 그것은 단아한 녀학생이던 리숙의 눈부시게 하얀 쎄라복때문에 그렇게 느껴진것이리라. 보라색 아편꽃을 머리에 꽂고 우편마차에서 사뿐 뛰여내릴 때 물동가의 덜먹총각들은 물론 늙은이들조차 그 아련하고 청신한 모습에 숨을 죽였었다. 오래전, 현수가 17살 났을 때의 일이다.…

그러나 리숙은 전혀 현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보기는커녕 단 한번 눈여겨보는 일조차 없었다. 같이 온 담가병들과 간호원들을 재촉하여 차에 오르게 하고는 박살이 난 운전칸에서 꾸물대고있는 운전사를 다몰아쳤다.

《운전수동무 뭘하고있어요. 빨리 떠나지 않고.》

운전사는 열리지 않는 문짝을 탕탕 때려보다가 오그라들고 찢어진 창틀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게 내 뭐랬소. 공습땐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데…》

《그만해요!》 리숙이 따끔하게 쏘아붙였다. 《지금 덕암산진지에선 숱한 부상병들이 우릴 기다리고있어요. 우리가 한발 늦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요?… 늦어졌다간… 무사치 못할줄 아세요!》

운전사는 이마살을 찌프렸다.

《뭐 그렇게 엄포를 놓을건 없수다. 어쨌든 간호장동문 운이 좋은줄 아시우. 그럭저럭 굴러가긴 하겠으니.》

운전사가 커다란 몽키스파나로 열리지 않는 문짝을 힘껏 두드리는동안 현수는 리숙에게 다가섰다.

《거기에 부상병들이 많소?》

《그래요.》

《얼마나?》

《글쎄요. 한 10여명된다더군요.》

리숙은 시종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기색이였다.

《언제쯤 돌아오오?》

《그건 모르죠.》

《여기론 오지 마오!》

《왜요?》

《이제… 얼마후 배떼다리를 폭파하오!》

《폭파?!》 리숙은 심드렁하니 되받았다. 그러다가 불쑥 굳어졌다. 그 녀자의 검푸른 두눈에서 반디불모양 타오르는것이 있었다. 《그럼 그땐… 다리가 없어요?》

《그렇소. 이제 포련대가 철수하는 즉시 폭파하라는 명령이요. 아마 적들이 가까이까지 온것 같소.》

《그럼 우린?… 부상병들은 어떻게 하구요?》

《글쎄…》

《뭐라구요?》

그 순간 그들은 둘다 오한이 나는듯 몸을 떨었다. 자동차의 엔징소리들이 저쪽에서 들려왔던것이다. 독립포련대의 포차들이 분명했다. 숱한 발동기들의 소음이 커지고있다. 그것들이 넘어서면 배떼다리를 폭파해야 한다.

《중대장동무!》 마른 입술을 깨물고있던 리숙이 가느다랗게 부르짖었다.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l시간만!… 아시겠어요? 지금 숱한 생명이… 중대장동무에게 달려있어요!》

《동무! 난 지금…》

《아무튼 믿겠어요. 중대장동무!》

리숙은 대뜸 운전실발판에 뛰여올랐다. 깨여진 문짝을 잡고 《출발!》하고 명령했다. 벌써 발동을 걸고있던 운전사가 변속단을 넣었다. 파르스름한 배기가스가 류현수의 온몸에 들씌워졌다.

벌써 포차들의 선두가 굽인돌이를 돌아서 달려오고있었다. 포차에 타고있던 포병들이 마주가는 자동차우의 처녀들에게 롱을 걸었다.

《처녀동무들- 그쪽으론 왜 가는거요? 다들 철수하는데… 갑자기 산보할 생각이라도 난게 아니요?》

《천만에요! 전쟁을 하러 가요. 포병들이 물러서니 우리가 대신 막아야죠!》

《어랍쇼! 굉장한 용사들이구먼.》

《영웅들이죠!》

《지원포사격을 해달라우?》

《필요없어요. 괜히 우리 머리우에다 퍼부을라구.》

겨끔내기로 떠들고 웃어대는 소리… 전쟁이라고 항시 죽음의 위협이 뒤따르는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가슴이 졸아든채 살수는 없다. 그래서 전쟁판에서는 웃음과 노래가 그리도 많은것인지 모른다.

