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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조선의 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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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997회 작성일 19-12-08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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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망하신 하루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청사에 돌아오시자 곧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지도하시였다. 2시부터 3시 15분까지 조성된 엄중한 정세하에서 지방방어를 강화할데 대한 문제가 진지하게 토론되였다. 3시 30분부터는 보위성 부상을 통하여 인천-서울 지역의 정황보고를 받으시였다. 이어 병기생산국 서병호국장을 찾으시여 극심한 부족을 느끼고있는 무기, 탄약 생산문제를 의논하시였다.

5시엔 남일이 준비한 보고를 가지고왔다. 그런데 남일이 집무실로 들어설 때 홍명희부수상이 또 회견을 청해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여기 좀 앉으십시오.》

《장군님!》

홍명희의 가늘게 쪼프린 두눈에서 불안의 그림자가 얼씬거렸다. 짧게 기른 코수염을 연신 비다듬고 마른 기침을 몇번이고 거듭한 끝에 잰 말씨로 입을 열었다.

《장군님! 어제 있은 놈들의 폭격통에 력사박물관이 또 크게 상했습니다. 제 불찰로 미처 소개 못한 유물들이 있는데… 대책을 세워야겠고 또… 전재고아들문제도 있고 해서 장군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토론해봅시다.》

그이께서 거듭 자리를 권하시였다. 절제있고 고정한 이 로인이 구구히 찾아온 리유를 설명하는것으로 미루어 우정 용건을 만들어온것이 분명했다. 터질것 같은 불안을 한가슴 가득 채워온듯 눈에 띄게 바재이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손수 의자를 끄당겨주시였다.

《어서 앉으십시오. 여기서 우선 남일동무의 보고를 들어보시는게 좋겠습니다. 조성된 정세와 관련하여 이제 남일동무가 우리 군대의 작전전략적가능성을 분석하게 됩니다.》

《예?》

홍명희는 잠시 늙은이답게 눈을 깜박거리며 남일을 지켜보았다. 짙은 의혹이 그 눈빛에 어려있었다. 한두번 머리를 흔들기까지 했다.

홍명희는 지난 6월 26일에 있은 공화국 군사위원회 제1차회의 당시부터 군사위원회 성원 7명중의 일원이다. 주로 부상병구호 등의 일을 맡고있지만 여러 기회에 조성된 국면, 전시국가계획 및 전시보급과 일련의 전투정황들에 대한 토론들에 참가해왔으므로 전쟁과 군사부문 사업에 대한 광범위한 리해를 깊이 하고있었다. 그러나 얼마전까지만 해도 교육성 부상이였던 남일이 군사전략과 관련된 중대한 보고를 한다는것이 어쩐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였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며 또한번 남일을 훑어보았다.

웬일인지 남일은 얼굴이 컴컴하게 질려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 가까이 부르시자 약간 흠칫했다.

《남일동무.》 김일성동지께서 미소를 담고 고무하시였다. 《어서 시작하시오.》

남일의 굳어진 얼굴이 실룩거렸다. 탁자앞까지의 몇발자국을 무겁게 움직여왔으나 잠시 옆구리에 끼고있는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김일성동지께서 의아해하며 물으시였다.

《남일동무, 웬일이요?》

《장군님!》 단숨에 이렇게 내뿜고나서 남일은 꼿꼿해졌다. 추위를 타는듯 얼굴에 싸늘한 경련이 스쳐갔다. 《아직… 보고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장군님! 보고드릴것이… 없습니다.》

《…》

김일성동지께서는 얼핏 홍명희쪽을 보시였다. 짧고 희여스름한 그의 속눈섭이 떨리고있었다. 재빛을 띤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김일성동지께서 바라보시자 그만 고개를 수그리고말았다.

남일은 수치와 절망에 찬 마음으로 탁자앞에 굳어져있었다. 타는듯 한 아픔이 입안의 침을 말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바지혼솔을 쥐여뜯으며 숨소리마저 죽이고있었다. 너무도 긴장했던 나머지 목덜미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말뚝처럼 굳어져버린 남일을 한동안 지켜보시였다. 홍명희가 참다 못해 괴로운 기침소리를 냈다.

김일성동지께서 조용히 물으시였다.

