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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조선의 힘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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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164회 작성일 19-12-1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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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최현과 박정덕의 련합부대들은 9월말까지 군집단의 후퇴를 보장하기 위해 김천-대전간, 김천-리화령(문경고개)간의 두 전략적도로를 중심으로 치렬한 기동방어전을 벌렸다. 그들은 산악지형의 특성을 살려 큰길에 차단물을 설치하고 령길을 따라 여러층의 화력체계를 조직하여 우세한 적들을 타격하였다. 낮에는 강력한 화력타격과 반돌격을 배합하였고 밤에는 부단한 습격전으로 적을 족쳤다.

그러는동안 그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지상과 공중으로부터 적의 타격도 집중적으로 받게 되였다. 미제8군의 미l, 9군단, 괴뢰군l, 2군단, 영제 27려단 그리고 부산에 기여든 추종국가군대의 총 화력이 두개의 전략적도로상에서 최현과 박정덕의 사단들에 집중되였다. 그리하여 두 사단은 다른 사단들을 38°선으로 원만히 조직적인 후퇴를 진행하게 하는 대가로 그들자신은 매일같이 가혹한 타격을 받고 줄어들고 소모되고 피를 흘리게 되였다. 이렇게 1주일이 지났다. 마침내 임무를 수행한 최현은 자기사단을 뒤로 물러서게 하였다. 박정덕 역시 사단을 신속히 철수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었다. 대전부근의 발달된 교통망을 리용하여 적들은 방대한 무력으로 사단을 포위하였다. 명성높은 서울제4보병사단은 위기에 처하였다.

적들은 포위된 서울제4보병사단이 완전히 괴멸되고있는듯이 방송으로 불어댔다. 신문에서도 굉장히 떠들었다. 그러나 서울제4보병사단에서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은 최현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자신이 시시각각 포위의 위험속을 헤쳐나가야 했으며 사단이 위기를 면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의식을 잃고 담가에 실려있었다. 오랜 병마가 그를 최종적으로 거꾸러뜨린것 같았다.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또 다음날 오전까지도 깨여나지 못했다.

…추풍령너머에서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였다. 어느새 거무칙칙한 구름발이 하늘을 뒤덮었다. 소리도 없는 번개가 먼저 어둑스레해진 먼 하늘가를 쩍-갈라놓았다. 잠시후 숨막힌 긴장으로 눈시울이 떨려날 지경에 이르러서야 꽈르릉! 뢰성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 소리도 담가에 실려있는 최현을 깨우지 못했다. 추풍령의 정수리를 타고앉았던 비구름이 리화령(문경고개)의 중턱까지 휘감아버렸다. 비구름은 이슬비처럼 랭기를 뿌리며 세찬 파도마냥 휩쓸어왔다. 후둑-후두둑! 굵은 비방울이 두눈을 꾹 감고 누운 최현의 이마언저리며 숱진 눈섭을 겨누고 엇비스듬히 때렸으나 이번에도 그는 두툼한 볼을 약간 실룩거렸을뿐이였다. 하늘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무숲이 태질하며 세찬 바람질에 부대꼈다.

《천막을 가져오-》

부관이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벌써 애어린 간호원처녀가 개인천막을 펴고있었다. 부관과 간호원, 기병총을 멘 련락병 등이 개인천막 네귀퉁이를 붙들고 담가를 따라섰다. 잠간 멎어섰던 일행은 다시 령을 오르기 시작했다. 후날 시와 노래로써 더더욱 유명해진 문경고개 중턱이였다.

바로 두달전 찌는듯 한 무더위속에서 최현사단은 이 령을 지나갔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죽령과 문경고개사이의 해발 885m의 험한 싸리재에서 적의 방어진을 무너뜨리고 락동강의 좌안 함천, 의령지구에로 진출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피로써 열어간 그 길을 되돌아가고있다.

대줄기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의 군모채양에서 비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담가우에 쳐든 개인천막도 풍덩하니 처져내렸다. 바람이 세차지자 엇비듬히 내리는 비방울들이 최현의 얼굴을 후려쳤다. 최현이 또 입귀를 실룩거렸다. 그러자 간호원처녀가 비에 젖은 병아리처럼 몸을 떨면서 부르짖었다.