어느덧 선두의 포차들이 배떼다리를 건느기 시작했다. 목쉰 구령소리, 대안 저쪽의 호각소리, 부릉부릉하는 엔징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넘실거리는 물결우에서는 아침해빛이 홍그러이 뛰놀았고 그우로는 포차들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연무처럼 흐트러져갔다.

3소대장 김수찬이 그의 귀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중대장동무! 아까 그 간호장이름이 뭔지 압니까?》

느닷없는 물음에 현수는 뜨아해했다. 그러자 김수찬의 얼굴이 벌깃해졌다.

《리숙이라고 한다나요. 에- 맵시나는 녀자인데 좀 독하다구 할가… 사내들을 막 쥐락펴락하겠더군요. 그렇지요. 중대장동무?!…》

《쓸데없는 소리 마오!》

현수는 퉁명스럽게 그의 입을 봉해놓고 예비떼목을 준비하고있는 2소대쪽으로 걸어갔다. 가던도중 문득 짚히는것이 있어 걸음을 늦추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리숙의 말이다. 방금 그 말을 그대로 옮겼다!…

목덜미가 뜨거워났다. 그는 아무 의미도 없이 어깨띠를 바싹 잡아당기고나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머리속에서는 느닷없이 한줄기 연기와도 같은 추억이 가물거렸다.…

오래전 여름, 고콜불들이 가물거리던 토장의 저녁… 낯익은 우편마차가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을 끌며 달려오던것이 먼저 떠올랐다. 갈기털이 부르르한 절다말이 자갈을 물린 주둥이가장자리에 거품을 물고 달려오는데 마차우엔 낯선 중년부인과 말쑥한 쎄라복을 입은 녀학생이 타고있었다.

마차가 영림서에 멎고 숱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낸 부인과 녀학생이 그안으로 들어가자 곧 소문이 퍼졌다. 그것은 얼마전 이곳에 왔다가 몸져누운채 오도가도 못하게 된 리성조라는 전기기술자의 가족이라는것이였다. 리성조인즉 압록강과 두만강은 물론 북부일대의 모든 강하천들을 답사하면서 무슨 수력자원을 찾는다고 했다. 처음 사람들은 골덴바지에 각반을 치고 핼메트를 눌러쓴 전기기술자가 자비로 그 힘겨운 일에 나섰다는것을 알자 어리둥절하였으나 그 가족들이 불리워오자 은근히 동정하기 시작했다.

단아한 녀학생은 전기기술자의 딸이였다. 아직 소녀티를 채 벗지 못한 나이로 어데선가 뜯어온 아편꽃이 머리우에 꽃혀있었다. 눈부시게 흰 쎄라복의 진한 줄무늬들이 목깃에서 물결치고있는것도 그렇거니와 보라색 아편꽃은 그때 열일곱난 인발구군이였던 류현수의 마음에 류달리 강한 인상을 새겨주었다. 아편꽃치고도 흔하디 흔한 흰꽃이 아니라 굳이 보라색꽃송이를 골라 머리에 꽂은때문인지 아니면 그 아련한 녀학생이 검푸른 두눈으로 이윽토록 현수를 지켜본때문인지… 매미의 울음소리가 귀따가웁게 울리는 사시나무아래에서 현수는 흥상에서 왔다는 이와실이군 병술령감의 편지를 써주고있었다. 숱한 사람들이 둘러앉아 그 모양을 지켜보고있었는데 그들중엔 아버지의 병때문에 멀고 먼 북방의 토장에까지 찾아온 그 녀학생도 있었다.… 아마도 구멍이 숭숭 난 베적삼 베바지에 기름이 절고 바닥이 다스려진 통다비를 신고 광목수건으로 머리를 칭칭 둘러감은 현수가 서울뒤골목의 대서방 찜쪄먹게 글을 써주는것이 신기해보인 모양이였다.…

대통을 물고 한숨절반 연기절반 김빠진 소리로 령감이 중얼거리면 그때마다 현수는 빠른 솜씨로 글을 써나갔다.

《…아무튼 금년농사야 망해먹은거구… 젠장, 그럭저럭 빚값이래두 벌어갈가 했던 노릇이 이 모양 이 꼴이니… 개똥같이 됐네. 남들처럼 대포집에두 드나들지 않구 꼬박꼬박 모아봤지만 쌍놈의 짓이 이짓인거야. 헌 지하족 한컬레 얻어갈것 같지 못하이. 윤두소를 기르겠으면 기르구 생금이년을 주사댁에 보내겠으면 보내구 맘대루 하게. 빌어먹을! 이 말을 들으면 그 년이 또 눈물동이나 짜겠지만… 낸들 어떻게 하겠나. 제밀헐!…》

병술령감이 한참이나 쿨럭쿨럭 기침을 하는동안 현수는 편지를 다 썼다. 여러 사람들이 편지를 읽어보라고 청했다. 그런데 현수가 쓴 편지는 병술령감이 불러준것과는 판 달랐다.

