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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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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630회 작성일 19-11-1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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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4

 

선교동 인도로를 걸어가던 오천행은 불시에 주변이 어두워지자 우뚝 멎어섰다.

《또 정전이로군!》

새까매진 동평양시가의 곳곳에서 반디불 같은것이 돋아올라 희미하게 빛을 뿌리였다. 그것은 집집에서 켜놓은 등잔불들이였다. 벌써 두달째 밤마다 정전이 되군 하여 모든 집들에서 기름등잔과 양초들을 준비해두고있었다.

동양리 두메산골에서도 고콜불과 등잔불들을 내버리고 전기불을 환히 켜고사는 세월에 민주수도에서 기름등잔을 걸어놓는다는것이 도대체 될말인가.

오천행은 정전이 될 때마다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는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전기부문 로동자, 기술자들이 책임져야 할 일이였다. 두달이 지나도록 전기과부하의 원인을 모르고있으니 한심한 일이였다.

전기불이 꺼질 때마다 사람들은 《젠장, 전기쟁이들은 뭘하고있어! 나쁜 놈들!》 하고 욕을 퍼부었다. 리문도는 날마다 신소편지를 한아름씩 받아안군 하였다. 전기처장뿐아니라 송배전소도 신소편지, 신소전화들이 무시로 날아들었다. 오천행에게 《넌 도대체 뭘하는 녀석이야! 민주수도 평양이 정전되는걸 보면서도 발전소를 건설하는 이동작업대 대장이라는것이 그거 하나 바로 잡지 못해? 지금도 련애질만 하고 미쳐돌아가지 않는가.》 하고 모욕적인 전화신소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물론 직장, 직위, 성명을 정확히 밝히고 신소전화와 편지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기명신소자가 더 많았다. 오늘도 전기처에서는 평양시 전기부문 책임일군들의 모임을 가지고 두가지 문제를 심각히 토의하였다. 하나는 전기과부하원인을 시급히 밝히는 문제이고 빠른 하나는 양덕-천성 50키로메터구간과 개고-고인 27키로메터 구간의 철도를 전기화할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청년이동작업대 대장인 오천행이 대답해야 할 문제였다.

우리 나라 동서간의 분수령인 거차령을 넘을 때마다 증기기관차의 견인력부족으로 하여 양덕에서 30프로의 화차를 떼놓아야 했다. 증기압이 약해서 어떤 때는 렬차를 한정없이 세워두군 하였다. 이런 현상은 강계지구로 들어가는 만포선의 명문고개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였다. 여름에 물고기생선들은 대체로 이 고개들에서 썩이군 하였다. 이번에 장군님께서 강계지구에 갔다오실 때에도 개고-고인구간에서 화차머무름시간이 한정없이 연장되여 몹시 걱정하시였었다.

이것을 해결하자면 철도를 전기화하는 길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철도를 전기화하자면 로력, 자재, 기술 등 여러가지 문제가 걸리였다. 전기처장이 오천행에게 《로력과 자재를 대주면 동무네 이동작업대에서 동양발전소를 건설하듯이 양덕-천성, 개고-고인구간의 철도전기화를 할수 없겠는가? 할수만 있다면 교통국과 토론을 해서 1948년도추가계획에 물리자는거요.》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을 못했었다. 하여 모임은 아퀴를 짓지 못한채 끝나고말았다.

오천행은 저녁을 먹고싶은 생각도 없어 집곁에 있는 공원의자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밤 9시경에야 동평양지구가 일시에 환해졌다.

오천행은 그제야 집으로 찾아갔다. 방안이 비여있었다. 불을 켜고 둘러보니 아래방에 놓인 개다리밥상에 흰 종이장이 얹혀있었다. 종이장에는 삐들삐뜰 서툴게 쓴 양어머니의 글자가 보이였다.

《천행아, 아래목 니불미테 저녀기 이쓰니 머거라. 김치는 부어케 이따.》

성인학교를 다녀 지난해에야 겨우 국문을 깨친 양어머니였다.

이불을 헤치자 음식그릇들을 덮은 흰 가제천이 눈에 띄였다. 흰쌀밥을 담은 놋주발, 두부지지개, 건뎅이젓… 어머니의 다심한 사랑이 가슴에 젖어들었다.

그가 음식그릇들을 밥상에 올려놓고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문밖에서 방씨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 몇신데 이제야 밥을 먹느냐? 제때에 밥을 먹어라.》 방씨는 부엌에서 혀를 차며 들어왔다.