《가만!… 이자 사단장아바이가 뭐라 했어요!》

《…》

다들 걸음을 멈추고 서로 바라보았다. 잠시후 키가 큰 부관이 손바닥으로 비물이 줄지어내리는 얼굴을 뻑 문지르고 나직이 말했다.

《가자구.》

담가가 또 움직였다. 천막 한끝을 꼭 잡고 가던 간호원처녀가 울먹거렸다.

《뭐라구 했어요. 분명 무슨 말인가 하는걸… 난… 봤어요.》

아무도 그 말에 응수하지 않았다. 비는 더욱 세차졌다. 천막우에 고인 비물이 키낮은 처녀쪽으로 들부어졌다. 경사지였다. 간호원처녀는 소리없이 울고있었다. 눈물과 비물이 동그란 작은 얼굴을 흠뻑 적셔놓고있었다. 처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꾸만 더 무거워지는 천막귀퉁이를 비비감으며 허둥지둥했다. 의식을 잃은 사단장아바이곁에 자기만 남기고 간 군의소장이 원망스러웠다. 사실상 군의소는 부상병들과 같이 먼저 자동차로 떠났었다. 어덴지 알수 없는 집결처에서 만나게 될것이라고 했다. 나이지숙한 상급준의가 사단장곁에 남아있으려 했으나 최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창녕에서 담당간호장이 치명상을 입고 숨진 때부터 그는 누구도 가까이 두지 않았던것이다.

풀덤불이 와스스 떨며 짓이겨졌다. 싸리재쪽에서 번개가 번쩍했다. 이어 요란한 우뢰소리가 구을러왔다. 그때 전방척후를 나간 구분대에서 중성 두알을 박은 상급참모가 달려왔다.

《아바이가 어떻소. 아직… 회복하지 못했소?》

부관과 담가대원들 그리고 나어린 간호원의 울고있는 얼굴까지 둘러보고나서 그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난사로군!… 이걸 어쩐다?…》

앞에서 긴급정황이 생긴 모양이였다.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있는 천막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다음 잠시 사단장의 이지러진 얼굴을 보고나서 또 한번 《난사로군!》하더니 앞으로 달려갔다.

키큰 부관이 또 먼저 걸음을 떼였다. 담가대원들의 잔등에서 비물이 뛰였다. 두둑두둑 천막을 두드리던 비줄기가 세찬 바람결에 흩날리기도 했다. 물에 흠씬 젖은 최현의 얼굴에 또 한번 고통스러운 파문이 줄달음쳤다. 실룩거리는 입술, 간호원처녀가 고집하듯이 정녕 무슨 말인가 하는듯 했다.

그때 최현은 락동강기슭에 서있었다. 사단이 총공격으로 대안의 적을 타격하고있었다. 떼목우에 실린 땅크들이 불을 토했다. 장검을 빼여든 기병대들이 부교를 건너 질풍같이 내달았다. 그런데 넘실거리는 물결우에 가랑잎처럼 흔들리는 쪽배 하나가 떴다. 작은 쪽배였다. 어린 계집애가 노를 젓고있었다. 멀리 뒤에 있는 최현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버지!-》

최현은 꿈쩍 놀랐다. 룡옥이다. 이 세상에서 그가 제일 사랑하는 딸-위불없는 룡옥이다. 최현은 부르짖었다.

《룡옥아!-돌아와. 어서 돌아서라. 거긴 안돼!》

《일없어. 나두 갈래. 난 해군대장인데머-》

장군님댁에서 군사놀이 할 때마다 《해군대장》을 하겠다고 어거지떼를 쓰던 룡옥이다. 작은 노를 까칫까칫 저으며 세찬 물결을 헤쳐간다.

《룡옥아!-》

그 순간 세찬 물기둥이 솟구쳐올랐다. 작은 쪽배도 해쭉거리던 룡옥이의 앙증스러운 모습도 모두 물기둥속에 삼켜졌다. 차디찬 물보라가 최현의 얼굴을 덮씌웠다. 그는 숨을 죽였다. 물기둥이 내려앉기를 기다렸다. 세찬 물보라가 사라지고 다시 총공격의 함성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장검을 빼든 기마병들도 불을 토하던 땅크들도 일순간 멎어있었다. 이제 최현이 권총을 빼들고 한방 쏘기만 하면 순식간에 적진을 들부셔놓을것이다. 정적, 모든것이 숨을 죽였다. 그런데 웬일이냐? 하늘높이 솟구쳤던 물기둥도 멎었다. 구름도 물결도 총포탄도 다 멎었다. 누가? 왜? 어째서?…

돌연 간호원처녀가 흑-느끼며 멎어섰다. 담가대원들도 일시에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서 무엇인지 펑끗했다. 한순간 눈이 부시도록 새파래졌다가 금시 눈알을 뽑아간듯 했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찰나 땅!-하고 천둥이 터졌다. 온몸의 살이 막 찢겨나가는것 같았다.