적당한 안부, 농사일 걱정, 처서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쓰고 이렇게 계속했다.

《아무튼 빈손으로는 돌아가지 않을테요. 기어이 돈을 벌어가지구 갈 생각인즉은 그때까지 너무 걱정말고 기다리오. 윤두소를 기르는건 좀 힘에 부칠것 같은데 꽤 해낼수 있겠는지 잘 생각해서 하구려.

생금이는 절대 보내지 마오. 주사댁에서 기갈이 나서 덤빈다 해도 내가 돌아갈 때까지는 아예 말듣지 마오.

그럼 오늘은 이만 쓰겠소. 다들 몸성히 지내기를 바라오.》

병술령감은 묵묵히 담배만 태웠다. 그러나 사시나무그늘밖에서 귀담아듣고있던 쎄라복입은 녀학생은 몹시 감동된듯싶었다.

《그 편지 제가 부치죠.》

녀학생의 말이였다. 다들 뜻밖의 일이여서 녀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귀밑까지 붉어진 녀학생은 말을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래일 가는 길에… 부치면 더 빨리 갈가 해서… 좋지 않나요?》

《좋지비, 그렇게 해주겠닥하문사 나쁠거 있나!》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했다.

《병술령감이 복을 받는가보이.》

《웬걸! 총각을 봐서 그러는거지비!》

현수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넘겨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들은 서로 똑바로 마주보았고 다음순간 서로 눈길을 피해버렸다. 그날 녀학생의 하얀 손이 편지를 받아쥘 때 현수는 자기의 거칠고 투박하며 어지럽기까지 한 손을 움츠러뜨렸다. 그바람에 하마트면 편지를 떨굴번했다.

편지를 받아쥔 녀학생은 봉투를 돌려보며 감탄했다.

《어머! 글씨두 참 곱게 쓰네에!-》

이번엔 현수의 얼굴이 구운 가재빛으로 익었다. 사람들이 능갈치며 웃어대고 롱을 했다. 현수는 말한마디 못하고 허둥지둥 그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때 물동에서 《조심해라!-》하는 웨침소리가 울렸다. 든장을 쥔 떼군 한사람이 물동가에서 떼에 뛰여올랐다. 물몰이를 시작하려는것이다.

《물몰이다!》

누군가 이렇게 웨치자 많은 사람들이 물동가로 우- 밀려갔다. 물몰이란 통나무를 가득 채운 물동에 물이 불기를 기다리고있다가 한꺼번에 수라문을 터뜨려 내달리는 물살의 힘으로 나무들을 떠내려보내는것을 말한다.

든장을 쥔 떼군이 《떴다!-》하고 호기있게 웨쳤다. 그러자 물동에 채워놓았던 떼목들이 일시에 앞을 다투어 수라쪽으로 쏜살같이 달려내려갔다. 무서운 속도로 좁은 수라에 돌진하는 아름드리나무들, 서로 찧고 받으며 뒤엉켜 돌아가는 떼우에서 대가 긴 갈구리를 쥔 떼군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밀려나오는 나무들을 수라쪽으로 돌리고있었다.

물몰이가 시작되자 녀학생도 온 정신을 그쪽에 팔고있었다. 난생 처음보는 무섭고도 장쾌한 장면이였다. 류현수는 경탄과 공포의 빛이 새겨진 그의 얼굴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별안간 녀학생의 커다란 두눈이 굳어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여 막 울부짖으려는듯 한 그 기색에서 현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머리를 홱 돌렸다. 순간 그는 물동에서 한 떼군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벌떡 대가리를 치켜든 통나무에 떠받들린채 물동으로 날아들고있는것을 보았다. 악! 하는 비명소리, 물동에서도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일시에 얼어붙었다. 한순간이면 방향을 잡지 못한 통나무들이 물동을 들이받아 사람이고 나무고 형체없이 짓뭉개버릴것이였다.