《어머닌 어디 가셨댔어요?》

《반회의에 갔댔다. 소학교 체네교원이 나와서 강연을 하는데 얼마나 말을 잘하겠니. 아들을 가진 어머니들은 모두 욕심을 내더라.》

방씨는 부리운듯 눈을 슴벅이며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오천행이와 말이 있는 양덕의 처녀선생이 련상되는 모양이였다.

오천행은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였다. 불시에 고은옥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며 심장부위가 뻐근해왔다. 지난해 4월 평양에서 잠간 이야기하다 헤여진 후 오늘까지 근 일년동안 몇번 편지거래를 하였을뿐 아직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은옥이였다.

오천행은 동양리에서 발전소건설을 할 때 은옥이와 만날 기회가 많았으나 일부러 찾아가기를 삼가했었다. 은옥이가 자기를 보기 괴로와하는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은옥에 대한 연연한 생각은 어느 한순간도 오천행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기를 련모하는 은옥이의 마음도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세번씩이나 받아본 은옥이의 편지에서 충분히 읽을수 있었다. 허나 은옥은 엄한 아버지의 통제를 받고있고 부모의 뜻을 거역할수 없는 처녀이니 그와 자기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있는상싶었다.

《얘 천행아! 뭘 그리 생각하느냐?》

오천행은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야 밥상앞에 멍청히 앉아있는 자기를 의식하고 얼른 숟갈을 손에 쥐였다. 무엇인가 날카로운것이 가슴을 허비면서 전신에 쓰라린 자극을 일으켰다.

《천행아, 이젠 나두 며느리를 맞고싶구나. 아무리 생각해두 고씨집안하군 인연을 끊어야 될가부다.》

밥을 뜨던 오천행은 우뚝 굳어졌다.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고있는지 그는 알고있었다. 방씨는 거뭇하게 낯빛이 질린 아들을 한참이나 측은히 건너다보다가 가는 한숨을 내쉬였다. 《네가 정 그 처녀와 정을 자르지 못하겠으면 결혼을 하구 너희들끼리 따로 나가 살거라. 그렇게만 하겠다면 아마 고씨집안에서 너희들의 성례를 허락할게다. 그 집에서 너를 마다하는것은 바로 이 에미때문이다. 제 딸이 청상과부인 내 시샘에…》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예요?》

오천행은 놀라서 숟갈을 떨구었다. 일찌기 남편을 잃고 오늘까지 조카자식인 자기 하나를 키우기 위해 고생이란 고생을 다하며 수절해온 고마운 이모님을 아니, 어머니를 내버리고 딴 살림을 한다는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쩌면 어머니가 그런 모진 마음을 먹게 됐단 말인가.

《어머니, 다신 그런 말씀 마세요.》

오천행은 소반상너머로 팔을 뻗쳐 수십년 고된 농사일에 악마디진 어머니의 거친 손을 두손으로 감싸쥐였다.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세요. 제가 어머님을 욕되게 했어요. 은옥이 아버님이 우리들의 결혼을 반대하는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저때문이예요. 제가 얼마나 많은 일을 저질러놓았어요. 사람을 쳐서 책벌을 받구… 발전소건설도 잘못해서 1. 4분기계획도 망쳐놓았댔지요. 그래서 저를 믿지 못하는거예요. 그러나 내 이제 일을 잘해서 어머님의 슬하에서 자란 이 오천행이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줄터예요.》

《천행아!》

방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며 목메인 소리를 하였다. 《일전에두 내가 말했다만 장군님께선 네가 일을 잘한다구 칭찬하셨다. 보통강개수공사와 발건소건설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장군님께선 아버지대신 네 결혼식을…》

방씨는 오열이 터져 말을 못했다. 그는 한참만에 마음을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내 그때 장군님께 아무 말씀도 못 올리자니 마음이 막 쓰리더구나. 가뜩이나 나라정사로 바쁘고 걱정이 많으실 장군님께 소소한 집안일까지 여쭈어 마음쓰시게 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혀끝에 묻어나오려는 말들을 삼켜버렸다. 됐다, 그 얘긴 그만하구 어서 밥을 먹어라.》

방씨는 아들의 손에 숟갈을 쥐여주었다. 오천행은 어머니의 기분을 돌려세우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참, 어머니가 강연회에 갔댔다구 했는데 무슨 강연회를 했어요?》