간호원처녀가 먼저 천막을 놓쳐버리고 어망결에 두귀를 잡았다.

그 순간 최현이 눈을 떴다.

《무슨 소리야?》 거칠게 부르짖었다. 《누가 명령두 없이 쏘라구 했어. 엉? 누구야?!…》

다들 망연히 서있었다. 처녀가 떨군 천막쪽으로 비물이 좔좔 쏟아져 최현의 얼굴에 들이붓고있었건만 그것도 모르고있었다.

《사단장동지!》

마침내 간호원처녀가 부르짖었다. 최현의 머리맡에 풀썩 주저앉으며 엉엉 울음을 터쳤다. 최현은 얼굴에 들씌워진 비물을 훑어던졌다.

《넌 누구야?!》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어내리였다. 룡옥이가 아니다. 그런데 어린 룡옥의 목소리처럼 가늘고 쨍쨍하다. 버긋하게 뜨고있던 두눈을 힘껏 문질렀다.

《도대체 이건… 뭐야. 우리 간호장은 어데 있어? 엉?!… 대관절 공격을 앞둔 때 날 어데루 끌고가는거야?!…》

락동강이 보이지 않았다. 피흘리며 넘어갔던 락동강이!…세찬 비줄기속에서 나어린 간호원처녀가 그를 붙안고 울고있다. 키큰 부관은 비에 젖은 몸을 떨며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한마디 말도 없다. 어찌된 일일가, 왜 들것에 누워있었을가?… 인차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귀속이 웅웅 울렸다. 그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비로소 모든것을 기억해냈다. 군집단의 리탈을 보장하여 싸우던 1주일간의 피어린 나날이 떠올랐다. 그는 일어섰다. 순간 칼끝같은 섬광이 번쩍번쩍하며 머리우로 시퍼런 화살을 날렸다. 꽈르릉! 천둥소리가 그의 온몸을 흔들어놓았다. 최현은 비틀거렸으나 부관이 내뻗친 팔을 뿌리치며 버티고 섰다.

《사단장동지, 안됩니다!》

간호원처녀가 천막을 움켜쥔채 부르짖었으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여기가 어덴가?》

《문경고개입니다. 사단장동지!》

그는 흐릿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려는듯 금줄두른 장령모를 벗어들고 대줄기같은 비물에 얼굴을 맡겼다. 입안으로 목덜미로 사정없이 비물이 쓸어들었다. 간호원이 팔목에 매달려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사단장동지. 그러면 병이 더 심해집니다!》

《가만있어. 간호원! 병이라니 무슨 소리야. 나는 평생 병이라는걸 몰라!》

전류에라도 감전된듯 온몸이 쩌릿쩌릿 울려났다. 마치 번개에 감전된듯싶었다. 그는 으드득소리가 날 지경으로 이발을 악물며 벼락치는 하늘가를 노려보았다. 목덜미로 쓸어든 비줄기가 등골을 따라 줄줄 흘러내리고있었다. 발뒤꿈치에서 나무가지들이 부적거렸다. 지난해의 가랑잎들, 색이 변하고 말라비틀어진 떨기나무잎사귀들이 탕수에 밀려갔다.

최현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훔쳤다. 사무친 아픔이 날카롭게 그리고 사정없이 그의 가슴속을 쑤셔댔다. 언젠가 미혼진밀영에서 병에 시달리던 그를 몸소 찾아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 눈물로 부르짖은 맹세가 있었다.