《어떻게 된 일이요. 남일동무. 시간이 모자랐소?》

《아닙니다.》

《자료가 불충분했던건 아니요?》

《아닙니다.》

《그럼 말해보시오. 어떻게 된셈인지…》

《장군님!》 남일은 머리를 들었다. 그쯘한 체격을 곧바로 펴고 그 무엇인가 결심한듯 숨을 크게 내뿜었다. 《장군님께서는 저에게 조성된 정황하에서 우리 군대의 작전전략적가능성을 연구할데 대한 과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연구과정에… 저의 준비정도가 너무 어리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대답을 저로서는… 도저히 찾을수 없었습니다.》

《…》

김일성동지께서는 양복앞섶을 헤쳐놓으시였다. 어데선가 비멎은 뒤의 시크무레한 흙냄새가 흘러드는듯 했다. 소창문이 약간 열려져있었다.

남일은 교육자이며 또 능숙한 조직자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난날 그가 가지고있는 능력과 품성가운데서 남다른 점을 한두번만 찾아보시지 않았다. 남들에게 오해를 살 정도로 강경한 성격, 해박한 지식, 선천적인 분석력… 그는 깊이 사고했고 자기의 생각을 정확히 다듬어 말하군 했다. 그러나 그는 전달에야 민족보위성 부상으로 임명되였던만큼 유능한 참모일군으로서는 아직 너무도 준비가 미약하였다.

《나는 동무에게》하고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말씀하시였다. 《우리 군대의 작전전략적가능성을 연구해보라고 했지 작전방안을 가져오라고 하진 않았소. 그러니만큼… 우선 그동안 연구한것을 말하면 되오. 그러되 남일동무! 지금 정세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조성된 정황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에 기초하여 금후 사태발전을 과학적으로 예측하며 주어진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 남김없이 동원리용하는것이요. 이것을 잊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장군님!》

남일은 옆구리에 끼고온 서류가방에서 갖가지 표식으로 어지러워진 지도를 꺼내였다. 그것을 정히 펴놓으며 가볍게 기침소리를 냈다.

《먼저 락동강계선에 조성되고있는 정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9월 13일 현재까지 이곳의 우리 련합부대들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한 결사적인 총공세를 벌리고있습니다.…》

그는 한마디한마디를 명확하게 발음하면서 보고를 계속하였다. 《ㅈ》발음을 《ㅉ》에 가깝게 할 때도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흥분이 그 특이한 억양으로 표현되였다.

《지금 우리 련합부대들은 락동강의 상류로부터 하류에 이르는 전역에서 공격성과를 확대하고있습니다. 우로부터 보면 포항, 경주에 돌입하였으며 대구이북의 요충지들이였던 안동과 영천이 이미 해방되였습니다. 대구정면에서는 가산과 다부동을 점령하고 창녕, 령산 방면에서는 적의 배후로 깊숙이 뚫고들어가 대구를 포위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마산정면에서도 파구를 확대했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질겁한 적들은 지금 <부산교두보>를 견지하려고 미친듯이 병력을 보강하고있습니다. 정찰국에서의 보고와 적들의 방송출판물자료에 의하면 최근 약 15일어간에 미제8군은 약 9만명, 괴뢰군은 9만 2 000명으로 늘어나 우리의 2. 5배에 달하고있습니다. 그밖에도 적들은 공군 3만 8 000여명, 해군 3만 7 000여명을 락동강전선에 고착시키고있는것으로 알려지고있습니다. 또 지금 일본은 거대한 후방기지로 전변되고 보급물자와 자재는 한정없이 부산으로 밀려들고있습니다.…》

홍명희의 얼굴이 긴장해졌다. 엷은 입술에는 경련이 일어나고 남일을 지켜보는 그의 두눈은 엄하게 쪼프려졌다. 그러나 남일은 여전히 꿋꿋한 표정으로 보고를 계속하였다. 우리 인민군련합부대들과 적들의 무력대비, 잠재력, 전과와 손실 등을 언급했다. 그가 인용한 자료들은 정확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자비하기까지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인민군대가 입은 손실에 대해 어물쩍해 넘기지도 않았다.

차츰 홍명희는 참지 못하고 저도모르게 킁킁 코소리를 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조끼단추를 쥐여뜯기도 했다. 수학에 능한 전날의 이 교육부상이 서류도 보지 않고 임의의 수자들을 불러댈 때마다 두손을 열심히 비비적거렸다. 하얀 얼굴이 파르스름한 빛이 돌 정도로 창백해졌다.