《그런걸 시국강연이라구 하겠지.》

방씨는 한무릎을 세우고 입을 열었다. 《글쎄 미국놈들과 리승만이놈이 조선땅을 영영 갈라놓자구 한다더라. 그런 개놈들이 어디 있갔니. 말을 들어보니 리승만이란 놈은 리완용이보다 더한 놈이더라. 북조선에서 날이갈수록 백성들이 잘살고있는게 배가 아파 그놈들이 간첩놈들을 들여보내서 암해책동을 하게 한대. 그래 모두 눈을 밝혀서 이상한 놈들을 보면 제때에 신고하라구 하더라.》

방씨는 인민반 강연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한참 옮기고나서 《우리 인민반에 건설식당에 다니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강연을 듣고 나오며 하는 말이 심상치 않더라. 자기네 식당에 단골로 매일 찾아오는 두 남자가 이상하다는거야.》 하고 한무릎 나앉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건설식당 단골손님들은 어디서 그런 돈이 나오는지 날마다 고급료리를 청해서 질탕치도록 먹고 마시고 하는데 오늘 낮에는 두 손님중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사람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하고 타령을 하더니 나중엔 무슨 발광이 난것처럼 적산계 좋을시구 적산계 좋을시구 하고 춤을 추며 돌아갔다는것이다. 그때 젊은 손님이 눈이 화등잔처럼 커지더니 저보다 십년은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사람의 귀뺨을 후려치며 《무슨 허튼 소리야! 죽자구 그래?》 하고 소리쳤다는것이다.

《그 단골손님들인즉은 너희네 보선소사람들이래. 제 입으로 보선소에 있다구 말했대.》

《그래요?》

오천행은 밥을 뜬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눈을 치뜨고 방씨를 지켜보았다. 그의 머리에서 돌연 예감의 불꽃이 번개치며 전신에 전류가 지나가는듯 하였다.

평양에는 남조선에 전기를 보내는 《경성송전선》을 비롯하여 평양을 거쳐 다른 지방으로 들어가는 송전선들을 관리하는 보선소가 10여개 있는데 거기서 수십명의 보선원들이 근무하고있었다. 긴급한 보선작업이 진행될 때에는 오천행이네 이동작업대에서 협조하군 하여 보선소와 이동작업대는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단골손님들이 어떻게 생겼대요?》

오천행은 사뭇 긴장해졌다.

《한사람은 아편쟁이처럼 얼굴이 누렇게 뜨고 코끝이 빨간 중년인데 옆손님이 차동무, 차동무 하는걸 보아 성이 차가인것 같고 다른 한사람은 대문이에 금이발을 두대 해넣었는데 털보라더라.》

오천행의 눈앞에는 두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한사람은 흥남비료공장에 있다가 평양으로 들어온 차철근이라는 보선공이고 또 한사람은 변대걸이였다. 다리 부러진 노루 한곳에 모인다고 두 협잡군이 남조선에 전기를 보내는 경성송배전실에서 일하고있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로동국에서 이들을 전기처산하 보선소에 배치장을 떨구어 결국 두 협잡군이 경성송배전실에 들어가게 되였다.

《적산계 좋을시구, 적산계 좋을시구 했다는데 적산이 우리 조선사람의것이 되였으니 좋기야 좋지. 우리가 쓰는 이 집두 적산이 아니냐.》

전기에 무식한 방씨는 적산계를 일본놈들이 가지고있던 집이나 공장, 기업소따위의 적산으로 생각하고있는것 같았다.

오천행은 밥상을 물리고 움쭉 일어났다.

《너 밥을 먹다 말고 어딜 가느냐?》

방씨는 모자를 쓰고 나서는 오천행의 느덧없는 행동에 놀라며 따라 일어섰다.

《어머니, 급히 가볼데가 있어요. 늦어올수도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주무세요.》

오천행은 그길로 경성송배전실로 달려갔다. 경성송배전실은 주택지구와 조간히 떨어진 유측에 있었다. 그가 송배전실에 들어서자 포대자루를 깔고앉아 술을 마시고있던 두 남자가 약간 당황해하며 돌아앉았다. 차철근이와 변대걸이였다. 그들이 다소 당황해한것은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다 들켰기때문이였다. 지금까지는 경성송배전실이 무풍지대였다.

우의 간부들도 모두 서울에 보내는 전기를 끊어버리고싶은 심정이여서 경성송전선설비들에 대해서는 고장이 나도 좋다는 립장에서 이붓자식처럼 대하였다. 전기처의 어느 간부도 경성송배전실에는 내려와보지 않았다. 천하 건달군들인 차철근이와 변대걸을 경성송배전실에 배치한것도 그 초소를 제일 값없이 보았기때문이였다.