《장군님, 이 최현이 적탄엔 쓰러질지언정 절대 병에는 넘어지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 준엄한 때에 와서 또 쓰러지다니… 앙당그려문 이발사이로 푸푸 세차게 비물을 내뿜었다.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었다. 앞에서 뒤에서 군관, 하전사들이 구령도 없이 달려왔다. 《사단장아바이》가 일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달려온 사람들이다. 물날은 군복이 비에 젖어 후줄근했지만 더없이 미덥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최현은 그들 한사람한사람을 눈여겨보고있었다. 그는 그 병사들이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있는지 잘 알고있었다. 그들은 힘찬 구령소리를, 순간도 드놀지 않는 지휘관의 힘있는 명령을 기다리고있다. 명령이 내리면 필사의 힘과 용기도 되살아날것이고 명령이 없으면 의연히 어깨가 처져있을것이다.

최현은 온몸을 부르르 떨고나서 부관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참모장은 어데 있소?》

《척후대와 함께 먼저 가고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빨리 가자. 출발!》

그는 힘겹게 걸음을 떼였다. 부관이 다가와 비록 뒤늦은것이긴 하지만 병사용천막을 걸쳐주었다. 최현은 아무말없이 오직 몸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싹 가다듬고있었다. 사단장이 비틀거리는 꼴을 보여주어서는 안된다. 그럴바엔 차라리 담가우에 올라눕는편이 낫다. 걸음마다 입을 악물고 신음소리를 삼켰다. 장화속에서는 줄곧 비물이 쿨쩍거렸다.

련락병과 함께 참모장, 작전부장이 달려왔다. 깜짝 놀라는것 같았다. 담가우에서 의식을 잃고있던 사단장이 개인천막을 어깨에 걸치고 앞장서 걷고있는것이다. 세찬 비줄기가 어깨와 잔등에서 물보라를 날리고있다.

참모장은 빈 담가를 든 건장한 병사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것은 마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사단장을 영영 잃고싶어?》하고 부르짖는듯 했다. 그러나 최현이 손짓하자 어쩌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섰다.

《보고하오!》

최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멎어서면 다시 한발자욱을 떼는데 육신의 힘을 깡그리 바쳐야 할것 같았다. 등골이 쩌개지는듯 했다. 저려나는 무릎이 견딜수 없어 당장 노그라질것만 같았다. 그는 참모장의 보고를 귀담아듣기도 하고 또 모두 귀전에 흘려버리기도 하면서 (령마루까지만 버티자. 거기까지만 견디면 된다!)하는 생각만을 거듭거듭 되풀이하고있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문경고개정수리에 올라섰다. 사납게 비를 퍼붓던 검은 구름장들이 어데론가 황황히 밀려가고있었다. 후둑후두둑!- 이따금 훗훗한 비방울들이 엇비듬히 눈섭을 때렸다. 그러나 서둘러 밀려가는 구름틈새로는 어느덧 높은 가을하늘이 드러나보였다.

최현은 어깨우에 걸쳤던 병사용천막을 활 벗어던졌다. 어깨우에서 뜬김이 무럭무럭 피여났다.

《괜찮아. 행겟나절(저녁나절)까진 나을수 있어!》

이렇게 자신을 격려하며 부관에게서 쌍안경을 받아들었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먼 골어귀에서 적자동차들이 가물가물 움직이고있었다. 참모장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말하였다.

《놈들은 한사코 우리를 포위환속에 가두어놓으려 하고있습니다. 그러되 공격은 피하고 우리가 힘들게 뚫고나가면 또 새로운 력량으로 앞을 막아나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릴 소금녹이듯 하려는 심산입니다.》

《…》

최현이 잠자코 있자 그가 또 잇달았다.

《정찰에 의하면 지금 2개의 보병련대와 곡사포 1개대대력량, 12개의 중땅크, 자동포들이 앞을 막고있습니다. 도로연선엔 2개 중대의 81mm 박격포, 3개중대가량의 60mm 박격포가 전개되여있습니다.》

《…》

여전히 최현은 쌍안경만 들여다보고있었다. 멀리 도로상에서 움직이는 자동포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끈끈히 살피는듯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생각은 전혀 다른데 가있었다.

(지금도 최고사령부에서는 계속 우릴 찾고있겠는데…)

군집단의 철수를 보장하며 피어린 결사전을 벌리던 그때 무선기가 파괴되여 일체 외계와의 통신이 두절된것이다.

(장군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실가… 밤낮 마음이 무거우실텐데 우린 이렇게 한마디 소식도 전해드리지 못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말인가!…)

가슴이 버글버글 끓어올랐다. 이런 때 자기가 담가에 실려있었다는것이 또 참을수 없었다. 어릿어릿해서 헛소리를 치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꿈속을 헤매다니… 쌍안경을 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는 팔을 내리며 참모장을 돌아보았다.