《계속해서 인천, 서울 지역에 조성된 정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일은 계속했다. 여전히 뚝뚝하고 메마른 어조였다. 적들의 병력, 장비, 화력, 우리측과의 대비, 예상되는 행동성격… 홍명희는 몸을 궁싯거리며 손가락마디들을 꺾었다. 어느덧 두눈엔 분노의 눈물이 어릴 지경이였다. 미간으로 쪼프려진 성깃한 눈섭을 찌긋거리며 남일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엔 분노와 혐오와 적의가 가득차있었다.

《지금 적들은…》하고 남일이 계속했다. 《인천에 상륙한 제1제대 주력으로 곧 서울을 강점하고 우리의 전선과 후방을 차단하려고 책동하고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락동강의 우리 주력부대들이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고 또 엄중하게는 포위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돌연 홍명희가 기침을 했다. 더는 그대로만 듣고있을수 없었던것이다. 남일이 입을 다물고 묻는듯 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홍명희는 아무말없이 또한번, 그러나 약간 소리를 죽여 기침소리를 냈다. 그러자 김일성동지께서 조용히 물으시였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는듯 한데…》

《저… 실은…》

홍명희는 말을 더듬었다. 부지중 자기의 분노가 의심스럽게 여겨지고 선뜻 입을 열기가 주저되였다. 얼어든 유리창에 귀를 눌러댔을 때처럼 고막이 징- 울었다.

김일성동지께서 또 권하시였다.

《의문스러운 점이 있으면 어서 말씀하십시오.》

《예.》

웬일인지 홍명희는 눈시울을 사뭇 떨고있었다. 머리를 들어 정면으로 남일을 쏘아보며 그는 거친 속삭임으로 이렇게 물었다.

《어째서 남일동문 인민군대가 서울을 내줄것처럼 말하시오?》

남일의 얼굴은 침울했다. 말마디들을 힘들게 발음하면서 그는 나직이 대답했다.

《지금 형편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주 위험하게 되고있습니다.》

《?…》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홍명희는 꼼짝도 않고 그자리에 앉아있었다. 숨이 막히고 답답해나고… 무엇인가 뼈속깊이 박히는 아픔이 있었다.

잠시후 남일이 다시 보고를 이어갔다. 예비부대들의 조직형편, 무기와 군수물자보급, 특히 총이 없어 사람들을 더 무장시킬수 없는 형편에 대해서도 자상히 까밝혔다. 점차 홍명희는 그의 말에 더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눈길은 책상우의 지도에 못박혀있었다. 남일이 며칠밤을 새우며 수자들과 갖가지 부호를 그려넣은 지도였다. 그 무심한 수자들과 여러 도형의 부호들이 얼마나 모진 경난을 의미하는것인지 리해되기 시작했다. 가슴속에서 눈보라가 일고있었다.…

홍명희는 언제 남일의 보고가 끝났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김일성동지께서 무슨 말씀인가 하시고 남일이 가지고왔던 서류와 지도를 거두어가지고 방을 나갈 때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조용해졌다. 불시로 찾아든 적막에 귀가 멍해졌다. 홍명희는 눈을 슴벅거리며 추운듯 몸을 옹송그렸다. 잠자코 계시는 장군님의 모습을 여겨보면서 심장 한구석이 쿡쿡 쑤시는것을 느꼈다. 비로소 그는 그이께서 얼마나 크나큰 심려와 아픔을 안고계실가 하는 생각에 목구멍이 타들었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의 지도앞으로 걸어가시였다. 그곳에서 지도의 한점을 눈여겨본 후 천천히 몸을 돌리시였다.

《부수상선생도 남일동무의 보고를 다 들으셨지요?》

《예, 하지만 군사문제엔 문외한이다보니…》

《선생이 노여워하는걸 저도 보았습니다. 남일동무가 너무 랭정하게 분석하는것이 마음에 안드셨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홍명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슨 까닭으로인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탁자 앞모서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라크칠한 탁자우에 땀밴 손자리가 났다.

《부수상선생!》 김일성동지께서 가까이 오시였다. 《남일동무는 사태를 대담하게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 힘든 문제도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이께서는 또 무엇인가 생각하시는듯 했다. 천천히 탁자를 에돌아가 화분대에 떨어진 꽃잎을 하나하나 모으시였다.