《오대장동무가 어떻게 여길 다 찾아오우… 같이 한잔 하기요. 여기 앉소. 립춘이 지나고 우수가 가까와오지만 밤이면 겨울날씨처럼 춥구만. 그래 한잔 하던중이요.》

차철근이 어딘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변대걸은 오천행이 나타난 순간부터 눈찌가 사나와졌다.

《어서들 드시오. 난 인차 가겠소. 친구네 집으로 가던 길에 들렸소.》

오천행은 그러면서 벽에 붙어있는 적산계함의 쌍바라지모양의 문을 열었다. 적산계에 나타난 적산수치에서는 크게 이상이 없었으나 적산계의 가동상태를 알려주는 바늘이 움직이지 않고있었다.

《왜 바늘이 움직이지 않소?》

《무슨 검열을 왔소?》 하고 시퉁스럽게 내뱉은 변대걸이 적산계함문을 활 닫아버리였다. 《눈금판이 고장났소. 그까짓거야 고장나면 무어라오. 전력계가 돌아가면 되지, 왜? 남조선에 전길 안 보낼가봐 그러우? 적산수치가 보여주듯이 우린 정확히 보내주고있소.》

오천행은 잠시 묵묵히 서있다가 적산계함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조절반앞으로 걸어가 《이안을 좀 들여다봐야겠소.》하고 두사람을 돌아보았다.

《거긴 무엇때문에 들여다보겠다는거야?》

변대걸의 이마가 댕댕해졌다.

《무슨 이상이 없는가 해서요.》

오천행은 조절반문을 열고 복잡하게 엉켜있는 전기선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이 방에 설치되여있는 각종 계기들과 련결되여있는 전기줄이였다.

오천행은 주머니에서 절연손잡이가 있는 손칼을 꺼내여 전기선들을 하나하나 헤쳐보기 시작하였다. 어느 한 전기선 중간 부분의 피복선이 다른것들과 차이가 나는것을 발견한 오천행은 《저 선은 끊어졌댔소? 새로 이은것 같구만. 피복선색갈이 다른걸 보니.》 하고 손칼로 전기선을 툭툭 건드렸다.

《선을 이었건말건 동무에게 무슨 상관이야?》

오천행은 변대걸이 뭐라고 하든 관계없이 손칼로 피복선을 긁어내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적산계와 련결되여있는 전기선이였다.

《동무, 그 피복선은 왜 긁어내?》

변대걸이 펄쩍 뛰며 오천행의 팔목을 거머쥐였다.

《놓소! 피복선을 좀 벗겨봐야겠소.》

오천행이 자기 팔목을 거머쥔 변대결의 손을 쳐갈기였다.

《야, 너 이동작업대 대장이 무슨 큰 벼슬자린줄 알아? 무슨 권한으로 남의 작업반 설비에 함부로 손을 대는거야! 돼먹지 않게.》

변대걸이 소리치면서 열어젖혀진 조절반 철문을 힘껏 후려닫았다. 그 바람에 허리를 구부리고 피복선을 벗기고있던 오천행의 머리에 철문이 부딪치며 탕 하는 소리가 났다. 이 불의적인 강한 타격에 천행은 머리가 빠개지는듯 하였다.

천행은 허리를 펴며 돌아섰다.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질테니 걱정마오. 난 이 피복선을 벗겨봐야겠소.》

《못해! 이 새끼 네가 뭐야? 이 집의 주인은 나야!》

변대걸의 얼굴은 피를 본 야수처럼 사나와졌다.

《뭐, 이 새끼?》

오천행의 눈에서도 불이 일었다.

이때 차철근이 달려와서 두사람사이에 끼여들며 만류하였다.

《오동무! 그만하게. 임자 주먹질때문에 한번 크게 혼나구두 아직 채심을 못했나. 이제 또 사람치면 큰일나네, 출당이야! 감옥에 들어갈수도 있지… 변대걸이 자네도 참게.》

차철근은 제법 년장자답게 신칙을 하고 오천행을 돌아보며 나무람을 하였다. 《사실 나도 좀 섭섭하네. 남의 작업장에 와서 이러는 법이 어디 있나. 지난해 전기처장도 여기 경성송전선설비에 함부로 손을 댔다가 장군님으로부터 비판받은게 생각나지 않나. 오대장이 또 그짓을 한단 말이요? 그러면 안되네.》

《나는 전기를 끊어버리자는게 아니요. 뭔가 검열해볼것이 있어서 그럽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행동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질테니 상관하지 마시오. 절대로 설비를 못쓰게 만들지는 않소. 나는 적산계와 련결된 저 피복선을 벗겨보고 이상이 없으면 내 손으로 피복을 해줄테니 아무 걱정마오.》

오천행이 닫겨진 조절반문을 다시 열었다. 차철근이 허둥거리며 오천행의 앞을 막아나섰다.