《당장 무선기를 하나 구해야겠소!》

그의 이 말에 참모장은 아무 대답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렇게 보는거요?》

《저… 사단장동지, 지금 어데서 무선기를…》

《왜 없다는거요. 적들한테는 있겠지?… 정찰중대장에게 임무를 주오. 아니 그럴게 없이 정찰중대장과 통신참모를 여기 불러오-》

얼마후 부름을 받은 두사람이 달려와 보고를 했다. 최현은 먼저 정찰중대장을 가까이 오도록 손짓했다. 허우대가 크고 꺼멓게 탄 얼굴에 수염터가 퍼릿퍼릿한 사람이였다.

《내 동무한테 중요한 임무를 하나 주겠소.》

최현의 말이 떨어지자 정찰중대장은 기세높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사단장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최현은 불을 뿜는듯 그의 귀전에 대고 말했다.

《지금 우리 사단은 최고사령부와 무선련계가 완전히 끊어졌소. 무선기가 파괴되여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지시도 받지 못하고 최고사령관동지께 아무런 보고도 올리지 못하고있단 말이요. 그러니 이럴 때엔 어떻게 해야겠나, 응?!》

《임무를 주십시오, 사단장동지!》

《적들의 무선기를 뺏아오라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어어 뺏아와야 해! 알겠나?》

《알았습니다, 사단장동지!》

정찰중대장의 힘찬 대답에 최현은 말라터진 입술을 혀끝으로 추기며 처음으로 미소했다.

《놈들의 지휘부를 답새기라구. 그리되 무선기는 흠집하나 가지 않게 가져와야 해!… 통신참모는 이 동무에게 통신병 한사람을 붙여주오.》

《알았습니다!》

최현은 팔을 내저었다. 그들은 물러갔다. 그 순간 최현은 놀란 눈빛으로 참모장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뭐요?》

령마루에 많은 군인들과 사민들이 무리지어있었다. 참모장은 미간을 찡그렸다.

《사단장동지, 개별적으로 후퇴하던 군인들과 사민들입니다. 적들이 우리 사단을 포위하면서 앞길을 막은통에 여기 주저앉아있었습니다.》

《주저앉다니, 군대도 주저앉아?》

《…》

《모두 몇명이요?》

《군인 190명에 사민들은 대략 50명가량 됩니다.》

《그들을 정렬시키시오. 따로따로!》

《들었습니다, 사단장동지!》

참모장이 물러간후 즉시 작전참모가 령마루에 주저앉아있던 사람들을 소리쳐 모이게 했다. 짤막하나 엄격한 구령소리들이 울렸다. 삽시에 단풍나무숲아래 190명의 군인들이 줄지어섰다. 그뒤쪽엔 각이한 옷차림을 한 사민들이 습관되지 않은 대오를 짓느라고 웅성거렸다. 그러나 장령복을 입은 최현이 나타나자 그들도 즉시 온몸을 꼿꼿이 폈다.

최현은 군인들이 정렬한 대오앞 펑퍼짐한 바위곁에 멎어섰다. 벌거우리한 피물이 내밴 붕대를 감은 병사, 불에 타고 찢긴 군복차림의 전사들이 태반이였다. 군관들도 더러 눈에 띄였다.

《군관동무들은 대오 3보 앞으롯!》

묵직한 구령이 울리자 7명의 군관들이 대렬훈련때처럼 대오앞으로 나섰다. 먼저 팔소매가 너덜너덜한 군관앞으로 다가갔다.

《어느 부댄가? 왜 부대와 떨어졌소?》

군관은 떠듬떠듬 부대와 떨어지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마지막으로 김천-대구간의 매곡동골에서 다리를 폭파한 후 포위되였다가 뚫고나왔다는것이였다. 17명의 대원들이 있었다.