그때 현수는 자기로서도 알수 없는 힘으로 통나무를 하나 번쩍 둘러메고 죽을 힘을 다내여 물동에 뛰여들었다. 언제 어떻게 통나무를 물속에 그루박았던지… 베적삼이 찢겨나가고 호된 타격이 어깨를 후려치는것과 동시에 물동을 들이받으려던 선두통나무가 획 돌아서 수라쪽으로 빠졌다.

《사람이 치웠다!-》

고함소리, 경악에 질린 신음소리, 그다음 모두 입을 다물고 턱을 덜덜 떨었다. 얼마후에야 물속에 처박혔던 현수의 머리가 떠올랐다. 쇠된 비명소리들이 또 터져나왔다.

《살았소- 총각이 살았소!-》

《이 밸 빠진 녀석, 소래기만 지르지 말구 덜미를 댕겨!》

《얼뜬 머리끄뎅이를 잡아라!》

《저리 비켜! 내 손 잡아라!-》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물속에 뛰여들고 잡아당기고 어깨에 둘러메였다. 가슴을 짓누르고 배허벅을 쓸며 물을 토하게 하는가 하면 서로 꾸짖고 나무라고 욕을 해댔다. 그러는가운데 현수가 눈을 떴다. 많은 사람들이 어깨로 성을 쌓고 땀에 절고 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맞댄채 그를 내려다보고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람들 맨 앞엔 하얀 쎄라복을 입은 녀학생이 있었다. 검푸른 두눈에서 이슬이 굴러내렸다.

《아프지 않아요?…》

현수는 아무말없이 샘물처럼 끓고있는 그 눈만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때 십장놈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둘러선 사람들을 헤쳐가게 했다. 현수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녀학생이 얼른 부축해주었다.

《일없겠어요?… 말째면 제가 도와드리죠. 우리한테 갖가지 약들이 있는데… 아버지랑 엄마랑 다 좋은분들이셔. 꼭 와요. 응?》 이어 속삭임같은 잰 말씨로 꼬리를 달았다. 《내 이름은 리숙이라구 해요.》

리숙!… 현수는 그 이름을 기억속에 새겨넣었다. 그외의것들은 중요치 않았다. 자기가 방금 죽을수 있었다는것, 든장을 잡고 오랜 세월 여기서 일해온 처서군들조차 못한 일을 그가 해냈다는것, 그리하여 물동과 한사람의 떼군을 살려냈다는것, 바로 그때문에 채찍을 건들거리는 왜놈십장까지 그를 아주 놀랍게 그리고 어지간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보고있다는것 등 그 모든것들보다 더 귀중한것이 있었다.

십장은 한동안 느물거리며 그앞에 버티고섰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손을 주머니에 찌르더니 헤여보지도 않고 만보 한줌을 꺼내들었다.

《자 물동을 살린 값으루 주는거다. 받아!》

《…》

현수는 지끈지끈 쑤시는 허리를 한손으로 짚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 만보 한줌이면 여라문명 인부들과 그 가족들의 밥줄을 끊어버린다.

《왜?… 이것두 적어서?》

《난 내것만 받소!》

《뭣이?!》 십장놈은 랭소했다. 《이자식 주두리를 놀리는것 봐라. 명월관 길이 확 열렸는데두 싫어?…》

십장은 만보쪽지들을 다시 주머니에 쓸어넣었다.

현수는 자기를 둘러싼 처서군, 이와실이군들과 같이 인발구길을 허척지척 걸어갔다. 통나무를 발구에 실어날라야 했다. 산턱에서부터 물동에로 발구를 끌어가며 눈알이 튀여나올 지경으로 또 악을 써야만 했다. 어깨우에서 발구채가 삐걱거리고 목에서 겨불내가 나도 비청거리는 다리를 쉴새가 없다. 경사지에서 발구가 쐴 때면 참나무목레루에서 파란 연기가 펄펄 일고… 뼈가 부서지는듯 해도 이를 악물고 끌어가야만 한다.

사시나무아래에는 쎄라복의 녀학생이 현수가 대필한 편지를 가슴에 꼭 대고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그들은 더 가까이 사귈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저녁에 벌어진 뜻하지 않은 일이 그들의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상기하기조차 쑥스러운 일이였다…

현수는 팔을 홱 내젓고 배떼다리로 향하였다. 화가 났다. 지금이 어떤 때이기에 그따위 객적은 생각인가? 강기슭의 너겁을 짓뭉개며 바삐 걸었다. 포차들의 도하가 거의 끝나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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