《아하, 이러면 안된다는데두. 이건 우리에 대한 인신모욕을 하는것과 같아. 정말 오대장이 뭐게 남의 작업실설비에 손을 대겠다고 하는가 이거요.》

《털어놓고 말하면 전기만부하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검열해보자는거요. 저리 좀 비키시오.》

오천행은 조절반앞에 버티고 서있는 차철근을 옆으로 밀치였다. 가볍게 밀었는데도 차철근은 일부러 비칠비칠 가재걸음을 하더니 저발쯤에 나동그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이놈, 제 아비같은 사람한테 손찌검을 해? 내 당장 우에다 보고하겠다. 너 두번이나 사람을 쳤으니 이번엔 감옥귀신이 될거다. 대걸이! 어서 가세! 일러바치세.》

옷을 털며 일어선 차철근이 변대걸의 팔을 잡아끌며 출입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변대걸에게 뭐라 쑤군거리더니 다시 오천행에게 《네 이놈! 하고싶은대로 해라! 거기 손만 대는 날엔 벼락을 맞을줄 알아라!》 하고 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쾅! 출입문이 닫기면서 문틀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오천행은 잠시 어정쩡히 서있었다. 그제야 조직선을 타지 않고 결김에 혼자서 여기로 들어온것을 후회하였다. 하지만 일은 저질러놓았으니 보고싶은것을 보아야 했다.

그는 문제의 피복선을 손칼로 다시 긁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약 3센치메터정도의 짧은 피복선이 옆으로 빠지며 뚤렁 떨어졌다. 이상하여 그것을 집어보니 긁혀진 피복선안에는 구리줄이 아니라 희고 가는 유리봉이 있었다.

(적산계가 돌아가지 못하게 고정시켰구나.)

오천행은 온몸의 피가 소리치며 머리끝으로 줄달음쳐올라가는듯 했다.

그는 무엇인가 생각되는것이 있어 조절반 밑바닥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얼마후 안쪽구석에서 유리관을 씌운 피복선과 똑같은 길이의 피복선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구리줄에 씌운 피복선이였다.

그는 구리줄을 씌운 피복선을 동강이 난 전기선사이에 끼워놓고 전력계함안을 들여다보았다.

적산계의 바늘이 대번에 움직이였다.

이제는 모든것이 명백해졌다. 이놈들이 구리줄과 유리봉을 씌운 두개의 피복선을 엇바꿔 꽂아가면서 적산계를 조절했던것이다.

이밤도 이놈들은 유리봉을 꽂아 적산계를 고정시켜놓고 남조선에 한도량이 넘는 굉장히 많은 전기를 보내고있었다. 과부하의 원인은 바로 이 송전실에 있었던것이다.

그렇다, 남조선간첩의 검은 손이 이 송전실에 뻗쳐있었다. 변대걸이와 차철근은 간첩에게 매수된 하수인들일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오천행은 출입문쪽으로 달려갔다. 이 사실을 빨리 전기처에 알리려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두놈이 달아나면서 밖에 쇠를 채워놓은것 같았다.

철문을 두드려보고 별짓을 다 하였으나 아무리 힘장사라도 그것을 열어낼수 없었다.

오천행은 우리안에 갇히운 범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송배전실안을 왔다갔다하였다. 그는 다음교대자가 올 때까지 어차피 송배전실안에 있어야 했다.

그밤에 도망친 차철근이와 변대걸은 10여일후 남포앞바다에서 체포되였다.

그들은 남포수산합작사의 한 어부에게 묵돈을 주고 고기배를 리용하여 남으로 도주하려고 하였으나 가짜로 매수된 어부의 신고로 체포되였다.