《군복을 깁소.》하고 최현은 짤막하게 말했다. 《군복을 단정히 하기 전엔 내 눈앞에 얼씬도 못할줄 아오!》

《들었습니다, 장령동지!》

다음 차례차례 군관들을 료해했다. 피치 못할 사정들이 많았으나 최현은 치밀어오르는 격분을 참을길 없었다. 한개중대도 넘는 이들이 도로가 차단되였다고 하여 주저앉아있었다는것이 그를 격노케 했다. 설사 몇개 사단이 막아섰대도 뚫고나갈 묘책을 찾아야 할것이 아닌가!…

한 젊은 중대장은 최현이 눈앞에 멎자 《려단장동지! 저를 모르시겠습니까?…》하고 부르짖었다. 《내무국 제3경비려단에 있던 김정렬입니다!》

최현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것도 대뜸 날카로운 기쁨속에 알아보았다. 1949년, 그가 눈익혀둔 용감한 중대장이였다. 그래, 무더운 여름날이였지. 38°선에서… 평양에 회의를 갔다오니 그날 비상사고가 있었다. 어느 한 중대의 반대쪽 릉선을 적들이 차지한것이였다. 최현은 치를 떨었다. 자기의 살점을 오려갔어도 그렇듯 펄펄 뛰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는 제일 용감하고 날파람있는 대원들 12명을 골랐다. 다음 야밤삼경에 자신이 직접 습격조를 데리고 적들이 차지한 릉선으로 들어갔다. 벼락같이 그리고 무섭게 족쳤다. 최현자신은 허리에 두손을 짚고 릉선우에 떡 버티고서있었다.… 그후 장군님으로부터 엄한 추궁을 받았다. 아직 그토록 노하신 장군님을 뵈온적이 없었다. 그러니 대뜸 기억에 떠오를수밖에… 그는 바로 그날밤 최현이 데리고 들어간 12명기습조의 지휘관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최현은 수북한 장미를 치켜올리며 몰풍스럽게 잘라 말했다.

《모르겠어. 생각나지 않아!… 내가 아는 사람가운덴 비겁분자가 없어. 알겠는가?!…》

낯색이 창백해진 그의 곁을 지났다. 마지막으로 서울제4보병사단 근위18련대의 한 문화부중대장과 마주섰다.

《근위부대의 군관이 왜 이 모양인가. 말해보- 왜 부대와 떨어졌어?》

머리에 두툼하니 붕대를 감고있는 사람으로서 등어리가 구부정했다. 갈퀴같은 두손을 눌러댄것이 눈에 띄였다. 전형적인 산골막바지농사군의 모습이나 의외에도 대답은 조리있었다.

《사단장동지! 후방병원에서 치료받고 돌아오던중에 그만 후퇴가 시작되였습니다. 지금 부대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어떻게 찾아가?… 온통 적들이 깔렸는데.》

《찾아가겠습니다!》

《?…》

최현은 말없이 그앞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은밀한 애착심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최현은 몸을 돌리고 다시 물었다.

《혼자요?》

《아닙니다. 후방병원에서 같이 온 동무들과 또 여기서 만난 대원들 모두 합해 17명이 있습니다.》

《이름이 뭐라구?》

《옛, 문화부중대장 주영섭입니다.》

《음-부대를 찾아가겠단 말이지… 그런데 지금 박정덕이 그사람도 악전고투하고있을거요. 동무네 새 사단장!… 알고있어?》

《소문은 들었습니다.》

《염통이 큰 사람이야. 젊구…》

최현은 실농군같은 주영섭의 어깨를 툭 쳤다.

《내 동무한테 약속해두지. 이제 동무네 사단과 만나게 되면 꼭 보내주겠소. 그러나 지금처럼 어려운 때 한사람이라도 내놓고 잘못되게 할순 없어. 장군님께서 지금 우리모두를 기다리고계신단말이야. 알겠나? 여기서 함께 싸우자구. 우린 이제 동무네 사단과도 꼭 만나게 돼!》

《알았습니다. 사단장동지!》

최현은 군관들을 자기 위치에 들여보내고 대렬중간앞에 나섰다. 한쪽허리에 손을 짚고 다른 손은 주먹을 쥐고 마치 연탁을 때리듯이 세게 내려쳤다.

《에익, 동무들! 왜 김빠진 축구공모양이 되여있나, 응? 이게 무슨 수친가. 그래 저놈들이 숱한 대포를 끌어왔다구 해서 주저앉았는가, 기가 꺾였는가?》

그의 눈이 번쩍이였다. 잠시 무엇을 기다리는듯 긴장하여 귀를 강구고있다가 두손을 마주치며 헌헌하게 계속했다.