《다른 사람들같으면 아마 이러저러한 작전방안들을 내놓았을수 있습니다. 어느 계선에서 어떻게 방어를 하며 적들의 공격을 저지시킨 다음 어떤 력량으로 어데서부터 반타격을 가한다 하는 식으로말입니다. 그러나 남일동문 조성된 정황을 분석한 결과 상상이외의 엄중한 위험이 날로 커가고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태하에서 그는 아무런 방책도 세울수 없다는것을 깨달았고 그때문에 괴로워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고백했습니다. 최고사령부에서 자기에게 기대를 걸고있는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있으면서도 그는 고지식하게 또 솔직하고 대담하게 자기를 드러내놓은것입니다.》

《장군님!》 홍명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중임을 맡기시려는지… 외람된 질문인줄 알지만…》

《괜찮습니다. 그러찮아도 군사위원회에서 토론하려고 합니다.》

그이께서는 잠시 침묵하시였다. 그이의 얼굴에 일순 어두운 그림자 같은것이 스쳐가는듯 했다. 무엇인가 가슴저미는 회오에 잠기시는것 같았다. 이윽고 깊은 생각에 잠기신채 조용히 말씀을 이으시였다.

《전쟁이 확대되고 첨예화되는 현단계에서… 나날이 최고사령부의 사업은 방대해지고있습니다. 총참모부사업만 놓고보아도 지금… 대담하고 확신성있게 일을 내밀수 있는 능력있는 주인이 없이… 여러날을 보내고있습니다. 아시다싶이 아직 총참모장자리를 비우고있는데… 전쟁의 국면이 첨예화되고있는 때 이것은 커다란 후과를 가져올수 있습니다.》

홍명희는 저도모르게 눈을 감고있었다. 지난 9월 10일 강건총참모장이 최전선에서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받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민첩하고 쾌활하고 정력적이고 담찬 군사지휘관 강건총참모장이 희생되였다는것을 처음엔 누구도 믿지 않았었다. 11일 오후 모란봉극장에서 영결식이 있었는데 군악대가 주악을 시작하자 순식간에 드넓은 홀은 비통한 추도곡의 홍수로 물결쳤었다. 군복을 입고 누운 강건의 얼굴은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명철한 사색속에 고요히 눈을 감고있어 누구든지 이름을 부르면 눈을 뜨고 벌떡 뛰쳐일어날것처럼 생각되였었다…

그 일을 생각하자 부지중 가슴이 쓰려났다. 그런즉 장군님께서는 지금 희생된 강참모장의 후임을 두고 말씀하신다. 그의 후임으로 저 남일을 생각하고계셨구나!… 무슨 말씀이든 올려야 했으나 비통한 생각만이 계속 입술을 태웠다.

《왜 아무 말씀도 안하십니까?》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홍명희는 달달 말라드는 입술을 감빨았다.

《장군님! 그저 좀… 생각에 잠겼댔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일없습니다.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저…》

그 순간 홍명희는 자기의 귀전에서 쇠붙이소리처럼 쟁쟁 울리는 음향에 머리를 흔들었다. 장군님께서 강참모장의 후임으로 남일을 지목하신데는 깊은 뜻이 있을것이다. 출신이나 경력은 아무런 문제로도 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런건 다 부질없는 로파심에 불과할것이다. 하다면 장군님께서는 무엇을 보셨을가. 무엇을 보시고 무엇을 믿으셨을가?…

《장군님!》 드디여 홍명희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지금같이 전국이 불안하고 커다란 위험이 닥쳐온 이때 아무 경험도 없는 남일동무에게 그처럼 막중한 책임을 지우려 하시니… 좀 놀라지 않을수 없습니다.》

《옳습니다. 제일 어려운 때 그에게 너무 큰짐을 지우려 하고있습니다. 전문분야도 아니고 경험도 없고… 그런데 우리에겐 지금 준비된 간부들이 매우 적고 또 간부들을 육성해낼 시간적여유도 없습니다. 선생도 아시다싶이 지금 우리에겐 믿음과 기대가 있을뿐입니다.》

그이께서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조용히 미소를 그리시였다.

《선생은 안길동무를 만나본적이 없으시지요?》

《예,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지혜롭고 다정다감하고 또 랭철한 의지를 가진 항일유격대의 지휘관이였습니다. 게다가 녀자같이 섬세하기도 했지요. 처음 입대했을 때 제손으로 자기가 입을 군복을 지었는데 그 바느질솜씨에는 녀대원들이 다 시샘을 할 지경이였습니다. 혁명을 시와 노래처럼 생각하던 인테리청년이였지요. 그러한 그였기에 입대한 첫시기 자기 마을에서 갖은 악행을 다했고 또 자기를 체포하려고 발악했던 악질특무놈이 잡혔을 때 끝내 제손으로 처단하지 못하고말았습니다. 몇번이고 총을 들었으나 눈을 꽉 감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습니다. 끝내 총을 내리고말았는데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답니다. 그러던 안길이 몇해어간에 중대장, 련대정치위원, 방면군참모장으로까지 자랐습니다. 해방후엔 보안간부훈련소 참모장으로서 불치의 병에 걸려 숨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인민무력건설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한동안 그린듯이 서계시였다. 조수처럼 밀려드는 추억의 물결에 몸도 마음도 다 잠그고계신듯 했다. 이윽고 다시 조용히 말씀을 이으셨을 때 그 음성은 젖어있었다.