차철근의 자백서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경성송전선 송배전실에는 3명의 배전공이 3교대로 근무하였다. 전야근(오후 4시-밤 12시)과 후야근(밤 12시-아침 8시)은 언제나 나와 변대걸이 교대로 엇바꿔가며 섰다. 때로는 둘이서 전야근과 후야근을 같이 서면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 나는 적산계와 련결된 전기선에 가느다란 피복유리봉으로 차단장치를 하고 낮교대자로부터 인계를 받으면 적산계가 돌아가지 않게 하였으며 반대로 인계를 할 때에는 구리줄을 씌운 피복선을 바꿔끼워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적산계를 마음대로 조절하면서 한도량보다 엄청나게 많은 전기를 남조선에 보내군 하였다. 그 교묘한 방법은 우리를 매수한 정체모를 사나이가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 선교양복점앞에서 그를 만나 실태를 보고하고 두사람이 각각 봉사금수천원을 받군 하였다. 때로는 돈과 함께 값진 물품을 받기도 하였다.

나와 변대걸은 물론 그가 남조선의 간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대로 술을 먹을수 있고 돈을 흥청망청 쓸수 있는 현생활의 향락에 유혹되여 그따위 죄짓을 하였다. 내가 때늦게 얻은 인생의 교훈은 나와 변대걸이와 같이 도덕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반국가적인 역적행위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기가 십상이라는것이다.

일하기가 싫어서 남을 속여넘기며 살아가는 협잡군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것은 나와 변대걸의 모습을 보면 알수 있을것이다.

우리의 막후조종자의 외모상 특징은 키가 크고(1. 8메터정도) 머리에 비해 하관이 빠르고 주먹코에 류달리 귀가 큰것이다. 얼굴은 희지도 검지도 않다. 그는 자기가 리문도전기처장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전기처장과는 길가에서 만나본 일까지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남조선에 도적질해보낸 전기는 무려 1억 5천키로와트시이다.》

평양의 밤은 다시 정전을 모르는 밝고 즐거운 밤으로 되였다.

전기사건으로 하여 리문도는 자주 법기관에 불리워다니였다. 전기도난사건을 조작한 간첩이 리문도와 아는 사이이고 길가에서 만나보기까지 했다는 이 사실에 법일군들은 상당한 주목을 돌리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공부한 일부 법일군들은 전기사건을 밝혀내는데 큰 공적을 세운 오천행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가지고 불쾌한 심문을 들이댔다. 모든 사색과 추리를 의심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습관된 그들은 살인범을 수사하는데서 시체의 첫 발견자를 첫째 혐의대상자로 보듯이 경성송전선 송배전실 적산계의 비밀을 처음으로 밝혀낸 오천행에 대해서도 먼저 의심을 앞세우는 방법을 선택한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오천행이가 스라스트베아링을 인수하러 리문도를 따라 서울에 들어갔던 2년전의 일도 전기사건과 련관시켜보려고 하였다.

법일군의 억축은 의사의 오진으로 하여 환자의 생명에 위험을 가져다주는것과 같이 엄중한것이였다.

평양시에는 리문도와 오천행이 남조선의 고용간첩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들이 제2의 인물을 내세워 차철근이와 변대걸을 뒤에서 조종하다가 탄로될 위험성이 생기자 정체를 감추기 위해 선손을 써서 스스로 차철근이와 변대걸을 잡아냈다는것이였다.

법일군이 그런 방향으로 유도할 때 차철근은 절대로 그럴수 없다고 부인하였지만 변대걸은 너희들도 함께 죽어라 하는 고약한 심보로 《우리들에게 전기도적질을 시킨 그 정체모를 사람이 리문도와 잘 아는 사이이고 또 만나보기까지 했다는것으로 보아 검사님의 말씀이 옳은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평양시 거리마다에는 차철근이와 변대걸을 직접 조종한 정체모를 사나이의 용모파기그림이 나붙었다.

이 전기사건으로 하여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생겨났다. 가뜩이나 오천행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생각해온 고은옥의 아버지 고영훈은 양덕에 있는 딸을 불러들여다 《이 눈깔이 먼 년! 남조선간첩하구 련애질을 해서 우리 집안을 망하게 만든단 말이냐!》 하고 미친듯이 펄펄 뛰였다.

오천행이 하나를 믿고 살아온 방씨의 마음은 또 어떠하겠는가. 전기사건으로 하여 열이면 다섯사람이상은 리문도가 남조선의 간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부모형제, 친아들 둘이 남조선에 있기때문이였다.

후레 드리크가 남조선전기전업회사 부사장에게 리문도가 북조선의 붉은 칼에 맞아죽을것이라고 한것은 바로 이날을 예언한것처럼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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