《난 뭐 길게 말할줄 몰라. 우린 입으로가 아니라 총과 대포로 말하는 병사들이 아닌가!… 동무들! 명심할것은 우리 장군님께서 전략적인 후퇴명령을 주셨으니 이 길이 바로 승리하는 길이라는 그거요. 그러니 한시도 지체해선 안된단말이요. 대포건 땅크건 맞받아나가야 돼. 기어이 장군님의 새 명령을 받으러 가야한단말이요. 알겠는가?》

《알았습니다, 사단장동지!》

최현으로서도 미처 예기치 못한 엄청나게 큰 대답이였다. 고개밑에서 포위를 조이고있는 적들의 귀에라도 미칠것 같이 요란한 웨침소리였다. 최현은 한팔을 들었다가 홱 내젓고 상급참모를 불러 대렬편성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사민들을 만나보았다. 정치공작대원, 유격대가족, 맨주먹인 청년, 학자, 배우 등 각이한 사람들이였다. 뒤따라온 참모장이 군대대오에 사민들이 따라서면 곤난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것이고 위험도 갑절 커질수 있다고 귀뜸했다. 최현은 성난 눈길로 그를 쏘아보며 오금을 박았다.

《그들은 내나 동무의 등뒤에 숨어 목숨이나 구하자고 가는 사람들이 아니요. 장군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란말이요. 한사람도 빠짐없이 대오에 들여세우오!》

소낙비가 멎자 희끗희끗 흐트러진 구름장들사이로 해빛이 쏟아져내렸다. 저 멀리 험산봉우리들에서 물기에 젖은 바위들이 번쩍거렸다. 실오리처럼 늘어진 산허리의 신작로, 황이 들기 시작한 작은 숲들, 강과 마을… 령남땅을 경계짓는 소백산줄기는 물러가는 더위와 북쪽에서 밀려온 서늘한 대기속에서 고요히 숨을 쉬고있었다.

최현은 다시 쌍안경을 들고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고개밑의 도로에서 포좌지를 굴설하느라고 법석이는 놈들을 이윽토록 살펴보았다. 참모장의 보고와는 달리 더 많은 적들이 이미 은페하고있는것이라면 일은 상서롭지 못하게 벌어질수도 있다. 최현은 무릎우에 지도를 펴놓고 지형지물과 대조해보았다. 그러다가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앓음소리를 삼키군 했다. 웬일인지 지도에 그려진 등고선들과 여러가지 전술부호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별안간 몸을 돌려 부관을 소리쳐 불렀다.

《군악대장 어데 있소? 내가 그한테 과업을 준게 있는데 왜 아직 보고하지 않는가?!…》

부관은 서둘러 전투가방을 열더니 정히 접은 한장의 종이를 꺼내였다.

《여기 있습니다. 사단장동지!》

《그래?!… 어서 이리 주-》

최현은 악보가 그려져있는 하얀 모조지를 부관에게서 받아쥐자 지도우에 펴놓았다. 해볕에 눈이 쑤셨다. 접었던 자리를 꼼꼼히 누르며 먹으로 곱게 그린 악보를 주의깊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며칠전 사단 군악대장에게 과업을 주어 그리게 한 악보였다.

《유격대행진곡》…

그는 악보를 볼줄 모른다. 그러나 그 깨알같이 까만 동그라미점들과 오르내린 선들을 보기 즐겨했다. 그것들이 살아움직이며 예리하고 강한 나팔소리로, 장중한 북소리로 울리는 그 격동적인 호소를 듣기 좋아했다. 거기에는 밀림을 뒤설레게 하는 세찬 눈바람소리며 대오앞에 날리는 붉은 기폭의 퍼덕임소리 그리고 피타는 가슴에서 터져나오는듯 한 결사의 각오, 열혈의 맹세가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악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있었다.

《장군님! 저 육실할것들이 지금 우리를 어째볼가 하지만 어림두 없습니다. 장군님품에서 자라난 이 최현이 아무려면 여기서 발목이 잽히겠습니까. <유격대행진곡>에도 있는것처럼 원쑤를 치고 기어이 돌아가리다!…》

참모장과 여러 군관들이 가까운 등뒤에 서있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사단장의 사색을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험으로 최현사단장이 저렇듯 꼼짝하지 않고 바위처럼 웅크리고앉아 어느 한점만을 직시하고있을 때 얼마나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것인지, 그리고 그 사색의 뒤끝에 얼마나 담찬 전투행동이 벌어지는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말없이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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