《얼마전에 희생된 강건동무 역시 내가 처음 북만의 녕안땅에서 만났을 때엔 허리에 칼과 수류탄을 찬 애어린 청년이였습니다. 그러나 29살에 벌써 총참모장의 중책을 지니게 되였습니다. 안길, 강건… 빼앗긴 조국을 찾느라니 그렇게들 빨리 성장한듯싶었습니다. 그들에게 남다른것이 있었다면 조국에 대한 사랑, 인민에 대한 헌신성이 크고 뜨거운것이였습니다. 부수상선생, 나는 남일동무한테서도 이점을 보고있을뿐입니다.》

홍명희는 후두둑후두둑 뛰는 가슴 한쪽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대고있었다. 투명한 적막에 둘러싸인 이 방안에서 흥분에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만이 유일한 음향인듯 여겨졌다. 그는 자기 심장의 고동소리에, 아니 장군님의 거대한 사상과 인품에 매혹된 심장의 웨침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부지불식간에 자기의 흘러간 한생도 더듬어보았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음을 감수하려니 비분을 금할수 없어》 자결의 길을 택한 부친의 유서를 벽에 걸고 보면서 잃어진 나라를 찾고저 꿈을 키우고 민족주의운동의 선풍속에도 뛰여들었으나 끝내는 심혈을 기울여 쓰던 력사소설마저 채 맺지 않고 붓을 꺾어버린 후 초야에 묻혀살던 그였었다. 그때 벌써 홍명희는 60을 넘긴 로인, 가물가물 꺼져가는 하나의 초불에 불과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다 연소시켜버리고 흘러내린 초물덩이만이 덧쌓인 그의 인생을 돌아보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위대하신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이 그에게 활력을 주고 원천을 주었다. 위대한 사랑이 진해가는 심장에 세찬 피줄을 이어주었던것이다.

홍명희는 머리를 들고 장군님을 우러러보았다. 비로소 그는 자기자신이나 남일 혹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있는 인격과 지혜와 능력을 저울에 달아보려는것이 얼마나 당치 않고 부질없는 시도인지를 깨닫고있었다. 비로소 그는 이 시대의 견실한 혁명가들과 그들의 견결한 정신이 우러난 샘터를 발견한 심정이였다.

그는 장군님께서 가져온 문건을 보자고 말씀하셔서야 서둘러 팔소매로 눈굽을 찍었다. 그리고나서 자필로 정히 쓴 문건을 펴놓았다.

부끄러웠다. 별안간 옹색하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침략자들이 방대한 무력으로 인천에 상륙하여 전진하고있다. 온 나라 인민이 가슴을 조이며 장군님을 우러르고있다. 이러한 때, 전쟁의 중하를 다 안고계시는 장군님께, 그토록 긴장하고 다망하신 장군님께 력사박물관 유물소개와 전재고아들의 교육, 의복 등의 사사로운 용건을 만들어온것이다. 그는 석고같이 생기를 잃은 낯색으로 까딱않고 서있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연필로 밑줄까지 그으며 주의깊게 문건을 넘기고계시였다. 렬차수송과 관련된 내용곁에는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천천히 눈길을 드시였다.

《좋습니다. 부수상선생이 아주 중요한 문제를 착상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급히 착수하여야겠습니다. 군사교통부에는 제가 직접 임무를 주겠습니다.》

《…》

홍명희는 눈굽이 쩌릿해졌다. 짧고 희여스름한 그의 속눈섭이 사뭇 떨리고있었다. 어느새 그의 마음은 벅찬 격정에 젖고있었다. 웬일인지 지금껏 귀전에 메아리치던 전쟁의 폭음이 멀리 사라져버린것 같았다. 남일이 불러대던 그 많은 미국제 대포와 땅크, 비행기들이 거꾸로 돌린 시보영화에서처럼 순시에 뒤로 물러가버린것 같은 느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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